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

 

1. 여말선초의 무장
2. 조선 중기의 문신


1. 여말선초의 무장


朴淳
? ~ 1402년(태종 2)
이성계위화도 회군 직전, 회군 승인을 받아오라며 우왕에게 보낸 고려 말 장수다. 조선 건국 후에는 상장군에 올랐다. 본관은 음성(陰城). 조선 태종에게 쫓겨난 신덕왕후의 친척 조사의가 동북면에서 난을 일으키자(조사의의 난) 이를 무마하고자 파견됐으나 피살됐다.
조사의의 난을 모티브로 한 함흥차사 전설에 등장하기도 한다. 아들 태종 이방원이 보내는 차사들을 오는 족족 죽여버리던 이성계도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박순을 죽이기가 꺼려져,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박순이 강을 건넜으면 더 이상 쫓지 말라고 명을 내렸는데, 박순은 마침 병에 걸려 강을 건너지 못했던 터라 그대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1]지만 실제로는 조사의에게 죽었고 이는 이성계의 함흥 도착 전이었다.
대중매체에서는 용의 눈물에서 등장, 배우는 반문섭. 여말선초 위화도 회군 때부터 함께 해왔으며, 이성계의 이야기로는 다른 장수들과 매한가지로 왜구와 여진 등을 격퇴하고 다닌 뛰어난 장수로 언급되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점에서부터 정치적 문제와 조선의 내부 개혁에 치중된 시점부터는 잘 등장하지 않다가, 이방원과 이성계의 대립이 극해져서 함흥차사의 문제가 발생할 때, 충의로 간 신하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자 충의와 조선의 충성 그리고 이성계의 동료로서 그에게 간다.
야사와 실록을 적절하게 섞은 만큼 함흥차사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관복을 벗고 소를 데리고 가서 다른 장수들을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고 동시에 친구이자 자신의 상관을 만나러 가고자라는 의미로 와서 이성계에게 다가가서 미물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은연히 드러나게 만들고 자식을 용서해주길 빌며 엎드려서 부탁했고, 이성계를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처음으로 살려서 돌려보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사의가 이를 반드시 죽여야한다고 주장하자,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쫓아가고, 박순이 강을 건넜다면, 살려주시고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죽이라'''는 말을 했다. 이성계는 조사의를 완전히 저지하지 못하였기에 이렇게 말했고, 그와 동시에 강까지 멀지 않으니 필히 건넜으리라 여겨 최대한 늦춰준 것이었지만, 야사와 마찬가지로 늦은 밤 일찍 출발했지만, 곽란으로 인해서 나루터 근처에서 쓰러졌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공이 다음날 아침까지 재워주고 미음까지 챙겨주며 그를 보내는 바람에 그는 그만 강을 건너지 못하고 만다.[2] 그리고 죽기 전에 태종에게 절을 한 이후 베이면서 사망하게 된다.[3]
이후 죽음은 장원심이라는 노승에 의해서 하륜에게 들어가게 되고 다른 이들 역시 다른 쪽으로 알게 된다. 이성계 역시 그에 대해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한탄하면서도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그의 죽음이 마냥 헛된 것이 아니었던지 조사의의 난이 벌어진 이후에도 이성계는 마음이 밝지 않고 한켠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움직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2. 조선 중기의 문신





[1]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2] 드라마 연출은 한층 더 안타까운게 사공과 느긋하게 걸어서 배의 한쪽에 발을 걸친 상태까지 도달했고, 강폭 역시 그렇게 넓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 그 걸친 발을 뒤에서 쫓아온 장수들이 멈춰라라고 하자 바로 '''발을 떼버린다.'''[3] 이에 사공이 엎드리면서 그의 시신 앞에서 우는데, 함흥차사라는 사실과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것에 대한 슬픔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