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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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포지션은 공격수였으며, 2003년 안양 LG 치타스에서 데뷔해 2020년까지 뛰었던 스트라이커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2.2.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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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최고 스트라이커로 연령별 대표팀에서 큰 활약을 펼쳤던 정조국은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고 2002 한일월드컵 대회 당시 대표팀 훈련장에서 선배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진행하였다.[2] 히딩크 감독은 이들을 '한국 축구의 미래'라고 표현하며,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회 폐막까지 훈련 도우미로써 대표팀 경험을 쌓도록 도와주었다.
2006년 1월 18일 UAE와의 친선 경기를 통해 드디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2006년 9월 6일, 대만과의 2007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여 팀의 8-0 승리를 이끌었다.
2008년 10월에는 9개월 만에 국가대표 예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으나, 부상으로 하차했다.
2009년 1월, 이란전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소집되었고, 5월에는 부상으로 하차했다.
2011년 아시안컵 국가대표팀 예비 명단에 들어갔으나 부상과 피로 누적을 염려해 최종 명단에서 탈락하였다.
2011년 6월 3일 세르비아 전 평가전 출전을 끝으로, 더이상 대표팀에 소집되고 있지 않다.
'''성인대표팀 13경기 4득점'''
연령별 대표팀부터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국내 정상급 실력을 가진 스트라이커임에는 분명하지만, 정작 프로 데뷔 이후 성인대표팀에서는 많은 경기를 못 뛰었고, 메이져 대회 발탁은 전무했다.[3]
아마, 정조국이 최고의 모습을 보이던 2000년대 후반은 근 몇년동안은 역대급 시기라고 불릴만한, 걸출한 공격수 스타 플레이어가 넘쳐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당시는 꽃미남 슈퍼스타 안정환, 이동국부터, 천재 신예 박주영, 이근호, 이외에도 조재진, 등 공격수 자원이 워낙 넘쳐나던 시절이라, 국가대표팀 승선이 쉽지 않은 시절이기는 하였다.
2.3. 기록
2.3.1. 통산 K리그 기록
2020년 통산 150 공격포인트를 달성하였다. 통산 득점은 121골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K리그 통산 최다 득점 5위의 기록이다.
2.3.2. 대회 기록
- FC 서울 (2003 ~ 2010 / 2012 , 2014.9 ~ 2015.12)
- K리그1 : 2010 , 2012
- K리그 리그컵 : 2006 , 2010
- 대한축구협회 FA컵 : 2015
3. 지도자 경력
2020년 시즌 종료 후 선수생활을 은퇴하자마자, 자신이 마지막으로 몸담은 제주 유나이티드 FC의 공격코치로 부임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청소년 시절에는 타이밍을 완벽하게 갖고 노는 공격수로 기대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꽤 희귀했던 타입. 발이 빠르거나, 눈을 즐겁게 하는 개인기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신체조건은 좋지만 그렇게까지 몸싸움을 즐겨하던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뛰어난 공간 침투력과 침착성을 살린 엄청난 결정력으로 골을 노리는 정통파 스트라이커이다.
이와 같은 엄청난 골결정력과 강력한 슛팅으로 ''''패트리어트'''' (미사일)라는 별명으로 현재까지도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4]
상당히 지능적이고 정석적인 플레이를 즐겨 하는 선수이다. 고전적인 골잡이에 가까우며 오프사이드 라인 침투나 수비수 교란에도 능하다. 슈팅은 잘 차지만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의 영향력은 떨어지는 편이기 때문에 동료들의 조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지능적인 편이기 때문에 공격형 미드필더, 섀도우 스트라이커, 인사이드 포워드 등 호흡이 맞는 동료가 있으면 동료를 잘 이용해서 좋은 활약을 보여 준다.
한때 움직임이 없고 수비 가담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2010 시즌 이후로는 수비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편이며 데얀과의 호흡이 일품이었다. 원톱보다는 투톱에서 제 위력을 발휘하는 공격수.
유망주 시절 당시 한국에서 독보적인 몇몇 재능을 포함해 여러 가지 재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초대형 유망주로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기대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전성기라 할 수 있는 광주시절 단 한 시즌에는 놀라운 골을 많이 넣었지만 나머지 시기에는 경찰청에서 뛰던 2부리그 시절이나 분유캄프 한 시즌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신감 있게 뛰면서 득점을 책임지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 유연함이 부족해서인지 자잘한 부상을 많이 당한 편이고, 좀 소극적인 성향이나 민첩성과 스피드의 부족 등이 아쉬웠다.
그러나 축구계나 팬들 사이에서 인성이나, 품성, 리더쉽 등에 대해서도 상당히 평이 좋은만큼, 선수생활이 후반기에 접어들어갈수록 팀을 아우르는 라커룸 리더로서의 역할을 두루두루 인정받았다.
5. 여담
- 구단 컨텐츠의 일환으로 선수 본인이 이 문서를 읽었다! 프로 데뷔 전 문단에서 연속이라는 단 5개 "연속" 대회 득점왕으로 라고 연속이라는 단어가 빠져서 아쉽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6. 관련 문서
[1] 김성은과 결혼하면서 개종했다[2] 정조국, 여효진, , 4명이었다.[3] 그나마 프로 데뷔이후 참가한 대회를 보자면 2006 도하 아시안게임정도가 있다.[4] 패트리어트는 미사일 이름말고도, '애국자' (Patriot)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름이 '조국'인 것이 한 몫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