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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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창빈은 1890년 8월 17일 평안도 순천군 원하면 창중동(현 평안남도 은산군 신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감리회 신자로, 1919년 2월 28일 경성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뒤 감리교회 목사 이윤영(李允榮)에게 전달하고 독립만세시위계획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이후 금융조합 서기 황경환(黃慶煥)·천도교 간부 유경운(劉景雲)·신창면 면장 김삼봉(金三鳳)·의사 함태호(咸泰鎬)·김찬수(金贊洙)·면내 유지 이수홍(李秀弘)·여전도사 김온유(金溫柔)·청년대표 이대근(李大根)·김순효(金純孝) 등 3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는 이들과 여러차례에 걸쳐 회의를 거듭한 끝에 거사일자를 신창 장날인 3월 5일로 결정하고, 총책임자를 이윤영, 그리고 2번·3번 책임자를 황경환·유경운으로 각각 결정했다. 또한 면장 김삼봉은 면사무소에 대한독립운동 준비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장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선언문·선전문·동원장 등 10여종의 격문을 인쇄하여, 먼저 일본 측에 통고하고 각면에도 배포하였다.
특히 총책임자인 이윤영은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교사이던 아내 이마대(李瑪大)에게 거사 당일의 합창단으로 동원하기 위하여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윽고 3월 5일 오전 10시, 3천 5백여명의 군중이 면사무소에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는데, 독립선언서 낭독, 독립연설, 애국가 봉창, 만세 삼창의 순서로 식이 진행되었다.
이때 그는 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이 끝난 뒤 대대적인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순천군에서 포교 활동을 전개하다 8.15 광복 후 북한이 급속도로 공산화되자 서울로 월남했고, 1969년 11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박창빈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