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용(독립운동가)
1919년 3.1 운동 당시 대구에서는 3월 8일 제1차 만세운동이 있은 후 학생들과 시민들의 항일저항의식은 더욱 높아져, 3월 9일 오후 3시경에는 계성학교 학생을 비롯한 약 150여명의 학생들이 재차 의거를 단행하기 위해 달성공원으로 모여들다가 일제 군경에 탐지되어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계성학교 학생으로 학교 선배이자 같은 마을 사람인 박태현(朴泰鉉)과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박남준(朴南俊)·김재소(金在炤) 등과 함께 3월 10일 태극기를 제작하여 계성학교 학생을 시위 대열에 참가하도록 독려하고 수백여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케 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그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개월형(미결구류 38일 합산)을 언도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