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오스 1세

 


[image]
'''제호'''
바실리오스 1세(Βασίλειος A')
'''휘'''
바실리오스(마케도니아의 바실리오스, Βασίλειος ὁ Μακεδών)
'''생몰년도'''
811년 ~ 886년 8월 29일
'''재위기간'''
867년 ~ 886년 8월 29일
1. 개요
2. '마케도니아인'
3. 황제가 되기 전
4. 치세
5. 참고 자료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사브리아 왕조아모리아 왕조를 거치며 중흥의 발판을 마련한 동로마 제국은 바실리오스 1세가 개창한 마케도니아 왕조의 시대에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두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 또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만인지상의 지위인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2. '마케도니아인'


바실리오스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국가별로 말하는 기원이 상이하며, 개중엔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조작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아르메니아 출신이라는 것이고, 동로마 제국으로 이주해 트라키아 지방에 정착한 농민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국가 마케도니아와 고대의 마케도니아 왕국, 그리고 북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지방 때문에 왜 트라키아에 살던 그가 마케도니아인인지 의아할 수도 있으나, 당시 제국의 행정 체제인 테마 제도하의 마케도니아는 현대 불가리아와 터키에 걸쳐있는 테마였다. 즉, 아르메니아 혈통이든, 트라키아 지방에 살았든 간에, 마케도니아 테마 출신이기에 마케도니아인이라 부른 것이다.

3. 황제가 되기 전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로마인으로서 사용하는 그리스어에는 아르메니아 억양이 묻어났으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문맹이었다. 다만 건장한 몸을 타고난 덕에 힘이 굉장이 세었고, 말을 다루는 솜씨가 탁월했다. 운좋게 황제의 측근인 부제 바르다스의 친척 밑에서 일하던 바실리오스는 특유의 능력 덕분에 황제 미하일 3세의 눈에 띄게 되어[1] 콘스탄티노플의 황궁에 입성하게 된다. 바실리오스는 황제의 신임을 얻은 뒤에 미하일 3세에 의해서 곧 최측근에게 주어지는 직위인 신변책임자(Parakoimomenos)가 되었다. 황제의 측근이 된 바실리오스는 실권자인 바르다스를 숙청하는데 앞장서서 그의 권력을 차지했으며, 바르다스에 이어 미하일과 공동황제가 된다. 미하일 3세와 공동 통치한 기간은 16개월 정도이다. 미하일은 바실리오스에게만 실권을 맡기고 술, 전차 경주 따위에만 빠져 있었으며 존경하던 삼촌인 바르다스와 달리 바실리오스의 간섭은 못마땅하게 여겨 둘 사이의 관계는 틀어졌다. 결국 바실리오스는 미하일을 암살하고 단독 황제가 된다.

4. 치세


성상파괴운동이슬람 제국, 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오랫동안 신경을 제대로 못 썼던 이탈리아에 다시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 그의 치세이다. 그의 목표는 이슬람 세력에게서 아드리아 해를 지키는 것[2], 크로아티아 해변인 달마티아에 대한 지배권 재확립, 궁극적으로 이탈리아를 수복하는 것이었다. 목표대로 전부 다 되지는 않았지만 변방의 새로 나타난 이민족을 몰아냈으며 바리, 오트란토, 타렌토, 칼라브리아를 수복했다. 하지만 시칠리아는 오히려 뺏겼다. 여기에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3]가 일선 사령관으로 큰 역할을 했다.
바실리오스는 최초엔 서방 속주들의 회복을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에게 유화적 제스처를 보냈다.[4] 니콜라오 1세 교황은 바실리오스의 우호적 제안을 회개로 받아들였으나, 곧 바실리오스의 태도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고 지지를 철회한다.[5] 신성 로마 제국의 루트비히 2세와는 결혼 동맹[6]을 제의하고 바리를 함께 수복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동로마의 제독이 신성 로마 제국군의 준비가 불성실하다고 여겨 루트비히를 '프랑크의 왕'으로 부르자 루트비히는 모욕에 분통을 터뜨렸고[7] 이로써 바실리오스가 동맹자로 점찍었던 두 사람은 적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동로마의 육군은 사라센만이 아니라 세력을 키워 서쪽으로 소아시아까지 진출한 파울리키아파[8]도 상대해야 했다. 격전끝에 바실리오스는 파울리키아를 내몰고 주요 기지를 파괴했으며 지도자를 죽였다. 서유럽에서도 성과를 올려 크레타와 시칠리아는 비록 수복하지 못했으나[9] 달마티아 전역에서 사라센을 몰아내어 전 지역에 테마를 설치했고 베네벤토의 아델키스, 오트란토, 바리를 손에 넣었다. 제국은 사실상 남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어 이로써 교황령과 서방 제국은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의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제국 해군도 테옥티스토스와 바르다스의 조련을 받아 만만찮은 전력을 회복했고 바실리오스 대에는 언제 어디서든 사라센의 기습함대가 나타나면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이 같은 군사적 업적은 이후로 100년간 동로마 제국이 외부의 적들의 공세에 맞설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선교 사업 역시 활발하게 진행됐고 발칸의 슬라브 부족들은 하나둘씩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은 정교회가 지배하게 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불가리아 교구 역시 정교회의 품에 돌아왔다. 바실리오스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낡고 붕괴 위험에 처한 대성당들을 보수하고 모자이크 장식을 더했으며 소피아 대성당에 비할만한 대성당인 네아[10]를 지었다. 황궁과 다른 궁전들도 보수하고 화려함을 더했으나 오늘날 바실리오스가 만든 건축물은 하나도 전하지 않는다. 법전도 개정하였다.
레온 6세는 당대에 바실리오스가 아니라 미하일의 자식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바실리오스의 후사들로 여겨져 마케도니아 왕조로 불리나 이는 후대 역사가들이 보기에도 신빙성 있어 보이는 듯. 바실리오스의 자식은 첫째인 콘스탄티노스로 바실리오스를 닮았으며 둘째, 셋째 자식은 미하일의 자식인지 바실리오스의 자식인지 불분명하다.[11] 바실리오스는 전 부인의 소생인 콘스탄티노스를 끔찍이 아꼈으며 첫 아들이 죽자 바실리오스는 이를 자신이 저지른 두 차례의 암살에 대한 댓가로 여길만큼 큰 실의에 빠지며 때로 광기마저 보일 정도였다. 이어서 정식 후계자가 된 레온[12]에 대한 바실리오스의 감정은 싫어하던 것을 넘어 거의 혐오에 가깝게 발전한다. 레온은 반역에 대한 혐의를 받아 감옥에 갇히고 실명할 뻔 하였으나 간신히 피하고 죽을 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석방된다. 바실리오스는 사냥 중 죽는데 기록은 상세하나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정황상 암살로 추정된다.
향년 75살로 장수했다.

5. 참고 자료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티움 제국사 - 게오르그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연대기 - 존 줄리어스 노리치

6. 크루세이더 킹즈 2


The Old Gods DLC를 구입한 후 867년 시나리오에서 플레이할 수 있다. 교육 특성으로 강인한 군인(tough soldier)이, 그 외에 야심, 강인함, 흉터, 기만적 특성들이 붙어 있어 그의 입지전적인 인생을 구현하고 있다.
바실리오스의 황제로서 능력치는 좋은 편이 아니고 직할령도 넓지 않은데다 강력한 봉신들도 존재하고 제국 내부에 이단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강인함 특성 덕에 대체로 오래사는 편이어서 성장을 바랄 수 있고, 지방관령 제도를 가진 로마 제국의 황제인 덕에 봉신 통제도 편한 편인데다 이미 아들들이 태어나 있어서 후계 걱정이 큰편도 아니다. 잘 하면 1세기 안에 로마 제국을 재건할 수 있다.
제국 주변의 상황은 더욱 좋다. 서쪽의 제국인 프랑크 제국은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혼란스럽고, 불가리아는 마자르인과 동로마 제국에 끼인 형국이며 동방엔 성전을 걸기 좋은 고만고만한 이슬람 소국들이 있다. 이들을 지켜줄 바그다드의 아바스조는 페르시아와 아프리카가 떨어져나가 메롱한 상태이기까지. 괜히 로마 제국 복원 디시전이 쉬운 시나리오가 아니다.

[1] 말을 다루는 특별한 기술을 부렸다고도하고, 불가르 족의 거한을 거꾸려트렸다고도 한다.[2] 그것을 위해 중프랑크와 제휴했고 아드리아 해에 함대 139척을 보냈다.[3] '대'(Elder)로 구분하는 이유는, 손자인 황제 니키포로스 2세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4] 바실리오스는 유스티니아누스 이래 처음으로 옛 영토의 회복을 계획한 황제이다.[5] 바실리오스가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과적으로 포티오스만 내쫓은 모양새가 됐다.[6] 이 결혼 동맹이 성사되었으면 바실리오스에 이은 다음 황제는 서방과 동방을 함께 다스리는 황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7] 루트비히 2세는 프랑크의 황제가 아니라 샤를마뉴도 받지 못한 칭호인 로마 황제로 불러주기를 원했다.[8] 양자론(예수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일반 사람들처럼 태어났으나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느님의 아들로 선택되어 하느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주장) 쪽 교파이다. 삼위일체를 그야말로 정면으로 위반하니 제국 입장에서는 이단.[9] 시칠리아의 주요 거점인 시라쿠사이는 878년에야 함락되었다[10] 성모 마리아, 성 미카엘, 성 엘리야, 성 니콜라오스에게 공식적으로 봉헌되었으나 네아라는 짧은 이름으로 불렸다[11] 미하일은 바실리오스의 본처를 내쫓고 미하일의 정부를 바실리오스와 결혼시켰다. 그렇게 하면 합법적으로 궁에 들일 수 있기 때문에. 미하일은 바실리오스에게 다른 정부를 주선해준다.[12] 레온은 결혼하기 전 정인이 있었으나 하도 염문을 뿌려대는 통에 바실리오스가 레온에게 다른 혼처를 주선해주었고 여자는 먼 곳으로 보내 다른 남자와 결혼시킨다. 레온은 독실한 신자로 숨이 막힐 것 같은 배우자를 좋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