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편집한 조선 시대의 사서.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에는 가장 유명했던 역사서였다. 물론 정사가 아닌 야사집이지만 야사집치고는 자료 수집에 매우 공을 들이고 최대한 주관을 배제함으로써 공정성과 객관성에도 신경 쓴 사서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긍익이 사관으로 재직했던 사람은 아니라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계 역시 뚜렷하다.
제목의 뜻은 '연려실(이긍익의 호)이 쓴(기술) 책' 정도가 되겠다.
총 59권 42책이며, 부친 이광사[1] 의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42세부터 타계할 때까지 30년 동안에 걸쳐서 완성했다. 완성시기는 1806년이지만, 이긍익의 나이 42세 이전에 이미 어느 정도 집필했던 것 같다.
고종 대 이후에 어떤 사람이 보충한 듯한 속집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연려기요'라는 목차와 내용이 아주 다른 별집 이본이 있다.
2. 저자와 저술 시기 논란
이 책의 저자가 이긍익인지 아니면 그의 아버지 이광사인지 하는 것에 대한 견해가 나뉜다.
정약용이 유배 시절 아들 정학연에게 이도보(李道甫)의 연려실기술을 읽어보며 공부를 좀 하라 고 글을 남긴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도보는 이광사의 자이다. 또 홍한주(洪翰周)가 "원교(圓嶠)의 『연려실기술』은 기사본말체이다."라고 평한 글이 있는데 여기서 원교는 또한 이광사의 호이다.
그러나 의례에 경술(庚戌)년에 풍악산(楓岳山)에서 유람하며 소회를 밝힌 기록이 있는데, 이는 1790년에 해당하므로 이광사가 이미 죽은 뒤이다. 대체로는 이 부분을 더 정확한 것으로 여겨 인터넷 등지에선 이긍익이 저자로 많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언제 편찬되었는가도 논란거리인데, 저자 이긍익의 연보도 제대로 전해오지 않고 있고, 현재 전해지는 『연려실기술』은 필사본이 대부분인지라 특별히 정본이 없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다만 대략적인 시기는 예상해볼 수 있는데, 의례를 보면 이긍익은 정조 14년(1790년) 이전에 초고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긍익은 본문에 여백을 두어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는 대로 수시로 기입. 보충하는 방법을 취했다. 일단 초고를 완성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보충케 해 정본을 만들고자 희망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전사본 중에선 내용이 다른 것들도 있으며, 그나마 가장 정본에 가까운 것으로는 1911년 최남선이 주도한 광문회본과 1913년에 나온 조선고서간행회본이다.
3. 서술 방식
태조에서 현종에 이르기까지 283년간(1392년 ~ 1674년)을 각 왕대의 주요 사건을 기준으로 하여 여러 이야기를 써 놓았다.
서술 방식을 알아보자면 야사에서 개인의 기록을 발췌하여 기사로 배열하는 형식인 ‘야사통사(野史通史)’와 기사본말체, 광범위한 사료 수집을 통해 편찬했다. 기사본말체의 형식은 정치적 사건이나 정치사 서술에 유효한 방식이므로, 『연려실기술』은 당대의 정치사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과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이긍익은 기존의 기사본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역사서술에 본격적으로 적용했다. 그리하여 조선조의 정치, 사회, 문화, 예악, 행정, 법제 들을 보다 조리있고 다채롭게 이해하고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위해 그는 철저한 자료 수집을 강조, 최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려 하였다. 그가 인용한 문헌은 문집만 100여 종이고, 그 외에도 야사(野史), 정사(正史), 족보(族譜), 가승(家乘), 금석문(金石文), 일기(日記) 등 400여종에 달할 만큼 방대하였다. 이같이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뒤, 편찬자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여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가하려 했다. 즉 서술하되 지어내지 않으며(술이부작)[2] , 사실에 근거하여 기사를 수록하고(거실수록), 직서(直書)를 원칙으로 하며 전거(典據)를 명확히 제시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술이부작’이란 서술 형태는 객관성을 표방하면서 서술자의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조선 왕조 당대사를 서술할 때 주로 이용되었다. ‘거실수록’은 사실에 근거하여 기사를 수록한다는 뜻인데, 각 당파 간에 시비가 엇갈리는 사건을 서술할 때에는 각각 당파의 상반된 주장을 함께 실어놓고 있다. 즉, 역사를 공정하게 서술하면서 해당 사건의 시비를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판단에 맡긴 것이다. 직서는 수록 인물을 호나 자 등으로 부르는 것을 피하고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의 역사 인식은 어떤 인물의 선악을 판단하는 데 의의를 두지 않고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전거제시는 인용된 구절의 각 조목마다 출처를 붙여 기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에 대한 작가의 말.
그리고 그 예.각 조마다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혔으며, 말을 깎아 줄인 것은 비록 많았으나, 감히 내 의견을 붙여 논평하지는 않았으며 ‘서술은 하되 지어내지 않는다(술이부작)’는 공자의 뜻을 따랐다. 동서 당파가 나눠진 뒤로 이편 저편의 기록에 헐뜯은 것, 칭찬한 것이 서로 반대되어 있는데, 편찬하는 이들이 한편에만 치우친 이가 많았다. 나는 모두 사실 그대로 수록하여, 뒤에 독자들이 각기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기에 맡긴다.
- 연려실기술 의례
이렇듯 『연려실기술』의 서술 방식의 특징은 역사 편찬의 체계성과 공정성, 객관성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곧 저자의 역사 인식을 그대로 나타내 준다고 볼 수 있다.일찍이, 이두란(이지란)과 더불어 같이 사슴 1마리를 쫓았는데, 문득 넘어진 나무가 앞을 가로막았다. 사슴이 나무 밑으로 빠져 달아나니, 두란은 말을 채찍질하여 나무를 돌아갔는데, 태조는 몸만 뛰어 나무 위를 넘어서 나무 밑으로 나온 말을 도로 잡아타고 사슴을 따라가 쏘아 잡으니, 두란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공은 천재요. 인력으로 따를 수 없소” 하였다. (용비어천가)
- 연려실기술 제 1권 태조조 고사본말
4. 내용과 역사 인식
『연려실기술』은 총 59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집 33권, 별집 19권과 속집 7권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연려실기술 의례에서 찬술의 내력 및 찬술의 기준과 서술태도를 밝히고 있다. 의례는 모두 7조로 되어 있는데,여기엔 사관과 편찬 경위가 다시 설명되어 있다.
원집과 속집에는 왕실에 대한 기사, 당대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의 본말(시작과 끝),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인물을 싣고 있다. 왕 및 왕실에 대한 내용은 왕과 그의 가족 관계. 왕의 휘와 자, 생몰년원일, 세자 책봉 관계, 재임 기간 등을 서술하고 재위 기간 중에 있었던 왕의 개인적인 특기 사항을 적고 있다. 다음으로 당대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 즉 옥사, 붕당 관계, 반란, 정난, 사화, 대외 정벌, 왜변 등과 관련된 사건을 싣고 있다.
내용의 전개는 기사본말체를 적용, 사건의 발단, 전개, 결말의 순서로 기술하고 있다. 또 당시의 다른 사서에 비하여 인물을 중요시하고 이를 크게 취급하였는데, 그 때문인디지 각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수록해 놓았다. 각 임금 대에 활동하였던 인물을 묘정배향신(廟庭配享臣. 종묘에 배향된 신하), 상신(相臣. 3정승), 문형(文衡. 대제학), 명신(名臣. 이름난 신하), 훈신(勳臣. 공신), 유현(儒賢. 유학자), 유종(儒宗. 대 유학자), 유일(遺逸. 초야에 은거한 선비), 절신(節臣. 절개를 지킨 신하), 순난제신(殉難諸臣. 정난에 죽은 신하), 강도순절자(江都殉節者.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되자 순절한 사람들), 의병(義兵), 장수(將帥), 난신(亂臣) 등의 항목으로 분류하여 서술하고 있다. 즉 각 왕대별 정치적 사건과 이에 연관된 관리들의 정치 활동 위주로 서술되었다. 『연려실기술』이 편찬된 18C의 정조 연간은 탕평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기간이다. 이 무렵 조선 시대의 정치사를 다른 사서가 활발하게 편찬되었듯이 『연려실기술』도 이러한 관심의 산물로써 조선 시대 정치사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별집은 국조(國朝) • 사전(祀典. 제사 규범) • 사대(事大) • 관직(官職) • 정교(政敎) • 문예(文藝) • 천문(天文) • 지리(地理) • 변어(邊圉. 외교 • 국방) • 역대전고(歷代典故) 등 10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역대 문물 제도의 유래와 변천을 고사 형식으로 수록한 것이다. 별집은 문화, 통치제도 등을 다뤄야 하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원집이나 속집에서 각 왕별로 사건을 기술한 체제와는 달리 항목별로 나누어 통시대로 기술하는 체제를 취하였다. 이처럼 서술 체제를 달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루는 대상의 사간적 범위에서도 차이가 난다. 그는 별집에서는 신라 이후의 역사가 다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단군 조선에까지 미치고 있다. 원집의 역사가 조선 왕조에까지 국한시키고 있는 것과 다르다.
별집 중 역대전고는 전체가 삼국시대까지만의 국가에 대한 서술을 하였다. 이긍익은 조선의 문화가 이전의 문화로부터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설명하고자 이와 같이 서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문화는 조선 왕조의 것만 떼어서 서술해서는 완전한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전의 역사까지 서술했다는 것이다.
아래는 그에 대한 저자의 말.
그는 기존의 단군 – 기자 – 마한으로 이어지는 단편적인 고대사 인식 체계를 부인하고, 단군에서 기자 • 위만 • 예국 • 맥국 • 동옥저 • 한사군 • 삼한 • 신라 • 고구려 • 백제와 3국의 속국, 후백제 • 태봉(후고구려) • 발해로 이어지는 체계를 세웠다. 이는 기존의 역사 인식에 비해 보다 확대된 역사 인식이다. 또한 단군조선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단군의 개국년대나 존속연한, 국호, 단군의 무덤, 문화, 수도, 강역, 단군신화에 대해서도 상세한 고증을 가하였다. 발해에 대해서도 상세히 서술했으며,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하고 발해의 건국 주체를 비롯한 발해사의 여러 문제에 대해 고증에 힘쓰고 있고, 발해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수용하였다. 따라서 별집에서 보이는 역사 인식은 객관성에 입각하여 사실 자체를 민족 의식의 토대 위에서 서술되고 있는 사실 서술의 객관성 인식과 한국사의 인식이 통합되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국조의 예악(禮樂) • 행정(行政) • 법제(法制) 등 시대에 따라 덜고 보탠 것과 관직의 연혁 • 변방의 사고에 관하여서는 이 책이 편년체로 된 것이 아닌만큼, 그것들을 연월(年月)의 차례로 기재할 수도 없었고, 또 그렇다고 각 조(各朝)에 나누어 기재하자니 열람하여 찾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따로 그것만을 수록하여 전고별집(典故別集)이라 하였다. 거기에는 혹 신라 • 고려의 옛 제도나 풍속을 각 편의 첫머리에 대략 실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동방 역대의 인혁을 알아서 문질(文質) • 득실(得失)이 여하였던가를 상고하도록 하였다.
- 연려실기술 의례
5. 평가
현재는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어 버린 탓에 좀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지만 조선 시대에 이 정도의 자료를 개인이 수집하여 완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대단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야사라는 야사는 거의 다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긍익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아 승정원일기와 실록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섰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 완벽하게 실증적인 사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실제 정사와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그 때는 이미 죽은 인물이 나오는 장면도 있는 등 교차검증 없이 직접 인용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며, 조선 왕조 실록이 완벽히 번역되어 전산화된데다 승정원일기가 번역 중이기 때문에 학계에선 "실록과 승정원엔 기록되지 않은 이런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있더라~" 정도의 위치이다.
허나 이긍익 본인이 실사구시로 유명한 실학자 중의 한 사람이고, 그 또한 객관적으로 사실을 기술하려 노력했으므로 이를 단지 야사 모음집으로 절하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시각이다. 다만 개인이 아무리 실증적으로 한다 노력해도 중앙관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근대에는 국가 공식 기록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으로서 한계가 있다는 점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사학사'[3] 를 연구-하는 데에는 중요한 책 중 하나.
이 책의 업적(이자 가장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면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거의 모든 역사 컨텐츠를 책임졌다는 것이다. 분량이 비교적 적기에 번역이 실록보다 훨씬 빨리 끝난 점도 있지만, 일단 야사 중심이라 이야기로 풀어내기도 용이하다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육신과 생육신에 관련된 이야기들[4] , 유자광이 남이의 시를 미평국에서 미득국으로 고쳐 모함했는 내용이나 인종에게 문정왕후가 독이 든 떡을 먹여 죽였다는 얘기, 경신환국의 빌미가 되었다던 허적이 제멋대로 유악을 빼내어 쓴 이야기, 인조가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던져 죽였다는 얘기들 등등이다. 이야기중엔 너무 유명해져서 정사보다 연려실기술의 내용이 더 잘 알려져 있는 것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 자체가 사건 이후 백년 이상 지난 후에 기록된 일이고 더우기 왕실과 연관되는 일이라 잘못 입 놀리면 삼족이 멸하는데도 이어져 왔다는 것 자체가 생명력을 가진 이야기이니, 정사에서 뭐라고 했든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밖에도 사건의 인과 관계를 밝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정치사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기사본말체를 본격적으로 도입함에 따라 역사 편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6. 기타
-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전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상당수 사극은 대부분 연려실기술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왕조 500년이고, 다른 경우가 용의 눈물과 왕과 비. 맹꽁이 서당도 거의 연려실기술의 이야기에 다른 야사를 추가한 정도다. 연려실기술은 조선 시대 후기에 한 개인이 섬에서 쓴 작품이고, 신봉승이나 윤승운 같은 사람들도 당대에는 나름 고증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1993년 조선왕조실록이 우리말 번역되기 전까지는 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 한문 전문가에 불과했다. 물론 국한문혼용체가 일반적으로 쓰였던 만큼 한학에 대한 지식을 높게 평가한 시절이었기에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많았고, 실록에 실린 기사들은 당대에도 교과서나 전문서적의 참고자료로 쓰이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양이 너무 방대해서 역사학자나 한학자를 제외한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만한 책이 결코 아니었다.
- 분명 사료로 연구되지는 않는데 이걸 보는 조선사 연구자나 교수가 있다면 90%가 수업 시간에 얘기해 줄 여담을 찾는 것이라는 농담도 있다(...). 그렇다고 사료로서 가치가 완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닌데, 이긍익이 창작한 소설이 아니라 당대에 퍼져있던 야사를 모은 것이므로 어떠한 사건에 대해 (사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당대의 시선을 살펴보는 자료가 될 수 있다.
- 연려실기술도 국역이 완료되었는데, 권수도 상당하고 책 하나하나도 상당히 두껍다.[5] 좀 큰 도서관에는 다 배본되었다고 봐야겠지만 대학 도서관을 제외하면 대출불가도서로 분류된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 DB에서 번역본을 서비스 중이니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면 고전 번역원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되겠다. 아래 링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