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제도

 

1. 배경
2. 형성
3. 정착과 운영
4. 몰락
5. 종언

Themata. 중기 동로마 제국의 군사 제도의 중핵을 이룬 제도로, 일종의 둔전병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제도다. 군관구 제도, 혹은 번진 제도라고 번역된다.

1. 배경


동로마 제국은 그 지정학적 특성상 양면전쟁을 항상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었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동방의 패자로 자리잡은 사산 왕조와는 피로 피를 씻는 열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계 민족들, 또 이들이 이주하고 난 뒤 빈 자리를 메운 슬라브계 민족들이나 튀르크계[1] 민족들과도 제국 서부, 북부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쳐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은 필연적으로 행정 업무와 군사 업무를 일체화한 일종의 군관구제를 통해 군사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전의 고대 로마 제국은 포에니 전쟁 이후 라티푼디움이라고 불리는 노예가 생산에 주로 참여하는 대토지 소유제가 확대되어 갔다. 그라쿠스 형제는 이런 대토지 소유 현상을 해결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정치적 개혁이 이루어진 것과 별개로 라티푼디움 제도는 전반적으로 유지되었다.[2] 그러나 대토지 소유자를 중심으로 했던 기존의 제도가 장기간 동안의 대페르시아 전쟁의 혼란 속에서 제국 동부 일대의 대토지 소유자가 몰락하여 버림으로 인해 소토지 보유자를 중심으로 하는 둔전제가 실시되었다. 둔전제는 테마 제도의 휘하에서 군사력의 원천이 되어줌으로써 테마 제도의 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군관구제의 유래는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설치한 군정일치의 라벤나, 카르타고 엑사르크[3]에서 기원을 찾는다. 이러한 군관구제는 630년대에서 640년대 사이에 시리아와 이집트를 위시로한 제국 동부의 상당수가 이슬람 세력하에 떨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대개의 경우 이 시점을 테마 제도의 출발점으로 잡는데, 테마 제도는 제국의 경제적 중심지이자 이슬람 세력과의 최전선인 소아시아 지역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서쪽으로는 콘스탄티노플 바로 건너편 칼케돈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이슬람 세력과의 경계인 타우루스 산맥까지 크게 5개의 테마가 이 시기 아나톨리아 반도에 조직되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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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년경 아나톨리아의 테마. 최초 5개의 테마에서 2개가 더 늘어나 총 7개가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테마는 스트라티고스[4][5]라 불리는 사령관에 의해 행정/군사가 통합되어 운영되는 군관구 조직이었다. 초기의 테마는 기존에 소아시아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던 야전군의 관구 조직을 근간으로 하여 조직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초기의 테마 제도는 크게 테마 아르메니아콘(Thema Armeniakōn)/테마 아나톨리콘(Thema Anatolikōn)/테마 옵시키우(Thema Opsikiou)혹은 옵시키온/테마 트라키시온(Thema Thrakēsiōn)/카라비시아니(Karabēsianoi)[6]의 다섯 조직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각기 4~6세기의 코미타텐세스 야전군들인 아르메니아 기동군/오리엔툼 기동군/제1프레센탈군과 제2프레센탈군/트라키아 기동군/일리리쿰 기동군을 승계 및 재조직하여 이루어졌으며, 무려 2~3세기에서부터 유래하는 각 기동군 안의 연대들도 테마 아래 투르마 단위에 정착하였다. 그 군인들은 테마 구역 내에 거주하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스스로를 무장할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종래의 황실 영지에서 토지를 수여받았다.[7]
하지만 이러한 각 테마 관구는 줄어든 제국의 영토에 비하면 지나치게 컸고, 실질적으로 테마 제도에 의거한 둔전 지급은 9세기 초에 니키포로스 1세 치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일 정도로 주먹구구식인 면도 있었다.
이후 7세기 말엽부터 8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빗발치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제국은 테마를 보다 작은 조직으로 세분화시켜 운영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게 되었다. 842년의 기록에 따르면 개편된 테마 조직 내에는 18명의 스트라티고스가 있었고, 940년에는 28명이, 970년대에 이르면 90명에 육박하는 스트라티고스 및 분견군 사령관이 존재했다.

3. 정착과 운영


본래 군사적 효용성에 입각하여 구 행정 구획에 기초하여 설정되던 테마는 점차 제국 행정 구획을 맞추는 기초적인 단위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더불어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엽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설치된 소규모 군관구들인 클리수라의 대부분이 정식 테마로 승격되었다. 원래 이런 클리수라들은 상당수가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하는 요새화된 산악 지대에서 소규모 게릴라전과 반격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중요하므로 단순한 지역방어의 개념을 넘어서기 시작한 테마 제도의 규모는 점차 확대되었다.
초기 소아시아 지역 일대에서 운영되던 테마 제도는 그 효용성을 입증하면서 제국 국방의 기본 체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10세기에 이르러 숨가쁜 방어전에서 벗어나 여력이 생긴 동로마 제국은 발칸 반도와 동방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게 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요안니스 1세, 바실리오스 2세로 대표되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춘 황제가 군대를 지휘하면서 제국은 새로이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확장된 영토에 기존의 테마와는 규모 면에서 다소 열세하지만 새로운 테마들을 편성하여 국경 일대를 요새화시켰다.
테마 제도 하에서 각 테마는 약 1만여 명에 이르는 수의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테마는 투르마-드룽고스-반돈-켄타키아-콘투베르니아로 이루어지는 전투 서열하에 일정 단위의 정규 병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이러한 동원 체계하의 제국은 영토와 군비가 최대로 확장 된 1040년대에 이르러 최대 25만여 명에 이르는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이 병력은 395년도 동서 분리 당시의 동로마 제국군의 수효 110%에 해당한다!
물론 이렇게 동원된 테마 산하의 군사력만이 동로마 제국 군사력의 핵심은 아니었다. 테마에서 동원된 병력들은 익숙한 지형에서 싸운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지연전 및 게릴라전을 수행해 적의 주력을 지치게 한 후 인접 테마의 지원군과 중앙군인 타그마[8]가 지친 적의 주력을 격파하는 것이 동로마 제국 전략의 기본으로 자리잡았다. 테마 제도는 강력한 중앙군 타그마와 함께 제국의 국방력을 지탱하는 강력한 축으로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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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5년 당시 각 테마의 이름과 경계.

4. 몰락


7~8세기의 위기를 건너 10세기에 들어 제국의 영토가 확장되고 사회가 고도화 되자 테마 제도 역시 점차 변화하였다. 직접 국경을 접한 최전선의 테마들은 여전히 그 전투력을 유지했고, 중앙정부 역시 타그마의 일부를 분견군으로 파견함은 물론 변경의 테마 두개이상을 묶어 둑스(Doux), 카테파노(Katepano) 등의 고급 관직 밑으로 편성하여 지휘의 효율화를 꾀했다. 이러한 남이탈리아, 칼디아, 메소포타미아, 안티오히아, 바스푸라카니아 등으로 대표되는 둑스, 카테파노 관할의 테마들은 숫적으로 열세이더라도 정예한 군대와 전문화 된 장교진의 조합으로 1050년대까지도 제기능을 하며 제국의 방위를 책임졌다.[9]
대신 이러한 변경 테마 안쪽의 테마들은 점차 군사적인 성격보다는 행정적인 성격이 강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테마군으로 편성된 군인들은 여전히 장부상으로 존재했으나 무장의 수준이나 전투력이 크게 떨어져 2~3선급의 예비병력으로 취급받았고, 실제 소집시에도 군역 대신 대금을 치르는 경우가 늘어갔다. 정부 역시 테마군보다는 직업군인인 타그마나 용병을 선호하였고, 생업에 종사하는 국민들을 군역으로 괴롭히는 대신 봉급을 꾸준히 지급하면서 민간 통제의 일환으로 이용했다. 즉, 둔전으로서의 초기 테마제도는 이미 반쯤은 사라졌고, 시대가 바뀌면서 다른 형태로 기능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한 테마 제도의 모습은 콘스탄티노스 9세에 이르러 불안함을 보이게 된다. 그의 치세에는 사방의 적을 상대하면서 군비가 최대로 확장되었고, 9할을 유지하던 기축금화의 금 순도도 점차 하강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이러한 재정악화에 이어 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에 파플라고니아, 아르메니아콘, 아르메니아 지역 테마들에 배치 된 병력이 동원되면서 동부 변경 테마의 방위력이 약해지는 사태가 겹치게 되었다. 책임을 질 이사키오스 1세 역시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어서 군비를 유지하는 대신 강경한 태도로 세제혜택을 줄이고 교회의 재산을 뺏어 재정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곧 한계를 보이며 민심을 잃고 짧은 치세를 마친다.
뒤를 이은 콘스탄티노스 10세는 반대로 군비를 축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악화된 재정을 정상화하면서 강압적인 군인황제를 겪은 민심을 달래고 군부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최악의 실책이 되었는데, 이사키오스 1세가 주로 병력을 동원했던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 일대에 셀주크 제국의 공격과 튀르크 유목민의 노략이 이어지면서 해당 지역이 붕괴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변경의 테마들이 무너지자 전란을 겪은 지 백 년은 족히 넘은 아나톨리아의 테마들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극약(劇藥)인 로마노스 4세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와장창...
결국 군대가 박살나고,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방어선이 무너지고, 외교 대상인 셀주크 제국조차 통제하지 못하는[10] 수만 단위의 유목 부족들이 제국령으로 쏟아져들어오면서 11세기 말의 대혼란이 로마 제국에 도래하였으며, 이것이 흔히 말하는 테마 제도의 몰락이다. 즉, 내적인 모순이나 봉건화 따위로 국방이 무너진게 아니라 쿠데타라는 우발적인 사건에 수습불가능한 외침과 혼란 그리고 정책 실패가 이어지면서 붕괴한 것이다.
이러한 대혼란이 수습 된 것은 콤니노스 왕조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부터이다. 그의 즉위 즈음하여 바다에 막힌 유목민들이 더 이상의 전진하지 못하고, 외교적인 수단이 먹히는 룸 술탄국이 등장하면서 혼란은 점차 줄어들어갔다. 물론 주요한 테마가 몰려있던 아나톨리아는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알렉시오스 1세는 결국 반토막난 제국을 가지고 노르만 전쟁, 페체네그 전쟁 등을 기어이 치러내었다.
그러나 제국이 존망의 위기에 몰려있던 레부니온 전투에 이르면 전국의 병력을 총동원해도 5만여의 병력 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십자군이 들이닥칠 즈음에도 7만여밖에 수습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장부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20만에 가까웠던 11세기 초반에 비하면 엄청난 몰락이었다.

5. 종언


콤니노스 왕조 이후 로마 제국은 중앙군을 더욱 확장하면서 도로를 정비하고, 해군을 증강하여 군사력을 투사하기 위한 기동력을 크게 강화하였다. 여기에 꾸준히 영토를 수복하면서 산과 강을 국경으로 삼고, 주요한 길목과 도하지점엔 요새와 관문을 건설하였으며 유목민들을 통제할 룸 술탄국도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적 효과는 마누일 1세 시기의 중흥으로 나타났다.
대신 테마군은 국방의 주역에서 물러났다. 전통적으로 강력한 행정기구를 가진 로마 제국은 기존의 세제혜택에 가까웠던 프로니아 제도를 이용하여 새로 고용한 직업군인을 국방의 핵심으로 삼았다. 11세기부터 존재했던 프로니아 제도는 12세기 중반을 넘어서 급속도로 확장되었고, 테마군에 비하면 적지만 정예화 된 프로니아군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11]
그러나 테마군은 이후에도 존재했다. 정부가 여전히 건재했고, 그에 따른 행정 기반도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안드로니코스 1세, 알렉시오스 3세의 시대에도 반란군이 숫적으로 상당한 군을 동원한 것이나, 4차 십자군이 진격해올 때 소아시아나 남부 그리스에서 수천의 병력을 동원하여 맞선 것을 보아 테마군 자체는 존재했다. 물론 전투력은 중앙군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서, 강력한 기사를 앞세운 십자군 앞에 번번히 털려나갔다.[12][13]
결국 4차 십자군으로 인해 중앙정부가 통채로 사라지면서 행정기구에 큰 타격을 입었고, 점차 테마군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된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니케아 제국은 용병, 중앙과 지방의 프로니아군 그리고 지방 수비군[14]으로 국방을 꾸려나갔으며, 이러한 기조는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시대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외침, 내분, 흑사병이라는 악재가 연달아 겹치는 14세기에 군제가 개편되면서 테마 제도 역시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의 모습은 프로니아 제도 참조.
관련문서: 비잔티움 제국/군관구

[1] 불가르족이나 쿠만족, 페체네그 족 등 적잖은 투르크계 민족들이 우크라이나 스텝 지역을 통해 동유럽으로 꾸준히 몰려왔었다.[2] 이러한 체제는 노예 확보를 위한 정복 전쟁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었고, 트라야누스 황제 이후 정복 전쟁이 중단됨에 따라 노예가 아닌 부자유 소작민이 생산의 주축이 되는 콜로나투스 제도가 제국 후기에 정착되었다.[3] 영어로는 Exarchate: 주로 총독(부), 그 외에도 태수, 도호 등으로 번역. [4] Stratēgos. 영어 단어 Strategy의 어원이 되었다. 주로 절도사, 사령관으로 번역.[5] 제도 도입 초기까지만 해도 스트라티고스 외에 민정을 담당하는 프로콘술(속주총독) 지위가 있었고 영향력을 미쳤으나, 점차 스트라티고스가 그 지위를 압도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6] 카라비시아니는 공식적으로 테마 제도에 따라 재편되지는 않았으나, 소아시아 남부 일대에서 실질적으로는 테마 제도의 일원으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8세기에 정식 테마가 되었다.[7] 때문에 이들은 편제로 보든 부대 역사로 보든 옛 로마 군단들의 직계 후예며, 로마사에서 카이사르 덕택에 꽤 유명한 제10군단의 잔여 병력의 후예들 같은 경우 카라비시아니에 참여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8] 아주 간단히 말하면 카타프락토이등의 기병비율이 높은, 공성전력을 비롯한 지원병력까지 포함한 직업군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더 깊게 파고들면 여기에 덧붙일 요소가 있으며, 그 수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트레드골드의 경우는 바실리오스 2세 재위 당시의 타그마 병력이 42,000명에 육박했다고 추정하지만 J.핼든 같은 경우는 6,000명 남짓으로 추정하는 등 학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리고 트레드골드는 다른 건 해석 잘 해놓고 왜 이것만 잘못 보냐며 핼든을 극딜했다. 핼든의 경우 저 수의 추정이 막연히, 그 시대에 그런 상비군을 유지할 리 없었다는 개인 가정에 기반을 둘 뿐 이렇다할 주장의 근거가 없어, 까일 빌미를 제공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9] 말이 열세이지 적어도 2만여 명을 넘겼다. 당장 10만의 튀르크군과 회전을 벌였던 카페트론 전투에서도 조지아 왕국군과 연합하여 5만의 병력을 동원한게 그 예이다. 중세시대에 작은 왕국 정도는 멸망시킬 수 있는 숫자의 정예병력을 변방의 특정 전역에서 즉각적으로 동원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10] 알프 아르슬란은 로마노스 4세를 풀어주면서 로마 황제가 유목민들을 통제하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였다.[11] 다만 프로니아 제도는 어디까지나 급여를 지불하는 형태이지 병종이나 지방군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12] 올리브 숲 전투의 사례처럼 일개 테마에서 4~5천의 테마군을 동원했다면, 1180년 3차 중흥기의 로마 제국은 해군을 포함하여 10~13만의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13] 실질적으로 전투에 동원한 병력의 한계가 4~5만이었다거나, 1, 2차 중흥기의 20만을 넘는 병력에 비해 초라하다는 점으로 폄하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명심해야할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재정복을 위해 군비를 확장하기 전에도 전체 병력이 20만을 넘기지 못했고, 2차 전성기 때 군비가 최대로 확장 된 1040년대에도 실질적인 동원력은 비슷했다. 오히려 최악의 위기에서 짧은 시간 만에 규모면에서 조금 열세하지만 더욱 정예한 군대를 재건한 것을 높이 평가해야할 것이다.[14] 카스트레니Kastrenoi라 불리는, 행정단위별로 배치된 다종다양한 군사조직. 지역 방위, 치안, 행정 집행 등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