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

 


'''본관'''
죽산 박씨
'''성명'''
박문성(朴文成)
'''초명'''
'''박서(朴犀)'''
'''가족관계'''
증조부 추밀원부사·전중감·빈객, 충질공(忠質公)
박정유(朴挺蕤)
조부 지문하성사·형부상서 박육화(朴育和)
아버지 호부상서 박인석(朴仁碩)[1]
아들 박이온(朴李溫)
'''생몰연도'''
미상
1. 생애
2. 기타
3. 관련항목


1. 생애


고려의 무신으로, 여몽전쟁귀주성 전투에서 성을 굳건히 지켜낸 명장이다.
본관이 죽주(죽산, 현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이자, 죽주 사람으로 1231년(고종 19년)에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살리타이가 철주를 함락하고 귀주를 공격하자 김중온, 김경손, 정주, 삭주, 위주의 수령들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귀주에 집결한 후에 몽골군과 싸웠으며, 몽골군이 박문창을 사로잡은 뒤에 그를 보내 투항을 권유하자 박서는 박문창을 처형했다.
박서는 몽골군이 귀주를 공격할 때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하자 적절한 대응으로 여러 차례 공격을 막았고 이는 다음과 같다.
  • 몽골군이 누차, 거대한 평상을 만든 후에 땅굴로 공격 → 성벽에 구멍을 파서 쇳물을 불태우고 썩은 이엉을 태워 평상을 불태움.
  • 대포차 15문으로 공격 → 포차로 돌을 날림
  • 사람의 기름으로 불을 지름 → 진흙을 물에 섞어 던짐
  • 풀더미로 불을 지름 → 물을 준비해뒀다가 물을 뿌림
몽골군이 퇴각했다가 여러 곳에서 군사를 모아 다시 공격해서 또다시 적절한 대응으로 몽골군을 여러 차례 막았고 이는 다음과 같다.
  • 포차 30문으로 성곽 50간을 부숨 → 성벽을 수리하고 쇠줄로 막은 뒤에 몽골군을 공격
  • 대포차로 공격 → 포차를 날려 대응
살리타이가 지의심, 강우창 등을 보내 항복 권유를 했지만 박서는 이를 거부했으며, 또다시 사람을 보내왔음에도 거절했다. 구름사다리를 만들어 공격하는 것에 대우포로 대응했고 고종이 최임수, 민희 등을 보내 강화한 사실을 알리자 박서는 항복했다.
고려사 박서 열전에 따르면 전투가 한창일 당시 몽골군의 어느 나이 든 장수는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고 한다.

吾結髮從軍 歷觀天下城池攻戰之狀 未嘗見被攻如此而終不降者。 城中諸將 他日必皆爲將相。

"내가 성인이 되어 종군하면서 천하의 성에서 전투하는 모습을 두루 보았지만 이처럼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성 안에 있는 장수들은 훗날 반드시 모두 장군이나 재상이 될 것이다."

훗날 몽골 사신이 와서 박서가 항복하지 않은 것을 들어 그를 죽이려 하자 최우가 박서에게 "나라에 대한 경의 충성은 아무데도 견줄 수 없으나 몽골의 말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경은 잘 생각해 처신하라."고 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죽주로 돌아갔으며, 후에 관직으로 돌아와 문하평장사에 임명되었다.
일설에는 무학대사가 그의 5세손이라고 하지만, 그 진위가 불분명하다. 죽산 박씨 족보에도 무학대사가 그의 후손이라고 나와있지 않다.

2. 기타


전쟁기념관에서는 2010년 8월에 박서를 호국의 인물로 선정했다.

3. 관련항목



[1] 박인석의 묘지명에 따르면, 형들은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사실상 외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