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의의 난

 


'''조사의의 난
趙思義ㅡ亂'''

'''시기'''
1402년
'''장소'''
한반도 북부
'''원인'''
이성계이방원 간의 갈등.
'''교전 세력'''
조선 중앙군
조사의 반군
'''지휘관'''
'''이방원'''(태종)
이숙번
이천우
박순
송류
<^|1>'''이성계'''(태조)
강현
조사의
조홍
'''병력'''
40,000 명
10,000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반군 궤멸
'''결과'''
반군 진압, 조사의 등 관련자 처형.
'''영향'''
이성계의 정치·군사 영향력 소멸.
1. 개요
2. 진행
2.1. 파죽지세의 반란군
2.2. 정부의 진압
3. 진정한 흑막?
4. 태종 이방원의 수상한 행적
5. 난의 결과
6. 사극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태조 이성계왕비신덕왕후 강씨의 친척 조사의(趙思義, ? ~ 1402년)가 태종 2년(1402년)에 일으킨 난. 그리고 30여 년 간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던 '''불패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배한, 이성계 인생 최후의 전투.

2. 진행


조사의는 태종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관직을 잃고 연금상태에 처했지만, 나중에 태종이 태조 이성계의 뜻을 존중하여 동북면(함경도) 지역으로 보내게 되었다. 이후 조사의는 신덕왕후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동북면 지역의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태조도 함흥에 머물면서 조사의의 난을 인정하여 명분을 제공했다.

2.1. 파죽지세의 반란군


[image]
조선 초의 기병. ※출처 :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 블로그
조정에서는 박순ㆍ송류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이들을 죽이고,[1] 이천우의 기병 100여 명을 사로잡고 파죽지세로 내려와 이천우의 군을 격파하였다. 기세 등등한 조사의의 군대는 평안도 덕천·안주 방면으로 진군하여 군사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의 진로를 저지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써서 반란군을 분산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2.2. 정부의 진압


11월 27일 청천강에서 이숙번이 이끄는 4만 명의 진압군과 1만 명의 반란군 사이 싸움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포로로 잡힌 김천우라는 자가 "관군은 '''4만''' 명이나 되는데 여러분들이 당해낼 수 있겠소이까?" 라고 했는데 이 말 한마디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명~수십 명의 탈영병이 발생하더니 조화(趙和)라는 병사가 탈영을 하려고 불을 지르면서 크게 소리를 지르자 와해되었다.# 이후 조사의는 함경도 안변에 돌아와 아들 조홍과 함께 관군에 잡혀 12월 7일 도성으로 압송되었다가 18일 주살되었다.

3. 진정한 흑막?


하지만 현대의 연구가들은 이 난리에서 조사의의 비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정황으로 볼 때, 이 난은 태조 이성계 본인이 일으킨 것이라는 견해이다.
우선 신덕왕후 강씨는 본가나 외가나 함흥과는 상관이 없다.[2] 동북면 출신인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연줄을 만들기 위해 혼인한 것이니 동북면에 기반이 있는 집안 출신은 필요도 없고. 당연히 강씨의 친척 강현이나 인척 조사의도[3] 동북면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태종 이방원 역시 그런 점을 알고 있으니까 이런 위험분자들을 마음놓고 함흥에 처박은 것이다. 이성계의 영지인 동북면, 그리고 이성계의 사병인 가별초는 태조 본인이 나서는 거 아니라면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테니까. 실제로 난이 진압되자마자 대간에서는 대놓고 '''동북면 가별치(가별초)가 난의 원인이었으니 혁파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처벌받은 인원들을 보면 보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승녕부 당상관인 정용수와 신효창이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귀양가는데, 이들은 바로 '''태조를 함흥까지 호종한''' 인원들이었다. 애초에 승녕부 자체가 태상왕(이성계)의 수행을 담당하는 기관인데 이곳 인사들이 처벌받았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또한 환관 함승복도 난에 가담했다 하여 처형되었는데, 그 역시 태상왕의 수행 내관이었다. 전근대 왕조시기에는 명분이 문제되거나 처벌했을 경우 미칠 파장 등이 우려되어 궁궐 내 왕족을 처벌하기 힘들 경우 그 수족 부하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대신하곤 했는데,[4] 이 관점에서 보자면 태조의 수족들을 처벌한 것은 곧 태조가 이 사건의 흑막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난이 평정된지 17년이 지난 태종 18년에 다시 이 문제가 불거져 당시 태조의 수행내관이었던 안우세, 김수징 등을 문초하였는데, 안우세의 증언을 보면 김화에 도착했을 때 정용수와 신효창이 '''함승복과 배상충이 북쪽에서 군마를 뽑고 있다'''고 귀띔했다고 증언했고, 김수징은 조사의가 정용수와 신효창을 태조에게 참소했지만 태조가 물리쳤다고 하여 태조와 조사의의 상하관계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이후 숙종대에 박순에게 시호 내리는 문제를 논하다가 갑자기 함승복과 배상충을 태조가 보냈다는 언급이 나타나며 아예 성조(태조)가 조사의의 군중에 머물렀다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무인정사로 순군옥에 갇혔던 조사의가 누구덕에 풀려나서 부사 벼슬까지 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이미 태종 원년에 태조가 한 번 안변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건 협력관계 따위가 아니라 그냥 대놓고 태조가 미리 사람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타이밍을 잡고 대놓고 난을 일으킨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결국 조사의는 별로 한 것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방원 입장에서 자기가 동생을 죽이고 형을 숙청하더니 이제는 아버지와도 싸우는 패륜아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조사의를 주동자로 몰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처벌 수위도 고작 참수형이었다. 훗날 자기는 생각도 없었는데 반역자들이 멋대로 자기를 추대하기로 정해놨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왕족이 사약을 받고 죽는 나라에서 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해서 칼부림을 한 것 치고는 굉장히 편하게 죽여준 것이다. 조선 국왕이 '''친정'''을 한 유일무이한 사례임을 생각하면, 이는 더더욱 적당히 뭉갤 필요가 있었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태조 흑막설을 참고했는지, 태조 이성계가 조사의와 힘을 합쳐 난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한다. 조사의가 이방원에게 반란을 일으킨 동기를 묘사하기 위해서인지 이방원과의 악연으로 인해 중앙 조정에서 쫓겨나 복수를 결심했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여기서도 조사의는 안변부사로 제대로 나온다.
이 사건 이후 함흥차사의 일화와는 달리 태조 이성계는 할 수 없이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태조 이성계가 주동자였고 적당히 뭉개긴 했지만 그래도 반란은 반란이었는지 영흥부는 영흥군으로, 안변대도호부는 안변현으로 강등당했으며, 이후 일어난 이징옥의 난이나 이시애의 난까지 겹쳐 함경도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유형무형의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5] 다만 이 두 지역은 바로 다음해에 다시 부로 복원되었는데 역시 태조를 거스를 수 없었다는 점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4. 태종 이방원의 수상한 행적


이때 공식적으로는 이숙번이 이끄는 군사가 조사의를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태종 이방원의 행적을 살펴보면 뭔가 기분을 찜찜하게 만드는 수상한 행적이 보인다.
처음 대응부터 수상한데, 조사의가 거병했다는 기록 이후로 태종 이방원은 5일 동안 아무런 군사적 액션을 하지 않았다. 당장 그 배후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으악 이거 속히 진압하라!' 소리가 절로 나와야 할 상황에서 5일간 태종이 뭘 했느냐면, "금강산 유람 중"으로 알려진 태조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서 모시려고 한다. 이때까지 조사의는 파죽지세로 승리했다.
관군은 계속 속절없이 밀리는 상황이었는데 반란 발생 13일째에서야 태종 이방원은 친히 출병하여 개경을 떠난다.[6] 이 이후 기록 중에서 좀 재밌는 상황이 보인다. 친히 출정해서 북쪽으로 진군하던 태종이, 11월 22일에는 방향을 틀어서 '원중포'라는 포구로 간 것이다.# 그쪽엔 조사의의 군사들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태종은 원중포로 간지 4일 만에 볼일 끝났다는 듯이 개경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더 희한하게도, 그 다음날 조사의의 군사들이 관군에 겁을 먹거나, 탈영하거나, "스스로 무너졌다"라는 표현 아래 와해되어 버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태종은 원중포로 가기 14일 전인 11월 8일에는 이성계의 위치를 알린 회양부사(淮陽府使) 김정준(金廷雋)에게 1필을 내렸단 기록이 있는데#, '''이게 군사작전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포상 형식'''이라는 데에서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조사의의 난이라고 이름 붙여졌지만, 사실상 태조 이성계의 이름과 지휘 아래 거병한 반란군임을 감안하면 '''태종이 반란 발생 20일만에 원중포에 있는 태조를 기습하여 사로잡은 뒤 의도적으로 그 정보를 반란군에게 흘린 채 귀환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태종의 행적이 저렇게 모호하게 기록된 것은, 왕이 자기 아버지를 기습해서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을 최대한 기록에 남기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 가설에 따르면 태조가 노환성 지병 때문에 구석진 포구에 숨어서 정양하고 있었고 그 첩보를 빠르게 입수한 태종이 소수의 날랜 기습조만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경호병력을 무력화시키고 납치해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태조가 평소처럼 건강했다면 원한에 사무쳐서 직접 군을 통솔하며 선봉에 서서 그 활솜씨만으로도 태종을 때려잡고도 남았을 위인인데 반란군의 수장이 그런 구석진 곳에 숨어있었다는건 아무래도 미심쩍은 것이니. 조사의의 난 당시 태조는 70대를 눈앞에 뒀다.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진 60대 초중반 때도 병환으로 인해 누워있다가 난에 당하고 말았던 태조니 4년이 지난 후라면 더욱 병으로 고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태조의 성격과 이방원에 대한 당시의 증오를 감안하면 직접 반란군을 조련한다고 무리했다가 병에 걸리거나 지병이 심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태종이 원중포에 갔다가 개경으로 돌아간 시기를 기점으로 그전까지 잘 싸우던 반란군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 이유도 완벽하게 설명된다. 반란군의 구심점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사로잡혔으니 당연히 속수무책으로 털릴 수밖에.
그리고 이방원은 개경으로 돌아온 지 3일 후에 태조에게 문안을 드리고 태조가 스스로 귀가하는 형식으로 궁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문안했다'''는 표현으로 미루어보아 이 시점에 이미 이성계의 신변은 개경 내 혹은 개경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란 직전만 해도 금강산 쯤에 있었던 이성계가 개경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뻔하다.
이러한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은 이유로는 이런 해석이 있다. 무패의 상승장군 태조 이성계의 이력에 패전이 추가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7], '''태상왕으로 물러난 개국 군주가 자기 아들이자 당대의 국왕을 상대로 거병했는데 그 개국 군주를 당대 국왕이 재빨리 몰래 기습하여 납치했다'''는 기록이 남게 된다. 이는 사실상 조선 왕실이 그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을 콩가루 집안임을 대놓고 인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왕실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기록을 윤색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5. 난의 결과


조사의의 난은 한 나라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반란이라는 큰 일임에도 태종은 그리 큰 처벌을 하지 않는다. 뭣보다 건국 초기라 기틀을 확실히 잡을 필요성 때문에라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혹하게 때려잡아야 마땅한 시기였음에도[8] 말이다. 우선, 반란 주도자 조사의와 그의 아들을 포함 16명만을 처형한다. 특히, 태조의 측근이자 태조를 따라 동북면으로 갔다가 반란에 참여하게 된 정용수, 신효창, 그리고 동북면의 군사 지휘권을 갖고 있었음에도 난에 참여했던 박만 등에겐 매우 관대하게 처벌한다. 이때의 기록은 태종실록이 아닌 세종실록에 나오는데, 세종 즉위년 10월 28일자 기사를 살펴보면 "상왕(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박만은 성품이 물러서 태상(태조)의 명을 어길 수 없었을 것이며, 또 박만 등의 일을 어찌 일일이 법대로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대목이 나온다. 태종 당대의 기사엔 나타나지 않으나, 내용에 '상왕이 말하기를' 이라고 적혀 있는 바, 태종이 직접 조사의의 난에 태조가 가담했음을 시사한 것이다. 위 기사와 태종의 난 가담자들에 대한 태도, 그리고 난이 일어날 당시의 태종의 친정 과정 등을 볼 때, 조사의의 난이 태조가 주도한 것임은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6. 사극에서


거의 유일하게 다뤄진 사극용의 눈물. 실제로는 이성계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지만 이 드라마의 조사의신덕왕후에 대한 은혜를 갚는다는 차원에서 조사의가 이성계의 뜻을 받든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조사의가 난을 일으키고 이성계가 동의해준 느낌이다. 그리고 전쟁의 전개도 이방원의 친정군은 서북면에서 조사의의 주력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와중에 조영무가 이끄는 별동대가 이성계의 본진인 함흥을 툭툭 건드리는 그림으로 나온다.
여전히 여진족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성계에게 여진족이 호응하려고 하나 이를 파악한 하륜이 명나라로 직접 가 황제를 만나 여진족을 압박해달라고 요청하며, 황제도 이를 받아들여 결국 여진족은 물러난다. 믿고있던 여진족의 지원이 순식간에 끊기자 애초에 수적으로 열세이던 반란군은 기세가 높다는 걸 이용해 얼른 결판을 내려고 하나 조정에 포섭된 박만의 배신으로 조사의는 사로잡히며, 본거지 함흥도 이숙번 등에게 점령 당해 이성계도 완전히 손발이 떨어져나가는 신세가 된다.
결국 이성계는 마지못해 궁궐로 돌아오며, 조사의는 난을 주동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한다. 죽기 직전 조사의는 이방원의 추후 행보를 예견하는 독설을 퍼부으며, 그의 말처럼 이방원은 본격적인 외척 박살에 나선다.

[1] 그리고 이들은 함흥차사 전설의 주인공이 된다.[2] 신덕왕후의 친가는 곡산 강씨(황해도 곡산군), 외가는 진주 강씨(경상남도 진주시)다.[3] 할아버지 조변이 상장군까지 지냈을 만큼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다.[4] 성종의 왕후였던 폐비 윤씨가 벌인 주술서 사건으로 휘하 나인들이 대신 처벌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모시는 상전을 중심으로 내관과 나인들이 일종의 계파를 형성하기도 했기에 이러한 처벌은 '부하에게 내려진 불명예는 곧 직속상전인 해당 인물의 불명예'라는 인식의 발전이었다. 또한 계파 자체의 분위기를 음울하게 만들어 그 인물에게도 간접적으로 타격을 주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계급이 있고 상전을 위해선 경우에 따라 목숨까지 바친다곤 해도, 휘하 내관 및 나인들은 상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면 남은 동료들이 말만 겉으로 꺼내지 않을 뿐 분위기가 좋을리 없었다.[5] 실제로 차별대우 받은 이유는 일단 인구가 적고 농업생산량도 낮은데다가 해상 조운으로 한양에 세금을 보내기가 힘들어서 세금도 거의 걷히지 않는 땅이고, 충돌이 잦은 국경지대인데다가 험지라서 타 지역과의 인적, 물적 교류도 적은 지역이었다는게 주요 원인이다. 함경도 지배계급의 자제들조차 유학 공부를 맘놓고 하기 힘든 환경이니 함경도 출신의 대신이 배출돼서 고향을 챙김받는 것도 힘든 악순환.[6] 개경 수비는 장인인 민제를 수성 도통사(守城都統使)로 삼아 맡겨 두었다.[7] 다만 원래는 주력군의 중앙 지휘부에 있어서 주력군을 격파해야만 사로잡을 수 있는 총사령관이 주력군과 떨어져 별도의 장소에 있다는거부터 태조의 건강 상태가 직접 싸우는건 물론 지휘/행군조차 못할 지경이란 뜻이라, 패배하고 사로잡힌건 커리어에 악영향이 될 사유까진 아니다.[8] 실제로 건국 초기에는 반란이 일어나면 유독 심할 정도로 처참하게 때려잡는게 기본이였고 이는 왕을 위협할 수 있는 합법적인 힘을 지닌 개국공신들에게도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조선과 비슷한 시기 건국한 명의 홍무제는 유독 더욱 잔인하게 반란을 진압하고 공신들을 숙청해댔다. 조선도 건국 초 왕씨 몰살이라는 대학살을 벌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