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
1. 개요
無學大師
(1327년 ~ 1405년)
조선 왕조의 유일한 왕사(王師).
속가의 성은 박(朴), 흔히 부르는 '무학'은 호로 법명은 자초(自超). 고려 충숙왕 14년(1327) 9월 20일에 태어났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 천도를 도왔다고 한다.
2. 생애
야사 등지에서는 그가 귀주성 전투의 영웅인 박서의 5세손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박서의 본관인 죽산 박씨 족보에도 그가 박서의 후손이라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도 경상남도 합천이라는 설과 충청남도 서산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따라서 어렸을 때 미미한 신분으로 추정된다.
야사에서는 모친이 수태하던 날 태몽으로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책과 부러진 붓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이후 그의 운명을 암시했다.
충목왕 즉위년(1344) 18살에 출가하여 불교를 공부하다가 충목왕 2년(1346)에 능엄경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암자 등에서 수행정진하였다. 공민왕 2년(1353) 27세 나이에 원나라 대도로 건너가 유학을 하였다. 대도에서 인도 출신 고승 지공대사를 만나 도를 인가받았다고 한다. 한편 이미 고려에서 유명한 고승이었던 나옹화상이 역시 원나라로 갔다가 무학을 만났고, 무학은 나옹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공민왕 5년(1356) 30세에 다시 고려로 귀국했다. 나옹화상 역시 공민왕 7년(1358)에 고려로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는데 이때 무학과 다시 만났다. 무학은 그후 함주로 가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의 묘자리를 잡아주어 이 때부터 무학과 이성계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왕 10년(1384)부터 두 사람은 사제지간을 맺을 만큼 본격적으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통해 역성혁명을 꾀하려던 이유 중에는 정도전이 노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서얼이기에 신분상승을 원한 점도 있다는 주장이 있듯, 무학대사 역시 신분상승을 목표로 이성계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설도 있다.
야사가 상당히 많은데 세간에 알려진 이성계의 세 서까래 꿈 해몽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얘기(猪眼觀之卽猪 佛眼觀之卽佛)와 전어도 관련, 왕십리의 한양 위치 배정(이때 처음 봐두었던 자리는 현재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가 차지하고 있다.) 및 이자춘, 이성계의 묏자리도 그가 봐주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종묘의 칸 수를 결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야사일 뿐이니 너무 믿진 말자. 종묘의 칸 수 경우엔 확실히 틀렸다. 특히 경복궁의 자리를 잡을 때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좌우에 북악산과 목멱산(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두어 동향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정도전이 제왕은 "예로부터 중국의 위대한 군주들은 북쪽에 좌정하고 남쪽을 향해 앉아서 사방을 다스렸다"며 북악산을 주산으로 인왕산과 낙산을 좌우 청룡과 백호로 삼고 목멱산을 향해 남향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반대해 지금과 같은 경복궁과 한양도성의 위치가 결정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 이때 무학대사는 "200년 뒤에 내 말을 다시 떠올릴 날이 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1] 물론 이것도 야사일 뿐이다.
그러한 야사들을 볼 때 상당한 명풍수이자 예언자였다고 봐야 할 듯. 단, 고우영 화백의 수레바퀴에서는 재상과 장군이 나오는 묫자리를 왕이 나올 자리라고 했다가 틀렸다고 스승 나옹의 꾸지람을 받거나 왕십리의 유래에도 나오듯이 처음부터 잘못된 위치 선정으로 도선 국사의 가르침을 받는 장면을 보면, '무학(無學)'이라는 이름 그대로 그렇게까지 빼어난 고승은 아니였을거라고 서술했다.
조선 태조 원년(1392) 10월 9일에 왕사가 되었다. 같은달 11일이 이성계의 탄신일인지라 깨달음에 대해 강의했는데, 불법의 취지를 능히 해설하지 못해 중들 가운데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2][3] 태조 2년(1393) 2월 11일에는 한양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 땅의 형세를 관람하면서 이성계가 묻자 무학은 능히 알 수 없다고 답했다.
태종 2년(1402) 7월 13일에는 회암사의 감주가 되었고, 같은해 11월 9일에는 이성계가 함주에 있을 때 이방원의 명으로 이성계에게 가서 이방원이 속히 돌아오기를 청한다는 것을 전했다. 태종 5년(1405) 9월 20일에 향년 79세로 입적했고 그 사리는 회암사 부도에 안치되었다. 3년 후에는 태조 이성계도 승하했다. 태종 10년(1410) 시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무학이라는 호보다는 자초라는 법명으로 더 많이 나온다. 정조 16년(1792)에는 개종입교 보조법안 광제공덕 익명흥운 대법사(開宗立敎普照法眼廣濟功德翊命興運大法師)란 호를 추가로 받았다. 실록의 기사
회암사에 무학대사비가 있는데 그 비문을 태종이 친필로 써주었다. 그런데 순조시절 지방의 유생 이응준이 그 비가 있는 곳이 명당이라는 소리를 듣고 멋대로 비를 허물고(!) 그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 시신을 몰래 투장했다. 이 사실이 알려져 이응준은 목이 날아갈 뻔했으나 간신히 목숨은 건저 유배당하고 비석을 복구하여 새롭게 그 자리에 다시 만들어놓았다.실록의 기사1,실록의 기사2
3. 미디어
사극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한 1996년 작 용의 눈물과 KBS 대하드라마의 부활을 알린 2014년작 정도전에서 출연하였는데, 두 드라마 모두 박병호 씨가 배역을 맡았다. 이처럼 동일 배역을 다른 사극에서 2번 연기한 다른 경우로는 태종 역의 김영철(대왕 세종, 장영실), 원경왕후 역의 최명길(용의 눈물, 대왕 세종), 단종 역의 정태우(한명회, 왕과 비), 소혜왕후(인수대비) 역의 채시라(왕과 비, 인수대비), 정난정 역의 김영란(교동마님, 조선왕조 오백년의 풍란) 등이 있다...[4]
용의 눈물에서는 기록 및 야사의 내용을 반영하여 그가 주역이 되는 에피소드들도 나오며, 위에 언급된 왕십리와 경복궁에 관한 에피소드도 당연히 나온다. 작중 마지막 출연은 태조 이성계가 임종 직전 꾼 꿈에서 가장 먼저 나와 저승에서 이성계를 맞이해주는 우호적인 사람 중 한 명.
정도전에서는 무학대사(정도전) 문서 참고.
4. 같이보기
[1] 사극 용의 눈물에도 해당 일화가 등장한다.[2] 이런 일화로 보아 불교 이론 쪽은 그다지 깊게 알지 못했고, 도참사상 쪽에 통달한 스님(?)이었을 수도 있다. 선종 쪽에 가까운 수행을 했다면 불경에 대해선 자세히 모를 수도 있다. 지금 조계종에도 그런 스님들이 많다.[3] 달리 생각하면 실록을 쓴 유학자들의 불교 깎아내리기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무학대사의 입적 뒤의 기록만 봐도 "세상에서 고승이니 왕사니 받들더니만 죽을 때가 되어서는 보통 사람처럼 괴로워서 신음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화장하고 난 뒤에도 뭐 별거 없더만?"라는 식으로 다소 시니컬하게 기술되어 있을 정도다. #[4] 그 외에도 불멸의 이순신에서 권율, 가토 기요마사의 배우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를 다룬 징비록에서 같은 역할로 나와 국민 권율, 국민 가토라는 별명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