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아누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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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dianus III (225년 1월 20일 ~ 244년 2월 11일, 재위 238년 3월 22일 ~ 244년 2월 11일)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황제
2.2.1. 즉위
2.2.2. 장인 티메시테우스
2.2.3. 페르시아 전쟁
2.3. 불분명한 죽음
3. 평가
4. 여담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28대 황제. 외조부, 외삼촌과 함께 세습왕조 고르디아누스 왕조로 묶여 서술되기도 한다. 238년 3월 북아프리카에서 황제를 칭한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가 다음 달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자 원로원에게 푸피에누스, 발비누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후 막시미누스가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푸피에누스, 발비누스가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되면서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당시 13살밖에 안 돼서 어머니와 근위대장이자 장인인 티메시테우스의 보좌를 받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원정을 이끌던 중 티메시테우스가 돌연사하면서 의지할 곳을 잃어버렸고, 결국 새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19살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다[1].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고르디아누스 3세는 225년 1월 20일 로마 7언덕 중 하나인 카일리우스 언덕에 위치한 유서 깊은 저택[2]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피우스(Marcus Antonius Gordianus Pius)이며, 즉위 후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ntonius Gordianus Pius Augustus)이다.
그의 외가 고르디아누스 가문은 오늘날 터키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신흥귀족 가문으로 외조부 고르디아누스 1세 대에 이르러 원로원에 입성해 집정관까지 지낸 집안이었다. 그러나 신흥가문임에도 이 집안은 이 무렵 로마 최고 수준의 재력을 가지고 있어서 최고급 대리석 원기둥 200개가 원형으로 회랑을 이루어 둘러진 별장 보르가타 고르디아니를 소유하고 있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버지는 한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발부스 가 태생의 안토니네 황실 방계 황족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라고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근현대 학자들에게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친부로 한때 알려진 발부스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의 여동생의 외손자로 2세기 당시 집정관과 아프리카 총독 등을 역임한 퀸투스 푸덴스의 아들이다. 그래서 발부스가 친부라는 고대기록의 주장은 여러 학자들에게 여러 증거상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받고 있다[3].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버지는 루키우스 베루스 여동생의 손자 발부스가 아니더라도, 세베루스 왕조 시대때 로마 상류층에 속한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이나 귀족 자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익명의 원로원 의원 내지 상류층 자제였던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버지는 이름이나 경력 등은 알려진 바 없지만, 238년 이전에 죽었다.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친가 쪽 이름 대신 외가의 이름을 거의 취했고 이름도 외조부에서 많이 따온 풀네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봤을때, 아마도 양친의 가계 중 부와 권력을 갖춘 외가의 힘이 친가보다 더 컸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는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 고르디아누스 2세의 여동생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이다. 그녀는 마키아 파우스티나라는 이름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진짜 이름이라고 하는데, 현대 사가들은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유일한 이름이며, 마키아 파우스티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구의 이름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한때 오현제 중 트라야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피를 이은 집안 태생으로 소개되기도 했는데, 그녀의 남편이 발부스가 아닌 만큼 이 사람 역시 오현제 중 그 누구의 후손도 아닌 사람이었다.
이처럼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고르디아누스 3세 모두 친가와 외가 모두 족보 위조가 있을 정도로 그 가계는 의심받고 있다. 또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스스로 트라야누스와 셈프로니우스 가문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족보위조를 했어도, 이 집안이 신참자답지 않게 문예지원 등을 해서 민중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이런 배경처럼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자신의 외가가 신흥 귀족임에도 당시 로마에서 최고 수준으로 워낙 부유하고 명망 높은 고르디아누스 가였으며, 친아버지 역시 원로원 의원 내지 상류층 자제인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고 238년 전 당시에는 외가의 유일한 남자혈육으로 상속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음에도 상류층 자제로 태어난 만큼 유년기의 삶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것 같다.

2.2. 황제



2.2.1. 즉위


238년 3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맡고 있던 외할아버지(고르디아누스 1세)가 현지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들여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원로원은 이들 부자를 내키지 않았음[4]에도 진짜 막시미누스를 미워했기 때문에 일단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즉위를 인정했다. 이 결과, 원로원은 전직집정관 고르디아누스 1세와 이 사람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런 소식은 당연히 게르만족들과 전투를 위해 변방에 나가있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알려졌는데, 황제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반역자들에게 협력한 원로원과 로마를 끝장내겠다며 군을 규합해 본국 이탈리아로 밀고 내려왔다.
한달 여 뒤인 그해 4월, 누미디아 속주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원로원의 고르디아누스 부자 황제 승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총독은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맡은 뒤, 함께 현지 농장주들의 집단소송을 처리했던 사람이기도 했는데 고르디아누스와 그의 아들이 황제 자처와 함께 자신을 교체하라고 하자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래서 카펠리아누스는 두 황제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누미디아 주둔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 속주의 카르타고로 진격해 공격을 가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경비병력이나 다름없는 휘하 1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저항했는데, 애당초 이 싸움은 카펠리아누스 쪽이 우세했고 이길 수가 없었다[5]. 그리고 이 전투에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중과부적으로 패해 목숨을 잃었는데, 아들의 전사 소식과 카펠리아누스의 입장을 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체포 전 허리띠로 목을 메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이에 원로원은 반(反) 막시미누스 세력 규합을 위해 오래된 이탈리아 세습귀족 출신의 원로원 의원들인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다.
하지만 로마 내 평민들은 떼를 이뤄 원로원 회의장이 있던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막고, 70대 고령의 요직을 두루 거친 두 전직집정관 출신의 새 황제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황제도 아니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를 들어 강하게 항의했다. 사실 군중들에게 고르디아누스 가는 신흥귀족임에도 도서관 기증, 문예 후원 등으로 인기가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원로원으로 향하던 푸피에누스, 발비누스에게 돌을 던지고 협박을 하면서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이 무렵, 막시미누스는 로마를 끝장내겠다며 군을 규합한 뒤 이탈리아로 움직인 상황이라서 원로원과 두 황제는 막시미누스 트락스와의 일전을 서둘러 치루기 위해, 이런 항의를 무시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자신들을 도울 20인 위원회 구성과 동시에 과격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협박하던 군중들을 달랠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13살에 불과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자신들이 있던 카파톨리누스로 불렀다. 그리고 원로원에서 고르디아누스 가의 유일한 남자혈육을 제 3의 황제로 인정하고, 카이사르 직위를 줬다. 이후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공동의 적 막시미누스에 맞서게 되는데, 이때가 해를 넘긴 2월 초였고, 이미 막시미누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본국 이탈리아 침공을 시작한 뒤 이탈리아 북부 최대의 항구도시 아퀼레이아 근처로 진군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무 모두에서 경험이 풍부한 푸피에누스는 이탈리아에서 방어병력을 모아 아드리아 해를 면한 아퀼레이아 쪽에서 진영을 펼치고 방어전을 준비했고, 막시미누스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했음에도 함락시키지 못하던 중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그렇지만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막시미누스가 사라지자 서로 권력 다툼을 벌였고, 이들의 대립은 자연스레 병사들에게 불만을 샀다. 따라서 238년 7월 29일 두 황제는 병사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근위대가 자신들의 병영 안에서 두 황제를 살해한 직후, 원로원은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가 로마 평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 근위대가 새 황제를 내세우기 전에 유일한 황제로 옹립했다. 그리고 원로원의 예상처럼 이 당시 근위대 병사들은 13세밖에 안 된 소년 황제를 특별하게 여기거나 크게 지지하지 않았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를 쉽게 반대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어린 황제의 뒤에는 원로원 외에도 로마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성년식도 치루지 못한 13살 소년이었기 때문에 단독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로마 권력을 장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원로원과 관료, 근위대장 등이 황제의 업무를 대리했다. 또 일부 사료에서는 기본적인 집무는 어머니 마키아 파우스티나가 대신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형식적인 방식이었고 실질적인 집무는 역시 경험 많은 로마 엘리트 집단들이 행사했다.
239년 또는 240년경 고트족과 카르피족(다키아인)이 함께 다뉴브 강 하류를 침략했다. 제국은 고트족에게 연공금 지불을 조건으로 포로를 석방시키고 그들을 돌아가게 했으나, 카르피족에게는 연공금 지불을 거절했기 때문에 카르피족이 다키아 속주에 더한 깽판을 치게 된다.

2.2.2. 장인 티메시테우스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는 성격 자체가 명랑하고 유쾌했다. 또 얼굴도 잘생겼으며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학문에도 관심이 많고 머리가 좋았다. 따라서 로마 민중들과 원로원, 관료들은 어린 소년 황제를 진심으로 좋아했으며, 이런 여론은 고르디아누스 3세가 19살의 나이에 사망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가이우스 푸리우스 사비니우스 아퀼라 티메시테우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했다. 그는 당시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를 위해 헌신해줄 수 있던 관료 출신이었고, 근위대장에 오른 뒤 섭정 역할을 담당했다. 티메시테우스는 기사계급 출신으로 전통적인 그리스-로마식 교육을 받은 로마인이었고, 세베루스 왕조 시절부터 경력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학자들은 그를 여러 근거를 토대로 레반트 속주 태생의 그리스계로 보고 있으며, 이런 추측은 확실해보인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즉위 후 외조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수 많은 건축 공사를 이행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어린 황제와 내각의 통치 스타일은 과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절을 연상케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240년, 아프리카 총독 사비니아누스가 카르타고에서 황제를 자처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반란은 바로 옆에 있던 마우레타니아 속주 총독이 신속히 개입한 까닭에 곧 진압되었다.
241년, 고르디아누스 3세는 근위대장이자 섭정인 가이우스 푸리우스 사비니우스 아퀼라 티메시테우스의 딸 사비니아 트란퀼리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고, 티메시테우스는 사위의 열성적인 후원자 그 이상의 인물이 되어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를 이끌었다.
티메시테우스는 제국의 행정을 주로 맡아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면서도 군사 방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갖춘 보기드문 인재였다. 그는 상술했듯 세베루스 왕조 시절부터 로마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경력을 쌓았는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시기에 중용받아 제국의 행정을 도맡았다. 그러다가 알렉산데르 황제가 살해된 후, 막시미누스의 보좌관이 되어 행정 면에서는 까막눈인 황제를 대신해 제국의 행정을 도맡았다. 막시미누스가 국가의 적으로 낙인 찍혔을 때 잠시 공직을 떠나야 했지만, 곧 로마로 돌아왔고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 파우스티나의 신임을 얻어 근위대장이 된 후 자신의 딸을 황제와 결혼시킴으로서 로마 정계 최고의 권력자로 등극한 사람이었다.
이런 가운데 240년 동방 일대에서 잠잠하던 사산조 페르시아가 샤푸르 1세의 지휘 아래 사막도시 하트라를 점령하더니, 1년 뒤 로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2.2.3. 페르시아 전쟁


242년,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1세가 로마 동방 영토인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소아시아의 안티오크를 위협했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황제를 대동한 채 동방 원정에 착수했다.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샤푸르 1세는 이미 탈취한 도시들의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티그리스 강으로 후퇴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첫 번째 원정 승리를 원로원에게 통지하면서 그 공로를 티메시테우스에게 돌렸다.
티메시테우스는 원정 기간 내내 군대의 안전과 기강을 감독하고 단속했다. 그는 부대 내에 물자를 충분히 비축하고 전방의 모든 도시들에 식초, 베이컨, 밀짚, 보리, 밀 등의 창고를 짓게 함으로써 군인들이 안심하고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로마군은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레세나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페르시아의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런데 243년, 티메시테우스는 돌연 사망했다. 이질 때문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향간에서는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장인이 갑자기 사라지자, 고르디아누스 3세는 망연자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의 입지는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2.3. 불분명한 죽음


19세의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자신의 장인 티메시테우스를 굉장히 신뢰했고, 그가 가진 능력과 경험에 의지했으므로 티메시테우스의 불분명한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젊은 황제는 낙담한 나머지 13살 때 상황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자연스레 황제 경비는 느슨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티메시테우스의 후임 근위대장이 된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일부러 병사들에게 생필품 배급을 늦췄다. 이에 병사들은 생필품 부족을 불평하며 나이값도 못 하는 어린 황제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겼다. 필리푸스는 병사들을 선동해 244년 2월 11일 유프라테스 강과 아보라스 샛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했다. 그는 그곳에 고르디아누스 3세의 시신을 묻고[6] 그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그렇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내 트란퀼리나는 남편이 암살(또는 전사)한 직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역시 더 이상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볼때 필리푸스 아라부스나 로마 근위대 병사들에게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페르시아 측의 기록들에 따르면 사산조 군대와 크테시폰을 놓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로마군은 대패하고 고르디아누스 3세는 낙마 후 전사했다고 한다. 로마측에서 전승된 기록들 역시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행보에 대해 불분명하다. 따라서 케펜호펜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의 경우, 교전국 페르시아의 기록 등을 근거로 고르디아누스 3세가 필리푸스 아라부스 등의 음모로 암살되었다고 단정짓지 않고 있다.

3. 평가


고르디아누스 3세는 사망 이후에도 로마인들에게 ‘고결한 황태자’, ‘진정한 로마인’ 등으로 추앙받은 게르마니쿠스 못지 않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는 이런 평가와 달리 당시 황제 자리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군인들에게는 당시에도 절대적인 아이돌로 추앙받는 게르마니쿠스와 그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 같은 아이돌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7].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3세는 여러 부분에서 게르마니쿠스보다는 그가 생전 롤모델로 삼은, 소년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공통점이 많았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당대 로마의 기록 중 하나인 <로마황제열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명랑하고 경쾌한 젊은이였다. 얼굴은 잘 생겼고,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호감을 샀으며...(중략)... 실제로 그에게는 나이를 제외하고는 제국을 통치하는 군주로서의 부적절한 면이 전혀 없었다.

-<로마황제열전> 중 고르디아누스의 생애, 33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살아생전 평판과 그 후광 덕에 13살의 나이임에도 이들의 유일한 혈육인 이유로 원로원,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단독황제가 된 이후에도 잘 생긴 외모, 명랑한 성격,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예의바른 언행, 똑똑한 머리와 학문에 대한 사랑, 책임감으로 집약된 개인적 매력 덕에 이탈리아 내 모든 로마인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게르마니쿠스와 비교될 만하다고 찬사를 받았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즉위 당시, 엘라가발루스를 제거한 근위대와 등장당시부터 그를 지지한 원로원과 로마민중에게 지지를 받고 옹립된 케이스와 비슷한데다 즉위 후 보여준 모습도 판박이처럼 똑같은 모습이 많아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는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처럼 어렸고, 단점도 비슷햇다. 그렇다고 해서 그 혈통적 정통성이 완벽했냐고 물어보면 그것도 아니다. 그는 다른 경쟁자들과 비교해 그나마 훌륭한 케이스였을 뿐이지, 카이사르 칭호를 받을 당시 건재했던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같이 수대째 내려온 명문귀족 태생의 베테랑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 후광이 중요했는데, 이마저도 게르마니쿠스의 타고난 장점인 ‘혈통과 정통성’[8]은커녕 황제 개인은 군대의 신임을 받지 못해도, 병사들과 원로원에게 군사적 천재성을 인정받았고 군인들의 사랑을 받은 카라칼라의 오촌조카이자 양손자라는 타이틀이 있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처럼 나름의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카이사르 등극에서 볼 수 있듯이,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가 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준 것은 본인들이 스스로 준게 아니라 민중들이 우격다짐으로 밀어 붙이면서 요구한 결과였다. 또 소년 고르디아누스가 따른 또래들보다 평균보다 능력이나 리더십이 낫다고 평가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소년황제 내지 귀족자제였는지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개인적, 능력적으로 내세울 거라고는 외조부, 외삼촌이 황제를 선언하면서 얻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대항마’라는 상징성 외에는 한 개인의 경력이나 능력으로는 역시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상태인데다, 공손하고 예의바른 미소년 황제일 뿐이지 제정 중기부터 나타난 정통성의 특장점[9]이 전혀 없었다. 즉, 고르디아누스 3세는 게르마니쿠스 같은 완벽한 정통성과 스스로 쌓은 능력과 실적도 없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의 정통성을 받았던데다 10년 넘게 제위를 지키며 군사업무 외에는 능력과 업무실적에서 합격점을 받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같은 평균 이상의 통치자는 절대 아니었다.
혈통적 정통성과 그 안정성이 부족해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대항마의 혈육이라는 상징성은 고르디아누스 3세 등장 당시, 미성년자인 그가 민중들과 원로원의 지지를 받았던 이유인 것은 사실이다. 또 고르디아누스 3세는 분명히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 황제였다면 분명히 세간의 기대처럼 평균 이상의 훌륭한 군주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카이사르가 되고, 단독황제가 된 시점은 안정적이었던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지고 3세기의 위기가 시작된 난세였고, 불행하게도 개인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시간도 부족했다. 특히 두 명의 공동황제 모두 빠르게 몰락한 탓에 형식적으로 관직, 영예를 원로원에게 차근차근 받을 수도 없던 상황과 때이른 티메시테우스의 급사 등은 불행이었다.
여기에서 더 큰 불행은 이 소년황제가 침착하고 진중한 성격과 품성을 갖추고 있어도, 위기 순간에 과감하게 대처하는 적극적인 성격도 아닌 부분이었다. 이는 성인 황제라고 해도 엄청난 정신력을 갖춘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케이스가 아닌 이상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었던 것은 맞다. 그렇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가 살던 시대는 3세기였고, 세베루스 왕조가 갑작스레 단절되고 혼란이 시작된 시대였다. 그래서 이런 그의 미숙함들은 한계가 뚜렷한 정통성과 함께 약점이 뚜렷하게 만들어버렸다. 이 결과, 고르디아누스 3세의 인기와 호평은 게르마니쿠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비교해 수도 로마의 원로원과 민중들에게는 비슷할 수는 있어도, 한계가 뚜렷했고 개인의 역량이 많이 요구받는 로마황제라는 타이틀상 결점이 될 수밖에 없게 됐다. 따라서 그는 어머니의 섭정과 장인 티메시테우스로 대표되는 측근 세력 기반의 내각 중심의 운영을 한 탓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많이 참조했는데, 이는 시간이 부족했고 그마저도 페르시아의 전쟁 중 어그러지면서 고르디아누스 3세가 위기 상황에서 황제를 직접 보호해줄 로마군의 지지를 완벽히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종합적인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가 위기 상황에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처럼 급격히 무너지는 최악의 결과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사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로마 내 민중들의 생각처럼 모든 재능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트라야누스콘스탄티누스 1세 같은 천재 군주나 정치인도 아니었고, 즉위 과정부터 제위에 있던 시절 내내 그를 둘러싼 당시 로마 상황도 좋지 않았다. 또 그는 원정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들에서 보이듯 장인의 급작스러운 사망 직후부터 어린 애 같이 넋을 잃고 후속 조치도 못한 탓에 제 스스로 로마군에게 지지를 잃는 최악의 결과가 됐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는 평민들에게 고평가를 받은 것에 비해 평범한 편인 소년황제에 불과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데, 이런 악평이 아니더라도 장인이자 보호자였던 티메시테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일관되게 평가받는다. 이는 당시 로마 여론도 마찬가지였는데, 고르디아누스 3세의 죽음이 전해질 당시 원로원과 민중들은 소년황제가 미처 그의 모든 재능을 발휘하기 전에 죽었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고 한다.

4. 여담


고르디아누스 3세의 초상화가 새겨진 은화는 현재 가장 구하기 쉬운 로마 제국의 은화인데 그 이유는 그가 살았던 시기에 은화로서의 데나리우스가 마지막으로 대량발행되었기 때문이다.

[1] 페르시아 측 기록에서는 수도 크테시폰까지 로마군이 밀고 왔고, 격렬한 전투 중 고르디아누스 3세가 낙마한 뒤 전사했다고 한다.[2] 폼페이우스가 지은 저택.[3] 로마인들, 특히 이 당시 상류층들에게 자녀의 풀네임은 그가 어떤 혈통을 이어 받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정통성의 증거이기도 했다.[4] 고르디아누스 1세는 성공한 속주 태생의 전직 집정관으로 교양이 풍부하고 적을 많이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참자임에도 로마 최고 수준의 부자가 된 시절인 카라칼라 황제 시절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본래부터 권력욕이 강했고, 큰 대회 등을 열면서 스스로를 군중들에게 트라야누스의 후손이자 그라쿠스 형제의 셈프로니우스 가문 후손이라고 주장했다.[5] 카펠리아누스 본인의 지휘력과 경험도 풍부한데다, 누미디아 속주 주둔 병력은 베르베르인과의 오랜 전투 등으로 다져진 북아프리카 내 정예병력이었기 때문이다.[6] 또는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자상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인기가 있던 고르디아누스 3세의 평판을 의식해, 죽은 황제의 시신을 수습한 뒤 로마로 옮기고 신격화시켰다고 한다.[7]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부자에 대한 라인강, 판노니아 일대 로마군의 절대적인 사랑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자발적이었고,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이들 부자를 위한 추모식과 제사는 무려 3세기 후반까지도 계속되었고, 이를 기린 탑은 드루수스 부자가 생전 활약한 마인츠에 드루수스 탑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아울러 이들 부자의 생애를 다룬 책들은 이 일대 로마군 병사들이 즐겨 읽던 책 중 하나였고, 재향군인회 퇴역병 가족들 역시 이들을 존경했다고 한다.[8]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직계 남자황족이고, 아우구스투스 생전 차차기 황제로 확정된 아우구스투스의 실질적인 ‘정통’후계자였다. 그는 부계와 모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피를 이어받았고 그의 큰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인데다 아내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이자 아그리파의 장녀 대 아그리피나였다. 다시 말하면, 공화정 시대 수백년을 주름잡던 귀족들이 즐비한 초기 제정시대 당시, 조상으로 올라가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로마장군들과 귀족 가문들의 피를 죄다 이어받은 사람이 실력으로 모든 정적을 제압한 유일권력자의 친혈육, 그것도 이 최고권력자에게 공식적으로 미래를 보장받고 부친의 후광에 더해 본인의 인품과 노력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평가받은 황태자였다.[9] 10대 이전부터 형식상 받은 여러 군복무 경력과 정치, 행정 경험과 훈장, 영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