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부르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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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0년 7월 31일 헤센의 바르부르크에서 프랑스군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연합군이 승리했다.
2. 배경
1760년 6월 말, 프랑스 육군은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의 지휘하에 헤센을 침공하여 마르부르크를 공략했다. 7월 10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의 지휘하에 프랑스군과 코르바흐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했다. 7월 16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엠스도르프 전투에서 방심한 프랑스 분견대를 습격해 괴멸시키는데 성공했으나 마르부르크에 세워진 야전 포대를 탈취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이후 브로이 공작은 7월 24일부터 연합군을 밀어붙여 7월 27일 폴크마르젠으로 진군했고, 작센의 프란츠 크사버(일명 크사버 왕자) 휘하의 예비군은 나움부르크까지 진군했으며, 슈발리에 드 무이 중장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디멜강 하류를 따라서 바르부르크로 진군했고, 스탱빌 공작의 군단은 지겐하인 요새를 포위했다. 연합군 총사령관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이러한 프랑스군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척탄병 10개 대대와 8개 기병 분대, 그리고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폰 슈페르켄 장군의 군단을 쾨르베케로 보내 디멜강을 사수하게 했다.
7월 30일, 브로이 공작은 프랑스 주력군과 함께 지렌베르크까지 진군했다. 하지만 슈발리에 드 무이 장군의 군단은 바르부르크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본대와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이런 적의 사정을 확인한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에게 바르부르크의 적을 공격할 것을 권유했다. 페르디난트는 이에 동의하고 슈페르켄 장군의 군단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자의 군단이 쾨르베케에서 두 개의 대열을 형성해 서쪽으로 진군하여 데 무이의 프랑스군 좌측면과 후방을 공격하고, 본인은 리브나우에서 디멜강을 도하하여 드 무이의 중앙과 우익을 공격하기로 했다. 당시 리베나우에서 쾨르베케 사이의 연합군 진영은 드 무이의 진영에서 약 13km 떨어져 있었고 페르디난트의 진영은 디멜 강까지 24km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 작전은 상당히 원대하면서도 극도의 섬세한 군사 기동이 필요했다. 연합군은 7월 30일 오후 9시부터 이동을 개시했고 다음날 새벽부터 전투를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 사령관: 슈발리에 드 무이 중장
- 병력: 18,000명, 중포 24문
3.2.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
- 병력: 16,000명
4. 전투 경과
7월 31일 오전 6시, 페르디난트의 선두 부대는 디멜강을 건너 쾨르베케 고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디멜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많은 지연이 초래되어서 약속 시각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 후 페르디난트는 군대를 최대한 남쪽으로 진군해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를 지원하려 했다. 오전 7시, 슈페르켄 장군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본군의 움직임을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쾨르베케에서 먼저 이동해 적을 향해 접근하기로 했다. 이후 그들은 한 시간 넘게 안개가 껴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날씨를 무릅쓰고 적진을 향해 행군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자의 첫번째 군단은 슈페르켄 장군 휘하에서 긴 우회로를 만들어 아이센과 그로세데네르 근처 숲을 가로질러 프랑스 진지의 후방에 있는 고지를 향해 3개 대열로 배치되었다. 두번째 군단은 자스트로 중장의 지휘하에 쾨르베케, 뤼트게네더, 멘느로 행진해 좌측에 메느, 우측에 오스젠도르프를 사이에 둔채 3개 대열로 형성되었다. 이 두 군단은 모두 영국군에 의해 지휘되었다.
오전 8시경,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드 무이의 프랑스군 우익에 있는 바르부르크를 향해 영국군 기병대를 출격시켰다. 이때 연합군의 접근을 보고 받은 드 무이 장군은 카스트리스 후작에게 적의 위치를 탐색하게 했다. 그러나 짙은 안개 때문에 카스트리스 후작의 정찰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러다가 안개가 걷힌 오전 9시 30분, 카스트리스 후작은 자신이 영국 기병대와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후작은 적 기병대와 잠시 교전한 뒤 고지에 올라가서 대규모의 연합군이 디멜강을 건너 오른쪽으로 행진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드 무이 장군은 보고를 받자 카스트리스 후작과 합류한 뒤 적이 좌익에 공격을 개시할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쟤빨리 말을 타고 본진에 돌아와 그의 군단에게 전투 준비를 할 것을 명령했다. 한편 카스트리스 후작은 적을 좀더 살펴보기 위해 경기병대를 이끌고 고지에서 떠나면서 후위대에게 고지를 계속 점령하게 했다.
드 무이의 군단은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 먼저, 4개 여단이 멘느 언덕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라 투르 뒤 팽 여단과 튀렌 여단을 바르부르크 인근 우편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루젤베르크 중장과 아우베트 중장 휘하의 기병대는 바르부르크 전방의 매우 넓은 평원을 바라본 채 중앙에 배치되었고, 프론삭 공작 휘하의 드래곤 부대는 보병 우편과 기병대 좌측 사이에 배치되었다. 또한 루에르그 여단은 기병대의 좌측 뒤편에 있는 분지 위에 예비군으로서 배치되었다. 포병대는 전선 앞에서 포진했고 일부 보병대는 바르부르크 마을에 포진했다.
오후 1시 30분,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오스젠도르프와 파펜하임 외곽에 포격을 퍼붓게 했고, 이와 동시에 영국 척탄병 부대가 오스젠도르프를 향해 진격했다. 이들의 공격은 오스젠도르프 앞과 프랑스군의 후방에 있는 고지를 접령하는 데 달려 있었다. 이에 부르보네 보병대 1개 대대가 이를 막기 위해 고지로 진군하자, 베크위트 중령은 척탄병 10개 분대와 함께 고지로 급히 뛰어갔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역시 몸소 척탄병 30개 분대를 이끌고 뒤따랐다. 그들은 적보다 먼저 고지에 올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투 태세를 갖췄고, 조금 후에 고지 근처에 도착한 부르보네 보병대는 적의 일제사격에 직면하자 10분 동안 멈춰서서 2개 대대의 합류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 연합군은 베크위트 중령과 합세했고, 이후 양군은 고지를 놓고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오후 2시, 적이 아군 좌익 후방의 고지를 노리는 것을 본 카스트리스 후작은 좌익을 지원하기 위해 바르부르크 마을에 배치된 병력을 급히 긁어모아 그쪽으로 진군했다. 그가 떠난 후 영국 기병대는 얼마 안되는 프랑스군을 바르부르크 마을에서 쫓아내고 마을을 약탈했다. 그러자 드 무이 중장은 프랑스군 좌익에 소속된 여단에게 2개 대열을 편성하라고 명령했고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추가 병력을 계쏙 보냈다. 연합군은 고지가 워낙 가팔라서 포병대를 고지 꼭대기에 가지고 오는 것에 애를 먹었지만 끝내 성공했고 뒤이은 프랑스군의 5차례에 걸친 연속 공격을 모조리 저지했다. 이때 자스트로 장군의 군단이 부르보네 여단의 우측면을 공격했고, 부르보네 여단은 패주했다. 이에 영국 기병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많은 포로들을 확보했다.
한편 페르디난트 원수 휘하의 연합군 주력은 어떻게든 전장에 참여하기 위해 바삐 이동했지만 제시간에 전군이 도착하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날씨가 워낙 더워서 피로에 지쳐 쓰러지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이에 페르디난트는 그랜비 후작 존 메너즈에게 영국 기병대 22개 분대와 영국 포병대 만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그들은 전장을 향해 신속히 진군해 2시간만에 전장에 도착했다. 그랜비 경은 즉시 전 기병대에게 프랑스군 우익 기병대를 공격하게 했다. 그랜비 경은 기마 근위대의 선두에 서서 적을 향해 돌격했고, 지휘관이 앞장서서 돌격하자 사기가 크게 오른 영국 기병대는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돌진했다. 프랑스 우익 기병대는 잠시 저항하려 했으나 적의 공세가 워낙 대단해 결국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이후 영국 기병대는 즉시 프랑스 보병대의 측면과 후방을 향해 돌진했다. 프랑스군은 분전했으나 결국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디멜 강을 향해 퇴각했다.
4시간 동안의 전투가 끝난 후, 연합군 일부 대대는 디멜 강에 있는 프랑스군 부교를 향해 출발했다. 드 무이 장군은 튀렌 여단에게 부교를 방어하게 하고 라 투르-뒤 팽 여단에게 가능한 빨리 튀렌 여단과 합세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두 여단은 허겁지겁 부교를 건너 달아나는 주력군의 후미와 부교를 보호했다. 이후 드 무이 장군은 디멜 강 전선을 방어하려 했지만 적 포병대가 압도적인 화력으로 포격을 퍼붓는데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자가 그랜비 경의 기병대 및 12개의 보병 대대를 강 건너편으로 보내자 결국 패배를 시인하고 바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폴크마르젠으로 퇴각했다.
5. 결과
프랑스군은 바르부르크 전투에서 1,6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2,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으며 대부분의 군수품과 대포 12문을 잃었다. 반면 연합군은 1,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그 중 590명은 영국 기병대, 240명은 영국군 척탄병대였다. 이 전투는 영국인들에게 민덴 전투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던 영국 기병대가 명예를 되찾게 해준 뜻깊은 순간이었다. 이후 프랑스군 총사령관 브로이 공작은 본국으로 철수했고, 연합군은 적의 뒤를 쫓아 프랑스로 진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