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아누스 2세

 


[image]
'''제호'''
고르디아누스 2세(Gordianus II)
'''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
(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Africanus)
'''생몰 기간'''
192(?)년 ~ 238년 4월 12일
'''재위 기간'''
238년 3월 22일 ~ 4월 12일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전
2.2. 황제


1. 개요


고르디아누스 2세(라틴어: Gordianus II, 192년 ~ 238년 4월 12일)는 군인 황제 시대를 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다음의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공동황제는 아버지이자 이름도 비슷한 고르디아누스 1세이며, 재위 기간은 238년 3월 22일부터 4월 12일까지다. 종종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 외조카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함께 고르디아누스 왕조로 묶여 서술되기도 한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전


192년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로 아버지인 고르디아누스 1세와 똑같다. 현대 사가들에게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료로 평가받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명문가 태생의 외할머니를 통해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어 받았고, 어머니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증손녀이자 명문가 출신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가족은 고르디아누스 1세의 출신 가문에 대해 서술했듯이 소아시아 태생의 기사계급에 속했으며, 그의 가계는 공화정 후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안토니아 중 한쪽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조상을 둔 로마시민권자의 후손이었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가 로마 원로원 최상위 부자이자 교양인이며, 후원자였으므로 젊은 시절부터 상류층의 엘리트교육을 받았다. 타고난 문학가이자 교양인이었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성품 자체도 겸손하고 따뜻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삶에 대해서는 아버지인 고르디아누스 1세만큼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그렇지만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약간의 경력을 살펴 볼 수가 있다. 신뢰성이 떨어지는 이 책에 따르면, 고르디아누스 2세는 엘라가발루스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때 재무관과 집정관을 지냈으며, 46세의 삶 동안 미혼으로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4세기 초 익명의 작가가 저술한 <카이사르들에 관한 초록(Epitome de Caesaribus)>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암살에 가담한 뒤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 2세가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아 또는 서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오늘날 일부 학자들에게 사실이 아닐 거라고 평가받고 있다.
고르디아누스 2세에게는 적어도 2명의 여자형제가 있었다. 이중 그의 누이동생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이자 히스파니아(오늘날의 스페인) 태생의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로마 명문 원로원 가문 출신의 원로원 의원과 결혼해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낳았다고 전해지는데, 그녀의 남편이자 고르디아누스 3세의 부친이 명문가 귀족인지 여부는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가계처럼 확실하지 않다.

2.2. 황제


고르디아누스 2세는 70대 후반에 접어든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가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속주총독으로 파견되었을 때 아버지를 보좌하는 군단 사령관 자격으로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1] 그러다가 238년 초, 북아프리카의 부유한 젊은 지주들에 의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보낸 재정관리인 등 로마 정부 관리들이 살해됨과 동시에, 그는 아버지와 함께 황제로 선포되게 된다. 그 후,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원로원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황제가 되었다[2] .
원로원에게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는 자신들의 친구에게 서신을 보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비난하고, 자신들을 황제로 선포할 것을 요청했다. 또 두 사람은 집정관과 원로원 동료들에게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유일하게 정규군을 이끌고 있던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를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그해 집정관 율리우스 실라누스의 낭독 아래 두 황제의 요청대로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를 공적으로 선포하고,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황제로 선포한 뒤 제국 각지에 선포 다음날 아침 통고문을 발표하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북아프리카 속주 바로 옆에 있는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이러한 통고문을 즉각 거부했다. 그는 애당초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황제 선언을 반역으로 본 사람인데다, 이들의 황제 선포에서 벌어진 로마 재정공무원 살해가 벌어진 일 등을 이유로 이 통고문을 무시했다. 설상가상 카펠리아누스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일을 협력하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앙심을 품을 정도로 감정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카펠리아누스는 기존 황제인 막시미누스 트락스에 대해 지지를 선언했으며,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반역자로 여기고 즉시 이들 부자를 공격했다.
카펠리아누스가 북아프리카 일대의 유일한 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제3군단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침공할 당시, 79세의 고르디아누스 1세는 카르타고에 머물고,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속주 내에 유일하게 주둔하고 있는 1개 군단[3]를 이끌고 카펠리아누스 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방어선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애당초 민병대와 정규군의 충돌인 탓에 고르디아누스 측이 불리했고, 이기기도 어려웠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1천여명과 함께 카펠리아누스의 공격을 막던 46세의 고르디아누스 2세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전사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절망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 뒤 허리띠로 목을 매 스스로 자결했다. 이는 황제 선포 후 한달도 안 된 3주 남짓이었다.

[1] 당시 고르디아누스 1세는 79세의 노인이었고, 사실상 이 파견은 정계 은퇴 전 마지막 경력인 상황이었다.[2] 당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와 함께 원로원에 서신을 보낼 시점에 이미 황제로 선포된 티스드루스를 떠나 잘 정비된 속주의 주도 카르타고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이때 두 사람은 티스드루스에서는 마지못해 보라색 망토를 둘렀지만, 카르타고로 향하는 시점부터는 황제 복장에 황제를 상징하는 온갖 장신구를 착용하고 로마황제로 행동하고 있었다.[3] 북아프리카 속주 내 주둔 병력은 사실상 경비병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