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수(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종수'''
'''朴鍾秀'''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58년 11월 27일
평안남도 평양부[1]
<color=#fff> '''사망'''
1951년 11월 14일
미국 하와이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종수는 1858년 11월 27일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 후 하와이로 이주했으며, 1914년 6월 10일 하와이 오아후섬 가할루에서 박용만이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창설하자 이에 적극 참가했다. 국민군단은 독립전쟁론의 방략에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이상설이 주도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국민군단은 군단장 박용만 휘하에 군단사령부, 경리부·제복소·병학교·훈련대·별동대 등의 조직 편제를 이루었는데, 박종수는 사관학교인 병학교의 대대장과 훈련대 대대장을 역임하였다. 국민군단의 병력은 초창기 100여 명의 규모였고,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했으며, 군사훈련을 포함하여 군사학에 관련된 광범한 교육과정을 이수케 함으로써 정예 사관을 배출하는데 힘을 쏟았다.
1917년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대조선국민군단이 해산된 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 정부 지원을 맡았다. 특히 1920년대 후반 임시 정부가 재정적인 문제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자 박종수는 이 사실을 하와이 동포들에게 호소하여 독립금 마련에 일조하였다.
1930년 2월 6일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독립과 민족 통일을 위해서는 임시 정부로 힘을 집중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한인협회를 창설하고, 박종수는 임시 위원을 역임하였다. 1931년 9월 19일,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 한인 교회 목사들과 청년 지도자들 중심으로 청년 통일 운동에 착수했고, 그 결과 조선소년동맹단이 창설되어 박종수도 이사원으로 참가하였다.
1934년 10월 14일 대조선독립단 통상 회의에서 국민회와 독립단의 통합을 추구하고, 아울러 독립단에서 운영하던 국어학교를 ‘우성학교(又醒學校)’로 개칭하고 관리 위원 5명과 학교 운영을 맡았다. 1937년 국민회와 동지회 간 1차 합동운동 당시 국민회 측 교섭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1년 11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박종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평안남도 증산군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