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칼라
Caracalla
1. 소개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이자 로마 제국의 제21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큰 아들로 아버지와 공동황제를 지내다가 연년생 동복동생인 게타와 공동 황제로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오늘날까지 콤모두스와 함께 폭군으로 공인돼 당대 로마인들과 후세 사람들에게 부자세습의 안 좋은 사례의 대명사로 통하는 사람'''으로, '''로마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안토니누스 가문에 셀프 입적하면서 바꾼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이다. 그리고 황제 즉위 후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였다. 그러므로 황제로서 공적인 통칭은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이고, 살아생전 공식적으로 안토니누스라고 불렸다. 그러나 별명인 카라칼라로 더 유명하다.
이는 당시의 갈리아식 의복을 가리키던 말인데, 모자가 달린 몸에 꼭 맞는 짧은 망토였다. 카라칼라는 발까지 내려오도록 옷의 길이를 늘려 입었는데, 새로운 스타일의 이 망토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 별명을 얻은 까닭이 그가 카라칼라를 즐겨 입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가 직접 카라칼라를 디자인한 일이 있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뭐 2세기 전에 칼리굴라라는 황제가 아기용 군화에서 딴 어린 시절 별명이 본명보다 더 불려서, 오늘날 통칭이 되기도 했으니...
카라칼라는 어릴 때부터 원수지간일 정도로 사이가 험악했던 친동생 게타를 재위 1여 년도 안 돼서 어머니 앞에서 칼로 찔러 죽이고 단독황제에 올랐다. 내치에 있어서는 상당히 평이 엇갈리는 황제인데, 로마 시민권을 모든 속주민들에게 나눠준다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했으며, 카라칼라 목욕탕을 건설했으며 새로운 화폐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냈고 병사들과 함께 하면서 본인 스스로 군인황제임을 과시해 군대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친동생, 아내, 장인 등을 살해한 행동과 알렉산드리아에서 보여준 잔인하고 무자비한 진압 방식 등에서 나오듯 개인적인 성품은 잔인하고 포악했다. 또 견원지간인 친동생을 제 손으로 직접 죽인 이후, 동생의 친구들과 지지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으며, 군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군의 연봉을 인상시키고 원로원을 계속 무시해 귀족들과 원로원까지 적으로 만들어 끊임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파르티아 전쟁 원정 중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의 사주에 의해 칼에 찔려 암살됐다.
2. 생애
2.1. 후계자 쟁탈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의 두 아들 중 첫 번째 아들로 188년 4월 4일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의 주도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카라칼라는 상당히 명민하고 사랑스러웠으며 부모님에게 공손한 아이였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판노니아에서 총독으로 있다가 황제를 참칭하고 로마로 진군해 원로원에게 정식황제로 인정받았다. 이후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콤모두스 암살 후 대가 끊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양자로 셀프 입적하면서, 세베루스의 장남인 그 역시 195년 이름을 거창하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로 지어줬다.
하지만 바시아누스의 개명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안토니누스 가문 참칭은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설령 바시아누스가 위대한 두 황제의 이름들을 따서 개명했어도 진짜 안토니누스 가문을 잇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시아누스의 개명과 카이사르 임명 조치는 카라칼라가 10살도 안 된 나이 때부터 후계자 지위가 공인되어 있었다는 확실한 선언이었다. 이 칭호를 받은 카라칼라는 10살이 되자 아버지에게 198년 아우구스투스 칭호까지 받아 일찌감치 공동황제가 됐다.
하지만 아버지 세베루스가 카라칼라의 연년생 동생인 게타에게도 209년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하사해 후계자의 기회들을 주면서, 본래부터 원수지간에 가까울 정도로 사이가 나쁜 동복형제는 서로 정적이 되어 급속도로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세베루스 재위 후반부터 카라칼라와 게타는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조차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견원지간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처음 공동집정관으로 오른 205년 1월 1일, 누구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갈등이 심해 세베루스가 명령을 내려 가까스로 공동집정관을 치루는 상황까지 연출됐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후, 공동으로 제위를 이어받은 22세의 게타와 23세의 카라칼라는 오래 전부터 '''경쟁 상대'''였고 '''서로에게 적대감이 깊었던 상태'''였던 만큼, 곧 터질 시한폭탄 같았다. 이에 비추어 보면 세베루스가 죽은 뒤 카라칼라가 먼저 단독 황제가 되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세베루스는 일찍이 198년에 장남 카라칼라에게 '임페라토르 테스티나투스'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두 형제의 나이 차이가 1년밖에 안 되는데도 게타가 아우구스투스 서열에 오른 것은 209년이 되어서였다. 이때 게타의 재위 계승 요구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친어머니 율리아 돔나 황후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고, 결국 단독 황제가 되려는 카라칼라의 시도는 실패했다. 따라서 두 형제는 공동 통치자로서 아버지의 유해를 들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렇게 세베루스 만년에 그와 사이가 나빴던 동생 게타가 경쟁자로 떠올라 갈등이 깊어갔다.
2.2. 장인과 아내 살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생전,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동향친구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의 딸인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Publia Fulvia Plautilla)와 결혼했다. 카라칼라의 장인 플라우티아누스는 근위대장이었고,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온갖 비열하고 잔인한 행동과 악행, 폭력 등으로 사람들의 신망을 얻지 못한 위인이었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아버지 세베루스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조상을 뒀고,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 출신인 동향친구의 비리와 악행들을 눈감아주고, 그가 막대한 권력과 부를 얻도록 해줬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이 결혼을 반기지 않았고, 장차 황제가 될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될 장인과 아내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202년 4월 결혼식을 올린 이후 아내와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으며,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결혼 생활 중 204년 딸을 한 명 얻었다. 그러나 이후 기록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딸의 언급이 없는 것을 봤을 때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놓고 다툰 카라칼라와 플라우티아누스 부녀의 갈등은 205년 1월 22일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사료마다 다르지만 어느 설명에 의하면, “카라칼라가 세 명의 백인대장을 설득하여 플라우티아누스를 음해하는 거짓 정보를 보고하게 했다. 그들은 조상들을 위한 축제가 끝난 후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저녁 식사 직전에 세베루스 황제에게 가서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들과 다른 일곱 명의 백인대장들에게 세베루스와 카라칼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가 음모를 통해 ‘원수보다 더 원수 같은’ 사위 카라칼라의 제위 계승을 막고 자신이 제국을 장악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세운 계획은 황제와 황태자를 살해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이 곧바로 그 사실을 알리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플라우티아누스는 즉시 살해되었고 시신은 거리에 내팽개쳐져 민중의 야유를 받게 되었다.
205년 1월 죽은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플라우틸라를 리파리 섬으로 추방됐다. 그러나 카라칼라의 아내이자 세베루스의 며느리인 그녀는 처형되지 않았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따라서 장인과 아내를 굉장히 혐오스러워했던 카라칼라의 증오는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카라칼라는 아버지가 죽은 211년 2월 제위에 오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추방시킨 아내를 죽여버렸다.
2.3. 동생 살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211년 2월 4일 브리타니아 로마군 병영이 있는 에부라쿰(현재의 영국 요크)에서 6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카라칼라는 남은 칼레도니아 원정을 중지시키고, 로마군을 하드리아누스 성벽 이남으로 철군시켰다. 이후 카라칼라는 로마로 귀환하기로 결정했으며 동생 게타 등과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서로 사이좋게 지내라. 군인들을 부유하게 해주고 다른 모든 사람은 무시하라.'''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유언 중 일부
로마로 귀환한 두 황제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는 황궁을 반으로 나누어, 각각 주 출입구를 따로 하고, 동시에 서로 연결되는 문과 통로들을 모조리 막아서 두 개의 궁으로 만들어 함께 거처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타협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었고, 게타와 카라칼라는 각자 원로원 의원들과 그 밖에 중요한 인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암투를 벌였다. 로마 제국 내 학자들 사이에 지지층을 형성한 게타가 카라칼라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통치자로서 그 둘 사이에 선택의 여지가 많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황제는 관료를 임명할 때에도 자신의 사람을 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며, 서커스 경기에서도 서로 다른 팀을 지지하고 서로 다른 팀들의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사법, 행정에도 관여하면서 이들의 경쟁은 법 판결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결국 동복형제인 두 황제는 서로를 독살할 생각을 했다.
몇 달 뒤 두 황제는 제국을 양분하는 것이 유일한 평화적 해결책임을 알고 게타는 아시아를 차지하며, 카라칼라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북서 지역을 맡기로 했다. 게타는 새 수도를 안티오키아나 알렉산드리아로 삼을 계획이었는데, 학자들은 이런 구도가 형성되었다면 제국에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전면적인 내란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대해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두 형제에게 "제국을 서로 나눠 가질 거라면 이 엄마는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이냐?"라며 물었고, 이 때문에 계획은 중단되었다.
계획이 무산되자 카라칼라는 이후 몇차례에 걸쳐서 동생 게타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연달아 실패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계획을 바꿔 거짓 편지로 게타를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방으로 유인한 뒤, 본인이 직접 무방비 상태가 될 게타를 암살하기로 했다. 실제로 카라칼라는 게타가 지지자들의 밀착 경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12년 2월, 게타가 율리아 돔나와 함께 있는 때를 틈타 그를 살해했다. 이때 카라칼라는 어머니 눈 앞에서 동생의 복부를 찔러 죽였다고 하며, 놀란 어머니에게 동생이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그런거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고 한다. 또 야사에 의하면 게타는 '''"어머니, 형이 날 이렇게 했어요. 형이 날 이렇게 했어요. 도와주세요! 날 도와 주세요!"'''라고 외치면서 율리아의 품에서 어머니의 옷을 피로 물들인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렇게 결국 세베루스 사후 그 무렵에는 사실상 공동 통치자였던 게타를 참살하고(212년 2월) 권력을 독점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카라칼라에 의해서 살해됨으로 인해 게타의 이미지는 순교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제위를 계속 유지했다면 카라칼라보다 더 나은 또는 더 많은 덕을 지닌 황제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2][3]
[image][4]
카라칼라는 단독황제가 되고 난 뒤, 죽은 동생 게타의 생일 기념일을 없앨 정도로 그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고, 212년 원로원에게 게타의 기록말살형을 추인할 것을 요청해 죽은 친동생을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게타의 상들과 이것들을 받치고 있는 돌들을 깨부수게 했다. 또 위에 나온 가족 초상화처럼 게타가 들어간 작품 등에서도 게타의 얼굴들을 삭제시키도록 했으며, 게타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들을 회수해 녹여버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이 사건 이후부터 아버지의 환청이 들리거나, 동생이 꿈에서 나오는 경험을 하는 등 죽기 전까지 평생을 친동생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렸다. 또한 이때부터 디오 카시우스가 기록했듯이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통, 즉 발기부전으로 인해 후사를 얻지도 못하는 스트레스까지 겪어야 했다.
게타에게는 로마 사회에서 엘리트 계층이라고 불리는 학자, 원로원의 유력 인사, 장군, 직업군인, 각 분야의 명사 등 막강한 지지자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에게 반대할 것임을 안 카라칼라는 게타의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행위였음을 강조하고, 이를 해명했다. 하지만 카라칼라가 신변안전을 위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근위대를 찾아가 자신이 하마터면 동생의 손에 죽을 뻔했기에 그를 죽였고 그건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때 군인들은 그를 의심했지만[5] 카라칼라가 많은 선물을 내리고 급료를 대폭 올린다는 약속을 했기에 일단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근위대를 자신의 편으로 일단 돌려 놓은 카라칼라는 다음 날, 원로원에 나타났다. 이때 그는 어머니, 근위대 앞에서 그랬듯이 게타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입지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카라칼라는 모든 과정을 생략한 뒤 동생의 옛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원로원 의원, 근위대장, 식민지의 총독, 궁중의 시종, 군인, 전차 기수, 게타의 옛 친구들도 재판도 없이 또는 아주 그럴 듯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그들은 식사를 하던 도중에, 공공 목욕탕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212년 초 몇 달 동안 무려 2만 명이 이렇게 죽어갔다. 대대적인 처형에 대한 항의가 있었지만, 카라칼라는 이들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가혹하게 진압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인 초로의 코르니피키아[6] 도 있었으며, 카라칼라의 아내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도 카라칼라의 명으로 처형됐다.
212년에 자행되었던 게타의 지자자들에 대한 대학살 사건은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 동생에 대해 죄책감과 증오심이 결합된 카라칼라는 무자비해졌다. 따라서 로마 사회에서 카라칼라는 다른 계층들과도 멀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카라칼라의 치세 동안 계속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2.4. 화폐개혁과 안토니누스 칙령(212)
카라칼라가 군심을 잡기 위해 무리해서 군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로 인상시킨 조치는 국고의 일시적 고갈로 이어졌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급히 세금을 인상해 징수케하고, 부자들이 내는 상속세와 노예해방세를 무려 2배나 인상해 강제 징수했다(상속세 공제범위도 없어지고 무조건 내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이는 국고 고갈 해소에 큰 도움이 도지 못했는데, 카라칼라는 통화 가치를 약간 절하하는 방식의 새로운 화폐 안토니니아누스(Antoninianus)[7] 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안토니니아누스는 2데나리우스 정도 가치면서도[8] 데나리우스 은화 2개의 80% 정도의 은만 함유했다. 세베루스 왕조 동안 데나리우스의 은 비율은 80%에서 50%로 하락하였고, 240년대의 40%, 250년대의 30%를 거쳐 갈리에누스 시대에 이르면 안토니니아누스 은화의 은 함유량은 5% 미만으로 은도금한 구리돈 수준으로 폭락하여 오히려 카라칼라가 발행한 화폐를 묻어둔 단지도 발견되기에 이른다.
테오도르 몸젠[9] 부터 이어진 전통적인 학설에 의하면,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사람들이 데나리우스를 숨기고 안토니니아누스만 시장에 나돌게 되고 안토니니아누스의 은 함유량이 점점 내려가는 과정이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세베루스 왕조부터 아우렐리아누스의 화폐개혁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인플레이션이 세베루스 왕조 시기가 아닌 고르디아누스 3세 시기 이후로 일어났다거나, 심지어 3세기의 위기 내내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후자에 의하면 제국의 추가적 화폐 발행이 그대로 그 가치를 받아들이는 변경 지역으로 흡수되었고,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아우렐리아누스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화폐개혁 시도 직후에 일어났다. 로마 시대의 물가 사료가 거의 없어서 특정 학설의 완벽한 검증은 하지 못했다. 단, 3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연간 600% 이상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났음은 부정되었다.[10]
이어서 카라칼라가 취한 가장 역사적이고, 이후 로마의 역사를 뒤집어 놓은 조치인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이 발표됐다. 그는 이 칙령을 발표하면서, 제국 내 모든 자유인들에게 동등히 시민권이 확대, 부여하고 그들에게도 로마 시민들이 부담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게끔 했다. 다시 말해서 이 법으로 로마 시민권의 메리트는 사라지고, 본국 이탈리아 주민들과 속주민들, 로마 시민권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유민들, 도시 시민들과 농촌 농민들의 관계가 동등해지게 만든 것이다.
이 법령은 오늘날에는 가장 민주적이고 공평한 칙령이라고도 평가받기도 하지만, 황제들과 면담을 가질 수 있던 원로원의 실세 의원이었던 당대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단지 세수를 늘리려는 대책에 불과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카시우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카라칼라를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현재 연구자들은 여러 고고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디오 카시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카시우스의 주장으로는, 카라칼라가 게타를 비롯한 자신의 정적들과 무고한 로마 시민 2만여 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뒤 인기를 얻기 위해 군대의 임금을 무려 250 데나리우스나 올려주는 등 무리해서 지출거리를 늘린 결과, 국고가 바닥나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는 것이다. 특히 로마 시민을 대상으로 한 직접세였던 상속세(vicesima hereditatum)를 2배로 올렸다.
디오 카시우스 등 당대 사람들과 근대 학자인 에드워드 기번 등은 안토니누스 칙령이 당시 사람들과 로마 제국 모두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칙령이었다고 주장했다. 카시우스 등 당대 기록자들은 카라칼라가 이 칙령을 발표한 것이 불손한 의도가 있음을 적은 뒤, 속주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비열한 꼼수라고 이 법령을 비난하거나 이 칙령 이후 속주민들의 삶이 얼마나 피곤해졌는지 지적했고, 에드워드 기번은 "속주민들은 허울뿐인 이름만 얻었고, 시간이 갈수록 속주민을 비롯해 전국 방방곳곳이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오히려 수탈과 학정으로 신음하게 되었다." 하고 평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카라칼라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후기 로마-동로마로 이어지는 차별 없는 로마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 성립에 기여하고 시민-속주민 구분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로마법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 또한 상당하다.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가 안토니누스 칙령과 관련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도시 → 이탈리아 → 제국으로 시민권의 확대가 계속된 것 뿐이며, 특히 이탈리아인들의 시민권 획득은 로마 공화정 시기에 무려 내전을 겪고 나서 가능했는데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칙령 발표 이후 로마 제국 영내의 모든 주민은 자신이 로마인이라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는 제국이 위기에 쳐했을 때 속주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경제적 관점으로도, 카시우스의 주장만큼 억지로 세수를 늘릴 필요가 없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등장하고 기존 세금체계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는 등 안토니누스 칙령을 당시 제국에 필요한 개혁을 수행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칙령이 급격한 변화가 아니고 제국 내의 시민 비율이 늘어나고 직접세 또한 시민에게까지 보편화되는 흐름을 반영했을 뿐이라는 설도 있다. 한 예로, 안토니누스 황조(아우렐리우스~콤모두스) 시기에 이미 로마 시민권을 받더라도 납세의 의무는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Tabula Banasitana). 어느 시기부터인가 (늦어도 2세기) 시민권을 받더라도 속주세가 면제되지 않았다.
비로마 시민들은 기존의 세금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의 세금까지 내야했으므로 세금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11] 모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칙령의 규모에 비해 동시대인들의 언급이나 영향에 대한 정황증거가 의외로 적은 편이기도 하다.
군사적으로는 로마 시민으로 지원조건이 제약되었던 레기온이 제정 중기를 넘어서면서 약체화되고 군인 지원자의 대부분을 차지한 변경 속주민과 보조병의 아들들이 보조병으로 쏠리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었다는 설이 있다. 레기온과 보조병의 구분은 이후로도 갈수록 흐려져 전제정 시대의 리미타네이-코미타텐세스 구분으로 대체되는데 안토니누스 칙령은 이러한 변화의 한 과정이라고 보기도 한다.
2.5. 황제의 전쟁
213년 초, 로마에 머무르기 불편했던 카라칼라는 게르마니아 변경 지역을 향해 떠났다. 마차를 타고 가는 대신 병사들과 나란히 행군하고 로마에서 특별히 수송해온 고급 음식 대신 평범한 현지 음식을 먹는 젊은 황제를 곧 군인들은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보릿가루를 직접 갈기까지 했다. 물론 군대에 대한 지원이 결코 사사로운 생각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자마자 자신을 지켜줄 수 있던 유일한 집단인 일반 병사들에게 국고가 감당하지 못할 제안을 해 마구잡이로 하사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군사들의 급료를 최소 50%로 대폭 인상해줬는데, 이 일로 인해 매년 국고에서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비용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것이 제국의 재정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준 건 절대 아니었다.[12]
213년 여름, 로마는 아그리 데쿠마테스(Agri Decumates) 지역과 라인란트 국경 양쪽에서 게르만 부족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원로원은 이러한 승리에 감동하여 카라칼라에게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수여했으며, 게르마니아 방벽을 넘어선 '예방전쟁'을 통해 원로원으로부터 '파카토르 오르비스(Pacator Orbis: 지상에 평화를 가져온 자)'라는 존칭을 얻었다.
2.6. 알렉산드리아 학살
이듬해(214), 카라칼라와 수행원들은 동쪽으로 길을 떠나 다키아와 트라키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그가 갑자기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되어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대제를 새롭게 기리게 된 것은 트라키아를 통과할 때였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제를 흉내내서 여러 마리의 코끼리를 수행원들과 함께 다니게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철학자들을 처형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죽음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로마와 다른 도시들에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카라칼라의 영웅 숭배는 극에 달했고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와 자신의 얼굴을 반씩 조합한 두상을 그리게 했다. 그러다가 일리움의 유적지와 아킬레우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찾아가 그곳을 화환과 꽃으로 장식했고, 그들이 일리움에 머무는 동안 수행원 한 사람이 숨을 거두자, 카라칼라는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루스(Patroclus)에 대해 묘사한 것을 본따서 화장용 장식을 사용해 동물 희생제를 드리며 성대한 장례식을 했다.
카라칼라는 어쨌든 많이 비교되는 콤모두스와 달리 자신이 로마군 최고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자각했기에 군사적으로도 대 게르만족 전선에서 상당한 전과가 있었으며[13] 기동대(벡실라티오네스)와 수비대를 분리하여 종심 방어적인 전략 사고를 도입하는 것도 그였고 이는 이후 로마 제국 방어전략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카라칼라의 여행은 다음 해에도 계속되었는데, 214-215년의 겨울은 소아시아의 북서 지역에 있는 니코메디아에서 보냈지만, 215년 5월에는 이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여름을 보낸 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갔는데 여기서 알렉산드리아 대학살이 벌어진다, 그곳에서 그는 시민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곳은 황제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묻힌 곳으로 매우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 도시였다. 카라칼라가 그곳에 가서 처음으로 한 일은 대제의 묘지를 찾아가 자줏빛 황제복과 그가 달고 있던 장식품들을 무덤 앞에 놓은 것이었다(카라칼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시신을 본 마지막 황제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14][15] 카라칼라를 격노하게 만드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데, 무슨 사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였을 수도 있고,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그가 게타를 살해한 것을 비판, 또는 카라칼라와 모후인 율리아 돔나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조롱했다고도 한다. 원인이 무엇이든 카라칼라는 자신을 비판한 비무장 시민들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대응했다. '''황제는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거짓 약속을 한 뒤 속아서 온 비무장 시민들을 검거했으며,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병사들로 둘러싸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러한 대학살은 곧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서 비무장한 수천 명의 시민이 카라칼라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죽어갔다.'''
2.7. 니시비스 전투
카라칼라가 동부를 방문한 목적은 파르티아인들을 상대로 한 정복 전쟁이었는데 이를 니시비스 전투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학살 사건 이후 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서 군대를 편성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원정 준비는 이미 2년 전 그가 소아시아에 있었을 때 시작되었으며 군대를 강화하고, 통신 라인을 개선했으며, 군대에 주화를 공급하기 위해 새로운 조폐국을 설립했다. 216년 초여름에 시리아 국경 지역에 집합한 군 병력은 당시로서는 대군인 8개 군단 전부 또는 일부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였다. 파르티아 제국은 213년 이후, 2명의 경쟁자들이 일으킨 내란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하기에는 매우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두 경쟁자 중 하나인 볼로가세스 6세는 메소포타미아 하류 지역과 수도 크테시폰을 장악했고, 다른 경쟁자 아르타바누스 4세는 이란 고원 너머 지역을 장악한 상태였다. 카라칼라는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여, 아르타바누스 4세의 편을 들었고, 동맹 강화를 위해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제안은 함정이었고 카라칼라는 그가 안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로마군은 티그리스 강 동부의 시골 지역을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파괴했다. 어떻게 기습했냐 하면 파르티아의 황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어 파르티아 측 하객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신부를 포함한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살해당했다. 뒷통수 치기로 얻은 결과였지만 카라칼라는 만족했고 그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원정의 본부가 된, 메소포타미아 북부 도시 에데사로 가서 사냥과 전차 경주로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해에 파르티아인들과의 교전에 필요한 새로운 군사 작전을 세웠으나 이 교전은 일어나지 못했다.
카라칼라가 동부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황제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던 것이다. 카라칼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군대 사령관인 플라비우스 마테르니아누스(Flavius Maternianus)가 음모 소식을 알게 되었고, 카라칼라에게 서신으로 이 소식을 알리려 했지만 그의 서신은 안티오키아에서 황실의 서신을 담당하고 있는 카라칼라의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 전해졌다. 이때 근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Marcus Opelius Macrinus)가 주모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의심받았다.
2.8. 암살
카라칼라가 보여준 잔인성과 여러 가지 악행 등의 이유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은 당연히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으며, 일반 로마 민중들과 안토니누스 법으로 시민권을 얻게된 속주민들 역시 카라칼라의 마구잡이식 학살과 수탈에 가까운 세금 징수 탓에 카라칼라를 싫어했다. 특히, 그가 군사적, 외교적으로 많은 사고를 친 제국 동방에서는 알렉산드리아 청년 학살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여론이 당연히 최악이었다. 카라칼라는 성장할수록 고집이 강하고 상당히 무례한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또 분노 조절 등 감정 조절 측면에서 상당히 무절제한 사람이었고, 자신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던 군주였다. 그리고 이런 개인적, 성격적인 결함은 결국 대 페르시아 원정에서 재앙으로 닥쳐온다.
카라칼라는 원정 행군 중에 뭔가 사소한 잘못을 범한 두 병사를 이례적으로 여러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질책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두 병사 중 한 명인 마르티알리스는 진작부터 은근히 황위를 넘보았던 근위대장 마크리누스를 충동질했다. 마르티알리스는 카라칼라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는데,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그의 형제가 입증되지 않은 혐의를 받고 며칠 전에 처형되었다고 했으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가 자신을 백인대장으로 승진시켜주지 않아서 화가 나서 그랬다는 기록이 있다. 어찌 되었든 마크리누스와 마르티알리스는 둘 다 4월 8일에 에데사에서 카르헤까지 카라칼라를 동행하는 수행원단에 포함되었다. 황제는 당시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는 볼일을 보기 위해서 가는 길을 멈췄다. 당시 카라칼라 곁에는 단 한 명의 시종만 있을 뿐, 나머지 호위병들은 황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마르티알리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부름을 받은 척하며 앞으로 다가가서는 바지를 내리는 그를 검으로 한 번에 찔러 죽였다.[16][17] 로마 민중들과 원로원 등 지도층 인사들에게 죄의식과 불안으로 잔인한 통치자로 평가받던 카라칼라의 삶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카라칼라가 죽자 암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마크리누스는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마크리누스가 그를 뒤이어 황제가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병사들에게는 사랑을 받았던 카라칼라의 시신은 정식으로 화장되었고, 시신은 안티오키아의 율리아 돔나에게 보내졌다. 그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었다. 시신을 담은 납골 단지는 다시 로마로 옮겨져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몇 주 후에 슬픔에 빠진 율리아 돔나도 굶으며 자살을 택해 그곳에 묻혔고, 몇 달 후 어머니와 아들은 돔나의 여동생 마이사와 그녀의 외손자 엘라가발루스에 의해 함께 신격화되었다.
3. 평가
3.1. 부정적 평가
'''이것(카라칼라의 최후)이 삶 자체가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고, 그의 치세는 굴욕적으로 참기만 했던 로마인들에 대한 비난까지 불러온 폭군의 최후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카라칼라는 로마의 폭군이라고도 공인된 만큼 평가가 상당히 나쁘다.''' 당대 기록부터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역사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아주 잔인하고 난폭하며, 로마의 포악한 황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카라칼라는 콤모두스 황제와 함께 능력이 보장되지 않는 부자 세습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시되는 황제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그는 부도덕하고 잔인했던 아버지보다도 더 잔혹했다. 그는 식탐이 있고 포도주에 중독되었다. 식솔들은 그를 싫어했으며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군사도 그를 혐오했다. 그와 동생 게타는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
ㅡ 로마황제열전 중 카라칼라의 생애, 9
안토니누스 칙령이 후대에 민주적이고 평등하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카라칼라 본인은 생애 전반에서 보여지듯 전혀 민주적인 황제가 아니었고, 헬레니즘적인 세계시민주의에 심취한 사람도 아니었다. 당대 원로원 핵심 의원이자 황제들과 직접 면담을 할 수 있던 디오 카시우스의 지적에 따르면, 안토니누스 법으로 시민권을 확대한 이유가 공공 의무를 확대하고 황실 재원을 늘리기 위해서였고, 혜택을 받았을 것 같은 속주민들은 유례없는 수탈로 신음해 민생마저 고통받게 됐다. 에드워드 기번으로 대표되는 카라칼라를 단죄하는 학자들은 카라칼라가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적인 이유 등을 내세워 시민권 확대라는 명분으로 발표한 법령 하나가 무너져 내려가던 로마 제국을 사회 전반적으로 위기로 빠뜨리게 만든, 미래를 생각도 하지 않은 최대 실책으로 평가한다.
카라칼라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리스를 통일하고 젊은 나이에 대제국을 만든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존경했다. 그는 대왕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고, 자신의 우상이 했다고 전해지는 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카라칼라는 대왕처럼 자기 과시와 야망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지만, 개인적인 매력은 전혀 없었고 독불장군처럼 행동했으며, 제 손으로 동생을 죽일 정도로 잔인성과 폭력성을 갖춰 자기절제와 분노 조절 등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평가받았다. 또 아버지처럼 지나치게 원로원의 위상을 낮추고, 선군정치를 펼치면서 원로원과 민중 등 많은 이들에게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동생 게타를 제 손으로 직접 찔러 죽이고, 동생의 친구들과 죄없는 로마 시민 2만여 명을 마구잡이로 죽인 이후, 군대의 급여를 2배나 인상했으며 홀로 고립되게 된 로마를 떠나 병사들과 함께 먹고 행군을 하며 전투을 치뤘다. 따라서 암살 직전 그는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폭군이라고 평가받았는데, 장군 등 장교급 인사들을 제외한 일반 군인들에게는 분명히 인기가 있었던 황제였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실책은 아무리 카라칼라가 나름 정치에 관심있어 했던 모습을 보이고, 재판에도 나름 성실히 임했다고 변호해도 가리기 어려웠다. 카라칼라가 공동황제였던 동생 게타를 살해한 이후, 2만여 명을 재판 없이 살해하면서 본국 이탈리아와 일반 로마 시민들에게 그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양심없는 폭군이 됐고, 군을 제외한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이에 그는 동생을 살해한 직후, 군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까지 올려줬는데 이런 행동은 아슬아슬하게 안정된 국고를 순식간에 고갈시켰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생전부터 상속세, 노예해방세를 두 배나 인상시키고 무리하게 세금을 인상시켜 폭정을 한다고 비난받았다. 또 동방에서의 외교 실패,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것 등으로 제국 동방에서의 인기는 최악이 됐고, 비무장 상태의 알렉산드리아의 청년들이 자신에게 항의했다고 무고한 민중들과 함께 잔인하게 학살한 행동은 제국 전체로 퍼져나가 폭군으로 공인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카라칼라는 기이하고 독불장군같은 언행을 하면서 늘 적을 많이 만들었고, 자신에게 조금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면 제아무리 비무장의 시민이라고 하더라도 자비를 베풀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는 괴행태를 저질러 당대에 이미 콤모두스 못지 않은 폭군으로 공인돼 기록됐다. 또한 카라칼라는 이전 시대의 네로처럼 후세에 폭군이라고 까이고 있음에도, 민중들에게 유쾌하고 재기발랄하며 매력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카라칼라의 유년 시절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의 그는 매력적이고 영리하며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친구들에게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년기때 그는 민중들에게 사랑받았고,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으며 사람들의 애정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의 장점들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카라칼라는 글에서도, 친절한 행위에서도 뒤쳐지지 않는 듯 보였고, 남에게 베푸는 데도 전혀 인색하지 않았으며 용서할 때에도 마지못해 하는 적이 없었다[18] 는 좋은 기록들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10대 초반의 카라칼라의 모습이었으며, 이후 그의 행동과 발언, 주변의 기록들을 보면 완전히 뒤집어진다.
부족한 자기통제력 탓에 돌발적인 충동 제어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닮고자 했던 노력과는 무관하게 제국 통치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동생을 죽인 죄책감 탓에 발기 자체가 안 되는 성불구자가 되어 자식도 남기지 못하게 되고 만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확연하기도 하고 은밀하기도 한 고통 때문에 몸이 아팠을 뿐 아니라, 어떤 괴로운 환영으로 고통을 받아 마음까지 병들었으며, 종종 자신이 칼을 든 아버지와 동생에게 쫒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다. 실제로 게타를 죽인 것도 그가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의 극단적인 불안이 그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야사에 의하면 카라칼라는 죽기 직전에 아버지가 나타나서 "네가 동생을 죽였으니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로마를 떠나서 군대에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했다. 카라칼라는 몸이 아파서 신전에서 질병 치유를 기원하기도 했지만 사실 카라칼라를 가장 괴롭힌 것은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죄의식과 불안감이었고 대순방 기간 동안 발생한 알렉산드리아 대학살 같은 잔인무도한 행동 뒤에는 이러한 원인이 숨어 있었다고 한다.
3.2. 재평가
하지만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와 마찬가지로 현대 학계에서 나름대로 재평가되고 있는 폭군이기도 하다.
그가 폭군이라고 불림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요소가 있다면, 거대한 목욕탕을 지어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안토니누스 칙령 등 여러 정책을 펼쳤다는 부분, 나름 군사적 재능이 있어 게르만족을 상대로 예방전쟁에서 성과를 내고 군인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전제정 시기 군제 개혁의 초석을 다진 황제였다는 것이다.[19] 특히 212년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시민권을 제국의 모든 남성 자유민 에게 처음으로 확대한 것은 고평가받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칙령으로 인해 로마인과 비로마인의 차이를 없애버림으로써 제국의 개념을 이탈리아가 지배하는 식민지가 아니라 보편제국의 형태로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이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적어도 이렇게 로마 시민권을 얻은 속주민들 중에 개인이 썩어서가 아닌 시민권의 브랜드가 죽어서 혹은 나라가 형편없다는 이유로 제국을 배신한 속주민은 없었다. 게다가 먼 게르만족의 규모가 불어나면서 정예부대와 별개로 병력 자체는 엄청나게 필요해졌고, 시민권 취득 인원이 수백만에서 5천만으로 확대되면서 징집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20]
카라칼라의 통치기는 위기 후 평화를 얻게 된 콤모두스 치세와 달리 변혁기였다. 그의 시대에는 제국 밖의 상황은 이전과 크게 달라져 동방과 서방 국경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이 상당히 강해진 상태였으며, 제국의 한계 수익성도 이미 길게는 하드리아누스 시절부터 쭉 악화되어가고 있다가 그의 치세에 이 여파가 닥쳐왔다. 카라칼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 쉬운 방법(세금을 올리고 화폐의 질을 낮추는 것)으로 해결했다.[21] 물론 화폐 가치 절하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오며 제국의 경제력이 악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징표지만, 당장 방위 수요는 급속히 늘어나 세금 쓸 데는 빠르게 늘어나는데 화폐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군대가 유지가 안 되고, 그 결과 외적이 침입해서 영토를 까먹으며, 경제적 잠재력과 성장률이 대폭 떨어져 결국 경제는 훨씬 더욱 망가질 뿐이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필수였으나 농업경제체제 하에서 경제성장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걸 해결하려면 외부에서 은이나 금을 가져오던가 아니면 산업혁명을 해야 하므로 카라칼라 시대로부터 최소한 1300여 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제국 재정은 매우 양호했다. 하지만 채권이 없던 시대에서 정부의 재정이 양호하더라도 일시적 많은 지출(전쟁 비용, 하사금)을 위해서는 금속 함유량을 줄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22] 대부분 학자들이 로마 제국 재정 부분에 대해서 서술할 때 채권이라는 개념이 없는 시대라고 적는 이유가 있다.
평가절하는 네로 황제 이후 계속 조금씩 이어졌고 3세기의 위기가 절정이었을 당시의 황제인 갈리에누스도 화폐 절하를 단행했으며, 3세기의 위기를 수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금화는 절상했지만 은화는 크게 절하시켰다.
4. 여담
- 여담으로, 미술학도라면 누구나 친숙하게 느낄 석고상 카라칼라는 바로 그의 흉상을 모델로 한 것이다.
- 아이러니한 것은 카라칼라의 치세를 지속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것은 시민권의 확대도 악명 높은 그의 잔혹성도 아닌, 바로 그가 로마에 세운 거대한 욕장이다. 카라칼라는 거대 목욕탕과 같은 문화 시설들을 건립했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욕장은 그 유적지만으로도 로마 제국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기념비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그가 로마에 남긴 공공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당대에는 안토니누스 욕장, 현재는 테르메 디 카라칼라(카라칼라 욕장)이라고 부르는 이 대형 욕장의 '켈라 솔리아리스' 부분은 돔 지붕 전체가 청동이나 구리 격자로 지지되어 있어, 크기가 얼마나 방대한지 역학에 조예가 깊은 건축가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지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1] 카라칼라의 초상들은 종종 성이 난 듯 찌푸린 표정의 불독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거친 군인'의 이미지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황제를 묘사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마지막 조상들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다. 하지만 이제 카라칼라의 초상들에서는 그의 영웅인 알렉산드로스 대제를 느낄 수 있다.[2] 게타의 성품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는 기록도 상당히 있다. 기록에 따르면 게타는 어려서부터 얼굴이 잘생겼고 무례하진 않았지만, 무뚝뚝했고, 여자를 밝혔으며, 비열하고 탐욕스러우며 다양한 향신료를 넣은 음식과 포도주를 좋아했고, 자신의 옷과 보석에 돈을 많이 쓰면서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선물을 하지 않는다는 평판을 받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3] 다만 살아생전 비정함과 짠돌이의 대명사로 대중에게 알려졌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경우처럼 단순히 성격에 모가 났다고 좋은 황제가 되진 못했을 거라 단정 짓는 것도 잘못된 것이긴 하다. 애초에 게타는 22살 나이로 너무 젊은 나이에 죽어 실력을 입증할 기회도 얻지 못했기도 하고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선정을 베풀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4] 세베루스 일가의 초상화인데, 카라칼라는 동생을 죽인 뒤, 왼쪽 하단에 그려진 동생의 얼굴을 지우게 했다.[5] 군인들은 세베루스 황제와 닮은 게타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2 파르티카 군단은 대놓고 불만을 표시했다.[6] 게타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7] 후대에 편의상 붙은 명칭으로, 당대에 불린 이름과는 다르다고 추정된다.[8] 학계 다수설이지만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9] 처음으로 안토니니아누스의 명칭과 평가절하를 의미하는 2데나리우스 교환비를 제시했다.[10] Money, Currency and Crisis: In Search of Trust, 2000 BC to AD 2000, edited by R.J. van der Spek and Bas van Leeuwen, Routledge, 2018 - p.24[11] 물론 로마와 이탈리아 주민들은 계속 혜택을 받았다. 다만 이탈리아의 특혜는 세베루스 황제 때 변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크게 바뀌었으며 최종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다른 속주와 같아진다.[12] 과거에는 재국 재정의 절반이상이 군사비로 빠져나갔다고 생각했지만 현대에는 절반 이하였다는게 중론이다.[13]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잇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보수하고 선제 공격을 감행해 게르만족에게 제법 타격을 줬다. 카라칼라 황제의 방어선 손질로 20여 년간 북방 게르만 전선은 평온했다.[14]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스스로를 특권층이라 생각해서인지 자부심이 강했고 황제들에게 할 말은 다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15] 사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이전의 지배자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부터 걸핏하면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할 만큼, 도시의 치안이 굉장히 불안했다. 심지어 로마의 최전성기인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인 서기 116년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그리스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출처: 한 권으로 보는 이집트 역사 100장면/ 손주영, 송경근 지음/ 가람기획/ 210~213쪽[16] 그러나 정작 카라칼라를 죽인 병사들은 마크리누스에게, 황제 시해의 범인으로서 바로 즉결 처분당한다. 또는 곧바로 말을 타고 달아났으나, 카라칼라의 호위 기병이 던지는 창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17] 혹은 태양신을 참배하는 신전에서 기도 중에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18] 로마황제열전 중 카라칼라의 생애 1[19] 파르티아의 중장기병을 상대하기 위해서 대규모 팔랑크스 부대를 훈련시키도 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의하면 마케도니아인 1만 6천 명으로만 구성된 팔랑크스를 편성하고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장비로 무장시켰다. 이 '팔랑크스'가 마케도니아식 장창병인지 트리아리식의 일반 창병, 또는 기존 로마군 진형의 다른 이름인지는 이견이 많다.#[20] 물론 질적 수준은 내려가지만 이건 제국의 경제력이 개판된 것이 더 컸다. 진법 유지를 위한 훈련도, 창칼 제조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애초에 안토니누스 법으로 시민권을 확대하지 않았다 쳐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21] 금화인 아우레우스의 무게를 1/45 리브라에서 1/50 리브라로 10% 낮추고, 데나리우스는 1/96 리브라에서 1/108 리브라로 12.5% 낮추며(은 92% → 70%), 2데나리우스에 상당하는 안토니니아누스를 신설하여 그 무게는 1/60, 즉 2/120 리브라로 했다(20% 절하 + 은 72% → 은 50%/동 50%).[22] 초기 원수정 시대에 엄청나게 금화 은화를 생산하던 금광들은 오현제 시대부터 점점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원수정 시대처럼 엄청난 귀금속의 공급을 기대하기 힘든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