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군면 통폐합
府郡面統廢合
1. 개요
1914년 4월 1일,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된 대규모의 행정구역 개편을 일컫는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했다. 백과사전 등에서는 주로 '''군면 통폐합'''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 행정구역 명칭과 영역, 경계선의 틀은 이 부군면 통폐합을 통해 마련되었다.
그러나 실제 생활권을 헤아리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고을들을 통합한 부분이 있었고, 도시화된 지역과 농어촌 지역을 분리하는 '도농 분리제'를 도입하였다. 이 도농 분리제는 81년 동안 새로 생기는 시는 기존 군과 분리되도록 행정구역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문제가 되었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일본식 지명이 여러 생겼으며, 고유어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본래 지명이 많이 사라졌다. 도농 분리제는 1995년에 도농복합시 제도가 도입되면서, 일본식 지명은 광복 이후 일본식 지명을 바로잡고 본래 지명으로 되돌리거나 새로운 지명을 짓는 노력이 계속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부군면 통폐합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있어 지역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 부군면 통폐합 때 생활권이 생판 다른 괴산군과 청안군을 통합했다가 결국 청안군의 일부를 계승한 증평군이 2003년에 분리되었다. 그러나 청안군에 소속되었던 영역 중 나머지 절반이 증평군으로 편입되지 못한 상태다.
- 무안부를 목포부와 무안군으로 나눴다가 1995년 이후 목포시와 무안군의 통합이 끊임없이 시도되었는데, 통합 반대 측(주로 무안군 지역)이 허위 선동과 폭력까지 일삼기도 했다.
- 시흥군·과천군·안산군을 통합했다가 서울 편입[1] 과 분리 승격[2] 이 계속되어 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시흥군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진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가 생기기도 했다. 안산군이 부활한 現 안산시, 과천군의 중심지에서 부활한 現 과천시도 옛 영역들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한 관계로 행정구역이 쪼개져 있다. 예를 들어 안산시 생활권인 정왕동이 정작 시흥시에 들어가 있다.[3] 옛 과천군의 영역 중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곳은 그렇다 하더라도 나머지 부분은 안양시[4] , 군포시, 과천시로 쪼개져 있고 통합 논의만 나오는 실정이다. 오리지널 시흥군 영역도 서울특별시 서남부와 경기도 광명시로 분리된 상황이다.
- 남양군과 수원군을 통합한 결과, 동탄에서 제부도까지 화성시가 관할하고 있다. 현재 수원, 오산, 동탄 시가지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구 남양군 지역이 독자 중심지 없이 저만치 떨어진 수원과 오산, 그나마 가깝지만 남양군 소속은 아니었던 향남에 생활권을 기댄다. 때문에 구 남양군 지역은 같은 시의 동쪽 끝의 동탄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고 메타폴리스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낙후된 농촌 지역으로 남아 있고 독자 생활권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남양읍으로 시청이 이전하고 남양뉴타운까지 개발되고 있지만 규모는 겨우 구색이나 맞추는 수준이다. 오히려 남양읍이 아닌 향남읍이 옛 남양군의 중심지 구실을 하는 실정이다.
1908년에는 세 번에 걸쳐 여러 군현들이 통폐합되었다. 일제에 의해 둘 이상의 독자적인 고을들이 통합된 사례로는 최초다. 아래의 표가 조정 대상과 결과다.
1909년에는 황해도에서 여러 군현들이 통폐합되었다. 황해도는 이때가 부군면 통폐합보다 여파가 더 컸다. 이 조치는 칙령 제2호의 발령으로 인한 결과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4년, 일제는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본격적으로 대규모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군면 통폐합이다. 현재 남한의 행정 구역은 이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앞서 1911년에 시흥군[19] 과 같은 일부 지역은 동리(洞里) 통폐합이 진행되었다.
도농 분리제가 최초로 도입되었는데 1995년에 도농복합시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시대까지 행정 기능이 없고 단순한 지역 구분이었던 면(面)에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설치하고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 것도 바로 부군면 통폐합 후 면제를 실시하면서부터로, 여러 모로 현 대한민국 행정구역의 기틀이라 할 수 있다.
통폐합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싶다면 내고향 역사 알기 참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중 지도를 참조해도 좋다. 또한 보다 자세한 변동 사항을 알고 싶으면 1917년에 발행된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을 참조해도 좋다.
2. 의도
1914년 4월 1일자로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조선 전국에 걸친 행정구역 개편의 목적은 조선 통치의 효율화였다.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얻은 방대한 조선 국토의 자료가 바탕이 되었다.
조선 시대 고을들은 이미 1906년에 크게 월경지 정리를 한 번 거쳤음에도 넓이와 인구 편차가 너무 심하게 났기 때문에 각 고을의 규모를 최대한 동등하게 맞추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통합 조치가 필요했을 수 있다.[20] 너무 작은 고을이 많으니 통폐합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다산 정약용도 부군면 통폐합을 100년 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다.'''[21] 또한 군이 아닌 개별 읍면을 시로 승격시키는 '도농 분리제'는 미국, 일본에서 시행되는 시·읍·면 자치 제도[22] 를 시행하고자 만든 밑천이라 볼 수 있고, 실제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과 대한민국 제2공화국 시기에는 시·읍·면을 기초자치단체로 두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시읍면 체제가 해외 지방자치에서는 흔한 경우다. 하지만 이 부군면 통폐합의 조치들은 폐지되는 고을의 중심지가 몰락하거나 소외되는 데 대한 해결책을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아 나름대로 각자의 지역 정체성을 갖췄던 곳들이 무시당하며 여러 곳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이후 읍면이 아닌 군을 기초자치단체로 두는 조치를 내리고, 이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 채로 지방자치제가 부활해 버리면서 더욱 크게 다가오게 되었다.
당시 행정구역 변경의 법적 근거는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도의 위치·관할구역 변경 및 부·군의 명칭·위치·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 (1913년 12월 29일 공포)이다.
읍(행정구역)/목록과 면(행정구역)/목록을 참조하면 알 수 있지만 통합 이후 폐지되어 사라진 군의 중심지였던 지역들은 거의 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쇠락하여 대개 인구 만 명 이하의 면으로 남아 있다. 예외로 수도권 지역에서 과천군과 안산군은 과천시, 안산시로 부활했고[23] , 양천군은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구로 부활했다.[24] 부평군 역시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구, 경기도 부천시로 부활했다.[25] 화성시도 사실상 구 남양군을 계승했다. 그리고 충청도에서는 괴산군과 합쳐졌다가 일부만 다시 독립한 증평군이 있다. 인구는 비록 만 명 이하이지만 군청 소재지인 청송읍을 제치고 군 인구 1위를 줄곧 고수하고 있는 청송군의 진보면도 있다. 파주군에 병합되었던 교하군 지역은 6.25 전쟁 이전까지는 군의 외곽에 불과했으나, 전쟁 이후 원래 중심지가 군사분계선과 가까워지면서 군청 및 기관들을 교하의 중심 지역이었던 아동면 금촌으로 옮기게 되었고, 이후 신도시 개발 등을 통해 파주시의 인구 60~70%가 거주하는 중심 지역으로 바뀌었다.
남한에서는 1914년 이전에 존재했던 군이 부활한 사례는 거제군(1953년), 신안군(1969년)[26] , 태안군(1989년), 기장군(1995년), 과천시, 안산시(이상 1986년)다. 現 과천시와 안산시는 원래의 과천군, 안산군의 영역을 온전히 부활시킨 것은 아니긴 하지만, 원래 각 군의 중심지에 해당되던 곳은 현재 각 시가 모두 점유하고 있다. 극히 드물지만, 북한에서는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사라졌던 군이 상당수 부활되었다. 물론 1914년 이전의 경계와 100% 일치하지는 않는다.
3. 방향
- 중, 남부 지방에 존재한 수많은 군들을 2개 ~ 4개씩 묶어 하나의 군으로 통합하였다. 함경도나 평안북도 같은 북부지방이나 중부지방의 강원도는 대부분 산간 지방이라 인구 밀도가 적어 방대한 면적의 군들이 많아서, 통폐합되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었다. 오히려 함경남도의 경우 함흥군에서 신흥군이, 북청군과 갑산군 일부를 분리하여 풍산군이 신설되기도 했다.
- 군뿐만 아니라 면, 동리(洞里)들도 몇 개씩 통합하여 하나의 면, 동리로 만들었다.
- 통합된 2개 ~ 3개의 군들 중 중심 역할을 하는 군의 명칭을 통합된 군의 명칭으로 정하였다. 통합된 군들의 규모가 대등했거나, 중심 역할이 누구인지 애매한 경우에는 두 군의 명칭에서 하나씩 따서 합성하거나, 아예 새로 짓기도 하였다. 전자의 예로는 부천군(부평군 + 인천부), 연백군(연안군 + 배천군[32] ), 후자의 예로는 평원군(영유군 + 숙천군 + 순안군) 등이 있다.
- 일본어 발음상 혼동의 우려가 있어 새로 짓기도 했다. 홍주군(洪州郡)과 결성군(結城郡)을 합한 곳은 홍주가 중심이었으므로 '홍주군'이 되어야 했으나, 같은 충남 내에 일본어 발음이 こうしゅう로 동일한 공주군(公州郡)이 있어서, 결국 두 군에서 한 글자씩 따서 홍성군이 되었다.
- 우리말 독음마저도 같은 곳이 있어서 새로 짓기도 했다. 영천(榮川)군 + 풍기군 + 순흥군에서는 영천이 중심이었으므로 '영천군'이 되어야 했으나, 하필이면 경북에 영천(永川)군이 또 있었기 때문에 영천(榮川)군을 영주(榮州)군으로 바꾸었다.
- 원래 명칭이 약간 변하거나 역사적 명칭을 끌어와 쓴 경우도 있는데, 연일군 + 장기군 + 흥해군 + 청하군에서는 연일이 중심이었으므로 '연일군'이 되어야 했으나, 연일의 역사적 이칭(異稱)인 '영일'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영일군'이 되었다.
- 철도 부설 등 교통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시가지가 발달한 지역은 해당 철도역 및 시가지의 명칭을 전체 고을의 명칭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대전군(회덕군 + 진잠군)[29] , 논산군(은진군 + 연산군 + 노성군)[30] , 김천군(김산군 + 개령군 + 지례군)[31] 등이 그 예다.
- 마찬가지로 해당 지역의 기존 중심지를 쇠락시키고 철도나 도로, 수운교통이 발달한 지역으로 중심지를 이전하는 일도 동시에 진행하였다. 경기도 광주군청이 남한산성에서 경안(현 광주시내)으로(1917년)[33] , 용인군청이 구성에서 김량장(현 용인시내)으로 이전한 것(1911년)도 이 시기의 일. 두 지역은 모두 광복 이후에도 읍을 거쳐 분동될 정도로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기존에 군청이 있었던 곳은 당연히 쇠락을 면치 못했는데 구성은 그래도 도시화가 이루어져 부활한 반면, 남한산성은 그 길로 완전히 쇠락하고 말았다.
- 면이나 동리의 명칭은 대부분 통합된 면이나 동리들의 각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들이 많다. 이를 동리(洞理) 통폐합이라 한다. 의왕면('의'곡면 + '왕'륜면), 신갈동('신'촌리 + '갈'천리) 등이 대표적 사례. 다만 시흥군과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앞선 1911년에 동리 통폐합이 시행되었다 (예 : 번대방리 + 우와피리 → 번대방리).
- 1915년에는 울도군과 제주군의 행정구역 단위명을 '도(島)'로 바꾸고(경상북도 울릉도, 전라남도 제주도), 군수(郡守)를 도사(島司)로 개칭했다. 이러한 행정구역으로서의 '도(島)'는 해방 이후인 1949년 다시 군(郡)으로(도사 역시 군수로) 명칭을 바꾸면서 사라졌다.
- 오늘날의 시(市)에 해당되는 부(府)의 영역을 시가지(또는 개항장) 일대로 축소시키고, 그 잔여 지역을 별도의 군(郡)으로 분리하거나 인접 군과 병합하는 이른바 도농(都農) 분리제 역시 이때 도입되었다. 경성부의 영역을 사대문안 및 용산 일대로 축소시키고 잔여 지역을 고양군에 편입시킨 것, 인천부의 영역을 제물포 일대로 축소시키고 잔여 지역을 부평군과 통합하여 부천군으로 신설한 것, 부산부의 영역을 부산항 일대로 축소시키고 잔여 지역을 기장군과 합쳐 동래군으로 분리시킨 것, 대구부의 영역을 오늘날의 중구 일부만 남기고 잔여 지역을 현풍군과 합쳐 달성군을 만든 것, 목포부의 영역을 목포항 일대로 축소시키고 잔여 지역을 무안군으로 분리시킨 것 등이 그 예다.
- 기존 군의 중심지가 되는 읍이나 면이 인구 5만 명을 넘으면 부로 승격시켜 원래 군과는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신설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적용되면서, 1995년 이전까지 역사적으로 원래 같은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지역인 '시'와 농촌 지역인 '군'으로 행정구역이 분리된 곳이 매우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농복합시 제도를 만들고 1995년 대대적인 시군 통합(도농 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 부와 군이 분리될 경우, 양쪽의 명칭을 다르게 부여했다. 이때 명칭을 짓는 규칙이 있었다.
① 해당 지역의 옛 이름 차용.(대전부 → 대덕군(대전의 '대'에 과거 행정구역이었던 회덕의 '덕'에서 한 글자씩 차용), 대구부 → 달성군, 광주부 → 광산군, 전주부 → 완주군(전주의 옛 이름인 '완산주'에서 차용), 진주부 → 진양군(진주의 옛 이름인 '진양대도호부'에서 차용) 등)
② 해당 지역 이름의 일부에 성(城), 주(州), 원(原) 등을 붙여 변형.(함흥부 → 함주군 등) 이 글자들은 지명에 예로부터 많이 쓰여온 글자들이다.
③ 해당 지역의 유명한 것의 이름을 차용.(평양부 → 대동군(평양 한가운데를 흐르는 대동강에서 차용))
④ 기존 지명에 신(新)자를 붙임.(의주부 → 신의주부와 의주군으로 분리)
단, 분리되어 나가는 부가 원래 군의 중심지가 아닌 경우(개항장, 신흥 교통취락 등)에는 분리되는 지역의 명칭을 그대로 부(시)의 명칭으로 쓰고, 군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② 해당 지역 이름의 일부에 성(城), 주(州), 원(原) 등을 붙여 변형.(함흥부 → 함주군 등) 이 글자들은 지명에 예로부터 많이 쓰여온 글자들이다.
③ 해당 지역의 유명한 것의 이름을 차용.(평양부 → 대동군(평양 한가운데를 흐르는 대동강에서 차용))
④ 기존 지명에 신(新)자를 붙임.(의주부 → 신의주부와 의주군으로 분리)
단, 분리되어 나가는 부가 원래 군의 중심지가 아닌 경우(개항장, 신흥 교통취락 등)에는 분리되는 지역의 명칭을 그대로 부(시)의 명칭으로 쓰고, 군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 수원군, 광주(廣州)군, 강릉군, 충주군, 공주군, 안동군 등 당시 면적이 비정상적으로 넓었던 고을들의 월경지나 땅거스러미, 기타 원래 소속 중심지보다 인근 군이 더 가까운 지역들은 인근 군으로 편입되었다. 경술국치 이전인 1906년에 이루어진 월경지 정리 때 정리되지 못한 곳을 마저 정리한 것이다. 수많은 고을들의 정체성과 실제 생활권을 무시하고 무분별한 통합을 강행하는 성격이 강했던 부군면 통폐합이었지만, 비정상적으로 넓은 군들의 땅을 이관하는 이 조항만은 매우 개념적인 일이었다.
4. 개편 사항
아래의 도(道)별로 정리된 행정구역 개편 사항을 보면 비교적 인구가 많고 면적이 작은 군이 많았던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역의 군이 많이 통폐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으면서 면적이 넓은 강원도, 평안북도, 함경도 지역은 통폐합된 곳이 적은 편이다.
아래 목록에서는 군 단위의 통합, 폐지 및 분할 내역만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image]
부군면 통폐합 직후 1914년 4월 1일의 행정구역도. 수도권 지역과 휴전선 이북을 제외한다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계선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4.1. 경기도
4.2. 강원도
- 춘천군(도청 소재지), 원주군, 강릉군[52] , 삼척군, 양양군, 통천군[53] , 횡성군, 평창군[54] , 영월군, 정선군[55] , 홍천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56] , 평강군, 회양군은 큰 변동이 없었다.
4.3. 충청북도
4.4. 충청남도
4.5. 경상북도
4.6. 경상남도
4.7. 전라북도
4.8. 전라남도
- 광주군(도청 소재지), 해남군, 강진군, 장흥군[91] , 보성군[92] , 장성군, 광양군, 영암군, 진도군[93] , 완도군[94] , 고흥군[95] 순천군[96] , 함평군[97] 은 큰 변동이 없었다.
4.9. 함경북도
4.10. 함경남도
4.11. 평안북도
4.12. 평안남도
4.13. 황해도
- 해주군(도청 소재지), 신계군, 평산군, 곡산군, 장연군, 재령군, 서흥군, 봉산군, 수안군, 안악군, 황주군, 옹진군[110] , 송화군[111] , 은율군[112] , 신천군[113] 은 큰 변동이 없었다.
5. 관련 문서
- 조선/행정구역 : 조선 개국 초기부터 1895년까지 설치되었던 조선의 행정구역에 대해 다루고 있다.
- 행정구역 : 현대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에 대해 다루고 있다.
- 북한/행정구역 : 1945년 이후 변화된 북한의 행정구역에 대해 다루고 있다.
[1] 영등포구, 관악구, 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서초구[2] 안양시, 광명시, 과천시, 안산시, 군포시, 의왕시[3] 그리고 옛 안산군의 중심지였던 수암동도 1994년까지는 안산시가 아닌 시흥시 소속이었다.[4] 이쪽은 후술할 오리지날 시흥군 영역도 포함되어 있다. 만안구 석수동, 박달동이 여기에 해당.[5] 1906년에 금왕, 대소, 감곡 등 차령 산맥 이서의 충주군 땅을 받았고, 1914년에 충주군에서 소이면을 또 받았다. 그 전까지는 음성읍과 원남면에 해당하는 지역이 음성의 전부였다. 한 마디로 지금의 음성군 땅의 과반수가 충주였다는 소리다.[6] 1906년에 대화, 봉평, 진부 등 대관령 이서의 강릉군 땅을 받았으며, 같은 시기에 동면을 정선군으로 넘겨서 정선군 신동면이 되었다. 도암면은 1906년에 정선에 편입된 뒤 1931년에 평창으로 편입되었다. 즉 현 평창군 중에서 1906년 이전에도 평창이었던 곳은 평창읍, 미탄면밖에 없다.[7] 진해구가 아니라 마산합포구의 3진(진동면, 진북면, 진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8] 여기가 20세기부터 진해라고 불리었던 지역으로, 1955년에 진해시로 승격되었으며 2010년에 마창진 통합으로 인하여 진해구로 강등된 지역이다.[9] 1914년 능주군, 동복군이 화순군으로 통합.[10] 하지만 1914년 다시 갈라져서 옥과군이었던 지역은 곡성군에, 원래 창평군이었던 지역은 담양군에 편입.[11] 여기서 순천으로 편입된 지역은 현 낙안면·외서면, 보성으로 편입된 지역은 현재의 벌교읍이다.[12] 상황이 이렇다보니 군의 중심지가 보성읍임에도 상권은 벌교읍이 더 발달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게다가 1960년대 이전까지는 보성읍과 벌교읍의 위상이 동등한 수준으로 경찰서, 등기소가 벌교에도 있었다. 이후 1960년대에 시로 승격하나 싶었지만 결국 인구 5만명을 못 넘기면서 때를 놓쳐 지금에 이르렀다.[13] 지형상 피자 자르듯 3개로 나눠서 편입시키기 적당하지도 않고, 북한 치하에서 옛 함종군 대부분이 증산군으로 편성된 것으로 보아, 위의 낙안군이 딱 절반으로 갈려나간 것과 달리 함종군은 대부분이 증산에 편입되고 일부 리 정도만 강서, 용강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증산군 전체가 강서군과 통합되었다가, 북한 치하에서 증산군이 재분리되었다. 광복 기준으로 옛 함종군의 중심지는 강서군에 있으며, 북한 치하에서는 증산군에 있다.[14] 북한 치하에서 은산군이 재분리되었으며, 자산군의 일부가 평성시가 되었다.[15] 북한 치하에서 옹진군과 강령군으로 재분리되었다.[16] 북한 치하에서 송화군과 과일군으로 재분리되었다.[17] 장산곶이 있는 장'연'군(長'淵')과는 다른 곳이다.[18] 북한 치하에서 신천군과 삼천군으로 재분리되었다. 문화군이 온전하게 부활한 건 아니나, 어쨌든 옛 문화군의 중심지를 포함해 상당 부분이 삼천군으로 들어갔다.[19] 서울 영등포권과 경기 광명시. 즉, 오리지널 시흥.[20] 예컨대 서로 인접한 포항시와 경주시는 둘 다 넓이가 크고 아름다운 편인데, 포항시/역사 항목에서도 보이듯이 포항은 4개 고을(연일 / 흥해 / 청하 / 장기)이 서로 통합되어 생긴 것이기에 그 정도 넓이가 나오지만, 경주는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도 경주라는 고을 한 개였는데 고을 네 개 합친 포항보다 더 넓다. 더욱 후덜덜한 것은, 1906년 이전에는 흥해군 기계면(+기북면)과 신광면, 그리고 청하군 죽장면도 모두 경주 땅이었다는 사실. 그림을 보면 확실한 느낌이 올 것이다. 더욱 극단적으로 보자면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는 강계군이나 무산군처럼 5,000km² - 6,000km²를 넘어가는 괴물 같은 군들도 있었지만, 평택군(現 평택시 팽성읍)이나 용안군(現 익산시 용안·용동면)처럼 면적이 40km² - 50km²대에 불과한 군도 있던 상황이었다.[21] 정약용, 1817년, 《경세유표》 제2편 <천관수제> 제7장 <군현분예> 중[22] 미국의 City-Town-Village와 일본의 시정촌 제도가 바로 이것이다.[23] 그나마도 과천은 정부과천청사, 안산은 시화공단·반월공단의 영향이 컸다.[24] 옛 양천군의 경우 1963년 김포군에서 서울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가, 1977년 이 일대가 강서구로 분리된 것을 거쳐 1988년 양천구가 분리되어 오늘날에 이른다.[25] 구 부평군의 경우는 애매하기는 하나 부평군이 명칭을 바꾸면서 인천부 외곽 지역과 남양군 일부 지역을 편입한 것이 아닌, 부평군을 폐지하면서 부천군이라는 신설 행정구역이 구 부평군 지역을 인천부 외곽 지역, 남양군 일부 지역과 함께 편입하여 '''새롭게''' 편제되었고 군청도 옛 인천부의 읍치였던 현 미추홀구 관교동에 두었으니 부천군이 부평군의 온전한 후신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는 연기군과 세종특별자치시의 관계와 유사한 면이 있다. 연기군 전역과 주변 도시의 일부 지역을 편입해 '''새롭게 출범한''' 세종특별자치시의 사례와 유사하다.[26] 구 지도군이 명칭만 바뀌어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지도가 군의 중심지 역할을 회복하지 못하고 목포에 종속되어 버렸으니 좀 모호하다.[27] 예외로, 인천부는 '제물포부'로 바뀌지 않고 존치되었다.[28] '삼화'의 경우, 진남포부의 개항장 이외지역을 '삼화군'으로 분리하지 않고 용강군에 편입하면서 유일하게 부활하지 못했다.[29] 회덕군 산내면 대전리가 경부선 대전역의 부설로 근대적인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회덕군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1914년 회덕군 + 진잠군 통합 시 '회덕군'이 아닌 '대전군'이란 명칭을 채택하게 되었다.[30] 은진군 화지산면 논산리가 호남선 논산역의 부설로 근대적인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은진군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1914년 은진군 + 연산군 + 노성군 통합 시 '은진군'이 아닌 '논산군'이란 명칭을 채택하게 되었다.[31] 김산군 김천면이 경부선 김천역의 부설로 근대적인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김산군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1914년 김산군 + 개령군 + 지례군 통합 시 '김산군'이 아닌 '김천군'이란 명칭을 채택하게 되었다.[32] 한자를 白川(백천)이라고 쓴다.[33] 단, 이 쪽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서울에서 충주를 잇는 영남좌로의 길목이라 역참이 있고 장이 서는 상당히 번화한 곳이었다. 영남좌로는 일제 강점기 때 경충국도라는 이름의 신작로로 정비되어 영남대로 구간과 합쳐졌고, 광주시내에 역동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도 그 흔적.[34] 세부 개편 내용은 서울특별시/역사, 경성부, 고양시/역사 문서를 참조.[35] 북도면.[36] 도서지역.[37] 도서지역인 대부면과 영흥면을 제외한 나머지 육지부.[38] 현 의왕시 일대.[39] 1906년에 월경지 정리로 광주군에서 편입된 지역.[40] 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일대.[41] 남종면.[42] 1906년에 월경지 정리로 편입된 지역을 제외한 오리지널 안산군 일대.[43] 1986년에 안산시, 과천시 부활.[44] 1938년에 평택군으로 개칭.[45] 1936년 양화동이 먼저 경성부에 편입되었으며, 1963년 군 전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46] 이후 관인면은 1983년에 포천군으로 넘어갔으며 대신 청산면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을 받아왔다.[47] 전곡읍.[48] 이후 적성은 다시 파주군으로 넘어갔다.[49] 1908년에 양근군, 지평군 통합.[50] 1919년에 고성군으로 개칭.[51] 1963년에 경북으로 편입.[52] 임계면, 도암면(현 평창군 대관령면)은 정선군으로, 진부면, 봉평면, 대화면은 평창군, 내면은 인제군으로 각각 편입되었다.[53] 1910년에 흡곡군 병합.[54] 강릉으로부터 진부면, 봉평면, 대화면을 넘겨받았다.[55] 강릉으로부터 임계면과 도암면을 넘겨받았다.[56] 강릉으로부터 내면을 넘겨받았으나, 1945년에 남북 분단으로 홍천으로 다시 넘겨주었다.[57] 일례로 고성군의 경우 옛 간성군 지역은 남한으로, 옛 고성군 지역은 북한으로 나뉘어졌다. (다만, 옛 고성군 지역도 일부는 남한으로 넘어갔다.) 김화군의 경우도 옛 김화군 대부분 지역은 남한으로, 옛 금성군 대부분 지역은 북한으로 나뉘어졌다.[58] 1914년 충주군에서 덕산면 편입[59] 청안군의 일부 지역이었던 증평읍, 도안면이 2003년에 증평군으로 분리.[60] 충주로부터 소이면을 넘겨받았으며 앞서 1906년에는 충주의 서부 대부분을 할양받았다.[61] 법왕면, 금목면(금왕면으로 통합) 등을 포함하여 현 음성군 지역 중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구역이 음성군으로, 감물면과 율지면은 괴산군, 덕산면은 제천군으로 편입되었다.[62] 유성면(현 유성구).[63] 1989년에 태안군 복군.[64] 성동면.[65] 2012년에 세종특별자치시 설치로 폐지.[66] 장기면 일부를 연기로, 유성면을 대전으로 넘겨주었다.[67] 내성면, 법전면, 소천면, 재산면은 봉화군에, 감천면은 예천군에 편입되었다.[68] 장기군 양북면, 양남면을 경주로 넘겨주었다.[69] 1923년 상리면, 하리면을 예천에 넘겨주었다.[70] 감천면을 안동으로부터 넘겨받았다.[71] 석보면, 입암면.[72] 1915년에 울릉도(島)로 개칭. '도'는 울릉과 제주에서만 쓰였던 부, 군과 동급의 행정구역 단위명이었다.[73] 1906년에 넘겨주었던 양북면, 양남면을 장기군으로부터 돌려받았다.[74] 1995년에 기장군 복군.[75] 1908년에 진해군과 웅천군을 창원부에 병합, 1910년에 창원부를 마산부로 개칭.[76] 1953년에 거제군 복군.[77]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78] 신원면.[79] 1925년에 경남도청이 부산부로 이전.[80] 1908년에 칠원군 병합.[81] 1907년에 전남에서 전북 소속으로 변경.[82] 1963년에 충청남도에 편입.[83] 부남면.[84] 영광군으로 위도면이 이관되었으나 1963년에 다시 환원됨.[85] 1908년에 창평군에 병합된 옥과군 일대다.[86] 1969년에 구 지도군에 해당되는 무안군 도서 지역을 신안군으로 분리.[87] 1908년에 병합한 옥과군 일대를 제외한 오리지널 창평군 일대다.[88] 1908년에 화순군 병합.[89] 1915년에 제주도로 개칭, 1946년에 전라남도에서 제주도가 분리되면서 제주군을 북제주군(구 제주군), 남제주군(구 정의군 + 대정군)으로 분리.[90] 고달면 제외. 고달면은 곡성으로 넘어갔다.[91] 회천면, 웅치면을 보성으로 이관.[92] 1908년에 낙안군 일부 병합(벌교읍 등), 1914년 장흥으로부터 회천면, 웅치면 편입.[93] 도초면 등을 무안에 넘겨주었다.[94] 추자면을 제주도에 넘겨주었다.[95] 1914년에 흥양군에서 개칭하였다.[96] 1908년에 낙안군 병합.[97] 목포부로부터 엄다면, 학교면 편입.[98] 1943년에 도청 소재지인 나남읍이 청진부에 편입되어 도청 소재지가 청진부로 자동 변경.[99] 1942년 폐지 후 원산부와 문천군으로 분할 편입.[100] 1952년에 곽산군 복군(북한 한정).[101] 진남포부 중 개항장을 제외한 교외 지역(삼화면 등)을 용강군에 이관.[102] 1952년에 상원군 복군. (북한 한정.) [103] 1952년에 숙천군, 순안군 복군. (북한 한정, 순안군은 1972년에 평양으로 편입되어 순안구역이 됨.) [104] 1908년에 함종군이 폐지되고 강서군, 증산군, 용강군에 분할 편입됨.[105] 1952년에 증산군 복군. (북한 한정.) [106] 1908년에 은산군, 자산군 병합, 1952년 은산군 복군. (북한 한정.) [107] 1908년에 삼등군 병합.[108] 1952년에 연안군, 배천군 복군. (북한 한정.) [109] 1952년에 토산군 복군. (북한 한정.) [110] 1909년에 강령군 병합, 1952년 복군. (북한 한정.) [111] 1909년에 풍천군 병합, 1952년에 복군(북한 한정, 원래 명칭이 아닌 과일군으로 복군.).[112] 1909년에 장련군 병합.[113] 1909년에 문화군 병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