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찬(1981)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로, 현역 시절 공격수 및 윙어로 활동하였다. 수원 FC의 레전드를 꼽으라고 하면 김한원과 가장 먼저 꼽히는 선수.
2. 경력
2.1. 초기 경력
박종찬은 한남대학교의 주포로 활약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이 활약에 주목한 인천 유나이티드 FC는 박종찬을 2005년 영입하였다. 박종찬은 리그 첫 경기에서부터 선발로 출장하는 기회를 얻었지만, 인천 소속으로 뛴 경기는 정작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군을 넘어 2군에서조차 부진에 시달린 그는 여수 FC라는 신생 구단에 합류했지만, 그 구단은 연고지 논란에 휩싸이는 등 굉장히 시끄러운 구단이었다. 이 팀은 FA컵 등에 참여는 했지만 2006년 내셔널리그에는 불참했고 2007년에 내셔널리그에 합류했으나 여수시가 연고지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INGNEX FC라는 이름으로 연고지 없이 원정 경기만을 치르게 되었다. 팀의 막장스러운 행정이 이어지고 월급도 제대로 못 받는 생활이 이어지는데도 박종찬은 희망을 잃지 않았고 점차 좋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 박종찬은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서 수원시청 축구단으로 이적했다.
여담으로 INGNEX FC는 이후 홍천 이두 FC로 개명하고 내셔널리그에 계속 참여했으나 승부조작 연루와 재정난으로 해체되면서 하나의 흑역사로 끝났다.
2.2. 수원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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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FC를 상징하는 두 레전드, 박종찬과 김한원'''
김창겸 감독의 추천을 받아 수원시청 축구단으로 온 박종찬은 곧 팀의 주포로 성장해서 멋진 활약을 선보였다. 그가 합류한 직후 수원시청은 선수권대회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후에도 수원시청에서 세 번의 왕좌에 앉는 데 공헌했다[3] . 2012년에는 내셔널선수권대회에서 양동현에 밀려 아쉽게 득점왕을 놓쳤으나 출전 시간 때문이었고, 득점 수 자체는 동률이었다.
2009년부터는 동갑내기 '''김한원'''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들은 수원 FC 공격을 이끄는 기둥이었고, 내셔널리그 최고 수준의 선수들로 높은 평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프로에 대한 열망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마침내 2013년 승강제 시행을 앞두고 수원시청 축구단이 '''수원 FC'''라는 이름으로 변경하며 프로 진출을 선언하면서 이들에게도 프로 재도전의 기회가 다시 왔다. 박종찬은 두려움과 가정에 대한 압박으로 이미 30줄이 된 상황인지라 은퇴를 고려했지만, 팀의 만류로 프로 도전에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챌린지에 합류한 수원 FC에서 박종찬은 여전히 팀의 주포였다. 당시 챌린지 득점왕은 이근호와 정조국의 2파전 내지는 여기에 양동현이 합류하는 것이 예상됐지만, 박종찬이 예상을 깬 득점 페이스로 치고 올라가자 비록 스타일은 다르지만 리오넬 메시-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신계 2인방에 도전하는 라다멜 팔카오의 모습이 연상된다고 하여 '''챌린지 팔카오'''라는 별명을 획득했다. 보그단 밀리치, 김한원 등과 함께 한 박종찬은 챌린지 첫 시즌 11골 1도움을 기록하면서 팀 내 득점 1위, 양동현과 함께 리그 득점 공동 5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나이를 속일 수는 없었고, 박종찬의 활약도는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2014 시즌에는 3골 1도움 정도에 그치며 로테이션 멤버로 밀려났고, 2015 시즌에는 입지가 더욱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커로 가끔 기회를 얻었고, 투혼을 불태우며 팀의 클래식 도전을 지원했다. 또 베테랑 선수의 입장에서 줄 수 있는 도움 역시 있었다. 그 결과 수원 FC는 처음으로 1부리그에 도달했고, 비록 주연은 아니었지만 박종찬은 조연으로 수원의 승격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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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이 종료된 후, 박종찬은 자신이 클래식에서 버티기는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며 은퇴했다. 그리고 시시 곤잘레스에 이어 하이메 가빌란을 영입하는 등 파격 행보가 이어지며 주목을 받은 수원의 레전드로, 만원 관중의 앞에서 은퇴식을 치르며 수원을 떠났다. 경력만 보면 지도자로의 전환도 충분히 수월한 박종찬이지만, 가정을 위해서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걷기를 선택했고, 그렇게 박종찬은 모두의 박수를 뒤로 하고 축구계를 떠났다. 그러나 박종찬의 이름은 수원 FC의 역사에 남았고, 도전의 아이콘이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기술적으로 훌륭한 기량을 갖추고 있으며 슈팅의 타이밍도 상당히 빠르다. 간결한 플레이를 즐겨 하며, 이러한 플레이가 먹혀 들어갈 때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선수 개인의 스피드도 상당히 좋았고, 노장이 되어서는 스피드가 떨어지면서 강점이 약해졌으나 그의 기술 능력과 특유의 템포는 여전하여 조커로 팀에 공헌했다.
4. 여담
- 박종찬의 형은 전남 드래곤즈, 경남 FC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1979년생 박종우 선수로, 런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박종우와는 동명이인이다.
- 1971년생의 박종찬 선수도 있었고, 이 선수는 일화 소속으로 잠시 뛴 적이 있다.
- 김한원처럼 프로 첫 팀이 인천 유나이티드 FC였다. 두 선수 모두 인천 시절에 주전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김한원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1] 네이버에서는 10월 9일, 다음에서는 10월 2일로 나온다.[2] 이후 홍천 이두 FC로 구단명 변경[3] 내셔널리그 1회와 내셔널선수권대회 2회. 리그 준우승도 두 차례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