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비누스

 


[image]
'''휘'''
데키무스 카엘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Decimus Caelius Calvinus Balbinus Pius Augustus)
'''생몰 기간'''
? ~ 238년 7월 29일
'''재위 기간'''
238년 4월 22일 ~ 238년 7월 29일 (98일)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황제 즉위
2.3. 죽음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27대 황제. 풀네임은 데키무스 카엘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이다. 238년 4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맞서려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푸피에누스와 함께 옹립되었고 푸피에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을 때 본인은 로마에 남았다. 그러나 공동의 적이었던 막시미누스가 부하들에게 살해된 뒤 푸피에누스와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병사들에게 암살당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발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별로 없으며,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그가 137년 집정관을 맡았던 푸블리우스 코엘리우스 발비누스 비불리우스 피우스의 후손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발비누스의 가계는 3세기 내내 수많은 원로원의 정계인사를 배출한 폼페이우스 팔코 가문과 1세기 때 활동한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와 관련있는 명문가였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아닌, 기록을 통해 주장되는 내용에 의해 살펴봐도 발비누스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귀족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84년 카파도시아의 총독이었던 카엘리우스 칼비누스의 아들[1]이었다고 하며, 즉위 전까지 총 2번 집정관을 맡았다. 발비누스는 203년 또는 211년에 카라칼라 황제의 동료 집정관으로서 처음 맡았고, 213년에 두번째로 집정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당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발비누스는 아프리카를 포함해 7개 지역의 책임자를 맡았다고 한다.

2.2. 황제 즉위


238년 3월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가 아프리카 속주에서 황제를 칭했을 때, 원로원은 그들의 즉위를 승인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국가의 적으로 지정해 맞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이후 원로원은 푸피에누스, 발미누스를 포함한 2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해 막시미누스에 맞서 싸우는 군사 작전을 논의했다. 그런데 238년 4월,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두 황제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1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목숨을 잃었고,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살했다.
두 황제가 불과 한 달 만에 사망했다는 급보를 접한 원로원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콘코르드 신전에 소집된 원로원은 일상적인 업무만 처리했을 뿐 그들 자신과 공공의 안전에 대해서는 토론하기를 거부했고 겁에 질린 침묵이 한동안 좌중을 압도했다. 이때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의 의원이 동료 의원들을 무기력으로부터 일깨웠다. 그는 먼저 막시미누스가 야전군을 앞세워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조심스러운 유화책은 더이상 소용이 없다고 말한 뒤 이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용감하게 전장으로 나아가 '포악한 야만인'과 싸우거나 고문과 치욕적인 죽음을 기다리는 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 의원을 황제로 옹립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 황제 만세! 원로원은 그대들을 선출하여 행복합니다. 공화국 또한 그대들의 통치 아래 행복할 것입니다!"

원로원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에게 집정관 및 호민관 권한을 수여하고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와 최고 대사제라는 직분을 안겨줬다. 두 황제는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감사를 올리기 위해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갔다. 그러나 감사 의식은 로마 대중에 의해 방해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며 원로원이 선택한 두 황제에 더해 제3의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사람을 제3의 황제로 옹립하라고 요구했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소란스러운 군중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몽둥이와 잔돌로 무장한 군중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두 황제는 시민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당시 13세 소년이었던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리기로 했다.
이후 두 황제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이탈리아를 수호하는 문제를 떠맡았다. 발비누스는 로마에 남아서 보급을 담당했고 푸피에누스가 친히 병사들을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했다. 그런데 발비누스는 로마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실패해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걸 막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막시미누스는 아퀼레이아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던 중 부하들에게 암살당했고, 푸피에누스는 막시미누스를 따르던 병사들을 거둬들여 로마로 귀환했다.

2.3. 죽음


막시미누스가 사라진 후,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를 상대로 권력다툼을 벌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의심, 발비누스가 보여준 로마 공공질서 유지 실패 등으로 대립했고, 권력에 대한 경쟁심은 두 사람의 성격 차이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참고했던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파트너인 발비누스를 사치스러운 귀족이라고 경멸했고,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를 한미한 가문 출신의 군인이라고 깔봤다고 한다.[2] 이러한 두 사람의 권력 분쟁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두 사람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결국 238년 7월 29일, 병사들은 로마에서 카피톨리움 행사가 한창인 틈을 타 황궁에 난입했다. 이때 푸피에누스는 발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발비누스는 거부했다. 이에 두 사람은 한 방에서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방안에 난입한 병사들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진지로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살해당했고 시신은 한동안 로마 거리에 방치되다가 원로원에 의해 뒤늦게 수습되었다. 이때 발비누스의 나이는 대략 70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 친아들 또는 양자[2]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아울러 푸피에누스의 출신 역시 최근 연구 발표 등에서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 아니라고 밝혀지고 있기에 푸피에누스가 한미한 군인 출신이라고 단정짓기는 무리가 있다고 지적을 받고 있다. 발비누스가 생전 남긴 초상도안, 아내와 함께 묘사된 조각, 대리석관에서 완전 군장 차림의 군인적인 모습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가 군인황제라는 이미지를 가진 푸피에누스에 대해 문관, 민간인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대립한 것은 일종의 세불리기 및 네거티브 전략 수단으로 분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