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어 파이터 3
バーチャファイター3
Virtua Fighter 3
1. 개요
1996년 9월 발매. 당시 최강의 스펙을 자랑하던 MODEL3 기판의 첫 작품으로 등장하여 전세계 게임계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사막, 물, 눈, 흩날리는 옷깃, 환경 맵핑 등 96년의 기술력으로 버쳐3같은 그래픽을 내는 게임은 단연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특히 3편은 인류의 '''역사적인 발명품'''으로 인정받아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그러나 3편은 링 환경의 다양화에 탈출 버튼의 추가와 잡기 커맨드의 변화 등 게임디자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와 구 유저와 신규유저의 평이 엇갈렸으며 게임진입장벽이 크게 높아졌다.
3편의 경우는 2편의 개발단계의 모습과 유사하다. 우메노코지 아오이의 경우도 본래는 2편부터 등장할 예정이었으며, 게임 시스템과 그래픽도 2편의 개발단계에서 쓰이던 것이다.
발매 초기 버전들은 그래픽이 깨지는 계단 현상과 치명적인 버그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철권 2보다도 심한데 왕초보자도 쓰리코인 정도면 바로 클리어할 수 있는 쉽고도 악명높기로 유명한 리온의 섬전공각 무한 다운공격이 대표적이었고 거기에 적을 띄운 후 바로 PK 를 입력한 뒤 K 를 킥캔슬 하면 넘어지던 적이 벌떡 일어나 얼어붙어 다시 두들겨 팰 수 있는 어이없고도 치명적인 버그도 있었다. 이런 수많은 문제점을 가진 때문인지 이전작들과는 다르게 여러 버전이 나왔는데 최종적으로는 버전D 까지 나왔다. 다만 짠손을 카운터 맞으면 잡기확정이라든가 역시 버파3에서 악명높은 하단 짠발마저도 카운터 맞으면 잡기확정 이 되는 등 짠기술들 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밸런스가 개판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버추어파이터 3 의 진정한 시작은 TB 버전이 나온 이후부터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으며 실제로 오리지널 3와 리버전 A는 거의 회자되지 않는다.
메인 프로그래머 및 디렉터: 카쿠 테츠야, 카타기리 다이치
디렉터 디자이너: 이자키 카즈히로
AI, 단위인정전: 마츠모토 코타
캐릭터 모델링: '''나고시 토시히로'''
백그라운드 그래픽 디자이너: 니시무라 나오타케
사운드: 카와구치 히로시, '''미츠요시 타케노부''', 이토 후미오, 쇼지 히데노리
종합감독 및 프로듀서: '''스즈키 유'''
2. 시스템 특징
시리즈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E버튼이 추가되어[1] 4버튼 체제로 제작되었고 기존의 사각의 링 형태에서 벗어나 다양한 스타일의 스테이지가 추가되었다. 이런 스테이지 변화에 기존의 평지에서 싸우는 것이 아닌 고저차와 벽 콤보, 바운드콤보를 처음 도입하여 게임상에서 여러가지 상황에 맞는 유연함을 강조했지만 2탄에 비해 대전의 속도감이 다소 저하되고 극한의 심리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기에 시스템적인 변화에 비해서는 플레이 양상이 다소 고정적으로 정착되었다. 또한 각 캐릭터마다 몸무게를 게임상에 적용시켜놓아 게임의 플레이를 좀 더 심도있게 하게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게임라인의 철권빠였던 모 객원기자는 이런것들을 하드웨어의 힘으로 게임성을 변화시켜간다는 독특한 컨셉..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이기도..
그리고 3만의 새로운 시스템이 다시 유저의 의해 창안되기도 하였는데 바로 '스텝'이다.[2] 이를 통한 횡이동이 강조되어 공간을 활용하는 플레이가 중요시되고 있는 3편이지만 단순 활용을 넘어 스탭을 통한 거리조절 및 공간의 활용을 극단적으로 높이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2의 종결자였던 신의욱. 하단 대쉬를 캔슬하여 단순 1회 이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플레이 내내 위빙을 하면서 상대방의 간격과 거리를 자유롭게 조절이 가능하게 해주는 코리안 스텝을 창안하면서 E버튼의 활용폭이 커졌다.[3]
덕분에 이 활용은 세가의 공식 버추어 파이터 3 가이드에 신의욱의 이름과 함께 가장 중요한 테크닉으로 등록. 그리고 신의욱은 제작자였던 3편의 제작진들과 스즈키 유 앞에서 직접 '코리안 스텝' 시연. 이것을 본 스즈키 유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4]
이외에도 디아블로팀에서 창안한 디아블로 매직 스탭 등 다양한 스텝과 여러가지 휭 이동을 활용하는 방법이 존재하였으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이 정도...
단급표
3. 한국의 상황
그래픽의 퍼포먼스가 경악스러운 만큼 기판의 가격도 굉장히 높아 보급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초기 비용도 300~500만원이라는 고가로 책정되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을수 없는것은 당연했다. 현재 환율로 환산시 3600만원 가량(...)한다. 현재를 기준으로 해도 적은 돈은 아닌 마당에 이 게임이 국내에 발매된 것은 1997년 봄이라는 점에서 체감가격은 현재보다 더욱 높았다. 지방으로 말하자면 군지역은 물론 간신히 시 이름을 달고 있는 소도시는 도시에 하나도 없을 수 있었고, 중소도시쯤 되어야 시내 오락실에 하나쯤 있을까 했다.
게임의 흐름은 대시 거리가 짧아진 것을 스피드가 떨어진다고 느낀 사람이 많았던 탓인데 한국에서는 팀 배틀이 활성화된 곳 말고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때문에 오히려 2편으로 회귀하는 유저가 많았다.[5]
다만 2편 시절의 최상위 괴수들은 3편으로 전환하였고 2편에 이어서 세계최강의 수준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신규유입 유저가 없었다는 점과 게임의 기본적인 난이도가 타 게임에 비해 높았던지라 결국 한국에서 버추어 파이터가 몰락하는데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신규유저 뿐만이 아니라 기존 2편의 유저들 중에서도 3에 실망해 이탈한 유저도 많았다. 일례로 3 발매 직전까지도 2 의 고수가 바글대고 끊임없는 플레이가 이루어지던 준 성지급 오락실들에서도 당연히 인기열풍을 이을 것으로 예상한 오락실 업주가 3편을 입하했으나 즉시 파리만 날렸던 걸 보면 2편의 유저에서 많은 수가 즉시 외면하고 이탈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3편은 수입사의 부도까지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고 오락실 업주들에게도 큰 손해를 안겼으며 국내에서는 손에 꼽히는 몇개의 오락실에만 소수의 유저가 모여 팀배틀을 꾸려나갔다. 게다가 같은 시기 철권 3가 대히트를 치면서 유저들이 그쪽으로 이탈한 영향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발전시킨 팀 배틀 문화는 3편에서 완벽하게 정착되어 타 게임의 유저에게도 정착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한국 최초의 전국단위 팀 배틀이었던 '메가 배틀'[6] 을 주최하여 배틀문화의 기점이 되었다. 특히 PC통신을 기반으로 하여 전국 각지의 고수들이 연결되면서 '지역 버파'를 고수하던 환경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폭넓은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 강한 한국세의 원동력이 되었다.
4. 일본의 상황
2편에서 강자로 군림했던 4대철인이 카시와 제프리를 제외하고 일거에 몰락하면서 새로운 세대교체가 되었다. 2편만큼은 아니더라도[7] 역시 큰 인기를 누렸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유저들의 반발이 컸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새로운 유저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여전히 인기를 지켜나갔고 동시에 일본의 유명 플레이어들도 카게 철인이었던 '카사오'만 유일하게 살아남고 나머지 철인들은 세대교체의 흐름속에 모두 은퇴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4 시절의 강자로 이름을 날리게되는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했다.
이때 등장한 유저는 침서탄과 승리만을 추구하는 엽기적인 플레이로 유명했던 '오카다' 및 4에서도 명성을 날린 '치비타', '세가루' , '오스 아키라'등이 있지만 한국의 일본과의 수준차이가 심각했었기에[8] 이때 당시 한국에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5. 맥시멈 배틀
당시 한국 대표 플레이 영상(4분 29초부터).
김성희의 G식백과 맥시멈배틀 이야기
맥시멈배틀 비하인드 스토리[9]
2편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한 신의욱, 3편에서도 마찬가지. 2편에서 비해서는 조금은 포스가 줄어든 느낌이 있지만 어차피 의미가 없는지라 여전히 극강의 실력자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세가에서는 3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계대회를 주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맥시멈 배틀'이다. 세계 7개국에서 12명의 선수가 선발되어 참가했으며 일본내 최강의 파이이자 여성 유저인 챤네와 잭키유저 야나가사라가 출전했다.
한국의 대표로 선발된 이는 리플레이즈의 신의욱과 사시미팀의 조학동. 신의욱의 경우 당시에도 한국 최강자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였고 조학동의 역시 특유의 심리전과 라우의 사상장 러쉬로 명성을 날리는 유저였다는 점에서 한국의 무난한 우승을 예상했다.[10]
대회는 예상대로 신의욱은 화려한 플레이로 일본 관객들에게 환호를 받으며 순조롭게 결승까지 올라갔었다. 특히 아키라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에서는 정석이었던 타격, 잡기, 가드해체의 삼지선다 및 순보번과에 의한 가드해체에서 연결되는 콤보라인, 잡기 타이밍에 붕격운신쌍호장 심어두기 등등의 플레이에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반격기도 잘 썼다. 아키라 다운 아키라를 처음 본 셈. 당시 상대하는 유저들의 발언은 하나같이 '지나치게 강하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11] 사실 이때 아키라는 일본에서 강캐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대회에서도 신의욱이 유일한 사용자였는데 실제로도 3에선 아키라보다 강한 캐릭터들이 널렸기에 우승을 위해서는 굳이 그다지 성능이 강하지 않은 아키라로 플레이 할 필요는 없었으나[12] 아키라로 플레이해 더욱 큰 임팩트를 준 셈.
조학동 역시 상대의 타이밍을 뺏는 특유의 사상장 러쉬와 카운터 잡기를 비롯, 8강에서는 일본 최강 파이였던 찬네를 상대로 라우가 뽑을 수 있는 최대한의 데미지 콤보(사상장카운터-쌍호열파-비연전신장-전신사하장-연환전신소각)를 일본에서 선보이며 압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학동 역시 순조롭게 이겨나가면서 4강전에서 야나가사라와 격돌. 이때 야나가사라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4강전. 야나가사라를 특유의 사상장 러쉬로 4라운드 퍼펙트 승으로 몰아붙이는 명장면을 유감없이 선보이며 결승까지 진출[13] , 결국 한국대표 두 명이 1위를 다투는 상황이 왔고 신의욱이 우승하면서 세계대회는 마무리되었다. 이 때문인지 공식발매된 대회 비디오를 보면 결승에서는 해설 자체도 거의 없다.[14]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시 신의욱이나 조학동이나 '''일본의 4각스틱을 대회에 참가하고 나서 처음 만져봤다는 것.''' 연습조차 하지 못하고 곧바로 한 번의 패배로 탈락하는 실전에서 4각스틱을 사용하는 극악한 조건이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우승한 것이다. 특히 조학동의 경우 손이 커서 굉장히 치명적으로 작용했는데 그 덕에 대회 초반부는 기본 잡기와 한두 가지 기술만 다루며 심리전에 집중하는 식으로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조금 적응이 된 이후로는 앞서 언급하다시피 특유의 플레이 스타일을 발휘하며 일본 대표 챤네와 야나가사라를 관광 보내게 된다. 그것도 4각스틱에 완벽하게 적응된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5.1. 맥시멈 배틀 이후의 여파
한국인 두 사람의 결승은 일본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로 남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생각외로 컸다. 일본의 우승을 생각했던 세가는 이런 결과에 당혹했는지 '''공식 비디오에는 60분 가량을 일본 대표선발전을 위주로 채워버리고 나머지 20분을 세계대회로 살짝 채우는 비범한 짓을 저지른다.''' 또한 대회 당시 신의욱, 조학동의 인터뷰를 모두 편집, 삭제를 하는 행동까지 선보인다.
그리고 우승직후 신의욱, 조학동 두 명은 일본의 최강 플레이어들 상대로 다시 한 번 일전을 벌이게되는데 결과는 당연히 처참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첫날 무패로 압살한 조학동은 먼저 귀국. 홀로 남은 신의욱과 일본 대표게이머들[15] 의 대전은 모든 격투게임을 통틀어 벌어진 한일전에서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결과로 말하면 10X승 6~7패 가량. 6~7패로 인해 철권의 장익수의 100연승 무패 신화 비교할 수 없다는 유저들이 간혹 있었지만 실상 내용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시 신의욱은 2일간의 일전 (조학동은 1일차 무패 연승 이후 먼저 귀국) 속에서 한판당 9전 5선승제라는 압박스러운 룰로 진행됐다.[16] 그리고 신의욱의 플레이방식 역시 철저히 일본 유저들을 농락하는 형태로 진행됐는데 자신의 주력 캐릭터는 배제한 채 상대방의 캐릭터와 동일하게 선택하여 플레이 했다. 쉽게 말해 일본의 사라 최강자가 나오면 신의욱도 사라를 선택하는 식으로 대응하여 플레이, 일본의 잭키 최강자가 나오면 잭키로 대응하여 대놓고 압살해버리는 형태로 진행. 즉 자신의 주력은 제외한 채 전 캐릭터를 사용하여 능욕하는 사상 유례없는 안드로메다 관광을 진행했다.
그리고 한가지 첨언하자면 버추어 파이터 3에서 신의욱의 주 캐릭터는 대회에서 우승한 아키라 유키가 아니었다. 3편 당시 주력 캐릭터는 잭키였으며 이후 리온 라파엘 같은 캐릭터로 대활약한 전적이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당시 한국의 최고 대회였던 제2회 메가배틀 신의욱이 소속된 리플레이즈와 디아블로의 결승전이였다. 당시 리플레이즈는 10~11점 정도까지 뒤진 최악의 상황에서 신의욱은 갑자기 리온을 꺼내들면서 기적적인 연승으로 1점~2점차까지 추격하던 명장면을 연출했었다.
이후 아쉽게 나머지 1승~2승을 하지 못해 준우승으로 대회를 마쳤지만 당시 이 시기의 신의욱을 아는 사람들은 맥시멈 배틀의 우승의 모습보다는 이런 기적적인 장면들이 신의욱이라는 플레이어의 수준을 확실하게 보여준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참고로 당시 상대팀이었던 디아블로 팀 역시 세계 최강이라고 할수 있는 한국에서 파이널 4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강팀이며 디아블로 매직 스탭이라는 테크닉을 고안하여 명성을 떨치던 팀이다. 대표적인 플레이어는 팀장 권오민, 권창훈 리온 등이 명성을 떨쳤다.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는 '''카게마루'''를 주력 캐릭터로 내세워 우승을 차지한바가 있으며 신의욱의 이런 아키라 유키에 관한 이미지는 버추어 파이터 2 시기의 아키라로 보여준 초월적인 실력으로 보여준 시기와 [17] 맥시멈 배틀의 아키라 유키로 우승하고 임팩트를 남기면서 인해 아키라가 주 캐릭터로 많은 이들이 착각하곤 했지만 버추어 파이터 3에서 만큼 사실 잘못 알려진 경우다. [18]
어쨌든 문제는 이런 결과를 본 세가는 우승자 자격 이후 다음 대회에 초청한다는 약속과는 달리 '''철저히 한국인 선수들을 제외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두 번 다시 대회를 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자국의 유저만 우대하는 짓을 저지르자 한국에서는 이 게임에 관심을 완전히 끊게 되면서 오리지널이 발매한지 불과 2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세계대회 우승 상품 자체도 버파3 기판이었지만 한국대표가 결승에서 맞붙자 상품을 바꾸었다라는 말도 나왔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당시 게임라인 인터뷰에서 신의욱이 "우승 상품은 버파3 기판이라도 주는줄 알았는데 기판은커녕 맥빠지는 상품이라 실망했다." 라고 인터뷰한데서 나온 것이 와전된 것. 일본은 2016년 e스포츠협회가 출범하기 전까지 법률상 게임대회에 10만엔 이상의 상금이나 경품을 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자세히 설명하자면 길어지는데, 도박개장죄 관련 문제 때문에 그렇다), 애초에 기판은 상품으로 걸릴 수가 없었다.
6. 확장판
6.1. 버추어 파이터 3TB
'''버추어 파이터 3TB 엔딩'''
3편 발매이후 1년후인 1997년 9월에 발매된 게임. TB라는 제목 그대로 3VS3를 지원하는 팀배틀의 방식을 지원하는 확장판. 기존의 버추어 파이터3가 A~D 버전까지 4가지가 정리되지 못하고 난립하면서 문제가 계속 발생하자 4개의 버전을 하나로 통합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도 찾아보기 쉬웠고 팀 배틀도 3TB로 계속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버추어 파이터 2의 인기에 근접 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TB버전에서는 또한 고수급 플레이어들의 실력이 농익어서 절정고수급 레벨이 다수 등장, 더이상 신의욱을 단독 최강자라 부를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TB 발매 이후에는 일본 중수급 이상 유저들에게도 한국스텝은 필수적인 것 중 하나가 되었다.
3 VS 3만을 지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밸런스 측면에서도 D버전을 베이스로 재조정되었고, 알게모르게 수정사항이 많다. 다운판정인 기술을 맞아도 다운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타카아라시의 다운 조건은 다른 캐릭터와 동일하게 조정되었다(물론 뜨지는 않기 때문에 콤보 전략이 일반캐릭터와 상당히 다르다). 아키라의 순신번과 등 일부 캐릭터에 신기술이 추가 되기도 해서 이래저래 3와는 다른 감각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쓸데없는 기능으로 1인 플레이 때에 한해 플레이 도중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자신이 조작하는 플레이어의 1인칭 시점으로 플레이 할 수 있다. 가정용 이식버전 철권2 에도 있던 비기와 같은 것으로 한두번 쯤 재미로 해보는 정도의 기능.
7. 이식작
: 아케이드판이 출시되고 얼마 후 새턴으로의 이식이 정식으로 발표되었고 실제로 개발이 진행중이었지만 2년여간 제대로 된 정보 하나 공개되지 않고 새턴에는 폴리곤을 구부리는 기술이 있으며 이를 이용하면 가능 등등 립서비스만 날리고 새턴용 버파3 희망고문만 주다가 결국 드림캐스트판 3tb의 이식이 발표되면서 새턴판의 발매는 무산되었다. 한참 지난 후에 새턴으로 개발되던 3편의 모습이 일부 공개되었다.
파이터즈 메가믹스의 버파 캐릭터들 모션이 3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커맨드 연습이나 겨우 할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나마도 아키라 등 소수를 제외하면 없는 기술까지 있어서 망했어요. 새턴판의 발매를 취소하는 대신 새턴판 이식에 들어가는 인력과 자금을 드림캐스트판으로 집중할 수 있으므로 드림캐스트판으로 더욱 충실한 완성도로 아쉬움을 달래드리겠다고 했지만 이는 훗날 완벽한 립서비스용 구라로 판명났다. 그래서 지금도 스즈키 유를 점박이 구라쟁이라고 까는 사람도 많다.
드림캐스트: 드림캐스트 동시 발매작. 베이스는 버추어 파이터 3TB이고[19] 이식작업은 겐키가 담당하였다.[20] VGA-BOX박스 대응으로 업소용(496*384)을 능가하는 해상도로 당시 VGA 박스를 이용한 모니터에서 출력되는 그래픽은 많은 게이머들을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최신예 아케이드 3D게임을 약 2년 지난 시점에서 집에서 즐긴다는 것은 당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당연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자타임이 온 유저들은 폴리곤이 미묘하게 줄어들어 캐릭터의 관절처리가 미흡하며 아오이의 도복바지나 잭키의 상의가 펄럭이는 연출도 삭제 되었고 배경 또한 텍스쳐의 해상도가 떨어지는 등 이런 저런 차이점 눈에 보이는 단점들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사실 버파3 매니아가 아니면 잘 모르는 이야기라 언급이 거의 없었던 이야기지만 여성 캐릭터의 경우 게임상의 적용된 몸무게를 아오이 기준으로 하나로 동일하게 만들어[21] 게임플레이 이식조차 완전하지 않았다는게 드러났고 당시 철권 시리즈가 주도한 초월이식 붐과는 달리 정교한 트레이닝 모드는 둘째치고 VS모드조차 없는 무성의함 역시 지적을 많이 받았다. 이는 북미판 발매때 개선된다.
굳이 실드를 조금 쳐주자면 이식에 주어진 시간이 6개월 정도로 촉박했고 겐키에게 주어진 개발킷은 '''베타버전'''으로 '''드림캐스트의 GPU인 PowerVR의 성능을 반 정도 밖에 사용할 수 없는 미완성품이었다고 한다.''' 겐키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악조건하에서 분투하며 이식한 작품인 셈. 그러나 애시당초 콘솔의 얼굴인 런칭타이틀을, 최첨단 3D 기술을 이용해 제작된 게임을 외주로 줘서 개발했다는 점에서 세가나 본작은 까여도 마땅하다.
버파3의 콘솔이식작은 이 작품이 유일하기 때문에 이식을 고대하는 유저들이 많다. 한때 드림캐스트 콜렉션이 발매되어 희망이 보이기도 했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고 몇 번은 이식된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식될 일은 아직도 요원해보인다.
초회판의 경우에는 쉔무(당시 타이틀은 '프로젝트 버클리')의 예고 및 메이킹 필름이 보너스로 들어있다.
[1] 2편에서도 몇몇 캐릭터에 한해 횡이동이 있었지만 실제로 공격을 회피하는 성능은 거의 없었다.[2] 2에서도 하단 대쉬를 이용한 기초적인 스탭은 존재하며 G캔슬을 통하는 방법도 존재.[3] 일본의 4대 철인 중 하나였던 붕붕마루가 코리안 스텝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굳어졌다.[4] 하단 캔슬 자체는 스즈키 유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그대로 출시하였다.[5] 실제로는 프레임 자체가 확 느려지거나 그런 문제는 없었고 모션과 속도 조절이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쉬의 경우는 캔슬 대쉬로 중급자 이상은 날라다닐 수 있었지만 이건 동네 오락실에 모든 플레이어가 웨이브 대쉬로 다가가 초풍으로 똥침 넣는 세상에서나 가능한 것.[6] 양재동 메가존에서 열렸으며 만화 선녀강림의 작가이자 날아라 슈퍼보드 환상서유기의 일러스트를 담당했던 유현이 대회 로고 및 일러스트를 맡았다.[7] 초기 3편이 망했다는 말이 많았지만 스트리트 파이터처럼 2편이 지나치게 성공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적어보였기 때문이다.[8] 신의욱 曰 '일본의 톱 플레이어의 수준은 한국에서는 흔하게 있는 동네 고수 수준 정도'. 참고로 맥시멈배틀에서의 대전상대들에 대해서도 대만쪽 유저들이 일본 유저들보다 수준이 높았다고 이야기한다. 후술할 맥시멈 배틀에서 3,4위전에서 대만 대표가 일본 대표인 야나가 사라를 이겨 이를 증명했다.[9] 당시 동행했던 천창욱씨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당시 비디오라고 한다![10] 다만 대회 당일 일본 호텔에서 한국 유통사는 이 두 명에게 달랑 차비만 던져주고 알아서 찾아가라는 만행도 있었다. 일단 대회 장소까지는 무사히 도착, 다행히 현장에 동행한 한국인(=현 프로레슬링 해설가로 유명한 천창욱)이 있어서 순조롭게 대회 참가.[11] 이때 결승 직전 대만의 라우 유저와 붙었을 때 기상 중단 타격을 맞으면 잡기 확정이라고 알고 있던 당시 유저들(한국과 대만도 동일했다고 한다)에게 아니다라고 말하듯 바로 붕격운신쌍호장으로 카운터를 날리는 장면에서 모두가 술렁일 정도였다. 참고로 저 사실은 사실 신의욱 씨 본인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리플레이즈 팀원들도 모르고 있다가 대회 이후에 내용 보고 물어봐서야 알려줬다고 한다...[12] 국내에서도 이 시절 신의욱의 주캐는 잭키였다. 잭키가 아키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고 쓰기도 쉬웠기 때문.[13] 이때 해설진은 야나가사라가 이 날 예선전 포함한 경기를 많이 치뤄서 피로가 쌓인게 아니냐면서 질 때를 대비한 보험 언플을 시전했다...[14] 여담으로, 신의욱과 조학동은 대회 시작 전에 결승에서 만나자고 이야기했고, 보기 좋게 결승에서 만났다고.[15] 일본내에선 이 일본 고수들이 '철인'이라고 불렸는데 이 '철인'이라고 불린 고수들은 고수들이 많은 오락실에서도 '''100전을 하면 95% 이상의 승률을 자랑하던 굇수들이라고 한다.'''[16] 게다가 당시 동행했던 천창욱씨의 말에 따르면 기판 자체도 캐릭터의 체력을 높게 설정해놓은 버전이었다고 한다. 즉,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장기전이었던 셈.[17] 같이 세계대회를 참가했던 이게라우 조학동조차 이 시기의 신의욱을 언급하길 10판 중 1판조차 이기는게 어려웠다고 한 바가 있다. 당시 이게라우 조학동은 버추어 파이터 2 시절 한국내에서 8강권을 마크하던 사시미팀을 이끌고 있었음에도 저렇게 회고할 정도...[18] 당대 세계 최강의 아키라 유키 플레이어는 신의욱이 아닌 부산 지역의 전설적인 플레이어 주씨 아키라를 언급하는 이들이 많은 편이다. [19] 팀배틀 모드와 1:1 모드가 둘다 존재한다. 사실 아케이드판 TB도 설정에 따라 기존 3처럼 1:1 대전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20] 당시 쉔무의 작업으로 인해 AM2팀이 직접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21] 아케이드판의 경우 사라>파이>아오이 순으로 몸무게가 무겁게 적용되어있는데, 아오이가 가장 가벼운 관계로 아오이 전용 콤보가 꽤 있었다. 다시 말하면 드캐판은 이 콤보들이 사라, 파이에게도 그냥 들어간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