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리지 보고서
Beveridge Report
1. 개요
1942년 영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가 정부의 위촉을 받아 작성한 사회 복지 보고서. 원래 제목은 사회 보험과 관련 서비스(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이지만 보통 작성자의 이름을 따와서 베버리지 보고서라고 부른다. 상술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현이 매우 유명하며, 복지국가의 이념을 상징하는 문서로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들의 사회 복지 정책에 있어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From the cradle to the grave'''
2. 배경
20세기 초까지 서구권에서는 자유방임주의가 절대적인 원칙으로 간주되었고, 이에 의거하여 국가는 최소한의 치안과 국방만을 제공하는 야경국가로만 기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간주되었다. 허나 이러한 자유방임주의는 불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극도의 빈부격차를 야기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상황은 뒤바뀐다. 총력전으로 진행된 1차대전의 특성상 정부는 전시물자의 효율적인 동원을 위해 시장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대공황 시기 각국 정부가 케인즈주의와 흡사한 없는 수요까지 만들어서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등의 정책을 펼치자 야경국가에 대한 신화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던 것.
이러한 와중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영국에서는 승전을 위해 보수당과 노동당이 힘을 합쳐 거국 내각을 구성한다. 클레멘트 애틀리를 비롯하여 노동당 출신 인사들은 내각 입각을 계기로 평소부터 강하게 주장해왔던 복지국가 수립을 수상 윈스턴 처칠에게 요구했고, 처칠과 보수당 역시 전쟁으로 지친 국민들에게 당근을 제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마침내 1942년 런던 정경대 교수 출신의 경제학자 겸 노동부 차관 윌리엄 H. 베버리지를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 보험과 관련 서비스에 관한 위원회'를 수립한다.
3. 내용
베버리지는 당시 영국 사회가 진보하기 위하여 해결할 문제를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었는데, 이는 각각 빈곤, 질병, 무지, 나태, 불결이었다. 이 중에서도 베버리지가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궁핍이었는데, 베버리지 보고서에 따르면 궁핍의 원인은 대개 (노령, 불황으로 인한 해고, 질병 등 원인이 무언이든 간에) 소득의 중단에서 기인한만큼,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공부조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1]
베버리지 보고서에 작성된 복지 시스템의 수립을 위한 기본 원칙은 다음의 세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모든 개혁안은 과거의 경험을 충분히 살리고 국부적 이해관계에 매달리지 말 것. (Proposals for the future should not be limited by "sectional interests" in learning from experience)
2. 사회보장보험의 구성은 사회개혁에 대한 종합 정책의 일환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Social insurance is only one part of a "comprehensive policy of social progress")
3. 사회보장보험은 국가와 개인간의 협력에 의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Policies of social security "must be achieved by co-operation between the State and the individual")
4. 결과
보고서가 완결되었을 당시, 영국 내각에서는 보고서의 공표를 둘러싸고 격론이 일어났다. 특히나 보수당 출신의 재무 장관 킹슬리 우드 경은 이 보고서가 재정적으로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공표를 반대하였으나, 노동당 출신 장관들의 주도하에 내각은 공표를 강행한다.
1942년 12월 2일 베버리지 보고서가 대중에게 공표되자 예상대로 큰 반향이 일어났다. 국민들은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전반적으로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였고, 언론 역시 호의적인 반응이었다.[2] 베버리지 보고서에 의거하여 1944년 구빈법이 철폐되고 장애인 고용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처칠 내각과[3] 보수당 인사들은 전시 상황을 이유로 베버리지 보고서의 즉각적인 이행을 거부하였으며, 전후 수년에 걸쳐 서서히 개혁을 진행할 것이며 몇몇 비현실적인 공약들이 대해서는 재논의가 필요하다고 못을 박았다.
허나 이런 보수당 내각의 소극적인 모습에 반발한 대중들은 1945년의 총선에서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의 손을 들어줬고, 애틀리 내각은 집권과 동시에 의욕적으로 사회 보장 정책 수립에 착수한다. 가족수당법이 도입된 데 이어 1946년에는 건강보험과 연금제도가 도입되었고,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자 실업 수당이 지급되는 한편 광산업을 비롯한 주요 산업들은 국유화가 이루어진다.[4] 그리고 이러한 베버리지 보고서에 기초한 영국의 사회 정책 기조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 노선이 부상하기 전까지 이어졌으며, 국제적으로도 전후 많은 국가들의 사회 복지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1] 다만 모든 복지를 공공부조로 충당할 수 없는 만큼, 기본적인 부조는 사적으로 해결하여야 하며 긴급한 사안에 대해서만 공금을 투입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2] 대표적으로 타임 지의 경우 영국 사회의 물결을 변화시킬 중대한 문서라고 평가했다.[3] 아이러니한 것은 베버리지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한 사람은 (노동당의 압력도 있었지만) 윈스턴 처칠 본인이었다. 다수의 정치인들이 그렇듯 일종의 말 바꾸기를 시전한 것. 처칠의 말바꾸기는 하루이틀 일은 아니라서, 예를 들어 보츠와나 독립 문제에 대해서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오락가락했다.[4] 다만 애틀리 내각 역시 모든 사회 보장 정책을 수립한 것은 아니었다. 종전 직후다 보니 영국도 엉망진창이라 돈이 나올 구석도 없었고, 미국 등의 원조가 있긴 했지만 종전과 동시에 냉전이 시작되면서 마냥 군비를 축소하고 축소분을 복지로 돌릴 수도 없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