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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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조 이성계의 계비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 무안대군, 의안대군, 경순공주의 어머니이며, 본관은 곡산.
2. 논란
사실 신덕왕후의 위치는 좀 어정쩡한 부분이 있다. 고려시대는 공식적으로 1부1처였다. 국왕만 이 조건의 예외이다. 주례 기준으로[1] 천자는 1후 3부인 9빈 27세부 81어처를 둘 수 있고, 제후도 천자만큼은 못해도 일부다처가 가능했고[2] , 경대부는 1처 2첩, 사(선비)는 1처 1첩이 가능하고, 서민은 1처다. 그런데 고려시대는 첩 금지였기 때문에, 제후 취급인 국왕 제외하면 모두 공식적으로 1부 1처가 된다. 그래서 무신정권 시기 집권자인 최우 같은 인물들도 공식적으로는 1처 만을 두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말기의 혼란으로 벌어진 지배층의 문란으로 인해서 가족관계 파악에 곤란을 겪는데, 이 때 등장하는 개념이 현지처이다. 원래 지방출신 인물들이 현지에서 결혼을 한 다음에, 이 상황에서 개성의 중앙귀족과 다시 결혼을 하는 폐단이 등장하는 것이다. 중앙 귀족들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지방에서 결혼을 했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설혹 알았어도 '''먼저 결혼한 사람이 귀족 가문이 아니라면 정식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하면서''' 실질적 중혼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경처'''('''京妻''')와 '''향처'''('''鄕妻''')라고 부르는데, 이건 고려시대를 기준으로 보건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보건 문제가 되는 행동이었으므로, 조선 초기에 국가 시스템이 안정되고 첩 시스템이 인정되면서 이로 인한 분쟁이 봇물처럼 터지게 된다. 이성계는 여기에 정확하게 걸리는 인물이었다.전조(前朝)의 말엽에 대소 원인(大小員人)이 경외(京外)에 양처(兩妻)를 함께 둔 자도 있고, 다시 장가들고서 도로 선처(先妻)와 합한 자도 있으며, 먼저 취첩(娶妾)하고 뒤에 취처(娶妻) 한 자도 있고, 먼저 취처하고 뒤에 취첩한 자도 있으며, 또 일시(一時)에 삼처(三妻)를 함께 둔 자도 있어서, 그가 죽은 뒤에 자식들이 서로 적자(嫡子)를 다투게 되니 쟁송(爭訟)이 다단(多端)하였으나, 그 때에는 처(妻)를 두고 취처(娶妻)함을 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3]
일반적으로 보면 먼저 결혼한 신의황후가 당연히 더 높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이론적으로는 이게 맞기는 한데, 신덕왕후 같은 경처는 기본적으로 중앙귀족들과 하는 정략결혼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즉, 경처들의 배경이 향처들의 배경보다 압도적으로 든든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짱짱했던 기존의 중앙 귀족들이 "내 딸내미가 첩 취급 당하는 것은 못 보겠다."라고 나서니 누가 이를 막을 것인가. 그래서 위의 분쟁들에서도 경처와 향처 모두 정처로 인정되고 그 자손들도 적자로 인정받는, 법이고 예법이고 다 뛰어넘은 사례가 속출하는데, 이게 다 혼맥으로 다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저 분쟁도 사실 적서차별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재산분쟁이 대부분이었다.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 개국 전에 사망했기에 별 문제 없이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지만[4] , 실제로 한씨가 조선 개국 때 살아있었다면 서열 싸움이라든가, 고려 때처럼 정실부인을 여러 명 두도록 할 것인가라든가, 어느 쪽을 왕비로 세우느냐 같은 걸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3. 일생
상산부원군 강윤성(象山府院君 康允成)과 진산부부인 강씨(晉山府夫人 姜氏)의 딸로, 부계는 곡산 강씨[5] 이고, 모계는 진주 강씨이다.
신덕왕후의 숙부 강윤충은 이자춘의 형 이자흥의 사위였는데, 이런 인연으로 이성계와 접촉할 수 있었고 강윤성의 딸이 이성계와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 당시에 이성계와 나이차가 무려 21살이나 되었다.(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보다 어리다!)
조선이 건국되고 현비(顯妃)에 봉해져서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태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자신의 소생인 의안대군을 세자로 만드는데 성공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보다 21살이나 연상인 남편 태조는 74세에 승하하여 조선 역사상 두 번째로 장수한 국왕이 된다. 이후 존호는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貞陵)이라고 했다. 신덕왕후가 죽은 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의안대군은 살해당했다.
원래 신덕왕후의 능은 오늘날의 중구 정동에 뒀지만, 태종대에 지금의 위치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졌다. 당시 정릉동은 양주목 관할이었다. 태조가 죽기 전, 신덕왕후의 무덤으로부터 100보 밖에 있던 땅을 하륜 등 공신들에게 나누어줬는데, 그 자리에 공신들의 집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태조는 그저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6] 태종은 신덕왕후를 미워하여 나중엔 그녀의 위패를 종묘에서 치우고 기일이 되어도 조회도 파하지 않고 진행했는데, 태조의 체면을 생각해서 제사는 지내되 왕후가 아니라 후궁의 예로 제사를 지냈다.
결국, 태종은 태조 사후에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완전히 왕비격에서 후궁격으로 격하시켜 버리고[7] , 정릉을 이장했다. 이후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한 김에 광교를 세워서 석재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버렸다.
사실상 평민의 무덤으로 전락해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한지 172년이 지난 1581년, 선조의 가마 앞에서 강순일이 '자신은 국묘를 돌보고 있으니 군역에서 면제해달라.'고 격쟁했다. 당시 함흥에 있는 조선의 추존 4대조 왕릉을 관리하는 사람을 국묘봉사자라 해 군역을 면제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강순일의 주장은 신덕왕후의 예우를 왕비격으로 복권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선조도 신의왕후의 후손이라서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백년 가까이 신하들이 복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왕이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1669년 송시열이 이에 대해 상소했을 때, 현종이 이를 가납[8] 함으로써 신덕왕후의 위패가 다시 종묘에 모셔지고 무덤도 왕릉으로 수복되었다. 1669년 음력 8월 5일 신덕왕후가 복권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는데, 백성들은 왕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여겼다고 한다. 이후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가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가 되었다. 대한제국 때는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추존.
4. 평가
동북면 변방 출신의 장수였던 태조 이성계를 중앙에 연결해서 결국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지원했다. 그러나 일찌감치 사망하는 바람에 아들 방석의 권위를 유지해주지 못했고, 무인정사 이후 후계구도를 어지럽혔다는 책임을 뒤집어썼다.
아무렴 천도, 불교정책, 공신책봉, 왕씨숙청, 폐세자빈을 전부 자기 뜻대로 행한 이성계가 겨우 베갯머리송사 따위로 후계자를 정했을 거 같은가? 현대 한국인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태종과 세종이 정립한 사관위주로 접하다보니 신덕왕후가 후계자 선정에서 욕심을 부려 무리하게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방석이 세자가 되는건 욕심이 아니라 순리, 당연한 일이었다.''' 왕세자의 최우선 조건은 왕과 왕비의 자식이다. 조선의 왕비는 엄연히 신덕왕후고 건국 이전에 죽은 한씨는 1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정종대에 신의왕후로 추증되었다. 즉, 태조가 세자를 책봉할 당시의 한씨 자손들은 왕비의 아들이 아니었다. 왕비의 아들은 방번과 방석, 둘이고 개중 방번은 처가문제(공양왕의 조카사위)로 절대로 왕이 되어선 안되니 자연히 방석이 세자가 되었을 뿐 이다.
문제는 그녀 자신도 예상 못했을 그녀의 이른 죽음이었다. 왕비의 아들이기에 방석이 세자가 되었는데 그 왕비가 죽어 국모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태조는 세자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릉을 경복궁 지근거리에 조성해 권위와 존재감을 유지하려 했지만 죽은 사람의 권위에는 한계가 자명했다. 겨우 40세에 사망했는데 당시 기준으로도 이른 죽음으로서 만일 폐세자 방석이 장성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방석의 세자책봉 명분이 바로 왕비의 적자라는 것이었으니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세자의 권위를 흔들수가 없었다.[9]
4.1. 비판
하지만 이런 실드는 어디까지나 상황을 신덕왕후의 입장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상정했을 때의 이야기일 뿐, 현실은 전혀 녹록치 않았다. 차라리 이방번이 세자로 책봉되었다면 그나마 위에서 말한 '''정식 왕후의 큰아들이니 어찌되었건 적장자는 적장자'''라는 논리가 어느정도 먹히고 적어도 동복 친형제들끼리는 끈끈하게 뭉칠 소지라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후처의 큰아들도 아니고 둘째, 전체 형제들 가운데서 빼도박도 못할 막내가 책봉되었으니 점점 해명을 위해 혓바닥이 길어질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사람을 하루아침에 망나니로 만들어 찬밥 신세로 만들어놓고는''' 그저 친형제니까 도와줄것이다? 이런 안일한 인식은 결국 사태가 발발하자 그 친형제조차 이방석을 돕지 않는 파국을 초래해버렸다.
공소[10] 적장자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미 태조부터가 한씨에게 왕후 시호를 내리지 않았을 뿐, 그 소생들을 엄연히 적자들로 인정, 대우했다는 것이다. 공소가 그냥 적자도 아니고 '적장자'면 그 적장자 위에 있는 아들들의 지위는 대체 무엇이 되는가? 음서로 출사한 이방우와 이방과, 과거에 오른 이방원과 이방연의 지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11]
신덕왕후를 변호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 소생들'''도''' 적자다'라는 것이지 '그녀 소생들'''만''' 적자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세자는 어디까지나 '''태조의 세자'''인 것이지 신덕왕후의 세자가 아니며, '''태조의 적장자'''를 고르는 것이 원칙이지 신덕왕후의 적장자인지는 정치적 고려 대상일수는 있어도 적장자세습의 원칙에 있어서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적장자와 그 외 적자들 사이에는 분명히 지위의 차이가 존재함에도 신덕왕후 옹호파들은 적장자와 적자라는 단어를 뒤섞어가며 혼란을 초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방우가 권력에서 밀려나 이미 적장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것일지도 모르나 이방우가 없는 상황에서 '''왕실의 공식 적장자는 분명히 차남 이방과였지 적장자 부재 상황이 아니었다.'''
신덕왕후의 행보가 더욱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그녀의 시댁이 이미 자신과 비슷한 상황을 이미 한 번 겪은 바 있어 참고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바로 시백부 이자흥, 시아버지 이자춘이 시계조모인 한양조씨 집안(과 그 집안 외손인 이완자불화)과 싸워 천호직을 쟁취해낸 바 있었던 것이다. 큰왕자들이 그녀 소생들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거나 능력이 보잘것 없었으면 모르되, 다른 이들은 몰라도 사실상의 적장자인 이방과와 다섯째 이방원은 경력이나 능력 면에서 분명히 후계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했고[12] 조선 기득권층과 학맥, 관맥, 혼맥도 탄탄했다.[13]
동북면에서부터 동고동락해온 왕실 종친들도 안변 한씨 소생들에게 팔이 굽어있었고, 하필이면 희대의 어그로꾼 정도전과 손을 잡은 탓에 사대부들의 지지를 확보하는데도 실패했다. 심지어 그녀의 외조카 신씨[14] 는 신덕왕후의 면전에서 이방원을 편 들었고,[15] 신씨의 오빠이자 신덕왕후의 또다른 조카인 신극례는 아예 이숙번과 부하들을 숨겨주고 거병 당시부터 병력을 지휘한 무인정사의 핵심 지도부였는데 더 말이 필요한가?
국초 적장자세습의 원칙이 잠시 흔들렸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 원칙을 뒤흔들 정도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이방원 - 그리고 그 아들 이도 였기에 가능했던 것인데 그와 한참 수준차이가 나는 공소 형제로 그 틈을 노린 것은 어느 모로 봐도 무리수라고밖엔 할 수 없다.
이성계가 곁가지들에게 잘 대해줬으니[16] 큰 왕자들도 이를 본받을거라는 희망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성계는 '''가주로서의 아량'''을 베푼 것이고, 큰 왕자들은 그 가주가 될 기회를 빼앗겼으니 이 역시 사리에 맞지 않았다.[17] 차라리 '''이방과를 밀어주고 자신과 자기 자식들을 잘 대해주기를 기대하는 게 몇백배는 현실적이었다.'''[18] [19]
이러나저러나 큰왕자들의 즉위로 딱히 신변의 위협 같은 것을 느낄 건덕지도 없었던 신덕왕후의 무리한 이방석 책봉이 더더욱 비판을 받는 것이다.
신덕왕후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일단 이방석이 즉위하고 나면 사태는 종결되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쯤되면 설령 태조가 생전 퇴위 등을 통해 어거지로 이방석에게 승계를 시도하여 즉위했다해도 '''이방석의 재위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큰왕자들을 사전에 제거하자니 이들과 엮인 사대부 집안들, 나아가 이화, 이천우 등의 방계 '''종친들에게까지''' 대대적이고 광범위한 숙청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이거 까딱 잘못했다가는 이방석의 치세가 초장부터 개판나기 딱 좋은 일이다. 이방원이야 워낙 정치력이 SS급이니 (이후 일이지만) 두 번의 쿠데타 이후 제 세상 왔다고 살판이 막 나려 한 공신세력을 적절하게 쓸 놈 쓰고 내칠 놈 내치고는 자신이 일전에 귀양보낸 친이방석 세력+신진인사 등으로 그 자리를 메워가며 주도권을 유지한 것이지, 잘못했으면 공신들 덕분에 왕위에 올라 꼭두각시 노릇하기 딱 좋았다. 심지어 외척까지도 엄청나게 견제해서 원래 세자였던 양녕대군과 친한 외척 민씨 일가의 형제들을 죄다 정치적 이유 하에 죽여버리기까지 한 전적이 있다. 차후 외척이 정치에 간섭할 걸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인데, 이는 들이맞아서 간섭질 할 외척 없이 왕위에 오른 세종은 외척에게 부담받지 않고 정치하는게 가능했을 지경이다.
공신관리나 세력균형관리 한 번 잘못하면 뭔 개꼴이 나는지는 기어코 조카를 밀어내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마침내 목숨을 앗아간 세조나 환국매니아라고 불릴만한 숙종, 그놈의 의심병으로 까마득하게 어린 동생 영창대군의 목숨을 거둔 광해군. 그리고 광해군을 이렇게 만드는데 일조한 아버지인 선조 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방원의 그 만렙 정치력을 형성한 한 축이 관직경험인데, 과연 이방석이 그 정도의 정치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방원이 괜히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를 외친 게 아니다. 실제로 그 구호가 적어도 오피니언 리더들에게는 먹혀드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봐도 왕위계승에서 밀린 왕족은 언제나 분란의 씨앗이었고, 그런 씨앗을 무려 다섯이나 만들어놓은 이상 어느 한 쪽은 제 명에 못 사는 건 예약된 일이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하필이면 손잡은 정도전부터가 절친이라는 남은조차 인정하는 어그로꾼인 탓에 중도세력 포섭 같은 게 될 턱이 없었고, 그런 스승에게서 배운 이방석이 제대로 된 정치세력 형성은 가능했을지도 의문이다.
결정적으로 '''친동생에게 왕 자리를 뺏겨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자기 큰아들'''의 문제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큰왕자들의 처리 문제가 간단해보일 지경이다. 차라리 이방원이 이방석 죽이고 집권했으니 일말의 동정표라도 얻는 것이지, 무리하게 이방석을 보위에 올렸다가 국초부터 난장판이 벌어지고 그걸 이방원처럼 세련되게 수습하지도 못했다면 그녀는 아마 문정왕후 저리가라 수준으로 조선사에 손꼽히는 악녀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5. 대중매체
5.1.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1부 《추동궁 마마》 (1983, MBC) - 김정연
5.2. 책
네이버 웹소설 연못에 핀 목화 - 송경별곡의 현비 강씨에 대해서는 신덕왕후(송경별곡) 문서 참조.
[1] 신분에 따른 차등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몇 처 몇 첩을 허용할 것인가는 책마다, 시대마다 다르다. 주례를 꼽은 것이 예기에도 인용되는 등(1후와 3부인 사이에 6궁이 들어간다는 점만 다르다.) 가장 기본적으로 언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경대부 미만은 다처가 허용이 안 된다.[2]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중 관련기사. 서열에 차이는 있으나 일정 숫자까지는 처로 인정 받았다.[3] 법이 없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일상생활은 기본적으로 관습법 체제였기 때문이다. 즉, 의례에 따라서 예법이 정해지고, 이것이 문제가 될 때에만 공식적 판결이 나오는데, 1부1처와 첩금지 역시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4] 신의왕후가 왕비로 추존된 시기는 정종이 즉위한 이후이다.[5] 신천 강씨의 분파 중 하나. 현대에 들어 신천 강씨와 통합한 2개의 분파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덕왕후를 신천 강씨의 일원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6] 고려 때만 해도 도성 안에 왕실의 묘를 쓸 수 없었는데 태조는 신덕왕후의 죽음으로 가장 큰 지지세력과 명분을 잃은 세자 방석을 지키기 위해 신덕왕후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하고자 광화문 바로 앞 중구에 정릉을 두고 원찰로 흥천사(興天寺)를 세웠다. 불교가 왕권의 비호를 받은 이유가 뭐다? 왕즉불. 권위를 세우는데는 불교가 유교보다 훨신 유용하니 전부 왕후와 세자의 권위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포석이었다. 그리고 태종이 정릉 밀어버린 것도 사감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리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신덕왕후와 방석을 후궁, 서자로 격하시키기 위함이었다.[7] 태종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싶었던 듯하나, 사실 사료를 보면 그녀가 후궁으로 확실히 강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태종대에 완성된 태조실록에서 신덕왕후를 '강비'로 지칭한 경우가 종종 발견되지만(폐서인이 된 왕비는 '성+비'로 된 명칭으로도 불렸다.), 기록에서 그녀의 지위 자체는 후궁이 아니라 차비(둘째 왕비)라고 적혀 있으며 후대에서 이걸 바꾸려고 하진 않았다.(조선 초에는 고려의 체계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데, 차비는 '왕의 두 번째 정실부인'을 의미한다. 후에 계비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기에 신덕왕후는 '계비'로 여겨지게 된다.) 이 때문인지 사실 태종대 이후의 기록에선 주로 '신덕왕후'로 지칭되었으며, 선조대에 그녀에 대한 예우를 복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 그 근거 중 하나가 비문에 그녀가 차비(둘째 왕비)로 적혀 있는 등 태조의 왕비임이 명백하다는 것이었다.[8] 그나마도 처음에는 석물 복원 정도만 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연일 요청하자 종묘 배향까지 받아들인거다.[9]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가 정처라면 그보다 먼저 혼례를 한 신의왕후 한씨도 정처여야 하는데, 정작 이성계는 이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물론 강씨만 중전으로 세움으로써 그녀의 소생인 2남1녀만 적자로 만들어서 정통성을 세울 생각이였는지는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한씨의 소생들은 이때 모두 장성하고, 몇몇은 이미 조정에 출사하여 이성계를 도와왔다. 그런데 그들을 갑자기 서출처럼 대우한다면 그들의 불만이 터진다라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주도적으로 이렇게 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만 왕이 어리석은 결정을 하였을 때에 그녀가 이를 보다 융통성있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생이 왕이 된다는 허상에 빠져서 사후엔 왕비로서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본인의 소생들도 전부 살해당하거나 불행해지는 결과를 만들었으니 어떻게 보면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 있다.[10] 이방번과 이방석에게 내려진 시호인 공순군과 소도군을 묶어 이르는 말. 삼봉집에서 무인정사를 '공소의 난'으로 적은 바 있다.[11] 특히 고려는 적서차별이 말도 못했던 나라다. 벼슬을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공소 적장자론을 단박에 박살낼 수 있다. 정도전이 그냥 서얼도 아니고 얼녀의 후손이라는 이유 하나로 죽을뻔하지 않았는가?[12] 심지어 이방원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그 능력을 객관적 지표로 증명해보였다.[13] 이방원의 경우 처가 및 처가를 통해 직접 얽힌 사돈 가문만 겹사돈인 사촌 형 이천우의 집안을 제외해도 8곳에 달했다. 게다가 장인 민제가 자기 스승이라 민제의 제자들이 곧 이방원파라고 해도 좋을 상황이었다.[14] 신덕왕후의 여동생의 딸[15] "정안군(靖安君)이 세자가 되면 심히 인망(人望)에 합할 것입니다. 지금 이방석을 세우니 필경은 반드시 좋지 않을 것입니다.".[16] 얼자인 이복 동생 이화와 그 어머니 김씨를 잘 대우했고, 아버지와 천호 자리를 다투었던 이복 숙부 이완자불화의 아들 이지도 어렸을 때부터 자기 집에 데려와 키우다시피했다.[17] 반대로 적장손이지만 가주 지위를 이자춘에게 빼앗긴 이자흥의 (양)아들 이천계는 이후 이성계를 죽이려들었다.[18] 이방과는 개국 당시에도 이미 30대 후반에 접어들도록 정처에게서 자식이 없던 상황이니 잘만 했으면 이방과가 이방석을 세제로 책봉하도록 딜을 거는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 방과-방석의 나이차도 25살이나 되어서 현대 관점에서도 사실상 부모자식이라 해도 좋을 수준이었고. 이렇게 된다면 아무리 정치력 끝판왕인 이방원도 딱히 명분 찾기가 어렵다. 이방과는 자신의 동복 형에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상의 적장자다. 아무리 자기가 정치력이 좋아도 적장자이자 명분이 확실한 형을 함부로 건드리면 설령 왕위를 찬탈해도 오래 유지하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덕왕후가 자기 친아들들을 왕세제로 삼아달라는 딜을 하든말든 이방원 입장에서는 형울 건들기 힘들다. 조선은 엄연히 절대군주제였고, 왕인 이방과가 적자가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방석을 왕세제로 삼아버리면 절대 이의제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면 딱 요 취급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정종은 자신과 이방원 사이에 있는 동생(익안대군, 회안대군)을 건너뛰고 정안군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다.(두 사람이 실각된 상황이었다는 정치적 배려는 있었다) 게다가 의안대군이 충분히 나이를 먹고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면 이방원의 입지는 더욱 줄었을 것이다.[19] 만일 이방원을 밀어도 큰 문제가 안되었던게 개국 이전에는 이방원은 신덕왕후와 사이가 매우 좋았었다.특히 왕위계승 차원에서 이방원 본인 야망도 있었지만 조선 건국 공적이나 실력을 봐도 충분히 자격이 있고 연장자이자 실질적 적장자인 방과도 왕위에 큰 욕심은 없던 점을 감안하면 이방원이 세자에 올랐어도 다들 납득했을 것이다.게다가 훗날 사돈이 되는 민씨 형제와 심온의 일을 제외하면 명예퇴직을 권유하거나 힘이 없는 명예직으로 이직하는 등 가급적 온건하고 깔끔한 처리로 공신들의 힘을 제어한 태종의 행적을 봐도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도와준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눈엣가시로 여기긴 커녕 오히려 더 잘해줬을 것이다 실제로 광해군도 자신을 크게 지지해준 계모 인빈 김씨와 이복동생들을 극진하게 대우한 전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