타미야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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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宮 二郎(1935년 8월 25일 ~ 1978년 12월 28일)
일본의 영화배우, 탤런트, 사회자. 오사카부 오사카시 태생이며, 본명은 '''시바타 고로'''(柴田 吾郎) 이다.
1935년 8월 25일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생후 4일만에 스미토모 재벌 중역이던 아버지를 잃었고, 전쟁이 끝난 후 어머니를 여의는 불운을 겪은 시바타는 교토의 친척집에 맡겨져 학창시절을 보냈다. 가쿠슈인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시바타의 당초 희망은 외교관 이었지만, 대학 재학 중이던 1955년 스포츠 닛폰이 주최한 '''미스터 닛폰 선발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다이에이 영화사'''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영화사 산하의 연기연구소 10기생으로 들어오면서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57년 본명인 '''시바타 고로'''로 데뷔했지만 다이에이의 사장 나가타 마사이치의 강권으로 이름을 '''타미야 지로'''로 개명했다. 당시 나가타가 구단주이던 프로야구단 다이마이 오리온즈의 강타자 타미야 겐지로(田宮健次郎)의 이름을 본따서 그 선수만큼 스타가 되라는 의미였다. 이후 주로 단역만 맡으며 그다지 눈에 띄지 못하던 타미야는 1961년 '''여자의 훈장'''에 출연하여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같은 해 개봉된 '''악명 시리즈'''에서 주인공 '''카츠 신타로'''(勝 新太郎, 1931~1997)의 친구 역할로 스타덤에 오르며 1961년도 '''에란도르 상'''[1] 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로서는 장신이던 180cm의 키에 중후한 외모와 목소리, 근육질의 몸매를 소유한 타미야는 다수의 작품에서 냉정한 엘리트부터 흉악한 야쿠자까지 폭 넓은 연기를 선보였고 1966년 처음으로 영화화 된 하얀거탑[2] 의 주인공 자이젠 고로 역할을 맡아 호평을 받으면서 이른바 '''쇼와의 쿨가이'''로 명성을 한층 드높였다. 동료 배우이던 '''후지 유키코'''와 1965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1968년, 영화 '''불신의 시기'''에 주역으로 출연한 타미야는 영화 선전 포스터(원안)에 자신의 이름이 4번째로 기재된 것을 보고 다이에이 측에 항의했다. 회사에서는 "이 영화는 여성을 주된 소재로 한 영화이니 여배우들을 위로 올리는 것이 맞다"며 설득하려 했는데 부사장인 '''나가타 히데마사'''[3] 가 "배우가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할 일이지, 왜 그리 말이 많아?" 라며 타미야를 몰아세웠다. 이후 타미야와 담판을 지은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은 "주역인 네가 출연진 맨 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네가 진짜로 스타인줄 아느냐? 실제로 너는 다이에이에서 세 번째 정도의 배우이다.''' 좀 적당히 해라!" 라면서 그를 질책했고 울컥한 타미야는 '''"이런 대접을 받느니 차라리 다이에이를 떠나겠다"''' 라는 폭탄 선언을 하고 말았다.
결국 타미야의 뜻대로 그의 이름이 포스터의 첫 번째 위치로 바뀌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분노한 나가타 사장은 다이에이와의 계약 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타미야를 해고해 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영화사와 타미야를 출연시키지 말자는 협정을 맺으면서 타미야는 일본 영화계에서 추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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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타임쇼크''' 사회자 시절.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타미야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연극배우, 가수, 밤무대 MC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69년 1월 NET테레비가 신설한 퀴즈 프로그램인 '''퀴즈 타임쇼크'''의 초대 사회자로 발탁되어 배우 시절과는 달리 지적이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로 변신하면서[4] 영화배우 시절보다 더 높은 인기를 끌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5] 퀴즈를 출제할 때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외치던 멘트인 '''"타~임 쇼크!!"'''는 한때 유행어가 된 적도 있다. 그 외에 도쿄 12채널(현 TV도쿄) '''타미야 지로 쇼''' 등의 버라이어티 쇼 MC로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
1969년 6월, 다이에이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자유의 몸이 된 타미야는 토에이의 제의를 받고 '''일본암살비록'''의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 복귀했다.[6] 1971년 자신의 개인 프로덕션인 '''타미야 기획'''을 설립하여 아내인 후지 유키코가 사장으로 취임했고, 첫 작품으로 타미야 자신이 제작 겸 주연한 '''3000km의 함정'''을 내놓았지만 신통한 반응은 얻지 못했다(...).
1972년 TBS 테레비의 드라마 '''알지 못하는 동지'''에 출연하며 TV 탤런트로 전업했고, 이후 '''하얀 그림자''', '''하얀 활주로''' 등 이른바 '''하얀 시리즈'''와 '''고원에 어서오세요''' 등 여러 화제작의 주연으로 선 굵은 연기를 보이면서 타미야는 인기 탤런트로 발돋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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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 테레비 하얀거탑에 자이젠 고로 역할로 출연한 타미야(우측). 왼쪽은 사토미 슈지 역의 '''야마모토 가쿠'''(山本 學).
1977년 11월, 후지 테레비가 판권을 사들인 야마사키 토요코 원작 하얀거탑의 드라마화가 확정되었고, 타미야는 주역 자이젠 고로 역할로 캐스팅 되었다. 이미 1966년판 영화에 같은 역할로 출연했던 타미야는 자이젠 역할에 유난히 애착을 가지며 열연하였고,[7] 직접 야외촬영 할 병원을 섭외하러 다니는 열성까지 보이며 드라마의 시청률은 나날이 상승하면서 순조롭게 방영되었다.
'''그런데...'''
평소 사업에 관심이 많던 타미야는 '''"일본의 하워드 휴즈가 되겠다"''' 라며 공언하면서 연기 활동 와중에 정재계 인사들과 접촉하고 골프장과 맨션 사업을 벌였지만 모조리 실패했고, 1977년 영국과 합작하여 제작한 영화 '''Yellow Dog'''마저 폭망하며 거액의 빚을 떠안고 말았다. 이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타미야는 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이 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약물 치료도 거부하여 아내가 그를 설득시키려고 적지않은 마음 고생을 했다고 한다.[8]
그 와중에 타미야가 주연한 하얀거탑 첫 화는 1978년 6월 3일 방영되어 시청률 18.6%로 산뜻하게 출발했지만, 타미야의 조증이 심해지며 드라마 촬영 도중 기분이 들떠서 제멋대로 현장을 이탈한다던가 심지어 뜬금없이 "우라늄 채굴 사업권을 받았다"며 휴가를 얻는 바람에 촬영이 갑자기 일주일 정도 중단되는 등, 스태프들의 속을 썩히기도 했다.[9] 그리고 사업 실패로 진 빚의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아내와 위장이혼 까지 하는 아픔을 겪었다.
드라마가 총 31회 중 18회 분량까지 촬영된 시점에서 제작진은 1개월 간 휴가를 갖기로 결정했고, 타미야는 기분을 전환하려 7월 29일 부터 9월 8일 까지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타미야는 여행 도중 런던 현지에서 탈모를 치료하기 위해 받은 모발이식 수술이 실패한 데다가 부작용으로 편두통까지 생기는 바람에 그의 정신 상태는 거꾸로 극도의 우울증으로 악화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 타미야는 드라마 촬영장에서 대사도 외우지 못하고 계속 울기만 하는 통에 촬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아내와 제작진, 그리고 '''야마모토 가쿠'''(사토미 슈지 역), '''타이치 키와코'''(하나모리 케이코 역) 등 동료 배우들의 필사적인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타미야는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11월 15일 모든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자이젠 고로가 죽는 장면을 찍기 전, 타미야는 3일 동안 금식을 거쳐 암환자의 모습을 갖추고 유서도 자필로 직접 썼으며 더미나 대역 대신 타미야 자신이 자이젠의 시체 역할을 하겠다며 자청하여 하얀 시트를 뒤집어 쓰고 침대에 누워 실려가는 헌신적인 모습까지 보이며 마지막 장면을 빛내주었다. 타미야 자신도 이 장면에 대하여 '''"잘 죽은 것 같다"''' 라며 만족스러워 했다.
하얀거탑 촬영을 마친 후 타미야는 몹시 허탈해 하며 프로듀서인 '''고바야시 슌이치'''에게 '''"자이젠 고로 이후에 나는 무슨 역할을 맡아야 할까? 도무지 모르겠다"''' 라며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만큼 타미야는 자이젠 역할에 남은 기력을 모조리 쏟아 부은 것이었다...
드라마 하얀거탑 종영까지 불과 2화를 남긴 1978년 12월 28일 아침, 타미야의 장모(즉, 후지 유키코의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타미야는 매니저를 보내 장모를 병원으로 모시도록 했다. 점심시간 무렵 병원에 다녀온 매니저에게 타미야는 "배가 고프다"고 하여 매니저는 바로 아카사카 소재 단골 양식집의 도시락을 사와서 침실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타미야는 미국제 산탄총을 가슴에 맞은 시체가 되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매니저는 곧바로 경찰과 후지 유키코에게 연락을 취했고, 이후 경찰 조사를 거쳐 타미야의 죽음은 자살인 것으로 결론났다. 이 때 타미야의 나이는 '''43세'''였다.
타미야의 시신[10] 은 부검 후 비밀리에 장례를 치루었고 1979년 1월 12일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타미야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하얀거탑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지면서 1979년 1월 6일 전파를 탄 최종화는 '''31.4%'''라는 굉장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田宮 二郎(1935년 8월 25일 ~ 1978년 12월 28일)
일본의 영화배우, 탤런트, 사회자. 오사카부 오사카시 태생이며, 본명은 '''시바타 고로'''(柴田 吾郎) 이다.
1. 학창 시절
1935년 8월 25일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생후 4일만에 스미토모 재벌 중역이던 아버지를 잃었고, 전쟁이 끝난 후 어머니를 여의는 불운을 겪은 시바타는 교토의 친척집에 맡겨져 학창시절을 보냈다. 가쿠슈인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시바타의 당초 희망은 외교관 이었지만, 대학 재학 중이던 1955년 스포츠 닛폰이 주최한 '''미스터 닛폰 선발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다이에이 영화사'''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영화사 산하의 연기연구소 10기생으로 들어오면서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2. 영화배우 시절
1957년 본명인 '''시바타 고로'''로 데뷔했지만 다이에이의 사장 나가타 마사이치의 강권으로 이름을 '''타미야 지로'''로 개명했다. 당시 나가타가 구단주이던 프로야구단 다이마이 오리온즈의 강타자 타미야 겐지로(田宮健次郎)의 이름을 본따서 그 선수만큼 스타가 되라는 의미였다. 이후 주로 단역만 맡으며 그다지 눈에 띄지 못하던 타미야는 1961년 '''여자의 훈장'''에 출연하여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같은 해 개봉된 '''악명 시리즈'''에서 주인공 '''카츠 신타로'''(勝 新太郎, 1931~1997)의 친구 역할로 스타덤에 오르며 1961년도 '''에란도르 상'''[1] 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로서는 장신이던 180cm의 키에 중후한 외모와 목소리, 근육질의 몸매를 소유한 타미야는 다수의 작품에서 냉정한 엘리트부터 흉악한 야쿠자까지 폭 넓은 연기를 선보였고 1966년 처음으로 영화화 된 하얀거탑[2] 의 주인공 자이젠 고로 역할을 맡아 호평을 받으면서 이른바 '''쇼와의 쿨가이'''로 명성을 한층 드높였다. 동료 배우이던 '''후지 유키코'''와 1965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3. 영화계 추방
1968년, 영화 '''불신의 시기'''에 주역으로 출연한 타미야는 영화 선전 포스터(원안)에 자신의 이름이 4번째로 기재된 것을 보고 다이에이 측에 항의했다. 회사에서는 "이 영화는 여성을 주된 소재로 한 영화이니 여배우들을 위로 올리는 것이 맞다"며 설득하려 했는데 부사장인 '''나가타 히데마사'''[3] 가 "배우가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할 일이지, 왜 그리 말이 많아?" 라며 타미야를 몰아세웠다. 이후 타미야와 담판을 지은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은 "주역인 네가 출연진 맨 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네가 진짜로 스타인줄 아느냐? 실제로 너는 다이에이에서 세 번째 정도의 배우이다.''' 좀 적당히 해라!" 라면서 그를 질책했고 울컥한 타미야는 '''"이런 대접을 받느니 차라리 다이에이를 떠나겠다"''' 라는 폭탄 선언을 하고 말았다.
결국 타미야의 뜻대로 그의 이름이 포스터의 첫 번째 위치로 바뀌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분노한 나가타 사장은 다이에이와의 계약 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타미야를 해고해 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영화사와 타미야를 출연시키지 말자는 협정을 맺으면서 타미야는 일본 영화계에서 추방당했다...
4. 방송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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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타임쇼크''' 사회자 시절.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타미야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연극배우, 가수, 밤무대 MC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69년 1월 NET테레비가 신설한 퀴즈 프로그램인 '''퀴즈 타임쇼크'''의 초대 사회자로 발탁되어 배우 시절과는 달리 지적이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로 변신하면서[4] 영화배우 시절보다 더 높은 인기를 끌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5] 퀴즈를 출제할 때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외치던 멘트인 '''"타~임 쇼크!!"'''는 한때 유행어가 된 적도 있다. 그 외에 도쿄 12채널(현 TV도쿄) '''타미야 지로 쇼''' 등의 버라이어티 쇼 MC로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
5. 연기자로서의 복귀, 그리고 하얀거탑
1969년 6월, 다이에이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자유의 몸이 된 타미야는 토에이의 제의를 받고 '''일본암살비록'''의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 복귀했다.[6] 1971년 자신의 개인 프로덕션인 '''타미야 기획'''을 설립하여 아내인 후지 유키코가 사장으로 취임했고, 첫 작품으로 타미야 자신이 제작 겸 주연한 '''3000km의 함정'''을 내놓았지만 신통한 반응은 얻지 못했다(...).
1972년 TBS 테레비의 드라마 '''알지 못하는 동지'''에 출연하며 TV 탤런트로 전업했고, 이후 '''하얀 그림자''', '''하얀 활주로''' 등 이른바 '''하얀 시리즈'''와 '''고원에 어서오세요''' 등 여러 화제작의 주연으로 선 굵은 연기를 보이면서 타미야는 인기 탤런트로 발돋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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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 테레비 하얀거탑에 자이젠 고로 역할로 출연한 타미야(우측). 왼쪽은 사토미 슈지 역의 '''야마모토 가쿠'''(山本 學).
1977년 11월, 후지 테레비가 판권을 사들인 야마사키 토요코 원작 하얀거탑의 드라마화가 확정되었고, 타미야는 주역 자이젠 고로 역할로 캐스팅 되었다. 이미 1966년판 영화에 같은 역할로 출연했던 타미야는 자이젠 역할에 유난히 애착을 가지며 열연하였고,[7] 직접 야외촬영 할 병원을 섭외하러 다니는 열성까지 보이며 드라마의 시청률은 나날이 상승하면서 순조롭게 방영되었다.
'''그런데...'''
6. 조울증
평소 사업에 관심이 많던 타미야는 '''"일본의 하워드 휴즈가 되겠다"''' 라며 공언하면서 연기 활동 와중에 정재계 인사들과 접촉하고 골프장과 맨션 사업을 벌였지만 모조리 실패했고, 1977년 영국과 합작하여 제작한 영화 '''Yellow Dog'''마저 폭망하며 거액의 빚을 떠안고 말았다. 이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타미야는 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이 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약물 치료도 거부하여 아내가 그를 설득시키려고 적지않은 마음 고생을 했다고 한다.[8]
그 와중에 타미야가 주연한 하얀거탑 첫 화는 1978년 6월 3일 방영되어 시청률 18.6%로 산뜻하게 출발했지만, 타미야의 조증이 심해지며 드라마 촬영 도중 기분이 들떠서 제멋대로 현장을 이탈한다던가 심지어 뜬금없이 "우라늄 채굴 사업권을 받았다"며 휴가를 얻는 바람에 촬영이 갑자기 일주일 정도 중단되는 등, 스태프들의 속을 썩히기도 했다.[9] 그리고 사업 실패로 진 빚의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아내와 위장이혼 까지 하는 아픔을 겪었다.
드라마가 총 31회 중 18회 분량까지 촬영된 시점에서 제작진은 1개월 간 휴가를 갖기로 결정했고, 타미야는 기분을 전환하려 7월 29일 부터 9월 8일 까지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타미야는 여행 도중 런던 현지에서 탈모를 치료하기 위해 받은 모발이식 수술이 실패한 데다가 부작용으로 편두통까지 생기는 바람에 그의 정신 상태는 거꾸로 극도의 우울증으로 악화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 타미야는 드라마 촬영장에서 대사도 외우지 못하고 계속 울기만 하는 통에 촬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아내와 제작진, 그리고 '''야마모토 가쿠'''(사토미 슈지 역), '''타이치 키와코'''(하나모리 케이코 역) 등 동료 배우들의 필사적인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타미야는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11월 15일 모든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자이젠 고로가 죽는 장면을 찍기 전, 타미야는 3일 동안 금식을 거쳐 암환자의 모습을 갖추고 유서도 자필로 직접 썼으며 더미나 대역 대신 타미야 자신이 자이젠의 시체 역할을 하겠다며 자청하여 하얀 시트를 뒤집어 쓰고 침대에 누워 실려가는 헌신적인 모습까지 보이며 마지막 장면을 빛내주었다. 타미야 자신도 이 장면에 대하여 '''"잘 죽은 것 같다"''' 라며 만족스러워 했다.
하얀거탑 촬영을 마친 후 타미야는 몹시 허탈해 하며 프로듀서인 '''고바야시 슌이치'''에게 '''"자이젠 고로 이후에 나는 무슨 역할을 맡아야 할까? 도무지 모르겠다"''' 라며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만큼 타미야는 자이젠 역할에 남은 기력을 모조리 쏟아 부은 것이었다...
7. 죽음
드라마 하얀거탑 종영까지 불과 2화를 남긴 1978년 12월 28일 아침, 타미야의 장모(즉, 후지 유키코의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타미야는 매니저를 보내 장모를 병원으로 모시도록 했다. 점심시간 무렵 병원에 다녀온 매니저에게 타미야는 "배가 고프다"고 하여 매니저는 바로 아카사카 소재 단골 양식집의 도시락을 사와서 침실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타미야는 미국제 산탄총을 가슴에 맞은 시체가 되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매니저는 곧바로 경찰과 후지 유키코에게 연락을 취했고, 이후 경찰 조사를 거쳐 타미야의 죽음은 자살인 것으로 결론났다. 이 때 타미야의 나이는 '''43세'''였다.
타미야의 시신[10] 은 부검 후 비밀리에 장례를 치루었고 1979년 1월 12일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타미야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하얀거탑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지면서 1979년 1월 6일 전파를 탄 최종화는 '''31.4%'''라는 굉장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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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미야 지로와 영화에 출연한 후지 유키코(좌측)
- 타미야의 아내 후지 유키코(1942~ )는 쇼치쿠를 거쳐 다이에이의 간판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1965년 5월 타미야와 결혼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하고 육아와 가사에만 전념하다 상기 언급과 같이 남편이 설립한 타미야 기획 대표로 일했다. 남편이 죽은 이후, 후지는 자택을 헐어버리고 그 집터에 외국인 전용 임대주택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뇌출혈로 투병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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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시바타 코타로, 타미야 고로
- 슬하의 아들 두 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우로 활동하였다. 장남 시바타 코타로(柴田 光太郎, 1966~ )는 배우로 데뷔했지만 현재는 고등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으며 방송활동은 완전히 접지 않은 채 종종 이어가고 있다. 차남인 타미야 고로(田宮 五郎, 1967~2014)[11] 또한 배우와 예능인으로 활동했으나 2012년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져 투병 끝에 회복하지 못하고 2014년 11월 아버지의 곁으로 가고 말았다...
- 2017년 타미야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방송에 시바타 코타로가 출연하여 아버지가 자살한 이유[12] 를 털어놓았고, 그럼에도 시바타는 타미야에 대하여 "지방이나 해외로 촬영을 갈 때마다 어머니와 나, 동생에게 한 통씩 총 3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만큼 가족들을 사랑한 좋은 아버지였다. 내가 그 때 나이가 좀 있었다면 아버지의 고민을 공유하고 위로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라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 2007년 MBC 드라마 하얀거탑의 장준혁 역을 맡았던 김명민은 드라마가 끝난 후 생방송 오늘아침에 출연하여 "우울한 역할을 맡으면 그게 전염병처럼 번진다. 일본에서 장준혁(자이젠 고로)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자살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그랬는지 알 것 같더라. 나도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우울증 비슷한 것을 느꼈다" 라고 고백한 바 있다.
- 더 드리프터즈의 전설적인 코미디 프로그램 8시다!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1977년 2월 26일 방영분). 도리후 학교에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이지만 머리는 좋은[13] 전학생으로 출연하여 선생님인 이카리야 쵸스케가 타미야에게 퀴즈 타임쇼크 식으로 "영어로 25는?", "프랑스어로 25는?", "나폴레옹이 마지막으로 유배된 섬은?", "마테호른은 어디에 있는 산인가?" 등등 여러가지 문제를 연달아 내서 전부 맞춘 타미야는 난데없이 퀴즈 타임쇼크 사회자 마냥 타~임 쇼크!!를 외치며 출연자와 관객들을 뒤집어 놓았고 이카리야에게 "여기서까지 타임 쇼크를 끌어들일 셈이냐!"[14] 라고 츳코미를 당했다. 한술 더 떠 시무라 켄의 유행어이던 "○○는 어떠심까~?(○○はいかがっすかぁ~?)"를 가로채서 "타임 쇼크는 어떠심까~?"라고 익살까지 떨면서 연기자로서의 진중하고 근엄한 이미지를 스스로 막 무너뜨리며 시청자들을 빵 터뜨렸다...
- 사케 오제키의 광고 모델로 약 10년간 출연했는데, 정작 타미야는 술을 잘 못해서 촬영할 때에는 물을 마셨다고 한다.
- 가라테 초단의 유단자였으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취미는 마작과 클레이 사격이었는데, 타미야가 자살할 때 쓴 산탄총이 바로 클레이 사격을 할 때 애용하던 총이었다.
[1] 일본 영화, TV 프로듀서 협회에서 주관하는 시상식.[2] 하얀거탑은 1965년 분카 방송의 라디오 드라마로 처음 미디어화 되었고 당시 자이젠 고로 역할 성우가 타미야 지로였다. 1967년 NET테레비 에서 최초로 TV 드라마화 했을 때 자이젠 고로는 '''사토 케이'''(佐藤 慶, 1928~2010)가 연기했다.[3]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의 아들.[4] 원래 영화배우들은 영화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하여 TV에 출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1960년대 들어서는 점점 빈도가 줄어서 퀴즈 타임쇼크가 방영을 시작하던 시기에는 영화배우가 TV에 출연하는 케이스는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타미야의 TV 쇼 고정 출연은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5] 타미야는 10년 가까이 퀴즈 타임쇼크의 장수 사회자로 활약한 후, 1978년 9월에 같은 배우인 '''야마구치 타카시'''에게 후임 MC 자리를 물려주고 프로그램을 떠났다.[6] 이 무렵, 자신을 다이에이에서 쫓아내는 것에 한몫 한 나가타 히데마사 부사장을 만나게 된 타미야는 왜 나를 내보냈냐며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참고도 다이에이는 TV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한 영화계의 불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1971년 도산했다(...).[7] 타미야가 자이젠에 대해 호감을 가진 이유는, 이름이 자신의 본명과 같은 '''고로''' 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8] 엎친데 덮친다고, 타미야는 탈모 증세까지 와서 매니저에게 발모제를 사오라고 시키거나 드라마 촬영 중 머리가 젖지 않도록 유난히 신경썼다고 한다(...).[9] 게다가 타미야 기획에도 타미야의 불륜 사실을 퍼뜨린다던가, 드라마의 홍보를 해준다는 등의 명목으로 금품을 뜯어내려는 사기꾼들의 연락이 빗발쳐서 경시청에 수사를 의뢰한 적도 있다. 결국 전부 입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10] 한때 하얀거탑 마지막 장면에 나온 자이젠 고로의 시신은 '''자살한 타미야의 시체이다''' 라는 헛소문이 있었지만, 위에도 언급했듯 자이젠의 죽음을 촬영한 시점은 타미야가 죽기 한달 반 전이라 시간적으로 전혀 말이 안된다. 아마 타미야가 직접 자이젠의 시신 역할을 맡은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11] 본명은 시바타 히데아키(柴田 英晃) 이다.[12] 직접 제작한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엉뚱한 사업에 손을 대는 바람에 엄청난 빚을 진 것도 모자라 친한 대학 선배에게 거액의 사기까지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당대 인기 여배우와의 불륜설까지 퍼져 타미야를 힘들게 했다.[13] 위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타미야는 가쿠슈인대학 경제학과 출신의 수재이기도 하다.[14] 전원집합은 TBS, 퀴즈 타임쇼크는 TV 아사히의 전신 NET테레비에서 방영하던 프로그램 이다. 당당하게도 경쟁사 프로그램을 광고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