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피에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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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 Augustus (165년 또는 170년 ~ 238년 6월 29일)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1.1. 출신 가문과 가족관계
2.1.2. 경력
2.2. 황제 즉위
2.3. 최후


1. 개요


로마의 27대 황제. 발비누스와 함께 집권한 공동 황제로, 당대 로마인들에게는 막시무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풀네임은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이며, 즉위 후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Clodius Pupienus Maximus Augustus)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귀부인 양자가 된 사람이라고 기록됐지만, 현대 서양 고대사 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 및 유물 발견들을 통해 이탈리아 태생의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와 로마 명문귀족 가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원로원 귀족 출신으로 밝혀졌다.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맞서려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명문귀족 출신의 발비누스와 함께 황제로 추대되어 막시미누스와 대결했는데, 막시미누스가 부하들에게 암살된 덕분에 내전을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발비누스와 서로를 의심하고 견제하다가 권력 분쟁을 벌였고, 얼마 안 가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1.1. 출신 가문과 가족관계


푸피에누스는 165년 또는 17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태어난 장소는 알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기록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가 페르셀리나 마르첼라라는 여인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 역사학계는 페르셀리나 마르첼라가 실존인물인지도 의심하고 있으며, 푸피에누스가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한 내용을 여러 가지 증거를 이유로 신뢰하지 않는다.
최근 연구들의 발표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이 당시 극소수로 줄어든 오래된 귀족 가문의 후예 중 제정 이후 뒤늦게 원로원에 재입성한 집안 출신으로 보고 있다. 이 발표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볼테라 출신의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와 유서깊은 파트리키 가문 태생의 클로디아 풀크라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푸피에누스의 공직 경험 과정, 푸피에누스 자녀들과 자녀들의 가계 등을 살펴보면 사실일 확률이 굉장히 높고 여러 근거 탓에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록은 설득력이 더 떨어지게 됐다.
푸피에누스는 아내 섹티아 세테길라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뒀다. 이중 장남 티베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막시무스는 푸피에누스의 어머니 가문의 성을 따랐고, 장남의 아들은 루키우스 클로디우스 티네우스 푸피에누스 바수스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즉 푸피에누스의 증손자 이름은 마르쿠스 티네이우스 오비니우스 카스투스 풀케르인데 이후의 후손들 역시 대대로 클로디우스와 풀케르를 사용한 것은 장남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푸피에누스의 외가와 이름을 통해 연관성을 맺은 증거라고 한다. 그래서 현대 연구들의 결과를 토대로 학자들은 푸피에누스가 모계 가문을 이어 받았다고 본다. 한편 차남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는 아버지와 칼을 겨눈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동료까지 지냈을 정도로 원로원 내에서 상당한 실력자였으며, 차남의 후손들 역시 장남 집안처럼 최소 4세기 이후까지 원로원 의석을 대대로 세습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또 푸피에누스의 사위 마르쿠스 울피우스 에우비오투스 레우루스 역시 원로원 귀족 태생으로 보결 집정관 경력 후 누미디아 총독을 지냈는데, 딸의 후손들 역시 원로원 의석을 계속 유지했으며 푸피에누스의 사돈 역시 원로원 귀족 태생이었다고 한다.
이런 출신 배경과 가계도 외에도 푸피에누스의 아들 두명과 사위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은 푸피에누스가 황제로 있다가 비참하게 살해당한 이후에도 로마 외곽인 티부르 등지에서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2000년대 발굴된 로마 근교의 여러 유적, 유뮬들을 통해 확인됐는데, 연구들에 따르면 푸피에누스 일가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주장한 내용과 달리 상당한 원로원 가문이라는 것이 확인된다고 한다. 아울러 푸피에누스 일가 중 친가는 푸피에누스의 부친이 원로원에 입성하기 전부터 이탈리아의 옛 에트루리아 지방에 위치한 볼테라 및 이 일대 토지를 소유한 집안이었는데, 이는 그의 집안이 외가처럼 이탈리아에서 오래되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힘을 쓰던 가문이었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따라서 이런 배경들을 토대로 봤을 때 푸피에누스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 대표되는, 고대 전승 기록의 주장대로 무작정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단정짓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2.1.2. 경력


푸피에누스의 정확한 경력은 미궁인데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기재된 그의 즉위 전 경력들도 의문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푸피에누스는 성인이 되자마자 군대에 입대해 백인대장이 되었고 대대장, 정무관을 거쳤다고 한다. 이후 푸피에누스는 비티니아, 폰투스, 아카이아, 그리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총독을 맡았으며, 220년대에는 변경 주둔 로마군의 지휘를 맡아 사르마티아족과 게르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푸피에누스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로마 폭도들에게 엄정한 법률 집행으로 가차없이 처벌해 시민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식자들에게 청렴하고 강직한 관료로 칭송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전승 기록은 이미 20세기 프랑스 출신의 고대 로마제국 후기사 권위자로 유명한 소르본 대학의 앙드레 차스타그놀 교수 등이 밝혔듯, 조직적으로 조작된 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황제들의 이야기도 날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기재된 푸피에누스의 모든 경력을 사실로 보면 안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차스타그놀 등 로마제정시대 라틴사 연구자들은 당시 로마의 영역과 행정체계, 법령, 관습, 발견된 비문 등을 종합해 살펴보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말하는 푸피에누스의 경력들에 대해 지극히 날조된 내용들이 곳곳에서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푸피에누스의 경력들 중 서방 속주 일대의 군경력(사르마티아게르만족을 상대로 거둔 승리)과 아시아 총독 경력 외에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내 다른 경력들은 죄다 "거짓말이 많아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출처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이탈리아 등지에서 발굴된 유적, 유물들을 통해 설득력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푸피에누스의 고대 전승상 경력 중 서기 207년 첫 집정관 직을 수행한 이후부터의 경력들과 게르마니아 일대에서의 전투, 아시아 속주 총독은 정확히 일치된 경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푸피에누스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아래에서의 집정관 경력 및 로마시장 수행 경력도 사실인데, 그는 234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때 황제의 추천으로 집정관에 선출됐으며, 그해에 로마 시장에 선출되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현대학자들은 고대부터 내려온 책에서의 기록 중 일부만 인정하면서 대조하는 방법으로 푸피에누스의 즉위전 경력들을 나열해 조심히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푸피에누스는 원로원 의원 아들로 태어나 로마군 대대장을 시작으로 로마군에서 군복무를 오래 한 뒤, 원로원 입성 후 여러 선출 관직을 역임하고, 게르마니아 일대에서의 전쟁 경험 중 군을 이끌면서 사르마티아족과 게르만 부족들에게 승리를 경험했다. 그 이후 집정관 직을 지낸 후 아시아 속주 총독을 경험했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때 집정관을 경험한 해에 로마 시장도 역임했다고 말한다.
이는 그와 공동황제였던 발비누스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푸피에누스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 아닌 이탈리아 원로원 귀족 출신임에도 비슷한 배경을 가진 동료 원로원 의원들과 비교해 군사업무와 행정업무 전반의 경력이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푸피에누스는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부터 급격히 줄어들던 오랜 귀족 가문 후손 출신 중 전통적인 엘리트 원로원 의원[1]였고, 즉위 전 자타가 인정하는 원로원 내의 문무를 겸비한 실력자였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런 경력과 배경들은 당시 엄청난 명문가 출신의 발비누스와 세습 원로원 귀족이면서도 실력자였던 푸피에누스가 원로원에게 공동황제로 추천받아 등극한 이유가 되는 것에 영향을 끼쳤다.

2.2. 황제 즉위


238년 3월,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맞서 싸우려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지명되었다. 이때 원로원은 두 황제가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막시미누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푸피에누스를 포함한 20명의 원로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런데 238년 4월.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두 황제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1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목숨을잃었고,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패배를 직감하고 자살했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록처럼 오현제의 후손이나 명문귀족 태생이 아니지만 당시 원로원이 가장 믿고 있는 원로급 원로원 중진이었다. 고르디아누스 1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집안 사람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소아시아 출신 그리스인의 후손으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달리 수백년째 로마시민권자였고,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세습 의원이었다. 특히, 고르디아누스 1세는 오늘날의 터키 출신의 평범한 집안 태생이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오랜 군경험을 거쳐 원로원 의원이 된 뒤, 카라칼라 시대부터 모두에게 존경을 받은 교양인이었고 로마 원로원 내 최고부자가 될 정도로 자수성가한 실력자였다. 따라서 원로원은 밑바닥부터 오랜 군경력을 쌓았고 교양까지 갖춘 문무를 겸비한 고르디아누스 1세와 세습의원임에도 군경력과 행정경력이 상당히 쌓인 고르디아누스2세를 황제로 지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두 황제가 불과 한 달 만에 사망했다는 급보를 접한 원로원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콘코르드 신전에 소집된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소식을 접한 이후 정상적인 업무만 처리했을 뿐 그들 자신과 공공의 안전에 대해서는 토론하기를 거부했고 겁에 질린 침묵이 한동안 좌중을 압도했다. 이때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의 의원이 동료 의원들을 무기력으로부터 일깨웠다. 그는 먼저 막시미누스가 야전군을 앞세워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조심스러운 유화책은 더이상 소용이 없다고 말한 뒤 이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용감하게 전장으로 나아가 '포악한 야만인'과 싸우거나 고문과 치욕적인 죽음을 기다리는 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 의원을 황제로 옹립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황제에 임명된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 황제 만세! 원로원은 그대들을 선출하여 행복합니다. 공화국 또한 그대들의 통치 아래 행복할 것입니다!"

원로원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에게 집정관 및 호민관 권한을 수여하고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와 최고 대사제라는 직분을 안겨줬다. 두 황제는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감사를 올리기 위해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갔다. 그러나 감사 의식은 로마 대중에 의해 방해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며 원로원이 선택한 두 황제에 더해 제 3의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사람을 제3의 황제로 옹립하라고 요구했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소란스러운군중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몽둥이와 잔돌로 무장한 군중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두 황제는 시민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당시 13세 소년이었던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내리기로 했다.
이후 두 황제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이탈리아를 수호하는 문제를 떠맡았다. 발비누스는 로마에 남아서 보급을 담당했고 푸피에누스가 친히 병사들을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라인 야전군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쳐들어가서 아퀼레이아를 포위했지만 아퀼레이아 수비군의 끈질긴 방어에 막혀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오랜 공성에 질려버린 병사들이 막시미누스와 아들, 근위대장 아눌리누스 등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퀼레이아 시민들은 막시미누스 일당의 머리를 확인한 뒤 성문을 활짝 열어 굶주린 병사들에게 식량을 나눠줬다. 이후 라인 군단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렇게 최대의 적수가 허무하게 사라지면서 푸피에누스의 치세는 안정되는 듯 했다.

2.3. 최후


그러나 공동의 적 막시미누스가 사라진 뒤 마음을 놓은 탓인지, 아니면 권력을 놓고 양립할 수 없던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공동황제 두 명은 서로에게 쌓인 오해, 고르디아누스 3세를 지지하는 원로원 파벌들과 엮이면서 대립했다. 푸피에누스는 발비누스와 권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엄격한 성격을 가진 그는 발비누스가 로마에서 보여준 공공질서 유지 실패를 지적했고 이는 권력 다툼의 시작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발비누스 역시 푸피에누스가 라인 방어선 일대의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병들을 포섭해 로마로 들어온 것은 자신을 암살 내지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의심해 푸피에누스를 견제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두 사람은 성격, 취향 등이 완전히 상극이었다. 또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발비누스는 푸피에누스가 군인 출신이라고 무시했다고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은 과거 공동황제들이 그러했듯, 자신이 맡은 권한의 범위를 놓고 분쟁을 벌였고 원로원 의원들도 양 파벌로 나뉘어 대립했다. 두 황제는 제각기 다른 집무실을 사용했고 서로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이런 대립 상황 속에 막시미누스를 따라갔다가 두 황제에게 투항했던 게르마니아 병사들은 이런 일련의 상황에 분개하여 그들을 죽여버리기로 결의했다.
238년 7월 29일,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은 로마에서 카피톨륨 행사가 한창인 틈을 타 황궁으로 침입했다. 이때 두 황제는 상대방의 상황이나 의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때 푸피에누스는 나중에 암살자들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발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발비누스는 이 요청이 푸피에누스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의 일부라고 의심해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두 사람은 암살자들이 방안에 들이닥칠 때까지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체포된 두 사람은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에게 '원로원 황제'라고 불리며 조롱받고, 황제의 의복을 벗겨진 채 로마 거리를 질질 끌려 다녔다. 이후 병사들은 자신들의 진지에서 두 사람을 고문하다가 게르만족 출신 근위대가 두 사람을 구하려고 달려올 것을 우려해 곧바로 죽였다. 이때 두 사람의 시신은 거리에 내던져져 한동안 방치되다가 뒤늦게 원로원에 의해 수습되었다.

[1] 과거 공화정 시대의 원로원 의원들과 제정 초중반기때의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트라야누스 같이 즉위 전부터 오랜 기간 변방에서 군 경력을 쌓았던 사람들을 말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이런 경력을 거친 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들이 원로원 내에서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