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
[clearfix]
1. 개요
조민수가 흑대기(黑大旗)를 들고 영의서(永義署) 다리에서 최영에게 쫓기는데, 태조(太祖)가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선죽교를 거쳐 남산(男山)에 오르니, 그 먼지는 하늘을 뒤덮었으며, 그 북 치는 소리는 온 땅을 뒤흔들었다. 최영의 휘하 장수 안소(安沼)는 정예병을 거느리고 남산에 웅거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달아났으며, 형세가 다한 것을 본 최영은 화원으로 달려 돌아와 분노를 참지 못했다.
《고려사절요》
고려 말기인 1388년, 이성계가 주도하여 일으킨 쿠데타.
명나라와 철령위(鐵嶺衛) 문제를 놓고 분쟁을 벌이던 고려에서, 요동 정벌군을 이끌고 있던 이성계(李成桂), 조민수 등의 무인들은 국경 지대 압록강의 섬인 위화도까지 북상했다. 그러나 이내 그대로 군대를 돌려 회군(回軍)하고, 개경 인근에서 전투를 벌여 고려 중앙군과 최영을 패배시키고 조정을 장악했다. 고려 우왕 14년인 1388년 음력 5월 22일에 발생한 사건으로서, 무진년에 벌어졌기에 무진년의 회군이라고도 일컬어진다.[3] 또한 공민왕때 추진한 제1차 요동정벌에 이은 두번째 요동 침공 작전이라는 점에서 제2차 요동정벌이라고도 불린다.
왕명을 어기고, 군 총지휘자가, 독단으로 군을 움직인 것. 사실상 쿠데타이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의 시발점. 이후 회군의 수장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신진사대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여 직접 왕에 오르게 된다. 그야말로 '''고려판 주사위는 던져졌다'''[4] 내지 그때 한국사가 움직였다.
2. 배경
2.1. 고려의 혼란과 명나라의 대두
무신정권(武臣政權)의 대두와 몽골제국과의 대몽항쟁 이후 고려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특히 당시 고려 말기는 지속적인 외세의 침략과 권문세족들의 사치와 무능에 혼돈의 카오스였다. 여러 폐단이 쌓이고 있던 상황에서 공민왕은 개혁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벌였으나 본인이 살해당하면서 이는 실패로 끝났고,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 몽골의 잔당과 여진족(女眞)의 반란군 등이 사방에서 준동하는 대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혼란은 정도전, 남은 등 과격한 급진개혁파를 출현케 했으며,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서 황산대첩(荒山大捷) 등의 대규모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힘과 입지를 키운 이성계, 조민수 등의 신진 무장 세력을 탄생시켰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의 위세가 바닥까지 떨어지면서 결국 원(元) 제국이 멸망하였고, 이러한 시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살린 주원장은 파양호 대전(鄱陽湖大戰) 등에서 승리하여 명나라를 건국하고 서달(徐達), 상우춘(常遇春) 등의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북벌을 감행, 원나라 몽골 세력을 모조리 중국 북방으로 내쫓아 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런 급격한 원명 교체기의 대혼란은 당대 고려의 정치 상황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2.2.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적 접촉과 요동의 정세
명나라의 홍무제 주원장과 고려의 접촉은 고려 공민왕 무렵에 처음 시작되었다. 1368년 주원장은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라는 인물을 보내[5] 고려에 자신의 친서를 전달했는데, 다음 해 사신이 도착하자 공민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나가 융숭하게 대접했고 명나라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여 명 중심의 조공 책봉 관계에 편입되었다. 고려의 편입에 대해 당초의 홍무제는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건국 초기 북원(北元)을 주시하고 상대해야 했던 명나라의 홍무제에게, 고려의 외교적 가치는 상당한 편이었다. 고려와 명나라가 관계를 맺은지 불과 3년 뒤인 1372년만 해도, 북원의 코케테무르(擴廓帖木兒)가 서달의 수만 대군을 격파할 정도로 당시의 북원은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6] 비록 명나라의 강력한 군사적 압박으로 북원의 세력은 많이 무너져내리고 있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요동 등지에서는 나하추(納哈出) 등이 횡행하고 다니는 판이었다.
때문에 당시의 고려는 명과 북원의 이러한 대립 상황을 인지하고 양쪽을 외교적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7] 고려는 명나라의 조공책봉 관계에 편입되고 친명 정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북원의 세력과도 완전히 손을 끊지 않았기에 당시 주원장의 입장에서는 북원과 고려의 외교적 결합을 막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요양행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북원 세력은 원나라의 유익(劉益)이 명나라에 항복한 이후, 급속하게 요동의 나하추 세력을 중심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나하추의 세력은 사서에 "소속 10여만으로, 송화강 북쪽에 있다."[8] 고 일컫어질 정도였는데, 그 절정기에는 한때 20여만 가까이 되기도 하였다. 나하추는 이러한 세력을 이용해 명나라의 요동 진출을 막고 있었다.
이 나하추는 아직 세력이 절정에 오르기 전인 1362년 전 쌍성총관인 조소생(趙小生) 등의 회유로 고려를 침공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하추는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에게 연거푸 패배했다, 이성계의 이 승리는 원나라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고려의 동북면 영토를 원나라 침략의 위협에서 확고하게 탈출하게 만들고, 고려의 영토임을 각인시킨 승리라고 평가된다.[9]
이성계에게 패배한 이후 나하추는 이후 고려에 대한 공격 의사를 포기하고 고려와 평화 관계를 유지하며 오히려 긴밀한 연결을 취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하추의 세력은 북원의 본거지에 대해 주력하고 있던 명나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는데, 나하추는 1372년 11월 요동의 명군 전초 기지인 우가장(牛家庄)을 공격해 창고를 불태워 양식 10여만을 없애고 명군을 무려 5,000명이나 몰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우가장은 명나라 초기 요동 해운의 마지막 종착지로써 요동 최고의 군량 보급 창고가 있었던 장소이다. 따라서 나하추의 이 승리는 명나라의 요동 보급로를 차단하고, 요동에서 장기적 포석을 다지려는 명나라에게 치명적인 패배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지만 강남 전투의 패전으로 보아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실제로 명군이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니까 금방 항복하였다.
1372년 1월 서달이 당한 대패와 같은 해 11월에 일어난 우가장의 승리는 북원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이후에도 나하추는 1374년 11월의 요양(遼陽) 공격, 1375년 12월의 대규모 공세 등 지속적으로 명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명나라의 적절한 대처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나하추 쪽이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고 만다. 그러자 나하추는 고려와의 외교적 연대에 주목하였다.
2.3.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태도 변화
이 무렵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인 편이었으나, 공민왕 말기로 갈수록 점점 틈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우왕 시기에 정점을 찍었는데, 명나라 사신이었던 채빈(蔡斌)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1374년 공민왕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홍무제는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 당시 고려의 실력자였던 이인임(李仁任)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도록 했고, 그 주범인 김의(金義) 등은 북원으로 달아났다. 당시 이인임을 비롯한 고려 지도층의 인식은 다음의 언급을 통해 나타난다.
《고려사》 이인임 전}}}자고로 나라의 임금이 시해를 당하면 재상 자리에 있는 사람이 먼저 그 죄를 받는 법입니다. 황제가 선왕의 변고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다면 공이 필시 모면하지 못할 터이니, 원나라와 화친해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비교적 친명 정책을 표방하던 공민왕의 시해, 명나라 사신 살해 등은 홍무제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했고, 이후 명나라는 고려에 대하여 강경 정책으로 나서게 된다. 명나라는 고려의 재정에 직접적인 부담이 될 정도로 막대한 조공[10] 을 요구하며 외교적 압박을 가했는데, 일반적으로 조공의 수량은 호부(戶部)에서 요구하면 예부(禮部)가 제시를 하는 것이지만, 이 당시 고려에 대한 조공 수량의 책정은 홍무제가 예부에 명령하여 일방적으로 책정한 것으로서 당시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매우 많은 수치였다.
그런데 막상 홍무제의 우려대로 북원과 고려의 관계가 가까워지자(혹은 가까워지는 듯 보이자) 상황은 또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1375년의 군사적 시도가 실패한 이후 나하추는 고려와의 연합 작전을 통한 전세 회복을 꿈꾸며 지속적으로 고려와 연락을 시도했다. 당시 몽골의 북원, 요동의 나하추, 한반도의 고려가 서로 가진 사신 왕래는 다음과 같다.
표에서 확인 가능하듯 1375년을 전후로 하여 북원 - 나하추 - 고려 간 사신 왕래는 상당히 빈번한 편이었다. 고려는 우왕의 책봉 문제 해결 등을 위해, 북원이나 나하추는 고려와의 군사적 연대 등을 위해 서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하추는 고려의 가장 당면한 문제였던 우왕의 책봉 문제 등을 해결해 주었으며, 이를 통한 대가로 고려의 군사 동원을 요청했다.
이렇게 되자 명나라는 강경 정책에서 다시 유화책을 쓰기 시작한다. 아직 북원의 세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고려와 몽골 세력의 연대는 치명적일 수 있었고, 만일 나하추나 북원을 공격하려 한다고 해도 고려가 방해가 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1377년 명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고려인 358명 등을 풀어주며 명나라는 고려에 손을 내밀었다. 이후에도 공물의 증액에 관한 대립은 있었으나, 1380년 8월 고려 조정의 요구가 일부 수용되어 이것도 부분적으로 해결이 되었다. 그렇게 공민왕 사후 틈이 벌어졌던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겨우 접점을 찾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역시 오래 가진 않았다. 몽골 세력이 괴멸(壞滅)한 것이다.
2.4. 나하추의 투항
《명사(明史)》 풍승전}}}홍무 20년, 풍승(馮勝)에게 명령하여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영국공(潁國公) 부우덕, 영창후(永昌侯) 남옥을 좌, 부우장군으로 삼아, 남웅후(南雄侯) 조용(趙庸) 등 보병과 기병 20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중략) '''나하추는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나리오의 말로 인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wiki style="text-align:right"
1387년, 나하추는 결국 명나라에 항복하고 만다. 1375년 이후 악화된 전황으로 몽골의 주요 장수들은 속속 명나라에 투항 했고, 고려와의 연계도 명나라의 외교적 노력 때문에 여의치 않자 나하추는 외로운 형세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무제는 풍승(馮勝)을 대장으로 삼아 무려 20만이라는 엄청난 대군을 동원하여 나하추의 세력지, 금산을 압박하였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이렇게 막대한 군사적 위협을 받자 나하추는 더이상 저항할 수 없었고, 여기에 더해 명군이 회유 작전 역시 병행하자 나하추는 결국 항복을 하고 만다. 이로 인하여 명나라는 요동 지역을 평정할 수 있었다.
나하추의 투항은 요동 지역 뿐만 아니라 전 몽골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북원의 천원제 테구스테무르(脫古思帖木兒) 정권은 재기 불가능 정도의 타격을 입었는데 이는 나하추가 투항함으로써 요동 지역 접근이 차단되었고, 그렇게 된 이상 북원 정권은 일개 초원의 유목민 정권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몽골 투항자는 굴비를 엮듯 줄줄 딸려오기 시작하여 나하추가 투항한 이후에는 20만 호, 천원제의 패배 이후에는 최대 60만 호에 달하였다.
골칫거리였던 나하추 세력이 붕괴되면서 명나라는 큰 자신감을 얻었고, 이제 더 이상 북원과 고려의 연대를 고려하며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데, 나하추의 항복으로부터 1년여 뒤, '''위화도 회군의 불과 얼마 전''' 명나라의 대규모 군대는 초원으로 진군하여 '''북원 정권을 완전히 괴멸시켜 버렸다.'''
《명사(明史)》 남옥전}}}홍무 21년, 3월 남옥에게 명하여 군대 15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게 하였다.
(중략) 창졸간에 그 앞에 이르자, 크게 놀라, 맞아 싸웠으나, 적을 패배시켰다.
{{{#!wiki style="text-align:right"
1388년 3월, 명나라의 15만 대군은 북원의 수도 카라코룸을 급습하여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남옥은 '''포로만 무려 8만명''' 가까이에 이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 시점에서 북원 정권은 완전히 멸망했다. 달아난 천원제는 예수데르(也速迭兒)라는 인물에게 살해되었는데, 예수데르는 과거 쿠빌라이 칸에게 패배한 아리크부카의 후예로써 긴 시간이 흘러 아리크부카의 후예가 쿠빌라이 칸의 후예에게 복수를 한 셈이 되었다. 이후 예수데르는 소위 타타르(Tatar)라고 불리우는 정권을 세워 나중에는 오이라트와 더불어 명나라의 골칫거리가 되지만, 당장은 남옥에게 당한 대패 때문에 본인들 수습도 어려운 판이었다.
여하간 나하추를 항복시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북원 정권을 괴멸 시키려 했을 정도니, 당시 명나라는 군사적, 외교적 행보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판이었다. 더 이상 고려가 다른 나라와 힘을 합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기에 다시 강경책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나하추의 투항 이후 명나라의 공격이 직접적으로 가능해졌다는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2.5.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는 1387년 12월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는 한편, 고려의 사신을 입국시키지 말도록 함으로써 고려 조정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
사실 이미 1387년 무렵부터 고려의 지도층은 명나라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요동에서 어떤 사람이 고려로 도망쳐 와, 명나라의 황제가 장차 처녀와 수재(秀才) 및 환관 각 1천 명과 소와 말 각 1천 마리를 요구할 것이라고 도당(都堂)에 제보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도당에서 우려하자, 최영은 '''"정 이런 식으로 한다면 군사를 일으켜서 명나라를 쳐야 한다."''' 고 주장했다. 즉 2차 요동 정벌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던 철령위 요구가 일어나기 전에도, 최영 등은 '''명나라를 칠 수도 있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피력하며 극도의 반명 기조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음 해인 1388년, 최영은 이성계의 협력을 바탕으로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을 제거하였고, 이 과정에서 우왕과 긴밀히 연결된 최영의 권력도 한층 강화되었다.[11] 따라서 공공연히 명나라 공격을 말했던 최영의 의도는 고려의 국가 정책에 긴밀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반명 기조가 한층 올라왔던 상황에서, 같은 해 2월에 앞서 명나라에 건너갔던 외교관 설장수(偰長壽)가 돌아와 명나라 황제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는 고려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고려사》 우왕 14년 #}}}고려에서 짐의 지시를 따르겠노라고 스스로 원하기에 짐은 해마다 말을 바치라고 지시했으나 바친 말들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공납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에 내가 바치지 말게 하고 다만 3년에 종마(種馬) 50필만을 바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또한 쓰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뒤에 사서 바친 5천 필도 모두 작고 약해져서 우리 말 한 필의 값으로 그런 말 두세 필을 넉넉히 살 만한 정도였다.
지금 또 복색을 개정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바친 것도 발굽이 제멋대로 생긴 데다 다리에 종기까지 났으니 기왕 바칠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따위를 바쳤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필시 사신이 오는 길에 서경(西京)에서 원래 말을 팔아버리고 나쁜 말로 바꾸어 온 것이 틀림없기에 장자온(張子溫)을 금의위(錦衣衛)에 여러 해 동안 수감하는 벌을 내린 것이다. 그대가 귀국하거든 이 사실을 정무를 맡고 있는 대신에게 알리도록 하라.
짐이 이미 통상(通商)을 허락했는데도 고려에서는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내 무역을 하려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태창(太倉)으로 보내 우리의 군사 태세와 전함 건조 여부를 정탐하게 했으며 또 우리 명나라 사람으로 그곳에 가서 정보를 누설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길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짓거리니 지금부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지며 또한 사신도 보내지 말라.
철령(鐵嶺) 이북 지역은 애당초 원나라에 속했으니 함께 요동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기타 개원로(開元路)[12]
·심양(瀋陽)[13] ·신주(信州)[14] 등지의 군민(軍民)은 다시 생업에 종사할 것을 허락한다.{{{#!wiki style="text-align:right"
이 당시 명나라의 요구 조건을 간략하게 살펴 보자면,
- ① 고려에서 보낸 말은 모두 약소하여 쓸모가 없다는 점
- ② 고려에서는 가만히 사람을 보내 명나라를 정탐하고 회유하였는데 이러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 ③ 철령 이북은 본래 원나라에 속한 땅이었으니, 이것을 모두 요동에 포함시켜 명나라의 땅으로 해야 한다는 점
철령위 지역은 함경도 원산만 부근으로 비정되는데,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명나라가 주장한 것은 고려에게 있어선 일전에 회복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을 회수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쌍성 총관부 지역이 고려의 영역으로 되었던 것은 벌써 23년이 지난 후였으며, 이는 명나라의 건국보다도 2년 더 앞선 시점이었다. 때문에 고려로서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왜 홍무제는 이 시점에서 철령위 설치, 즉 국가 간의 가장 민감한 영토에 대한 분쟁을 초래하였을까? 앞서 말한대로 홍무제는 북원과 고려간의 연결 가능성에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고, 나하추를 굴복시킨 후에는 고려가 다시는 몽골의 잔여 세력과 손을 잡지 못하게 하고, 고려가 여진 세력을 포섭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즉 홍무제의 핵심은 사실은 고려의 영토가 아니라, 북원 세력의 차단이라는 것이다.[15] 이를 뒷받침하듯 '''위화도 회군 이후로 명나라는 두번 다시 철령위에 대한 언급을 꺼내지 않는다.''' 즉 명나라가 철령위 이야기를 꺼낸 목적이 철령위 문제를 통해 일부러 고려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여기서 강경한 반응을 보이는 반명파와 온건한 반응을 보이는 친명파를 구분해내려고 했던 것인데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반명파가 제거됨으로서 굳이 고려를 더 자극을 할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홍무제가 고려의 땅이 탐나서 그런 요구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홍무제는 여러 차례 고려에 대한 군사 원정의 무익함에 대해서 말한 바가 있었다.[16] 따라서 고려의 영토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거나 혹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가장 당면한 문제인 북원 세력의 절멸보다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반도 땅에서 고려가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고심하고 있을 때, 몽골에서는 남옥이 이끄는 15만의 군대가 북원의 본거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목적이 고려의 영토이던 북원 세력에 대한 통제이던 간에 영토를 둘러싼 분쟁은 고려 조정에 있어 큰 화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3. 고려의 반응
3.1. 최영의 요동 공격 의지
외교관 설장수가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의 지시를 전달하자, 고려는 그 즉시 바쁘게 움직였다. 5도(道)의 성곽을 수리하게 하는 한편 원수(元帥)들을 서북 국경 지대로 보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면서 동시에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 등을 명나라로 파견하여 철령 이북이 고려의 영토임을 역사적인 근거에서 설명하도록 했다.
이와 동시에 최영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명나라의 정료위(定遼衛)를 칠 것인지, 아니면 화친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 이 당시 모든 재상들은 화친 쪽에 찬성했고, 이에 밀직사사(密直司使) 조림(趙琳)이 명나라 조정으로 출발했지만 '''요동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최영은 다시 한번 재상들을 불러 모아 철령 이북을 할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고, 재상들은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었다.
이미 명나라 공격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최영은 그 이후부터는 요동 공격을 주장하는 세력의 핵심이 되어, 인척 관계를 맺은 우왕과 더불어 요동 공격을 논의하였다. 우왕은 요동 공격에 대한 자문을 최영에게 구했고, 최영은 이에 대해 찬성했다. 즉 '''요동 공격이라는 정책의 핵심은 바로 최영이라는 이야기.'''
이 때문에 요동 공격을 반대하는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은 직접 최영의 집에 찾아가 요동 공격을 만류했지만, 이미 결심을 내린 최영은 이자송을 곤장으로 두들겨 패서 유배를 보낸 다음에 '''곧 죽여버렸다.''' 요동 공격에 대한 최영의 의지가 어느 정도 였는지를 볼 수 있는 부분.
이때 때마침 서북면 도안무사(都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명나라가 병사 1천여명을 이끌고 와서 철령위를 세우려고 한다." 는 보고를 올렸고, 동강(東江)에서 돌아오고 있던 우왕은 이 소식을 듣고 '''"내 말을 안 들으니까 이렇게 되었잖아!"''' 하고 울면서 통탄했다. 이후로 우왕은 명백하게 명나라를 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마침 명나라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命)을 파견하여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하였으나, 이미 명나라를 적으로 여기던 우왕은 병을 핑계로 아예 왕득명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우왕 대신 판삼사사(判三司事)였던 이색(李穡)이 왕득명을 만나 잘 달래었으나, 왕득명은 "철령위 요구는 황제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
심지어 최영은 여기서 한술 더 떠, 왕득명의 일로 고려에 왔던 '''명나라의 요동 병사 21명을 살해하고,''' 다섯 사람만 남겨 구금함으로써 명나라에 대한 적대 의지를 불태웠다. 고려 8도에서는 요동 정벌에 필요한 병사들이 징집되었고, 우왕은 황해도 부근으로 이동하며 사냥을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병력의 징발과 요동 공격에 대한 준비에 착수하고 있었다.
3.2. 이성계의 사불가론
사냥을 핑계로 이동하며 요동 공격 준비에 착수하던 우왕은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인 봉주(鳳州)에 도착했을 무렵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정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우왕은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최영하고만 단 둘이서 논의하곤 했었으나, 이번 요동 정벌은 예외적으로 처음으로 이성계에게도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워낙에 중대한 사안인만큼 이성계가 고려 말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임견미 등을 소탕하는데 최영과 더불어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우왕이 이성계에게도 동의를 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요양을 치는데 힘을 써주라는 우왕을 말을 들은 이성계는 여기서 우왕에게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에서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이다.
《고려사》 우왕 14년 4월 1일 #}}}"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역격(逆擊)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17]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18] 셋째,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입니다.[19] 넷째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20] "{{{#!wiki style="text-align:right"
그러나 우왕의 요동 정벌 의지를 전혀 꺾을 수 없어 보이자,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기정 사실로 여기는 대신 전략상의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즉 정 공격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시기는 좋지 않으니 좀 더 적절한 때를 노려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고려사》 우왕 14년 #}}}"전하께서 꼭 이 계책을 성취하려고 하신다면, 일단 서경에 머물러 계시다가 가을철에 군사 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때는 대군이 먹을 군량이 풍족할 것이니 사기가 높은 가운데 행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군사 행동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오니 비록 요동의 성 하나를 함락시키더라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군대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면 군사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져 참화를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즉 여름철에 무리하게 행군할 것이 아닌 좀 더 기다려서 가을철에 행군하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우왕은 이성계가 계속 질질 뺀다고 여겼는지 '''"너 이자송 꼴 못 봤냐?"'''(卿不見李子松耶?) 고 협박 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렇게 대꾸했다.
계속해서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우왕은 전혀 뜻을 꺾지 않았고, 결국 이성계는 소득없이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물러나면서 '''"이제 참화가 시작되었다."'''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이자송이 죽긴 했으나 후대에 훌륭한 인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살아 있긴 해도 이미 전략상 큰 실책을 범했으니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비록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이성계의 발언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사대주의 발언으로 오인받아 비판받기도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전쟁을 벌이기엔 명나라의 국력에 비해 고려의 국력이 약하니 선제 공격은 무모하다는 상식적인 말일 뿐이다. 이 발언은 전략, 전술적 입장에서 크게 틀리다고 볼 법한 부분은 없다. 당시 명나라는 신생국인데다가 고려가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되찾은 철령 이북 땅을 멋대로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고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당연히 이성계가 명을 '큰 나라' 라고 말한 것은 사대의 의미가 아니라 국력이 우리보다 더 크다는 것[21] 을 의미할 뿐, 사대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계가 명백하게 명에게 사대를 할 의사가 있었으면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바로 명나라에게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홍무제와 툭하면 어마무시한 키보드 배틀을 떴고[22] 이 때문에 명과의 관계는 조선 태종 때 명에서 영락제가 즉위하고 나서야 사대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불가론 이후에 이성계는 우왕의 요구에 동의했으며, 대신 공격의 시점을 가을로 물리자는 제안을 했다. 이것은 이성계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내놓은 타협책이었으며, 이 당시 말한 전략상의 이유도 큰 허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성계는 '''실제로 요동을 공격해서 잠시나마 점령했던''' 제1차 요동정벌의 주역 중 한사람으로서, 당시 고려에서 가장 경험 있는 인물의 주장이었다. '''기껏 성 하나를 점령한다고 해도, 군량이 떨어지고 더 진격하지 못하면 별 소득도 없다'''는 언급은 1차 요동 정벌 당시의 전황을 그대로 말한 사례로써, 충분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묵살됨에 따라 이성계는 자신이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략상의 이유가 아닌 이성계라는 인물의 세력으로 보아도, 요동 정벌이 현실화된다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사람이 이성계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조상 대대로 원나라에서 일하다가 고려에 투항한 이성계는 중앙 정치계에서 아웃사이더의 취급을 받아 왜구와 홍건적, 나하추와의 싸움에서 눈부신 무공을 세우고도 비교적 푸대접을 받았으며, 이성계 본인은 자신의 출신 성분을 희석시키기 위하여 몽골 세력과의 전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워 공훈을 올렸다. 친명 정책을 표방하는 유생들이 이성계와 접촉했던 이유도 입장상 철저한 반원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성계의 처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23] 그런 이성계에게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하라고 하는 것은 입장상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중앙 정치에서 세력이 없고, 비록 임견미 등을 척살하며 부각되긴 했더라도 본래 정계에 기반이 허약했던 이성계로서는 가별초(家別抄)로 유명한 자신의 최강 사병 세력과, 동북면에 있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24] 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 사병들이 소진되고, 혹시 명나라의 역습이 현실화된다면 가장 먼저 짓밟힐 곳도 이성계의 군사적 & 경제적 기반으로 당시 사실상 '이성계의 영지'나 다름없는 동북면이었으니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반대 주장이 순전히 이성계의 개인적인 이익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명나라가 요구한 철령위는 바로 이성계의 근거지인 동북면 지역이며 조상의 무덤까지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이 명나라에 넘어가면 이성계는 이런 상황에서도 역시 자신의 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나름대로 우왕의 요구에 동의하며 그 대신 내놓은 타협책마저도 '얻어 맞아 죽은 이자송' 의 이름까지 나오며 무시되자 이성계로서는 극도의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건 이성계의 의지도 무시되었을 만큼 당시 우왕과 최영은 요동 공격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며 일전에 처리한 임견미, 염흥방의 가산을 털어서 쓰고 전국의 중들 마저 징집하여 병사로 삼았을 정도였다. 이제 요동 공격은 피할 수 없는 일로 보였다.
3.3. 사불가론에 대한 최영의 반론
최영은 이성계의 4불가론에 맞서서 3가지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고 한다.
이 중, 대다수는 오늘날까지 요동 정벌의 가능성을 논할 때, 그리고 4불가론의 당위성을 논할 때 많이 사용되는 근거들이다. 책에 따라서는 3가지 혹은 4가지를 최영이 이성계에게 말했다고 나온다. 일단 국방일보나 이런 기사에서나 이런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걸 보면 아예 순수 창작은 아닌 듯하나, 고려사 데이터베이스에서 그 부분을 찾기 어렵다 아직 번역이 안 된 부분이 남아서 그런건지, 최영의 저 주장들이 후세에 덧붙여진 이야기인지 명확하게 확인이 필요하다.1. 명나라가 대국이긴 하지만 북원과의 전쟁으로 요동 방비는 허술하다.
1. 요동을 공격하면 가을에도 경작이 가능하기에 군량 확보가 가능하다.
1. 장마철이라는 조건은 명나라도 같으며, 명나라 군사들이 장마철에 싸우는걸 더 싫어한다.
+ 왜구는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최영의 논박은 이성계의 논리를 반박하기엔 부족해보인다. 1은 그럴 가능성도 있을 수도 있으니 넘어간다고 쳐도[25] 2의 경우는 1이 아닐 시에는 요동 점령이 오래 걸릴 수 있고[26] 3의 경우엔 조건 자체가 같다는 부분은 맞을지 몰라도 명나라 군대가 장마철에 싸우는걸 더 싫어한다는 근거는 미약하다.[27] 여기에 왜구가 정규군이 아니기에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기에 무리가 있다는건 당시 상황에서는 맞는 말이지만[28]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개경 근처까지 당도한 이들이었다. 여기에 그나마 현재에는 좀 기가 죽긴 했어도 아직도 왜구의 위협은 여전했다. 이게 진정 국면에 접어든게 세종대왕 때로 조선 건국후 30년 가까이 이 시점에서 보면 30년이 더 걸려서였으니 뭐... 물론 백성의 위해는 감안하지 않고 단지 나라의 존망에 위협이 되느냐로 따지면 단지 주의만 해야 할 수준이라는 항변도 가능하겠지만, '''요동공격에 고려 전군을 몰아넣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4. 요동 정벌은 가능하였나
- 역사의 IF 시나리오 - 달려라, 이성계! 머나먼 저 대륙으로!라는 글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 허준허튜브 개진상IF - 위화도 회군이 없었다면 만주벌판을 누구꺼?
사실 명사를 보면 당시 만주족 같은 이민족들도 자기들도 뭔가 해보겠다고 사방에서 반란 일으키고 난리라 명 말기와 비교해서 상황 자체는 딱히 훨씬 좋았다고 보기는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들에 원정까지 가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게 인물들의 개인적 능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들의 군사적 능력과 지식을 감안할 때 원이 당시 이들의 세력을 상당히 격파하는데 성공했었더라도 끝장을 내지 못했다면 한 고조나 모택동처럼 두고두고 후환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이 점은 고려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성계의 주장에 따르면 위화도 회군 이전의 군대의 사기도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좀 이겼다고 방심하고 있다가는 관구검처럼 빅엿을 먹일 수도 있는 장군들을 상대로 보급 문제도 좋지 않은데 사기마저 떨어지는 군대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사기가 낮은 군인들은 고대일록 등을 참고[30] 하면 진짜 말도 되지 않은 일들을 보여주는데 만약 타지에서의 전쟁이 자기들 생각보다 힘들거나 자신에게 별 이익도 없는데 따르기 싫다는 생각이라도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을 것이다.
당시 명군은 고려군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시 명군은 중원 천하 통일을 위해 원나라 군대, 같은 홍건적[31] , 그 외 이민족과 치고받으며 성장한 정예병 중의 정예병들이었다. 당장 남옥마저도 북원이 주둔한 후룬베이얼에 15만 병력으로 쳐들어가 대규모 전쟁을 벌이는 판국이었다. 정주민족의 군대이면서 초원지대로 쳐들어가 유목민족의 대규모 기병과 승부를 벌이던 게 당시의 명군이었다. 반면 고려군은 그런 경험 자체가 거의 없었다. 홍건적의 침입이니 왜구의 침입이니 하는 사건이 터지긴 했지만 명백히 북원과 명의 회전에 비하면 투입된 병력이 적었던 상황인데 이를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었을 뿐더러, 대규모 회전이나 화력전 등의 경험에서 고려군은 명군보다 압도적 열세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영혼까지 끌어모아 마련한 4만명의 공요군이 명나라를 침공했다가 요동 벌판에서 산화해버린다면 고려의 국방이 문제가 아니라 '''지구상에 고려인의 자취가 남을 수 있을지''' 자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32]
이성계의 주장에 대한 반론은 주로 이성계의 사불가론을 비판하는 것인데, 우선 앞서 말한 소국이 대국을 친다는 것이 가장 큰 비판을 받았다. 즉, 유교적인 논리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면 안된다는 게 얼마나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냐는 것. 이 언급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성공 여부 이전에 성공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알렉산더는 아나톨리아에서 벌어진 그라니쿠스 전투로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가볍게 정복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케메네스 완전 정복이라는 대업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쉬운 일임에도, 만약 이성계의 사불가론이 유교식 논리라면 이것마저 시도하지 말라는 의미가 돼버린다. 하지만 유교식 논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를 먼저 공격하면 위험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이 된다. 이성계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국인 원나라를 직접 공격한''' 장본인이었으니 그의 발언을 이런 유교적 사대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어렵다.
물론 이것 외에도 이성계가 마련한 타협안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성계의 말대로 가을에 진군 시 군량 수급에 문제가 없겠으나, 이후 찾아올 요동의 혹독한 겨울을 과연 버텼을까라는 것이 의문점. 물론, 그냥 경고성 공격으로 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겠지만.
일단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열세의 승리에는 다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주변 환경이 유리하게 돌아가거나, 지도자가 천재적인 지휘관이라던가, 이것도 아니면 휘하 병사의 정예 수준이 남다른 유리함 정도는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명나라처럼 통일 왕조인 당나라가 마음 먹고 대규모 원정을 진행했는데 수성도 아니고 야전에서 수차례 막힌 적이 있다. 상대는 당시 그렇게까지 강하다고 보긴 애매했던 토번이었다. 이때 토번이 전성기 당군을 막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휘관인 가르친링이 무지막지하게 뛰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르친링이 지휘하지 않는 토번군은 당군과 맞붙을 때마다 연전연패했다. 훗날 토번군은 당의 장안을 함락시키지만 이건 당이 내부적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상황이라... 여하튼 가르친링은 토번의 장수는 물론이고 동맹군인 돌궐마저 패배할 때 혼자서 당나라의 대군을 격파해 버렸다.(...) 토번의 주력군과 동맹군이 모두 패배한 직후에 소라한산 전투라는 걸출한 위업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가르친링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 덕분이라고 말해야 한다. 칭기즈 칸 테무진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본인도 뛰어난 마당에 휘하에 제베, 무칼리를 포함해 뛰어난 무장들과 아들들이 있고 뛰어난 마병들이며 칭기즈 칸의 명령하나면 불길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실제 금과의 전투에서 불길 속에도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고 한다) 10만 이상의 병력들 가진데다가 상대인 금, 서하, 호라즘 등이 전부 국력의 하향세이거나 실패한 국정으로 국력이 약화되거나 지휘관들의 능력이 빈약하거나 내분으로 인해 알아서 자동문 수준으로 무너졌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던 것이었고, 칭기즈 칸 사후에 벌어졌던 헝가리 원정은 1차 때도 매우 고전했지만 나중에 노가이가 11만 가량의 병력으로 침공했을 때는 중장기병을 앞세운 3만으로 가볍게 몽골군을 짓밟으며 승리했다.
위에서 대국침공 운운의 반박사례라고 든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례도 그야말로 '''천만다행으로 엄청나게 운이 좋게''' 전장에서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남아 승리했으니 망정이지 지도자로서 정말 하지 말아야 할 무모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녔다. 까놓고 그 거대한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한 명 죽고 나자 어떻게 됐는지만 봐도 알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소스 전투 이전까지 알렉산드로스의 아나톨리아 서부 정복은 그냥 맨땅에 헤딩한 게 아니라 그라니쿠스 전투에서의 한타싸움에 승리한 이후 이 지역의 친그리스계 폴리스들을 회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반대로 고려는 이미 1차 요동원정에서 이원경 같이 회유 가능한 고려계 유민들은 다 끌어모았고 2차 요동원정 시기가 되면 딱히 기대할만한 친고려 세력이랄 것도 없었다. 군사력 면에서도 마케도니아군은 헤타이로이로 대표되는 강력한 장창 중기병을 보유하여 군사력의 비대칭을 유발하는 데 성공했지만 고려는 오히려 명군의 기병대에 짓밟힐 걱정부터 해야 했다. 그게 아니면 알렉산드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군주가 최전방에 서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든가 해야겠지만...
이성계는 뛰어난 장군이지만 가르친 만큼 신화를 보인다고 장담못하고[33] , 군주의 무게감을 보이며 전군의 사기를 드높일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 비록 정예 사병집단을 거느렸다고 하나 그 규모는 많아봐야 3천 정도로 4만 공요군 내에서 채 1할도 차지하지 못한다. 게다가 당시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주원장 휘하의 장수들 역시 하나같이 뛰어난 사람들 뿐이었다. 사실 이성계가 뛰어나다 한들 이들 또한 모자란다고 보기는 힘들며,더욱이 주원장의 장수들은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다양한 전장에서 군공을 쌓았고, 대부분 수 만명 이상의 병력을 다뤄본 적이 있기 때문에 대규모 회전에서도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이성계는 좁디 좁은 고려의 장수였고, 평생에 거쳐 가장 많은 병력의 지휘권을 가지게 된 것이 바로 이 위화도 회군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홍건적의 난 당시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 간신히 20만을 채워봤지만, 당시 사령관은 정세운이었지 이성계가 아니었다.[34]
상대 측이 물량에서 압도적이고, 장군의 질적 부분마저 우위에 있는 부분이 있다. 이제 주변의 환경과 병사의 강함이 이점으로 작용해야 그나마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명나라는 팽창 정책을 진행 중인 상황이라고 하지만 이미 한참 전에 파양호 전투로 한족(홍건적)의 서열 정리를 끝내어 내환의 요소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 위화도 회군 시점에선 숙적 북원이 완전히 박살난 상태였다. 명나라는 주변 정리를 얼추 끝낸 뒤라 고려 쪽으로 군사력 집중이 가능했고, 더해서 강남과 화북의 어마어마한 생산력까지 함께 움켜쥐고 있었다.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조차 중국을 상대할 때 화북과 강남이 각기 다른 왕조(금과 송)로 나뉘는 행운이 뒤를 받쳐줬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35] 거인과 난쟁이의 싸움에서 거인이 총력을 다할 수 있는 순간, 난쟁이는 바로 도망치는 편이 낫다.
고려가 가진 병력의 질이 좋았던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고려군은 홍건적과 왜구조차 시원스레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 고려를 침공한 홍건적의 일파는 원나라에 눌려 한반도로 도주한 세력으로 사실상의 패잔병이었다. 왜구가 대규모 공세를 펼쳤고, 다량의 전함을 운용했다고 하지만 중세 일본 함선의 특성상 많아봐야 수만 명이며, 최대로 잡아도 2만 ~ 3만명 내외의 침공이다. 이것조차 제대로 못 막아내서 개경이 함락되고 남해안이 쑥대밭이 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이런 성적표를 받았다는 것은 전쟁, 특히 중세 시대 전쟁의 경우 일반적으로 방어자가 유리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려군의 전투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가 된다. 고려군은 앞서 예시로 든 가르친링의 토번군과 비교해도 상태가 더 안 좋았다는 것. 토번군의 경우 그저 당군이 더 강했을 뿐이지만 고려군은 이성계가 회군 직전에 아사자가 많아 진군하기 어려우니 회군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상태 자체가 좋지 않았다.
만약 북원을 치러 간 명나라의 15만 병력이 북원을 부순 후에 고려의 공격을 그냥 경고성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짜 침략 시도로 판단하여 고려로 전면 진공한다면 막는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36] 현지인들의 민심이 고려 쪽으로 확실히 돌아서려면 명군을 몇 차례는 격파해야 했을 테고, 5만에 불과한 고려군으로 두 배가 넘는 명군과 야전에서 정면 대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결국 이성계는 정면 충돌을 피할 공산이 큰데 명군이 요동 수복이 아닌 전격전으로 치중할 경우 고려로 들이닥칠 것이고, 요동과는 별개로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명군이 한반도에 주둔했을 가능성도 크다. 사실 당시 명나라는 몽골에 원정까지 가서 대도시(카라코룸, 상도 등)들을 잿더미로 만들고도 물자가 남아돌아 베트남과 티베트에 교전을 거는 한편 고려는 얼마 전까지 왜구가 하도 설쳐서 명의 정규군과 무장을 비교하면 농민군 수준인 홍건적에게도 중요 도시들이 함락될 정도로 국력이 떨어졌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성계도 바로 보급을 걱정할 정도로 물자가 넉넉하지 않았기도 했다. 더구나 몽골 세력은 적어도 군사력 면에서는 고려보다 약체로 단언하기 힘들며 외형적인 전력으로는 만주족이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할 때보다 강했던 적이 많다. 또 군사적 중요성을 가진 화기[37] 역시 이 때까지는 압도적으로 우수하다고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당시 명과 교전했던 국가들과 비교하여 병종에 있어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상대적인 비교를 하기 위해 무장의 질이나 병서를 살펴도 딱히 우월성이 보이지는 않는다.[38][39]
참고로 명과 교전한 몽골과 베트남 등은 패배했고 엄청난 피해[40] 를 입었으며 넘치는 보급으로 화포를 사용해 도시를 초토화시키던 당시 명군을 생각하면 고려, 조선도 이기든 지든 많은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 이성계 역시 명장이니 매우 잘 싸워서 이기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명을 공격한 대표적인 명장인 누르하치 역시 명군의 무장 상태들을 고려하여 명군이 약체화 되어가고 있을 때 움직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명장이라고 무슨 기적을 일으켜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누르하치는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좋은 관리가 부임하여 명군의 무장과 보급이 일시적으로 강화된 것 같으면 황제의 삽질로 해고될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명과 긴장 상태에 있었던 이성계와 이방원 역시 간간이 정탐을 해서 나온 결론이다. 물론 구체적인 방안으로 명과 긴장 상태가 높아지던 국가들에 명의 대부분 병력이 묶이는 순간을 노리면 어떻게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나 당시 교통과 통신 수준으로는 그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며 설사 잡을 수 있었어도 그 보고를 받았을 때는 상황이 이미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구체적으로 볼 때 명나라가 고려의 요동 공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대몽고, 여진 정책을 고려와 명 양국이 어떻게 수립하는지, 그 외에 명나라가 서방이나 남방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얼마나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고 여길지에 따라 성공률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군사적인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 국제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원, 베트남, 티베트 등과 적대하면서도 요동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군대를 보내기까지 한 마당에 명과의 충돌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말 고려가 요동을 공격해 점령한다면 명의 주적에 바로 고려가 포함될 것임은 자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팽창주의적 성향을 가진 명이 사방에 배치한 군사력을 고려에 모두 투사할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고려의 사정은 명의 예상보다도 좋지 못했다. 고려가 여요전쟁이나 윤관의 여진 정벌 때처럼 수십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이 되었더라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여말선초의 상막장을 겪은 고려가 동원할 수 있었던 군세는 5만 남짓. 명이 밑에 서술된 병력을 투입한다면, 고려가 비록 명의 군사 작전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단기간에 어떻게 하기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그러면 "장기적으로 가면 되지 않나?"라는 의문도 있을 수 있으나 우선 보급도 좋지 않고, 거기에 고려 내부에도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으며, 명이 팽창주의를 천명해 사방에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려 역시 얼마 전까지 피해를 입히고 있었던 일본이 어떻게 움직이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장기전으로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비록 일부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하며 일본도 많은 피해를 입은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지만 일본사를 참조하여 볼 때 꾸준히 인구와 국력을 쌓아 강성해진 일본의 저력은 이미 고려 말에 보통 사람들의 생각보다 대단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당시 고려, 조선 사람들도 최소한 군사적 문제에서 그 심각성을 알고 있었고 또 중국사나 일본사를 보면 일본의 세력 역시 상인들을 통한 정보망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주력군이 명군과 교전하느라 묶이는 신세가 된다면, 단순한 해적들이야 정리가 어느 정도 되어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고려를 약탈하기도 했던 지방 정규군들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들은 많은 사람들이 요동 정벌의 실현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원말명초 시기 명나라는 요남 지역에 정료도위(定遼都衛)를 설치하여 요동에 대한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한 숫자의 군사 세력이 요동에 주둔하게 되었다. 정료위의 명군은 위(衛)라는 군사적 단위에 의해 구성되었는데, 이 지역의 위는 최종적으로 25위에 달하였고 그 유명한 철령위 역시 이러한 25위 중에 하나다. 25위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명나라는 고려의 2차 요동 정벌, 곧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이전까지 13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명나라의 군사 단위에 있어 1위는 일반적으로 5,6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25위가 최종적으로 갖추어진 상황에서 명은 요동 지역에서 15만의 군사력과 최소 40만이 넘는 인적 자원을 요동에 배치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나하추 항복 직전 - 고려의 2차 요동 원정과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무렵에는 13위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는 명나라가 일단 6만 5천 이상의 병력을 요동 방면에 투입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 정도만 해도 고려의 공요군과 맞먹는 수치이다. 그래도 쪽수는 비슷하니 공요군이 어찌어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한 숨 돌린 공요군에게 달려들 것은 북원을 치러 갔던 남옥의 15만 대군이다. 물론 북원과의 전쟁에서 소모되었을 것이 자명하지만, 공요군 역시 요동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을 병력으로 이들을 상대해야 한다.
설령 이것도 저 멀리 후룬베이얼에서 달려 올 명군의 피로를 이용한[41] 각개 격파라든지 이성계 장군님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축지법을 쓰는 신묘한 전법을 썼다든지 해서 어찌저찌 이겼다고 가정하자.(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부터가 당시 고려군 지휘관들에게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통해 이성계가 잡아먹은 병력은 북원을 부족 연맹체로 만들어 버린 남옥의 15만 병력이다. 이런 강군이 박살난다는 것은 이성계가 이끄는 공요군이 '''북원군 이상의 위험한 군대'''라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 된다. 이러면 주원장이 적당히 물러날 리가 없으며 명나라 전체와의 전면전이 될 가능성이 너무 높다.
설령 '그래도 '경고성 공격'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것 역시 후세에 퍼진 흔한 생각이지만, 한반도와 북방(원 잔존 세력)을 이어주고 중국의 중심지인 화북으로 이어지는 요동의 위치적 중요성,[42][43] 대표적인 친원 국가로 알려지고 왕실에도 몽골 황실의 피가 흐르는 고려의 대외적 인상, 우왕 책봉 당시 보여준 원과 고려의 관계 등을 생각해 보면 북원이 막 몰락한 시점에서 벌어진 고려의 요동 공격을 주원장이 단순한 경고로 받아들일지는 심히 의문이라 할 수 있다. 고려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주원장이 요동 공격을 '경고성 공격'으로 치부하고 적당히 물러나 주는 것이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주원장이 앞서 말한 여러 상황 때문에 '고려가 원나라 세력의 구심점이 되려는 것 아닌가? 계승권을 주장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로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후자로 판단될 경우 고려의 기선제압을 위해 침공했을 가능성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여몽전쟁 급 까지는 안 될지 몰라도 병자호란 수준은 충분히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문제였으며, 모든 것이 주원장과 명나라 수뇌부의 판단에 걸렸는데, 거기에 걸기에는 고려라는 판돈이 너무 컸다.
5. 최영의 요동 공격 의지에 대한 이유와 목표
5.1. 친원파 구세력과 친명파 신세력의 대립
고려말 권문세족 집단은 원의 간섭기에 세력이 확장된 세력으로 공민왕의 숙청과 반원정책 이후로도 여전히 세력이 강성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중앙 정계의 기득권으로서 여전히 영향력이 살아있었고 정몽주, 정도전등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와 같은 친명 신흥세력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된 요동-만주의 복잡한 상황과 명의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코케테무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명군을 격파하며 버티는 북원의 저력은 고려 지배층으로 하여금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이인임을 비롯한 기존 세력은 북원과의 관계를 중시하였고 최영은 위에서의 명나라와의 마찰이나 성향과 친분 교류 상 이인임과 같이 친원 정책에 찬성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이성계는 한반도 동북지방 뿐 아니라 멀게는 간도-연해주 일대의 여진족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며 북원과 명과의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이성계의 기반의 존립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이 지역의 여진족 등을 통해 동북방 지역의 정세를 정탐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코케테무르가 죽으면 미래가 없는 북원이 불리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1388년은 남옥이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북원의 숨통을 끊는 원정을 하던 상황이었다. 고려의 요동정벌도 이러한 외교적 정치적 상황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더 진군하지 않고 머문 것은 기상 문제와 보급 문제도 있겠지만 남옥의 원정 결과를 확인하고 움직이기 위한 것도 가능성이 높다.
5.2. 최영의 권력 강화와 이성계 제거론?
앞서 보았듯 요동 공격에 있어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우왕과 최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우왕을 설득한 사람이 최영이었다. 즉 2차 요동 정벌은 최영의 의지로 이루어진 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영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을 원한 일에 대하여 묘한 시각이 있는데, 2차 요동 정벌은 기본적으로 '''최영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즉 평화를 통해 명나라와 철령위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는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던 친이성계 일파의 세력 강화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는 최영에게 있어 좋을 것이 없는 일이었으며[44] 최영은 요동 공격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45] 심지어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2차 요동 공격 자체가 최영 중심의 정국 구축에 최대 걸림돌인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절호의 수단''' 이라는 시각도 있다.[46]
실제로 앞서 보았듯 2차 요동 공격이 현실화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사람은 이성계다. 또한 조민수의 휘하의 좌군은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계림, 안동이라는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군사를 모집했던 반면, 이성계 휘하의 우군은 안주도, 동북면, 강원도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면 이는 비교적 적은 지역에서 군사를 많이 징발한 것으로, 이 군대가 몰살 당한다면 이성계의 막강한 사병은 합법적으로 끝장나게 된다.
그러나 '''최영이 이성계를 죽이려고 명나라를 쳤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너무 강한 주장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우선 고려사절요나 조선왕조실록에서 묘사되는 최영과 이성계는 오히려 친분이 돈독한 편이다. 최영이 비록 중간 중간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해도 태조에게 대항한 적수로 규정된 조선 시대에도 이러한 기록이 작성되었다면 실제로 이성계와 최영은 꽤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런 우정도 권력 앞에서 사라져 실제로 최영이 이성계를 죽이려고 했다손 쳐도 뒤에 살펴보게 되듯이 본래 '''요동 원정군을 지휘할 장수는 최영'''이었다. 따라서 순전히 이성계를 죽이려고 요동 공격을 시도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는 어렵긴 하다.[47] 그리고 우군의 징집 대상이었던 북방 지역은 고려 ~ 조선기 내내 정예병을 배출하는 산실이었고, 반면 좌군의 징집 대상이었던 지금의 경기와 삼남 지방은 농업 생산과 세수의 핵심 지역이었다. 따라서 남부 지방의 생산력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징집을 줄이고 정예병이 많이 배출되는 북방 지역의 징집을 상대적으로 늘린 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큰 문제가 없는 정책이었다.[48]
그러나 이성계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원정을 벌였다는 것은 좀 무리수라고 해도 최영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이용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요동 원정 과정에서 우왕은 오직 최영 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으며, 최영 역시 수차례 우왕과 담판식으로 요동 원정을 논의하며 정국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요동 원정에 반대하던 이자송이 처참하게 죽었던 것처럼 이 과정에서 최영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만약 요동 정벌군이 요동 공격에 성공했다면, 이성계는 백성들로부터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건 물론이거니와 요동방어를 위해 요동을 지배할테니 최영의 권력을 강화한다는 전제조건 자체가 틀어진다.[49] 반대로 요동 정벌군이 실패한다면 이성계는 제거할수 있겠지만, 명나라와 강화를 해야할텐데 명나라는 강화조건으로 전쟁을 주도한 최영의 신변을 넘길 것을 요구하거나 더 나아가 우왕의 퇴위를 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마디로 이성계가 전쟁에서 지면 권력 강화 이전에 최영 본인의 목숨조차 위험해진다. 요동 정벌을 계획할때의 최영은 우왕의 장인어른이며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신하였는데 이성계 한 명을 제거하기 위해 이렇게 위험한 도박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5.3. 찍고 돌아오자
주로 2차 요동 원정의 전략적 성공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가 나올때 종종 나오는 주장으로 당시 최영의 목적은 불가능해 보이는 요동의 영구적인 점령이 아닌,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시위로써 한번 찔러보고 온다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명나라의 위세가 점점 강력해지고 있었기에 요동의 점령은 불가능하지만 찍고 돌아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이를 통해 철령위 요구를 하는 명나라에 군사적 경고를 한다는 이야기다.
실제 1차 요동원정의 사례가 이와 비슷하기 때문에, 단순 시도도 아닌 이미 한번 성공했고 부족과 보완점까지 배워왔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군사 전략상으로 본다면 이는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야기다. 혹은 2차 요동 정벌이 영구적인 점령을 목적으로 했다고 해도, 전황을 고려해본다면 이와 같이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어찌되었건 상황을 '전투의 승패' 로만 따진다면 이는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딱히 이러한 전략적 구상에 대한 언급이 사서에는 없다.
5.4. 그냥 공격
딱히 별다른 의도 없이,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분개한 최영과 우왕 등이 순전히 이에 대한 반격으로 군사적 원정을 시도하고, 딱히 기습적으로 공격하고 돌아온다는 식의 구상도 없이[50] 요동의 점령을 원했다는 아주 일반적인 시각. 딱히 무슨 말이 나올것도 없을 정도로 아주 스탠다드한 시각이다.[51]
6. 2차 요동 원정군의 진군
이유가 무엇이였던간에 어찌어찌 마침내 요동 원정군은 준비가 되었다. 고려 전역에서 준비된 이 군대의 병력은 38,830명이었으며, 이 군대를 지원하는 병력이 11,634명으로 도합 5만여 가량이 되어 출정할 무렵 호왈 10여만이라고 일컫었다. 여기에 동원된 말은 총 21,682필이었다.
군대의 총사령관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승진된 최영이었으며,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는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는 이성계였다. 당시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이 부대는 서경(평양)에서 출발하여 진군하게 되었는데, 군대가 준비되기까지 우왕 역시 서경에서 징발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마침내 군대가 출발할 무렵이 되자 최영은 우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막상 의지하던 최영이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우왕은 불안에 빠져 최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우왕은 "그대가 떠나면 어떻게 정치를 의논하는가?" 라며 최영을 만류했고, 정 가겠다면 '''자신 역시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는 사이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는데, 최영은 자신은 서경에 남아서 일선의 군대를 감독할 터이니, 우왕은 개경으로 내려가라고 다시 한번 설득했다. 하지만 우왕은 이런 이유를 대며 거절하였다."이제 대군(大軍)이 장도에 올라 행군에만 한 달을 끌게 된다면 군사 작전이 성공할 수 없으니 제가 가서 행군을 독려하겠습니다."
공민왕이 시해될 당시 최영은 목호의 난(牧胡─亂)을 진압하기 위하여 떠나 있었는데, 우왕은 그 이야기를 하며 최영을 만류한 것이다. 사실상 고려의 전 군사력을 북쪽에 투입한 상태에서 최영의 보호가 없다면 우왕은 위험했고, 또 원정군을 장악한듯 보이는 최영을 완전히 풀어두기에도 우왕은 불안했을 터이니 최영과 바싹 붙어 있는게 가장 안전해 보였던 일이었을 것이다."선왕께서 시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하루라도 그대와 함께 있지 않겠는가?"
이 무렵 이성(泥城)[52] 에서 온 어떤 정체불명의 사람은 자신이 근래에 요동을 다녀왔다면서, 요동의 병사들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다 나갔다는 말을 전하자 최영은 기뻐했다. 또 최영은 원나라의 잔당들과 연락하여 서로 협공하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사실 그 무렵 원나라 세력은 남옥의 승리 이후 거의 패망하여 사막으로 쫓겨나 근근히 버티고 있던 참이었다.
7. 명나라의 반응
《고려사》 우왕 14년 6월 #}}}당시 명나라에서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고려 정벌에 나서기 위해 황제가 친히 종묘에서 점을 치려고 사흘 동안 재계(齋戒)를 하다가 회군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재계를 중지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2차 요동 공격이 진행될 무렵 명나라의 반응에 대해서는, 고려사에서 홍무제가 '''고려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나 황제가 전쟁을 위해서 종묘에서 재계를 한다면 꽤 큰일임에도 불구하고 명사 태조 본기 등에서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이는 조선시대 사가들이 회군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집어넣은 서술로 보인다.
그러나 명나라는 1388년 4월 도착한 고려 사신이 철령위에 대한 주장을 하자 '''거짓임이 분명하다'''고 우기는 한편, 8월 경 위화도 회군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자 무슨 술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미심쩍은 눈으로 동정을 살피는데 주력하였다. 고려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하다.
8. 시작되는 왜구의 공세
《고려사》 우왕 14년 5월#}}}전라도 안렴사(按廉使) 유량(柳亮)이 보고하길, 왜적이 배 80여 척을 진포(鎭浦)에 정박시켜, 인근 고을들을 노략질하고 있다 하였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사》 정지전}}}왜구가 세 도(道)를 침략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州)·군(郡)의 사람들을 죽이고 불태워도 장수와 수령 가운데 막아낼 자가 없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의 군사력이 서경에 집중되고 북으로 진군하는 사이, 이성계가 제기했던 문제 중 하나였던 왜구의 출몰은 현실이 되었다. 우왕 시기 수도 개경을 수차례 위협하고 수천, 수만의 군대로 고려 전역을 초토화 시키던 왜구의 대공세는 진포해전, 황산대첩의 대승리와 관음포 해전에서 정지(鄭地)가 거둔 승리로 점점 약해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 세력은 건재하였다.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행패가 덜하였던 것은 왜구가 자연히 감소했다기보다 고려군이 점점 왜구에 대응해 나갔기 때문이므로, 군대의 공백은 다시 왜구에게 절호의 기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우왕 또한 뻔히 예상되는 '북쪽으로 신경을 쏟는 사이 벌어질 왜구의 침공' 을 모르지는 않았다. 우왕은 군대를 북쪽으로 파견하는 와중에서도 왜구에 대한 대비책을 꽤 세워놓은 편이었다. 경기도의 군사를 추려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서 왜구를 막게 하는 한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이광보(李光甫)로 하여금 왜구에 대비토록 했다. 또한 요동 정벌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노예건 뭐건 모조리 징발하여 왜구와의 싸움을 막기 위해 내보냈다. 당시 우왕은 왜구에 대해 지속적으로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요동 원정 이후에 초래될 군사적 공백을 막으려고 한다고 해도, 요동 원정군에 전력이 투입되는 한 왜구의 준동을 막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우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온 왜구는 고려 각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1388년 4월 21일, 왜구는 초도(椒島)[53] 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당시 수도 개경은 군사력은 공백 상태이고 왕마저 서경에 있었기에 봉화가 계속해서 울리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어 5월 13일에는 80척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왜구가 진포에 상륙하여 주변 지역을 초토화 했다. 이에 우왕은 왜구를 막기 위하여 다섯명의 원수를 파견하는 한편, 전라도와 양광도에서 남자란 남자는 모조리 징발하여 왜구를 막으려 했으나 왜구는 양광도의 40여개 군을 무인지대를 밞듯 활보하였다. 양광도 안렴사(按廉使) 전리(田理)는 '''"적을 막으려고 하지만 병력이 취약해 방법이 없다."'''는 절망적인 보고를 올렸다.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가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이성계나 최영 외에 왜구에게 명성이 혁혁한 장수는 관음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정지였는데, 그 정지조차 요동 공격에 동원되었기에 왜구를 막을 장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왕은 분명히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지만, 요동 원정이 지속되는 한 이는 모두 미봉책에 불과했다.[54] 이러한 왜구들은 회군 이후, 정지가 전장에 투입된 후에야 소탕되게 된다.
그리고 우왕이 왜구에게 골머리를 썩고 있는 사이, 북쪽에서는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9. 원정군의 회군
[image]
최영의 부재 속에 군대를 이끌고 나선 이성계와 조민수 등은 압록강을 건너가 1388년 음력 5월 7일,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이성계, 조민수 등은 우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물이 불어나 군대가 오도가도 못할 지경에서 수백명이 익사하였으며, 군량미도 떨어져가 요동까지 가기는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현명하게 잘 사는 길은 큰 나라를 잘 섬기는 것인데다, 아직 명나라에 보낸 외교 사진 박의중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군대를 일으킨 것은 현명하지 못하니 어서 회군을 시켜 달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를 들어주지 않고, 대신 환관 김완(金完)을 과섭찰리사(過涉察理使)로 임명해 원수들에게 재물을 나눠주며 출진을 독려하게 했다. 종종 환관을 감찰사로 임명하는 일이 있다는것을 생각하면 이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성계, 조민수를 감시하기 위한 최영과 우왕의 판단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성계, 조민수는 환관 김완을 되려 억류하고, 다시 한번 아사자가 많고 군대가 진군하기 어려우니 회군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최영과 우왕은 다시 이를 거절했다.
조정의 사람을 억류하고 회군을 요구한 시점에서 이성계와 조민수의 반란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군대라고 모를 리 없었을 테니 원정군은 분위기가 흉흉해졌고, 그런 상황에서 이성계가 군대를 버리고 자신의 본거지인 동북면으로 달아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령관 중 한 사람이 이탈하다는 소문이 돌자 군대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으며, 혼자 어쩔 줄을 모르던 조민수는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자신이 이탈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 뒤 장수들을 소집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고려사》 우왕 14년 5월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이에 장수들이 동의함으로써, 원정군의 회군은 결정되었다.
원정군의 회군에 대한 의견으로는 장맛비에 기인한 우발적인 일이었다는 일반적인 견해[55] 와 철저하게 계획된 군사 작전이라는 의견[56] 등이 있다. 이후 전황을 보면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본거지인 동북면에서 여진족을 포함한 병사들이 이성계를 지원하기 위해 천여명이나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회군의 속도를 고려해보면 회군을 하며 동북면에 소식을 알리고, 소식을 들은 동북면의 군사들이 달려왔다기 보다는 회군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동북면의 군사들이 이동한 것이니, 양쪽에서 협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1차로 회군 요청이 이루어진 직후에 우왕은 왜구를 막기 위해 남은 군대를 이동시켰는데, 회군 요청을 통해 정보를 얻은 이성계가 2차로 회군 요청을 하는 동시에 군사를 진격시켰다는 것이 이 주장의 일부다.
설사 회군 자체는 위화도에서 결정된 일이라고 해도, 그전부터 이성계의 세력이 회군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이성계는 이미 요동 공격 이전부터 노골적으로 이를 반대하고 있었고, 공격이 시작되면 자신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불온한 감정을 가졌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고, 이러한 점은 최영 또한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영은 요동 공격에 나선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을 계획이 있었는데, 위화도 회군이 너무나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기에 이를 실행하진 못했다. 최영이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아야 할 정도로 불안감을 느꼈다면 군대는 출발 직전부터 불만에 가득 차 있었을 수 있고, 위화도에서 어려운 상황을 당하자 염두에 두고 있던 회군 계획이 빠른 속도로 실행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57]
준비된 계략이었던 우발적이었건 회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면, '반란군' 으로 지목되어 군대의 사기를 잃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만들며 바람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려사의 남은전에 따르면, 당시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까지 갔던 남은과 조인옥(趙仁沃)은 회군하자는 의견을 내어 필요한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58][59]
10. 파죽지세의 진격과 개경 전투의 시작
일단 회군이 결정되자, 원정군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진군을 개시했다. 군대가 1일 30리를 간다해도 12km인데, 당시 원정군의 회군 루트에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예성강 등이 있어 도하 작전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더욱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원정군의 총 숫자는 5만으로,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숫자가 많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400km를 10일만에 주파하는 괴력'''을 보였다. 내키지 않은 채로 북상하던 원정군이 서경에서 위화도까지 가는데 20일이 걸렸음을 고려하면, 회군 당시에는 두 배 먼 거리를 오히려 절반의 시일만에 남하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속도라고 한다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의 진격 정도다. 이런 점에서 볼때 사서에 묘사된 사냥을 하면서 천천히 갔다는 언급은 과장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이렇게 하여 5월 22일 출발한 군대는 6월 1일 개경 근처에 도착했는데, 본격적인 싸움은 6월 3일에 벌어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때 비록 기록상으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6월 1일 당시 도착한 부대는 경기병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발대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선발대와 불과 이틀 뒤에 병력이 도착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 점에서 볼때 후발대의 속도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기록에서는 회군 당시에 고려 백성들이 회군 병사들에게 술 등을 나누어 주며 환호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서술은 보통 과장으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다만 회군의 속도를 고려하면 이동 과정에서 별다른 저항이나 반발을 받지 않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60]
후발대의 도착에 앞서, 6월 1일 도착한 군대는 위화도에서 억류했던 환관 김완 편에 조정에 글을 전했다.
《고려사》 우왕 14년 6월 1일 #}}}"현릉(玄陵)(공민왕)께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기는 동안에는 천자가 무력으로 우리를 억누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최영이 총재(冢宰)가 되자 조종(祖宗) 이래로 큰 나라를 섬기던 뜻을 망각한 채 먼저 대군을 일으켜 상국을 침범하려 했습니다. 한 여름에 많은 사람을 동원하니 온 나라의 농사가 결딴나고 왜놈들은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내륙 깊이까지 침입해 약탈을 저지르며 우리 백성들을 살육하고 우리 창고를 불살랐습니다. 게다가 한양 천도 문제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한 지금,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필시 나라가 전복되고 말 것입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이렇게 글을 전달한 부대는 후발대의 도착을 기다리는지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었는데, 6월 2일 우왕은 병사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평중(陳平仲)을 보내 다음과 같은 글을 전했다.
《고려사》 우왕 14년 6월 2일 #}}}"명령에 따라 출정했으면서 진군하라는 지시를 위반한 데다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려하니 또한 이는 인륜을 어기는 짓이다. 이러한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것은 부족한 이 몸 때문이긴 하나 군신(君臣)간의 대의는 진실로 역사에 있어서의 보편적인 원칙이니 글 읽기를 즐기는 경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강토를 어찌 쉽사리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여러 사람들과 논의했으며, 그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 감히 어기는가? 그대들이 최영을 지목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최영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은 경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 수고한 것도 또한 경들이 잘 아는 사실이다. 이 교서를 받아보는 즉시 쓸데없는 망상을 버리고 개과천선하여 끝까지 함께 부귀를 보존할 것을 생각하라. 나는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wiki style="text-align:right"
한편 우왕은 여기에 더해 외교관인 설장수를 보내 다시 한번 회유를 시도했으나, 군사들은 도성 밖에서 진지를 구축하며 굳게 버티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무렵 동북면에서 여진족들이 포함된 병사 1천여 명이 도착하여 원정군의 세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위화도 회군이 벌어질 당시 고려의 주력은 모두 원정군에 속했으며, 그나마 남은 병사조차 왜구를 막기 위해 파견이 된 상태였다. 원정군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군하자 우왕과 최영은 급히 개경으로 이동해 모병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창고를 털어도 별다른 전력은 모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성계는 요동에 원수들의 군사력이 집중되었을 때 회군을 단행했으며, 조민수 등은 이에 협력하였고 설사 불만이 있는 원수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원수들은 대세에 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최영과 우왕은 병력의 부족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위화도에 병력이 집중된 상태에서도 왜구 토벌에 5원수를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그 시점에서도 우왕과 최영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병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 우왕과 최영이 별도로 다룰 수 있었던 병력은 추정이 어렵지만 모두 합하면 8천여 명이 되지 않을까 추정되는데,[61] 앞서 말했듯 대부분이 왜구 토벌을 위하여 나가 있던 상태였기에 그 8천명을 모두 모을 수도 없었다.
만일 우왕과 최영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모든 병력을 소환하고, 또한 징병을 통하여 어떻게든 1만 이상으로 병력을 모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전투 병력이 3만을 넘는다고 하나 공격 측과 방어 측의 상황을 고려하면 어떻게든 싸울 수는 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우왕과 최영이었다. 회군을 감행한 원정군은 요동 공략의 난점이라는 명분은 있었으나, 엄연히 왕명을 거역한 입장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우왕은 실제로 원정군에 대하여 회유 작전 또한 시도하고 있었기에, 싸움이 생각만큼 쉽게 끝나지 않고 길어진다면 원정군은 분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무시무시한 속도의 회군은 그런 변수를 모두 없애버리고 말았다. 이성계 급 장수가 하루에 군사가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가늠하지 못할 리가 없고, 시일이 길어지면 결국 불리해지는 건 이성계 쪽이니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회군하여 최영과 우왕이 대비할 시간 자체를 막아 버린다는 의도도 추측된다. 왕명을 통한 회유를 씹은 이유도 그렇고.
마침내 6월 3일, 고려의 존망을 건 사투가 시작되었다.
11. 개경 공방전
《고려사》 우왕 14년 6월 27일 #}}}태조가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진지를 구축한 다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유만수(柳曼殊)를 숭인문으로 들여보내고 좌군을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여보냈으나 최영이 맞서 싸워 모두 물리쳤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원정군은 우군과 좌군으로 나뉘어 우군은 개경 동쪽의 숭인문 밖, 좌군은 개경 서쪽의 선의문 밖에 주둔하였다. 좌우군은 이 나성(羅城)을 돌파하는데 애를 먹었는데, 최영은 열세의 전력에서 좌, 우군의 첫 공세를 막아내었다. 당시 원정군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회군했기 때문에, 공성전에 필요한 장비를 전혀 챙겨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의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의 높이는 27척, 두께는 12척이라고 하는데 이는 높이 8,1미터, 두깨 3.6미터에 해당한다. 별다른 장비 없이 함락시키기는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 우군의 유만수(柳曼殊)의 패배에 대해 이성계는 유만수가 나가기 전부터 '''"저 놈 눈은 큰데 광채가 없고 담력도 없으니 패배할 것이 뻔하겠다."'''(曼殊目大無光, 膽小人也. 往必北走) 라고 했다는데, 질 것이 뻔한 장수를 이성계 같은 지휘관이 내보냈다는 것은 이해가 잘 안되는 일이므로 이는 유만수의 패배를 미화시킨 기록으로 보인다.
유만수의 패배 이후 이성계는 한동안 느긋하게 있으며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않는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이성계는 아예 말의 안장까지 풀고 있었는데, 이후 기록을 보면 난데없이 숭인문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적은 아무도 막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이성계는 좌군과 협공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숭인문 대신 선의문을 공격하는 좌군은 성 내 진입에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일부러 유만수의 패배 이후 숭인문을 공격할 태도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숭인문의 병력은 더 급한 선의문 방어에 투입되고, 그 사이에 이성계는 방어가 허약해진 숭인문을 공략했다는 것이다.
한편, 좌군을 이끌고 선의문을 돌파했던 조민수는 영의서교(永義署橋)까지 나아갔으나, 여기서부터 최영에게 다시 밀리게 되었다. 영의서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조민수가 서쪽 선의문을 통해 진입했던 점으로 볼때 선의문과 남산 사이에 있던 교각으로 보인다. 당시 개경의 수비군은 모을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징발하여 개경으로 집결시키는 한편, 수레를 긁어모아 거리 입구를 봉쇄하는 바리케이드를 만든 참이었다. 따라서 조민수의 병력으로도 최영의 부대를 깨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민수는 검은 색의 큰 깃발, 흑대기(黑大旗)를 들고 있었다. 최영의 군대는 흑대기를 든 조민수의 부대를 쫓아내는 분전을 했는데 바로 그 순간, '''이성계의 군대가 나타났다.''' 이성계의 군대는 쫓겨가는 조민수의 흑대기 대신에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북을 치며 위풍당당하게 나타나니''' 그 위엄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당시 남산은 최영의 휘하인 안소(安沼)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으나, 이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자 두려워한 나머지 속절없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이성계는 이로 인하여 남산을 점령했는데, 개경 도성 내의 공간은 서북쪽에 궁궐과 관아가 배치되어 남산을 중심으로 동, 서 경계선이 이루어졌기에 남산은 핵심적인 요충지였다. 이 남산이 원정군에 점령되면서 사실상 개경 전투도 승패가 결정되었다.
최영은 패배를 직감하고 물러났는데, 이 시점에서는 최영에게 당하던 조민수의 부대도 물러나는 최영의 부대에게 역공을 취했을 것이다. 최영은 궁궐의 화원(花園)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었는데, 새까맣게 몰려온 이성계의 병력은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했다.''' 이어 이성계는 암방사(巖房寺)로 올라가 병사들에게 대라(大螺)[62] 를 불게 했다. 수백겹으로 포위한 병사들이 대라를 불며 최영이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성계의 병사들만이 대라를 불었기에 대라 소리만 듣고도 개경 사람들은 이성계의 군대가 온 줄을 알았다고 한다.
마침내 담장이 무너지자, 최영은 자신의 손을 잡고 우는 우왕에게 두 차례 절을 하고 곽충보(郭忠輔)를 따라 밖으로 나가 이성계를 보았다. 이성계는 최영을 보자 눈물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고려사》 우왕 14년 6월 27일 # }}}"이 일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
{{{#!wiki style="text-align:right"
숨은 뜻을 해석하면, '최영 당신에 대한 직접적인 원한이나 분노는 없으나, 내 야심과 목표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에 가깝다.
최영은 탄식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후 이성계와 군대를 이끌고 대궐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때 이색은 이성계를 만났고,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이색과 대화를 나눈 이성계는 군사를 전문(殿門)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개경 전투가 마무리 되었다."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仁任之言, 誠是矣)"[63]
12. 결과와 영향
이성계가 잠시 동안 허수아비 왕으로 창왕을 앉혔다 공양왕으로 갈아치운 뒤, 결국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렇게 '''역성혁명이 성공해 500년 왕조인 고려 왕조가 멸망하였고, 새로운 500년 왕조인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성계 이전에도 고려를 무신들이 권력을 쥐고 뒤흔든 사례가 없지는 않았으나, 이성계는 이전까지의 무신들과는 다르게 명망과 신흥유신들의 지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모두 결합한 괴물이었다. 그 후 위화도 회군에서 같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조민수의 도전과 정몽주(鄭夢周)의 마지막 저항이 있었으나 자신의 실력 뿐만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대부들(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지지를 얻은 이성계는 이 모든 도전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왕조를 개국하기에 필요한 명분과 입지를 충분히 갖추었다.
또한, 명나라가 흥하고 북원이 망해가는 역사적 전환기에서 나올 뻔한 고려의 마지막 북진 정책인 2차 요동 정벌이 엮여있어, 여러 모로 가히 한국사에서도 최고 수준의 떡밥이라고 할 수 있다.
13. 전투 경과
- 1388년
- 5월 22일(을미일)
- 제 2차 요동 원정군 위화도에서 회군 시작
- 5월 24일(정유일)
-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군인 성주(成州)에 있던 우왕이 서북면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의 보고로 원정군의 회군 사실 확인. 훗날의 정종 이방과가 성주를 떠나 이성계를 향해 이동함
- 5월 25일(무술일)
- 우왕과 최영, 남하 시작
- 5월 26일(기해일)
- 우왕과 최영, 밤중에 서경 도착
- 5월 28일(신축일)
- 우왕, 개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원정군이 지척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지름길로 이동하기 시작.
- 5월 29일(임인일)
- 우왕, 아침 무렵 50여명의 측근들과 함께 개경 도착, 최영 전투 준비 시작.
- 6월 1일(계묘일)[64]
- 원정군, 개경 외곽에서 진지 구축 시작.
- 6월 2일(갑진일)
- 우왕, 진평중과 설장수를 통해 회유 작전 시도, 원정군 진지 구축을 계속함, 동북면 지방의 별도 군사들 1천여 명 도착, 최영이 개경의 거리에 바리케이드 설치 시작
- 6월 3일(기사일)
- 개경 공성전 발발, 개경 함락.
14.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조선 건국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니 만큼, 조선 건국을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항상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1화, 2화가 바로 위화도 회군을 다루고 있다. 회군을 단행하며 드디어 자신의 야망을 펼칠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실감하고 회군 도중 최영과 요동 정벌에 대해서 말을 나누었던 것을 회상하는 이성계. 이성계가 회군하고 궁궐로 들어서자 우왕 앞에서 최영이 궁문을 닫고 홀로 이성계, 조민수와 맞닥뜨리는 장면. 야망을 위해 자신에게 아버지뻘이자 평생 존경하던 최영을 제거해야하는 이성계의 고뇌와 최영의 카리스마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이 나온 방영분은 다름아닌 1화. 방송 시작과 동시에 명장면을 터뜨린 것이다.
-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등장한다. 위화도까지의 진군 당시 막장스러웠던 상황이 그대로 영상으로 재현되며 그 상황에서 이성계가 고려에 충성할 것인지 아니면 반역을 해서라도 회군을 해야 하는지 갈등하는데 손익을 계산하던 조민수가 이성계의 편을 들기 전까지는 최영과의 친분 때문에 어떻게든 반역만은 피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고뇌하긴 했지만 새 왕조의 야심이 있던 용의 눈물의 이성계와 달리 정도전의 이성계는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이 한 것으로 처리되고[65] 모든 이들이 단체로 그를 떠받드는 장면이 나와서 이성계를 미화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기도 했다. 배극렴에게 마지막까지 최영이 '자네를 믿는다'라는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통곡하는 이성계의 모습은 그야말로 명장면. 마지막에 전군 회군 명령을 내리는 장면은 영화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에서 펠렌노르 평원에 막 도착한 후 돌격을 준비하는 로한군을 연상시키는 연출을 보였다.
4월 5일, 27화에 나온 개경 전투는 방영되자마자 주요 남초 커뮤니티를 환호의 도가니로 만들 정도의 역대급 임팩트를 남겼다. 성곽 시설의 문제 탓에 공성전 장면 자체는 그리 큰 스케일은 아니었으며, 이 장면은 나레이션으로 과감하게 생략해 제작비를 아꼈고, 대신 시가전에서 고퀄리티 전투씬을 보여주었다. 헬리캠을 이용한 카메라 효과 및 CG와 롱테이크 씬 등 연출으로나 카메라 기법으로나 상당히 공을 들인 티가 난다. 대체적인 반응은 국내 사극 역사에 남을 명장면. 특이하게도 엑스트라 병졸들이 주요 인물들이나 할 법한 스턴트 액션을 선보인다. 그전까지 병졸들이 화려하게 싸우는 모습을 부각시킨 사극은 불멸의 이순신 정도였고 웬만한 사극에선 전투력 측정기나 잠깐 찌르고 베는 장면만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 외 이전의 황산 전투와 달리 여기서 이성계는 직접 칼 들고 싸우진 않고, 말을 타고 전장을 관망한다.[66] 거기에 잘 언급되진 않으나 후반 야간 전투에선 바리게이드를 공성병기로 밀어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다 바리게이드를 사이에 두고 한국사극에선 보기 힘든 방패대열을 맞춰 싸우는 장면도 나온다. 마지막으로 최영과 이성계의 대결로 비장미를 더했다.
-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21화 ~ 22화에 묘사되었다. 그러나 드라마 자체가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제작 및 방영된 작품인지라 위화도 회군의 시기인 여름에 촬영을 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실제 역사상으로도 그렇고 드라마상에서도 분명 장마철이라 언급되었건만 작중에선 눈이 오고 얼음이 얼어붙은 겨울에 위화도 회군이 이루어지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시기상 여름 촬영이 어려웠다지만, 위화도 회군을 다루는데 있어서만큼은 계절 문제가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기에 이 드라마의 주요 오점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내용상으로는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5만 명의 병사들의 목숨과 인질로 붙잡힌 가족들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결국 회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다만 비장미 넘치는 전투신이 정도전보단 덜했으며 최영과 이성계의 대결은 나오지않고 둘이서 대화를 나누다가 최영이 그냥 체포되는 것으로 끝났다.
-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이성계가 순전히 개인적인 야망 때문에 해볼 만한 싸움을 포기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이성계의 사불가론도 실없는 변명으로 그려진다. 또한 이성계 휘하의 군관이었던 주인공 장사정이 회군에 반발하여 군에서 탈영하고 산적이 된다.
- 영화 봉이 김선달에서 김인홍의 지어내는 이야기로 김선달의 조상이 위화도 근처 마을의 촌장인데, 뗏목으로 부교를 만들어 이성계의 회군을 도왔다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