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아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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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고르디아누스 1세(Gordianus I)
'''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생몰 기간'''
158년 ~ 238년
'''재위 기간'''
238년 3월 22일 ~ 4월 12일
1. 개요
2.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2.1. 가문과 처가
2.2. 출세가도와 경력
3. 황제
4. 외모와 성격
5. 평가 및 여담


1. 개요


고르디아누스 1세(라틴어: Gordianus I, 159년 ~ 238년 4월 12일)는 군인 황제 시대를 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대항하기 위해 원로원이 내세운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공동황제는 아들이자 이름도 비슷한 고르디아누스 2세이며, 재위기간은 238년 3월 22일부터 4월 12일까지다. 보통 아들, 외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함께 고르디아누스 왕조로 분류되기도 한다.
고대전승기록 중 신뢰도가 가장 떨어지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는 외가, 처가가 모두 오현제 중 두 명의 황제 후손이라고 한 까닭에 한때 오래된 세습귀족 출신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발굴된 여러 금석문, 유물, 유적 등을 통해 고대기록상 주장된 내용들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비문에는 그가 소아시아 태생이라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고, 그의 일가는 시민권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일가에게 부여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또 처가 역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어떤 관련이 없는 집안이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1세는 오늘날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가 고향인 그리스계 로마인으로 옛 안토니우스 일가의 클리엔테스 가문 태생의 자수성가한 부자이자 원로원 내 실력자 출신이라고 현재는 소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와 그의 아들, 외손자는 이 당시 고대전승기록 내용이 아니더라도 로마 내에서 상당한 부자이자 교양인으로 명성이 대단했고, 그의 생애 역시 상당히 훌륭했다. 그래서 그의 출신가문과 경력은 명문가의 후예가 아님에도 전임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대척점에 선 원로원을 대표하는 인사 중 한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2.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2.1. 가문과 처가


본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이며 황제를 선언한 뒤에는 아프리카누스(Africanus)를 붙여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Africanus Augustus)를 존호로 삼았다. 이전까지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의 주장에 따라 외가, 처가는 오현제 중 두 명의 황제 후손이며 고르디아누스 1세 역시 제정 이전부터 대대로 세습귀족이었다고 한때 정설처럼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1세는 159년 소아시아 지방의 프리기아(Phrygia)에서 태어난 그리스계 사람으로''', 같은 해 원로원에 옹립된 푸피에누스, 발비누스나 이후 등장할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갈리에누스 부자(父子)와 달리 '''제정 이전부터 대대로 원로원 의석을 세습한 가문 사람이 아닌 원로원 의원이다.'''
이 황제의 이름 중 고르디아누스(Gordianus)는 그의 가문 조상의 기원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나톨리아 지방의 갈라티아 또는 카파도키아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고르디아누스라는 이름에서 이 사람과 그 가문의 기원이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다. 또 그의 프라이노멘(이름명)과 노먼(본관 성씨)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부계 조상들은 공화정 후기 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또는 안토니우스의 딸 중 한명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은 해방 노예의 후예 내지 안토니우스 가족들의 클리엔테스라고 하는데, 이는 소아시아에서 발견된 그의 비문에서 드러났다고 한다.
그의 집안과 가문 자체는 일단 제정 중기를 넘어선 3세기 당시 얼마 남지 않은 명문가이며 공화정 후기부터 400여 년 동안 의석을 가진 가문이라고 고대 기록에서 주장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이름과 현대 시대에 발굴된 비문 해석 이후 어느 정도 비밀이 풀렸다고 한다. 따라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존 기록들과 달리 현대 연구가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를 명문가의 후예로 보지 않는다. 아울러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안토니우스 가문과 관련된 사람의 후손으로 추측되는 또 다른 이유는 안토니우스의 직계 후손들은 프라이노멘으로 마르쿠스라는 이름을 키케로 아들이 입안해 통과시킨 법으로 못 짓는 상황인 반면, 클리엔테스 후손들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라는 이름을 넣어 사용이 가능했던 것도 있다. 또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라는 책은 3세기때 제위에 오른 여러 황제들의 경력들이 당시 로마에 없는 등의 오류 투성이고, 황제들의 가계도 역시 조작된 흔적이 많다[1]. 그래서 이 책을 기반으로 한 주장 중 상당수는 과거와 달리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앤소니 브래들리는 그동안 다른 현대 연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연구를 통해 비슷한 입장을 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와 그의 아들, 외손자는 훗날 공동황제에 오른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2]처럼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내려온 명문귀족의 후예는 아니었으며 소아시아 속주 태생의 기사계급에 속해 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즉, 고르디아누스의 집안과 가문 자체는 일단 제정 중기를 넘어선 3세기 당시 얼마 남지 않은 명문가이며 공화정 후기부터 400여 년 동안 의석을 가진 가문이라고 고대 기록에서 주장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며, 그는 이 시대 등장한 기사계급의 신참자 원로원 인사였던 것이다.
사실 제정 시대에 이르게 되면서 공화정 시절부터 의석을 대대로 가진 명문가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고, 남아 있는 가문들 역시 과거처럼 위세를 떨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속주 출신으로 원로원에 입성한 이들은 계속 늘어났는데, 제국 동방의 그리스, 소아시아 일대 출신 신참자들은 여러 속주 중 원로원 진출이 꾸준했고 많았다. 당장 이전의 세습왕조인 세베루스 왕조만 보더라도 왕조를 개창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본인 대에 원로원에 입성한, 이탈리아계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이었고, 세베루스 시대에 이르러 원로원이 인위적으로 재개편될 당시 많은 수를 차지한 사람들은 대개 제국의 동방, 특히 그리스와 소아시아, 레반트 일대였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당시 원로원의 이런 시대적 흐름처럼 고르디아누스 1세 역시 본인 대에 이르러서야 원로원 의석을 꿰차고 자녀에게 물려주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문제가 많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의 어머니는 울피아 고르디아나(Ulpia Gordiana)라고 하며, 그는 외가를 통해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아내 파비아 오레스틸라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증손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르디아누스 1세의 어머니와 아내가 진짜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어받은 친척인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증손녀인지에 대해서 오늘날 현대 사가들은 이 역시 모두 거짓이며, 이런 여성들의 이름들은 이 저서를 지은 이들이 만든 허구의 인물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프랑스의 역사가 크리스티안 세티파니는 이 분야에 대한 조사를 많이 했는데, 그는 연구를 통해 고르디아누스 1세 가계를 분석했다. 이 학자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가족들은 부계와 모계 중 어느 곳에서도 트라야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후예라는 증거가 없고 여타 다른 로마 귀족의 후예도 안 보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오히려 고르디아누스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가 셈프로니우스 가문 출신인 셈프로니아 로마나[3]라는 것을 언급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그와 현대연구자들은 그의 모친 또는 조모가 진짜 셈프로니우스 가문인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믿을 수 없는 이 기록에서는 상술한 것처럼 그의 아내이자 고르디아누스 2세의 어머니로 주장되는 파비아 오레스틸라라는 인물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1세의 부인은 전직 집정관 마르쿠스 안니우스 세베루스의 자녀로 추측되는 로마 내 상류층 출신이거나 그리스 혈통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여성인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좋은 집안 태생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1남 1녀 또는 1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이중 이들 부부의 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Antonia Gordiana)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히스파니아(오늘날의 스페인) 태생이었던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로마 명문 원로원 가문 출신의 원로원 의원 발부스와 결혼했다[4]고 하는데, 고르디아누스 1세의 사위가 진짜 그 발부스인지도 의문이고, 이 역시 이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2.2. 출세가도와 경력


엄청난 부자였던 고르디아누스 1세는 상술했듯이 고대 기록처럼 타고난 원로원 내 명문가 자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당시 원로원 의원 중 대표적인 최상류층으로 기록될 정도로 성공했다. 그는 집정관까지 올랐고, 자신의 가계를 스스로 트라야누스와 그라쿠스 형제와 연결시켜 신참자였던 자신과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5]. 또 그는 원로원 입성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는 동안 세베루스 왕조 시절 내내 평판이 상당이 좋았던 인사였다.
오늘날 연구들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1세는 젊은 시절 고향 소아시아와 가까운 시리아 속주에서 군인으로 복무한 뒤 차근차근 경력을 쌓고 원로원의 일원이 된 사람이라고 한다. 이때 그는 수사학, 저서 활동, 사회공헌 등을 통해 명성을 얻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고, 성격도 완만하고 본래부터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라서 타고난 귀족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1세는 이를 기반으로 로마인들이 "명예로운 코스"라고 불리는 엘리트 코스는 죄다 지냈다. 그 결과, 세베루스 왕조 시대동안 그는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법무관, 집정관을 역임했고 집정관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엘라가발루스 시대 때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즉, 고르디아누스 1세는 3세기 무렵, 로마 원로원 가문태생은 아니었지만 자수성가한 신참자 중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귀족 반열에 올라간 사람이었다.
그래서 즉위 직전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해 로마 최고의 부자 중 한명이 됐고, 로마 7언덕 중 하나인 카일리우스 언덕(지금의 첼리오)에 위치한 유서깊은 저택[6]을 구입해 살았다. 거기에다 오늘날 ‘보르가타 고르디아니’라고 불리는 호화로운 별장도 가지고 있었다. 로마 도심에서 5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한 이 별장 저택은 라치오에 그 일부만 남아 있는데, 규모만 보더라도 세베루스 왕조 시대 동안 고르디아누스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단번에 설명해주던 곳이다. 비싼 운송료가 드는, 원산지가 다른 최고급 대리석 원기둥 200개[7]가 원형으로 회랑을 이루어 둘러진 저택으로 고급 빌라가 하나의 웅장한 형태로 되어 있고, 비싸기로 유명한 기둥들이 대저택의 안뜰을 한 바퀴 휘감은 구조였다.
고르디아누스는 소아시아 태생의 그리스계로 수백년째 로마시민권을 세습한 로마인이었지만, 제국의 중심인 원로원 내에선 신참자였다. 하지만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말단병졸에서 승진해 대대장 신분으로 황제까지 오른 순수군인이 아닌, 소위 말하는 군단장급까지 군경력을 쌓고 의석을 제 힘으로 차지한 원로원 내 실력자였다. 또 이 사람은 온건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는데 원래부터 문학적 기질을 타고난 교양인인데다 꼼수를 사용해 적을 만들거나, 자신이 쌓아올린 부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는 세베루스 가의 황제들과 원로원 동료들에게 평판이 상당히 좋았다.
또 그는 원로원 입성 후 ‘명예로운 경력’을 역임한 상태였는데, 이때도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명예로운 경력’은 말 그대로 명예직이 많았기에 공화정, 제정 초기의 엘리트 원로원 귀족들과 달리 군대 경험이 없어도 신참자가 사회최고지배층이자 귀족으로 인정받는 척도 중 하나였다. 그런데 고르디아누스는 과거의 명문가 엘리트들이나 앞 세대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처럼 장교, 군단장으로 재직한 엘리트였고, 이 경력들을 지내면서 까칠한 카라칼라한테도 미움조차 안 받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능력이 뛰어나고 돈도 많은 고르디아누스는 신참자 출신 원로원 의원 중 자연스레 로마귀족의 전형 중 한명이 됐다.
상술했듯이 고르디아누스 1세는 군경력과 행정, 정치 경력을 두루 거치는 동안 고전 문학을 사랑했고, 특히 그리스 문학에 정통했다. 그래서 그는 폭군 카라칼라 시대 때 오현제 시대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태평성대를 다룬 20권의 서사시를 지어 책으로 만들었고,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각종 게임과 공연들을 주최해 상당한 명성과 부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 이런 그의 행동은 카라칼라에게 의외로 견제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고르디아누스 1세가 워낙 신중하고 황제에게 조심했던 성격 때문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고르디아누스는 명예로운 경력을 지낸 엘리트들이 사회기부활동을 하는 전통을 피하지 않았다. 따라서 6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도서관을 지어 이를 로마 시민들에게 공립도서관처럼 개방했고,[8] 세베루스 왕조 시대 내내 재산을 축적한 뒤에도 문학가, 시인, 예술가 등을 후원하는 것에도 열성적이어서, 그리스 작가인 플라비우스 필로스트라토스는〈소피스트들의 생애〉를 그에게 바치기도 했다.

3. 황제


전형적인 로마 최상류층 출신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경력을 쌓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막시미누스 트락스)가 황제였던 시절, 고령의 나이임에도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속주총독으로 파견되었다[9]. 그는 아프리카 프로콘술(속주총독)로 일하던 238년초, 아프리카의 부유한 젊은 지주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게 된다. 동시에 이들은 막시마누스 트락스가 보낸 자들을 죽여 버렸다.
자신이 부임해있던 속주에서 황제로 추대된 고르디아누스 1세가 쓴 편지가 그해 집정관인 율리우스 실라누스의 낭독으로 소집을 받고 회의장에 모인 동료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낭독되었다. 그리고 낭독이 끝나자마자 원로원은 그와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황제로 추대하고 막시미누스 트락스를 '국가의 적(공적)'으로 선포한 뒤, 다음 날 아침에 원로원 통고문으로 제국 각지에 이를 알린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본래 그가 다스리던 속주는 1천 명의 군단병이 경비병 형식으로 주둔하는 곳이었고, 바로 옆에 있는 누미디아 속주 총독은 막시미누스 사람 내지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황제 선포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카펠리아누스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현지의 젊은 귀족들이 로마 정부가 파견한 재정대리인을 살해하고, 벌인 행동과 포고문 중 일부였다.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는 맨처음 마지못해 티스드루스에서 황제 선포를 했지만, 카르타고로 들어가면서는 아예 황제를 상징하는 보라빛 망토를 포함해 온갖 장신구를 착용하고 서신을 보내면서 북아프리카 일대의 유일한 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제3군단을 통제한 카펠리아누스를 즉시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카펠리아누스가 고르디아누스와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세를 몰수하고, 이를 행정적으로 같이 처리한 동료 속주 총독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 사람 입장에선 굉장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또 카펠리아누스는 같이 일을 하면서 고르디아누스 일가에 대해 앙심을 품었고 감정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통고문이 알려지자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제3군단 병력을 이끌고 그대로 카르타고로 처들어간 뒤 즉시 이들 부자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내 지방 민병대 1천 명을 이끌고 전투를 벌였는데 애당초 싸움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사하였고, 수비하던 민병대 역시 박살났는데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패배를 직감하고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간 뒤 허리띠로 목을 매 스스로 자결했다. 이는 황제 선포 후 한달도 안 된 3주 남짓이었다.

4. 외모와 성격


고르디아누스 1세는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전형적인 상류층의 성공한 사람의 외모와 성격을 갖고 있었다. 먼저 그는 전형적인 로마인의 평균 키에 체격이 다부졌다고 한다. 그의 머리색은 점차 희끗희끗해졌고, 얼굴은 인상적이었지만 불그스레한 안색에 머리가 크고 눈과 표정, 눈썹은 경의를 느낄 만 했다고 한다. 또 성격은 온화하고 행동은 절도가 있었다고 하며, 격정적이거나 무절제하거나 지나치게 뭔가를 하지 않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외모와 성품은 자연스레 낮은 신분에 로마시민권을 보조병으로 있던 중 따면서 로마인이 된 경쟁자 막시미누스와 대비됐고, 원로원으로서는 트라키아 촌놈에 불과한 막시미누스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자인데다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사람임에도 자수성가해 자신들과 똑같은 원로원 의원을 역임한 고르디아누스 1세에게 호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5. 평가 및 여담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와 함께 오늘날 거짓이 많다고 평가받는 <히스토리으 아우구스타>를 통해 혈통적으로는 확실히 조작된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3세기 군인황제 시대의 황제 중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원로원 귀족적 특징이 강했던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고르디아누스 부자 중 그는 대를 이어 원로원에 입성한 동명이인의 아들과 달리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는데,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들과 함께 교양이 풍부하고 예의와 도덕심이 뛰어난 전형적인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로마 원로원 귀족이었다. 따라서 그가 80살이 다 된 고령의 나이임에도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속주에서 황제로 추대된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고대의 주장처럼 로마 제국 내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이탈리아 외에도 다른 속주에서도 가난한 농민. 부유한 지주 모두에게 지나친 물자 수탈로 반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고르디아누스 1세는 성공해 원로원에 입성한 이래 자신의 가계를 트라야누스, 그라쿠스 형제와 연계시키는 방식의 족보세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제정 중기 이래 자수성가형 신참자들이 많이 사용한 방식이었고, 신참자들이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 전형적인 방법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고르디아누스 왕조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왕조는 비공식적 왕조이고,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재위기간은 다 합쳐도 고작 3주 남짓에 불과하다, 또 맨 위에 나와있는 고르디아누스 1세의 흉상을 비롯해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의 흉상 역시 어디까지나 추정되는 흉상일 뿐 두 사람의 공식적인 흉상은 아니라고 한다.

[1] 대표적으로 고르디아누스 1,2,3세 그리고 푸피에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등이 의도적으로 가계가 폄하 또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연계를 통한 4세기 지배층의 정통성 확보 목적의 위조 케이스에 속한다.[2] 제1차 삼두정치로 유명한 크라수스가 속해 있는 리키니우스 가문 출신이다.[3] 고르디아누스 1세의 풀네임 중 그라쿠스 형제의 집안이 속한 씨족으로 유명한 셈프로니우스 일족의 피가 흐른다는 의미를 내포한 셈프로니아누스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그는 외가를 통해서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을 살펴볼 수 있다. [4]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의 아들이 바로 고르디아누스 3세이다.[5] 이런 방식으로 족보 세탁을 하는 경우는 대개 속주 출신 신참자들이 자수성가 후 성공한 이후 흔히 사용한 방식이었다.[6]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지은 폼페이우스 저택. 폼페이우스가 지은 저택인만큼 가격도 비싸고 아름다움과 호사스러움은 로마 내에서 아주 유명했다. 이 저택은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즉위 전 잠시 거처했던 저택 중 하나였다.[7] 이 기둥은 로마 시대 재산의 척도 중 하나였다. 특히 그는 이탈리아산의 하얀 대리석이 아닌 모두 수입산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흰색+초록색의 그리스산, 붉은색의 이집트산, 노란색의 누미디아산, 흰색과 회색 반점의 소아시아산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8] 당시 책인 파피루스 두루마기는 아주 고가였다. 특히 책은 필사본이었기에 더욱 더 비쌌다.[9] 80이 다 된 나이에 평화로운 원로원 관할 속주총독에 아들과 같이 파견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은퇴 직전이었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