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은

 


성명
박치은(朴致恩)
생몰
1897년 2월 7일 ~ 1954년 12월 4일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부 임원면 청호동[1]
(현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청호동)
사망지
부산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치은은 1897년 2월 7일 평안남도 평양부 임원면 청호동(현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청호동)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이 곽치문과 결혼했고 1919년 8월 추도일(秋道一)·강희성(姜熙成) 등 1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부인청년단(大韓獨立婦人靑年團)을 조직하고 부단장을 맡았다.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부인청년단은 독립운동자금의 모집과 독립투사들에 대한 편의 제공, 투옥지사와 가족들의 후원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그녀는 1919년 8월 무렵 남편 곽치문, 나진강, 김국홍 등과 함께 국민향촌회(國民鄕村會)를 조직했지만 회원들이 체포되면서 활동이 위축되자 다시 그해 11월에 대한독립대동청년단(大韓獨立大同靑年團)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중국 관전현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광복군사령부(大韓獨立光復軍司令部)와 연계하여 권총을 입수한 뒤 대동군의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수행했다. 그녀는 이 단체에서 무기와 군자금의 보관을 담당했으며, 1920년 7월경 평양의 관공부서를 폭파하기 위해 잠입한 안경신 등 대한광복군 총영 대원들에게 자신의 집을 은신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5월 대동청년단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남편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고, 1922년 4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그녀는 감옥에서 거의 나체가 된 채로 고문받다가 태어난 지 한달 밖에 안 된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형사들은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년이 새끼 귀한 줄은 아느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아기를 안고 온 친척은 3일동안 유치장 밖에서 애걸복걸 해보았지만 왜경은 이들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아기가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 이야기는 “산모를 나체로 심문, 어미가 정신없이 매 맞는 중에 아기는 경찰서 문 앞에서 죽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후 부산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4년 12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치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녀의 유해는 1990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대동군 임원면 청호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