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형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차경신의 남편이다.
2. 생애
박재형은 1889년생이며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화리 출신이다. 그는 1905년 5월 하와이로 이민간 뒤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1910년 11월 30일 시카고에서 대한인국민회 산하 지방회가 설립되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1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대한인 국민회(大韓人國民會) 로스앤젤레스지방회(羅省地方會)에서 활동하였다. 동 지방회에서 1911년 평의원과 서기 겸 대의원, 8월 로스앤젤레스 한인학생기숙소 발기인, 1912년 동 지방회 대의원, 1913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법무 겸 자치규정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 6월 로스앤젤레스지방회 부회장 겸 재무로 선임되자, 지방총회 법무를 사임하였다. 1914년 지방회 총무 겸 학무, 1915년 5월 재무, 1916년 9월 법무, 1918년 총무 겸 서기를 역임하였다. 1919년 지방회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으나 7월 임원 총사퇴로 새로 임원을 선정하자, 학무로 선임되었다. 8월부터 10월까지 국민회 산하 로스앤젤레스 파출소 위원, 1920년 12월 국내 한인들의 구제를 위한 구제금 모집 지방위원, 1921년 5월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로스앤젤레스 지방위원으로 북간도에 구휼금과 인구세를 보내기도 하였다.
1924년 11월 황성택 등 5인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국어학교 설립을 위한 실행위원과 교섭위원, 1925년 로스앤젤레스 조국동포 기근구제회 재무로 활동하였다. 1927년 동 지방회 재무, 1928~1929년 구제원, 1929년 나성국어학교 교육위원, 한인아동교육기관 기성 발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동 지방회 회장이 되자, 2월 광주학생운동 후원을 위해 로스앤젤레스한인공동회를 조직하고 재무위원이 되어 후원금을 모집하였다. 1931년 1월 나성공동회 국어학교 교육위원 겸 교육부 재무로 활동하였고, 1932년 5월 대한인국민회에서 조직한 상해사변(上海事變) 임시위원부 수전위원(收錢委員)이 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1933년 동 지방회 부회장,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특연을 위한 청연위원, 나성공동회 국어학교 교육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동 지방회 부회장과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 통신원, 1936년 지방회 부회장, 재미한인사회 발전책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동 지방회 집행위원 겸 구제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1월에는 대한인국민회에서 중앙상무위원회 산하에 시사위원회를 설립하자, 최진하(崔鎭河)·한재명·김강과 함께 시사위원으로 선정되어 국민회 발전책과 재미한인 활동방침을 연구하였다. 1940년 동 지방회 집행위원 겸 총무, <신한민보> 식자기계 의연모집 수전위원, 1941년 지방회 집행위원장과 국민회 중앙부의 중앙집행위원 겸 구제위원이 되어 지방회와 총회에서 동시에 활동하였다.
1942년과 1943년 지방회 실업위원, 1942년 국민회 중앙부 감찰위원, 1943년 중앙부 후보집행위원을 지냈다. 또한 1943년 9월에는 국민회에서 선출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 1944년 국민회 중앙집행위원 겸 중앙상무부 서기, 1945년 국민회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롯그앤젤레스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7년 7월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박재형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