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양

 


'''역임 지위'''
<colbgcolor=#F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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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1대
박중양

제2대
오하라 신조

제2대
신응희

제3대
박중양

제4대
이오 도지로

제2대
요네다
진타로

제3대
박중양

제3대
김윤정




<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朴重陽 | Bak Jung-yang'''

'''이름'''
<colbgcolor=#FFF> 박중양 (朴重陽)
호추 시게요 (朴忠重陽)
야마모토 신 (山本信)
'''초명'''
박원근 (朴源根)
'''본관'''
밀양 박씨[1]
'''호'''
해악 (海岳)
일소 (一笑)
'''출생'''
1872년 5월 3일
조선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사망'''
1959년 4월 23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침산1동 1652번지
'''사망 원인'''
노환, 폐질환, 과로 등의 합병증으로 인한 병사
'''직업'''
관료
'''소속'''
조선 총독부 중추원
'''최종 국적'''
[image] 대한민국
'''주요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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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상공부 주사
군부 기사
경상북도 관찰사
평안남도 관찰사
평안북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
충청남도 관찰사
충청남도 도장관
황해도 도지사
충청북도 도지사
자제단 단장
중추원 참의
조선총독부
시국 대책 조사 위원회
조선인 위원
중추원 부의장

1. 개요
2. 생애
2.1. 초기 활동
2.2. 유학 생활과 귀국
2.3. 관료 생활
2.4. 국권 침탈 이후
2.6. 해방 이후
3. 저서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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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는 충성할 필요가 없다.'''

박중양, 경술국치 직후

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조선 말의 관료이자 일제강점기의 조선 혐오형, 신념형 친일반민족행위자 정치인이다.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출생하였다. 구한말에 경상북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관찰사를 지냈고, 일제강점기 때는 충청남도 도장관, 황해도 도지사, 충청북도 도지사 등을 지냈으며 중추원 참의,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다. 일본식 이름은 호추 시게요(朴忠重陽), 첫 이름은 박원근(朴源根), 는 해악( 海岳), 일소(一笑)이다.
박중양은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인격자로 칭송하고,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는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발언으로 화제가 된 인물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기회주의적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는 다른 점이 바로 '''신념 있는 친일파'''였다는 것이다. 조선인이었으면서도 조선인의 민족성을 대단히 혐오하였다. 박중양이 이런 극단적인 자국혐오형 친일파가 된 결정적 이유는 갑신정변 이후,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무참히 고문하고 살해하는 조선에 충격을 받아 절망하고 증오심을 품었기 때문이다.[2]
박중양이 일제강점기에 관료 시절에 뇌물 한푼 받지 않았다는 점,[3] 광복 이후 민족주의자들의 협박에도 떳떳하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4]을 보면 기회주의적 친일파들과는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윤치호, 이규완과 같이 주권을 넘기고 일본에게서 작위와 돈을 받은 권력추구형 친일파들과도 다른 인물이 바로 박중양이다.
박정양과는 다른 인물이니 주의하자.

2. 생애



2.1. 초기 활동


박중양은 몰락한 향리 가문 출신으로[5] 가계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반남 박씨라는 설과 밀양 박씨라는 설이 있다.[6] 아버지 박정호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에서 남의 집 마름 노릇을 했다고 한다.[7] 할아버지 박기숙 등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계에 대해 정리한 블로그 글이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은 참고하기 바란다. 분량이 매우 방대하다.#
동생 박수양, 박계양 등이 있었는데, 박수양이 30대 젊은 나이에 서울을 방문했다가 적리병에 걸려서 갑자기 사망한다. 원래 선산이 양주군에 있었는데 양주군 아미타불고개 근처에 묻혔다.[8]
원래 박중양의 조상들이 살던 곳은 대구인데, 후일 대구에 정착한 이유는 일본에 상권을 넘겨주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있다.[9] 실제로 후술할 대구 읍성이 철거된 이후 일본인들은 대거 성내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2.2. 유학 생활과 귀국


청년 무렵에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897년에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1900년에 도쿄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 제도 연구생으로 경찰 제도와 감옥 제도를 연구 실습하였다. 이때부터 대한제국에서 파견한 밀정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1903년 도쿄부기학교에서 은행 업무를 배웠는데, 당시에는 '야마모토 신(山本信)'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1904년 졸업 후 귀국했다.

2.3. 관료 생활


귀국 직후 대한제국 관리서 주사가 됐으나 사직하고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 고등 통역관으로 참전해 인천, 진남포, 용암포, 안동현 등지에 종군하였다. 그해 11월 돌아와서 농상공부 주사가 됐다.
1905년에 진주 판관을 거쳐 농상공부 주사가 되었으나 대구에 1년간 거처하였다. 1년 후 군부기사가 되고 그해 군부 파견원으로 의친왕일본을 방문할 때 통역관으로 의친왕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그뒤 대구 판관으로 부임했다가 바로 대구 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로 승진했다.
이때 대구 읍성 철거를 주도했다.# 당시 대구의 상권은 성 안은 조선 상인들이, 성 밖은 일본인들이 장악했는데, 일본 상인들은 대구 읍성 안까지 진출하길 원했다. 일본 상인들의 요구가 가시화되자 박중양은 대구 읍성을 헐어버렸다. 읍성은 도시의 경계를 구분 짓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해당 지방을 방어하는 국가시설이다. 국방시설을 맘대로 철거한 시점에서 박중양은 이미 대한제국의 안위와 백성들의 민생을 외적들에게 열어준 것이었다. 당연히 조정에서도 이를 문제 삼았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 덕분에 책임을 면했다. 박중양의 후반생 은거지가 된 대구 침산동의 침산(砧山)[10] 한 덩어리 전체도, 이때 땅 투기로 거부가 된 일본인들이 주선하여 선물한 '사은품'의 성격이 짙다는 소문이 있다.[11] 대구읍성 철거 당시 박중양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두 아들 박문웅과 박무웅을 도피시킬 준비를 미리 해놓았다.
1907년에는 평안북도 관찰사와 평안남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를 거쳐 다시 경상북도 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돌아왔고, 대구읍성 철거 때와 전라남도 재직 시의 면세 등의 수완으로 이임 때는 금시계를 선물로 받기까지 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직전에 충청남도 관찰사가 됐다. 한일병합이 되었으나 슬퍼하지 않고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하며 공직생활을 이어나갔다.

2.4. 국권 침탈 이후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충청남도 도장관을 거쳤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자제단 본부를 조직, 발기하여 단장을 맡고, 대구 자제단과 경성 자제단을 이끌었다.[12] 전국에서는 3.1 만세 운동 해산 권고 운동, 만세 반대 운동과 시위대 해산, 진압 운동을 벌였다. 1921년에는 황해도 도지사가 되었다가 1923년 충청북도 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24년에는 속리산에 갔다가 길이 비포장 도로라서 보은군청 토목 기사를 시켜서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길을 닦았다. 농번기에 농민을 동원하니 원망이 자자하였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획을 밀어붙여 1주일가량 걸려 비포장 2차선 도로를 설치했다.[13] 농번기 강제 동원에 일당도 주지 않자 보은군민들은 화가 나서 보은군청 공무원과 토목기수를 단체로 밟아버리며 집단 난타 사건을 일으켰다. 1925년 속리산에 갔다가 '''여승을 성폭행, 변사하게 한 일[14]로 사직'''하고 대기 발령 조치되었다가 1925년 사퇴했다. 1927년 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가 되었다.
1928년 다시 황해도 도지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중추원 참의가 되어 1939년까지 재직했다. 1936년부터는 칙임관대우 참의가 되었다. 박중양은 조선 총독부에 여러 번 조선인의 참정권 허용론을 건의하였다. 물론 이는 조선을 명백한 일본의 통치 하에 둔 상태에서 참정권을 획득하자는 기존 친일파들의 자치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철저한 친일 논리에 기반한 건의였다.
1938년에 조선총독부가 제2의 중추원으로서 시국대책조사위원회를 설치할 때 위원이 총 97명이었는데, 그중 조선인은 11명이었다. 이때 박중양은 박영철(朴榮喆), 김연수 등과 함께 시국대책조사위원회의 조선인 위원으로 위촉되어 총독의 자문 사항을 심의했다.

2.5. 태평양 전쟁 무렵


1941년에는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그해 10월 22일 부민관에서 출범한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1943년 1월에는 국민정신총력연맹의 참여를 맡아 태평양 전쟁 학병 출전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 지방을 담당하기도 했고, 일본 육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일본군을 위문하고자 자비를 들여 싱가포르를 방문하기까지 했다.
1942년 조선인 몫의 일본 귀족원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나[15], 처음엔 웬일인지 고사했다.[16]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45년 4월 3일에 박상준(朴相駿) 등 6명과 함께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해방 후 1945년 9월 미군정이 주둔하자 귀족원 의원과 중추원 부의장에서 파면되었다.
벼슬이 높아지고 중년 나이가 되자 박중양은 개화장(開化杖)[17]이라는 지팡이를 애용하며 뽐내고 다녀, 사람들이 비꼬는 뜻으로 붙인 별명이 '박짝때기(박작대기)'였다.[18] 뒤따르는 하인 한 사람을 대동하고, ‘朴’이란 큰 글자가 쓰인 전용 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관가를 누비던 박짝때기였다. 직접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가끔씩 고급 음식점에 출입하기도 했다. 박중양은 지배층 일본인에게도 큰소리 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조선인이었다. 어지간히 지위가 높다는 일본인조차 박중양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새로 온 도지사고등법원장, 교장, 판사 등이 부임 인사를 왔고, 그런 사람들에게 예사로 작대기를 겨누며 “기미 기타카”(君、来たか?/ 자네 왔는가) 했나 하면, 밉게 보인 순사쯤은 자기 집 사설 감방에 하루 이틀 가두어 두었다가 제복을 벗겨 내쫓기도 하는 등 특이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지위가 자신보다 낮은 일본인들에게 갑질도 하고 싫은 소리도 거침없이 했다.
1910년대에 노점상 할머니의 물건을 발로 차는 일본인 순사를 막대기로 두드려 패고, 순사 입에 땅에 떨어진 떡을 물리게 하여 시장바닥에 조리돌림을 시켜서 민심을 수습한 일화가 있다. 이를 두고 일본 제국의 일원이 된 조선인을 황국의 순사가 괴롭힐 수 없다는 교묘한 친일 사상에 입각한 행동이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사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박중양은 일본인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여긴 사람이었고 백성들에게 횡포가 심해서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참고로 일제가 내선일체 사상을 본격적으로 주입하며 표면적으로 본국인과 조선인을 같이 동원하려 한 것은 1930년대 이후다.

2.6. 해방 이후


해방 이후 박중양은 당연히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려 규탄을 당했지만 오히려 무죄를 주장하였다. 미군정 장관 존 리드 하지, 아서 러치, 이승만을 찾아가서는" 나같은 놈이 진짜 친일파이니 나를 죽이면 된다." 하고 강변했다. '좁은 조선이 으로 갈려 있고 특히 이런 과도기에, 숨은 인재를 찾기도 어려운데, 왜 있는 인재를 없애려 하느냐? 그러니 친일파를 처단한다고 떠들기보다 그 사람들을 잘 이용해 주시오. 그 사람들을 두고 누구를 데리고 일을 하겠소. ... 나 같은 것은 친일파의 대표자이니 연령으로 봐도 그렇고 행적으로 봐도 그러니 어떠한 처단을 당하더라도 나는 달게 감수하겠다.'[19]는 것이다.
고위직으로 활동한 만큼 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은 당연하고, 이후 1949년 1월에 반민특위가 친일행위 혐의로 체포하였다. 반민특위 조사관의 진술에 의하면 박정양을 태운 자동차가 특위 정문[20] 앞에서 멈추었다. 6척 거구로 허리가 조금 구부러진 모습이었다. 박정양은 특위의 정문을 보더니 “あ、ここが昔の第一銀行だね、そう!そう!(아, 이곳이 옛날의 제일 은행이구나. 그래! 그래!)”고 한다.출처(하단)
민족을 위해서 어쩔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은 이광수, 최남선이나 질질 짜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빈 최린 등과도 다른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에 반민특위 조사관이나 방청객들 모두 의아해하다가 점점 공판에서 쏟아내는 항변에 아연실색했고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박중양은 모든 반응을 무시했다.
이를 두고 수사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광수, 최남선 등 다른 기회주의형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었으나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개과천선이고 반성이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21]
법정에서 조선총독부의 통치는 관대하였고 양반, 상놈 같은 신분 차별이나 지역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조선 총독부에 대한 반감은 일본인에 대한 맹목적인 편견의 결과이며, 이토 히로부미인격자라고 주장하여 주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이광수 등 대부분 친일파가 자신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는 식으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과는 대조적. 공판 기간 중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며칠 후 폐렴이 발생해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몇 개월간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를 해체한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가짜 애국자들이라고 조롱하고 이들을 비아냥대는 내용의 자료를 대량 인쇄, 배포했고 소주영 정신과에서 정신감정을 받았으며 성신 대학 부속 성모 병원에도 끌려갔다. 나중에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감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959년 4월 23일에 사망하였다.

3. 저서


  • 《박중양 일기》 : 일본 도쿄 유학 시절부터 반민특위에 검거되는 전날까지 썼고 반민특위에 압수되었다.
  • 《술회》 : 1949년부터 쓴 회고록 겸 시사 평론서이다.
  • 《박중양 선생 문서》 : 각종 편지 서신과 서한문을 엮은 것이다.

4. 기타


일본 유학 시절부터 반민특위에 체포되는 1949년 1월까지 계속 일기를 썼다 한다. 출처
1953년에는 한 일본인 고위 인사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 천황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일본이 미국, 영국 등 연합국에 패배하게 되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나 미국과의 전쟁을 일본 정객들의 오판이다. 그러나 자신의 충성심만은 변치 않았다.' 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에 체류한 대구 출신 사학자 강태원이 가쿠슈인(学習院) 대학 우방문고에서 이 편지를 발견했다.
술을 좋아해서 맥주를 60병 가까이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구에서 제작된 지역 뮤지컬 '기적소리'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생애가 그러했듯, 당연히 악역.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끊임없이 방해하려는
역할로 등장한다. 이에 독립운동 역할의 연기자들의 "뭐?! 하버드 로스쿠울~?!" 이라면서
박중양을 까내리는 대사는 어두운 뮤지컬에 짤막한 웃음을 준다.

[1] 양(陽)자가 이름 끝에 들어가니 반남 박씨로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 있지만, 박중양과 그의 형제들을 제외하면 일족 중 반남 박씨 항렬을 쓴 사람이 전혀 없으며, 그들 형제 이름조차도 개명한 이름이다. 밀양 박씨 규정공파 족보에 이 일족의 이름이 나오기에 일반적으로 밀양 박씨로 보는 편이다.[2] 아시아주의를 외쳤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흑화하여 탈아입구를 주장하게 된 계기도 김옥균 가족에 대한 연좌제였다.[3] 하지만 뇌물이고 뭐고 이미 매국에 대한 보상으로서 일제에 의해 대우와 보상을 충분히 받았을텐데, 거기에 뇌물까지 받는다면 오히려 너무한거 일지도.[4] 반면 이광수 같은 기회주의적인 친일파들은 반민특위에게 싹싹 빌었다고 한다. 반면 김원근 같은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협력했고, 자신의 일제강점기 시절 활동을 솔직하게 구술했다. 반면에 박중양은 끝까지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항변했다.[5] 이방, 호방 등 아전[6] 박중양이 대한제국에 제출한 자신의 이력서에 스스로 밀양 박씨라 기록했으니 이게 맞을 것이다. 현재도 밀양 박씨 규정공파 참판공파의 족보에 기재되었다.[7] 아버지 박정호의 벼슬은 박중양이 출세해서 추증된 '증직'이다.[8] 이 아미타불고개가 의정부시 자일동 자금동의 아미타불고개인지는 알 수 없다.[9] 출처[10] 일명 박짝때기산, 현 침산 공원[11] 출처[12] 3.1 운동 해산과 유언비어 척결, 시위자 귀가 설득 등을 하던 단체였다.[13] 출처[14]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여승성관계를 한 뒤 죽게 했다. 이 일로 동아일보는 한 달 가까이 박중양을 가루가 되도록 깠다.[15] 최유리,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 정책 연구》 (국학 자료원, 1997년) pp.235[16] 이미 1932년에 박영효는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17]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우산처럼 손잡이가 둥글게 굽은 지팡이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없다가 근대화 이후에 들어온 지팡이라고 '개화장'(개화 지팡이)이라고 불렸다.[18] 출처[19] 현암 조상원 추모문 집간행 위원회,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년) 381페이지[20] 현재 서울 KB 국민 은행 명동 본점 자리[21] 갑신정변 이후 목격한 조선의 현실에 절망하고 분노한 신념형 친일파였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근대 문명국가로 진입한 일본을 매우 동경했다. 물론 그 갑신정변이라는 사건을 맹목적으로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그 실패에 원한을 품는 것부터가 편협한 정치관을 드러내는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