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1908)
박영선은 1908년 7월 27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부친을 따라 만주 흥경현(興京縣)으로 이주하여 중국인 학교를 다녔으며, 졸업 후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의 중국어 통역사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1932년 8월 청원(淸原)에서 패전한 뒤 신빈현 왕청문에서 재기를 계획하고 있던 양세봉이 일본 군사경찰과 경찰의 습격으로 전사하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당시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 국민군 제2집단군에 입대하여 계속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항일전에 참전하였고, 8.15 광복 무렵엔 중국 국민군 구국군 독립제1사단 제1사단장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군준비사령부 사령관으로 건군에 이바지하였으며, 반민특위의 반민탐정위원장(反民探偵委員長)으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당시 33개 민족조직을 규합해 한족회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제 해산된 뒤, 그는 현실에 좌절하여 매일 술에 쩔어지내며 자식과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불량가장으로 전락했다. 박영선의 딸 박명아씨의 회고에 따르면, 9남매가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산으로 가! 산으로” 하는 어머니의 외침만 들리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허겁지겁 뛰쳐나와 집 뒤에 있는 우이동 산골짜기로 도망을 쳐야 했다고 한다. 이후 밤새도록 산속에서 공포에 떨다 집으로 돌아오면 포탄 맞은 전쟁터처럼 온 집안이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아내가 우이동 계곡을 찾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돈을 모았지만, 그는 그 돈을 긁어 가지고 나가 술을 마셨다. 남은 식구들은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박영선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분이었다"고 두둔했는데, 박명아씨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무척 원망했다고 한다.
그렇게 매일 불우하게 지내던 박영선은 1994년 7월 22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선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박영선의 딸 박명아 씨는 2002년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다룬 에세이 <아버지는 태극기를 물려주지 않았다>를 출간했다. 그녀는 어린시절 현실에 좌절한 부친의 폭력에 시달렸고, 자신을 좋아하던 친구의 오빠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유신정권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심각한 정신착란에 시달려 자신을 칼로 찌르려 드는 일까지 겪다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켜야 했다.
이후 그녀는 집안을 꾸려가기 위해 가정부생활을 하기도 하고 외판사원 일도 해보았지만 살림은 더욱 어려워져만 갔다. 결국 스스로 당시 고급요정으로 이름난 삼청각에 들어가 기생 노릇을 하다가 일본 거래처 사장이며 자신보다 마흔다섯살 많은 오토 씨의 현지처가 되었다. 그녀는 이후로 '독립운동가의 자식이 다 늙은 일본인의 현지처가 되었다'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에세이를 출간하면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힘을 쏟고 싶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