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력전

 

1. 개요
2. 유래
3. 성립 과정
3.1. 근대 이전
3.2. 근대
3.3. 제1, 2차 세계 대전
4. 현대의 쇠락
4.1. 무기의 고도화
4.2. 핵무기의 등장
4.3. 기타 원인
5. 영향
6. 기타
7. 같이 보기


1. 개요


여러분! 총력전을 원하십니까? 만약 필요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단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합니까?'''[1]

'''요제프 괴벨스, 1943년 2월 18일[2]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의 총력전 연설'''

總力戰. Total War.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과 수단을 총동원하여 싸우는 전쟁. 대부분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다. 전체전쟁(全體戰爭), 국가총력전이라고도 부른다. 말그대로 군사력을 비롯한 모든 국력을 동원하는 전쟁이다. 완전한 반댓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는 한정전쟁, 제한전(limited war)이 있다.
고대에도 국가의 소멸을 걸고 하는 총력전은 있었지만,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총력전, 즉 전면전이었지, '모든 국력을 총동원'한다는 의미의 총력전은 아니었다. 전근대의 전쟁들은 군주와 귀족과 직업군인들의 전쟁이었지, 농민이나 상인, 피지배층의 전쟁은 아니었다. 이는 국가 행정력의 한계 탓이 컸다. 근대적 의미의 총력전은 교통,행정의 발달로 인해 가능해졌다.
현대적인 의미의 총력전은 남북전쟁에서 그 첫 형태를 볼 수 있다. 이후, 양차대전을 거치면서 총력전이 극에 달하다가 핵무기의 등장 이후 서로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가는 공멸할거라는 위기감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총력전은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제한전이 더 많이 벌어지게 된다.

2. 유래


전략 사상으로서는 클라우제비츠전쟁론에서 그 기원을 볼 수 있다.
총력전이라는 말을 가장 처음 쓴 사람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동부전선 사령관이었던 에리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루덴도르프(Erich Friedrich Wilhelm Ludendorff)이다. 1935년에 저술한 《총력전론(Der Totale Krieg)》이란 저서의 제목에서 '총력전'라는 단어를 처음 썼다.

3. 성립 과정



3.1. 근대 이전


중세 유럽의 소왕국과 공국들은 상대 국가를 멸절하기에는 전력이 턱없이 모자랐으며, 피지배층의 민족 의식도 옅었고, 같은 기독교이기 때문에 문화도 공유했었다. 고대에는 민간인을 노예로 팔아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기독교 신자는 교리에 따라 서로를 노예로 삼아서 팔 수 없었으며[3][4] 서로에게 자비도 베풀어야 하는 등, 전쟁이였음에도 많은 규칙들을 지켜야 했다. 물론 규칙을 무시할 수는 있었으나 강력한 기독교의 수장인 교황의 권력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이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어야 했다.
전쟁을 이겨서 땅만 먹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일을 해서 가치를 생산할 노동력도 자원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민간에 피해를 주는 일은 피하고자 했었으며, 피지배층들도 전쟁에서 지던 이기던 그저 본 적도 없는 지배층이 서로 바뀐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근대까지의 전쟁에서 전쟁 비용으로 온 경제적 부담이 작았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근대의 대규모 전쟁의 비용 또한 국가를 쉽게 휘청이게 할 정도였다. # 프랑스 제1제국도 끝없는 전쟁 끝에 인구 대부분과 국고가 소모되고 지친 가운데 러시아 제국에 치명타를 입은 걸로 결국 십수년만에 반불 동맹군에게 패망하고 부르봉 왕정이 복고했다.
반면 전혀 다른 외세와 전쟁이라면 지배층은 격렬히 저항했고 민간인들도 무관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에서도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운 동유럽은 총력전에 가까웠고, 서로의 병력이 10만을 넘어가는 때도 있었다. 예컨데 백년전쟁아쟁쿠르 전투에서는 잉글랜드군 7~8천과 프랑스군 2~3만 정도가 동원되었으나 같은 시기 동유럽의 15년 전쟁에서는 기독교 국가 연합군 10만 명이 오스만군 18만 명과 싸웠다. 이는 동양의 전쟁들과 비교해도 규모 면에서 뒤지지 않는 수준이였고, 민간인들도 총동원되었다. 물론 항복해도 살아남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루마니아군에 붙잡힌 오스만 포로들은 대개 꼬챙이에 꿰여 죽거나 산 채로 난도질 당했고, 오스만군도 보복으로 기독교군 포로를 산채로 박피를 하거나 사지를 찢으며 죽이고 시체를 전시해놓는 등 서로에 대한 학살이 이어졌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전국시대에 원시적인 형태의 총력전이 등장한걸로 여겨진다. 전국칠웅이라 불리우는 이 시기 중국의 고대국가들은 타지역보다 국력을 조직화하여 투사하는데 우월함을 보였고[5]이들 사이에 국력을 총동원한 대규모 전쟁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이 시기의 총력전의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것이 진나라와 조나라사이의 장평대전으로 정확한 수치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어쨋든 경제활동이 가능한 성인남성 대부분을 동원하였다가 참패하고 막대한 인적자원을 상실한 조나라는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어야했다. 그외에도 고구려수나라, 당나라의 전쟁이 총력전의 양상이었다. 수양제는 견고한 요새들로 수비력을 갖춘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 통일제국 수나라가 지닌 모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미증유의 대군을 동원해 요동성 등 주 방어체계에 군력을 쏟아부워 총력전 양상의 단기결전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함이었으나, 예상외로 강건했던 고구려의 방위와 을지문덕과 같은 명지휘관의 활약에 막혀 엄청난 손실을 보고 패퇴하였다. 이후 두 차례 더 지속된 원정으로 수나라의 재정은 마침내 파탄났으며, 이로 인해 반란군을 막을 예비병력과 황도의 상비군을 운영할 비용조차 모두 탕진되어 나라는 망하고 수양제는 죽음을 당했다. 한편 그 엄청난 병력을 받아낸 고구려 또한 무사하진 못해서,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의 연이은 공격에 국력을 소모한 나머지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그러나 전근대에도 발생했던 거대한 규모의 전쟁 또한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한다는 의미의 총력전과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말하는 총력전은 후술하는 19세기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3.2. 근대


[제1조]

지금부터 적군이 공화국의 영토에서 물러날 때까지 모든 프랑스인은 군 복무를 위해 영구 징집된다. 젊은이는 전쟁터로 갈 것이다. 기혼남성은 무기를 제조하고 식량을 운반하며, 부녀자들은 막사와 제복을 만들고 병원에서 간호를 맡을 것이며, 아이들은 낡은 옷감으로 붕대를 만들고 노인들은 광장에 모여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하고 군주에 대한 증오심을 북돋고 공화국의 단결을 가르칠 것이다.

프랑스 국민의회가 공포한 총동원령(levée en mass), 1793년 8월 23일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군사력이 1793년에 나타났다.[6]

전쟁이 느닷없이 다시 인민이 해야 할 일이 되었으며, 그것도 스스로를 모두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3천만 인민의 일이 되었다."

클라우제비츠

근대가 되어서까지도 유럽에서는 전쟁이 일상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일은 비교적 적었다. 전쟁에 민간인이 대규모로 휘말리거나 영토 전체가 전화에 휩싸이기에는 전쟁의 규모가 너무 작았으며, 전쟁의 영향도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근대 이후 유럽에서 전쟁의 양상은 큰 변화를 겪는데, 바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징병제를 실시해서 군대의 규모를 폭발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는 국가가 더 이상 왕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으로 바뀌었으며, 이에 따라 전쟁이 왕의 전쟁이 아니라 국민의 전쟁이 되었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국민군이 나타났고,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보급하고 무기를 쥐어주며 훈련시키는 일 또한 중대한 산업적 과제가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후반에 프로이센 왕국에서 마침내 징병과 예비군을 결합하는 본격적인 징병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총력전의 양상은 없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비록 군대의 규모가 팽창해서 식량 등의 조달을 순수한 약탈만으로 풀기에 어려움이 커졌지만 여전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무기 쪽도 상대적으로 소비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 시대인 절대왕정 시대의 용병들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약탈을 하지 않고, 후방에서 받는 보급으로만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 근대적 민족주의가 자리잡기 이전의 병사들은 약탈을 허용하면 통제를 못해서 전투력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자칫 전투 한번 없이 군대가 붕괴될 수 있었기에 금지한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프랑스 혁명군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 뿐이며, 절대왕정 시대에도 그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약탈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국민국가의 출현으로 전쟁의 규모는 전례없이 커졌다. 여기에 과학기술의 성과 축적으로 대량살상이 가능해지고 철도나 통신기술등의 발달로 대규모 군대 운용술이 정립되는 19세기 후반에 진정한 의미의 총력전이 출현했다 볼 수 있다.
근래들어서는 19세기의 전쟁들에서 총력전의 양상을 찾아보려는 시도와 논의가 분분하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을 '최초의 현대판 총력전'으로 규정 해야한다는 주장[7]도 있고 상기한 이유들로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견해든 간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을 거치면서 전쟁의 양상이 이전과는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는 데 이견은 없다. 달리 말하여 적어도 나폴레옹 전쟁을 총력전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최초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겠다.

3.3. 제1, 2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거포들을 쉴새없이 생산하는 군수공장의 모습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 자치령의 군수공장에서 8인치 곡사포 고폭탄을 생산하는 과정을 담은 모습.

거대한 군수공장의 소화기 생산 공정
두 번째 변화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이 애써 눈을 돌리고 무시한 남북전쟁을 제외하면 이 때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총력전의 양상이 나타난다. 여기에도 3가지 요인이 있는데, 첫 번째는 프로이센 군대가 당시 유럽 최강으로 꼽히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을 보불전쟁에서 격파한 이후로 영국[8]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프로이센의 징병제를 일종의 모범 사례로 여겼다는 점이다. 그 결과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군대의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고, 이러한 군대를 무장시키며 먹이고 입히며 재우고 치료하며 매장하는 일 또한 산업적인 과업이 되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 두 국가 모두 징병제를 운용했지만, 타이틀만 징병제로 같을 뿐 실상은 큰 차이가 있었다. 프랑스는 문자 그대로 성인 남성을 국가의 힘으로 붙잡아 전쟁터에 내보내기 위한 징병제를 운용했다. 하지만 징병제에서 성인 남자 전원이 징집 대상이라고 해도 정말로 전원을 군대에 보내면 사회를 유지할 수 없고 그만한 규모의 군대를 감당할 수도 없으므로, 실제로 군대에 있는 인원은 징집 대상 중 소수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데파르트망, 즉 징집 대상 지역의 대상 남성들이 제비뽑기를 해서 정해진 숫자만큼 뽑힌 사람이 군대에 가고 일정한 기간마다 제비뽑기를 해서 교대하는 방식의 징병제를 운용했다. 웃긴 건 합법적인 병역기피가 가능했다는 건데 대한민국 국군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병역을 회피하는 상류층들이 프랑스군에서는 그냥 돈 주고 다른 사람 보내서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상류층이 저모양이니 중산층들도 당연히 같은 짓을 했고, 결국 프랑스군은 사회낙오자와 빈민층들의 군대가 되어 버렸지만 역설적으로 장기복무를 하면서 군사훈련을 수시로 받다 보니 병력과 전투력은 유지가 됐다.[9]
반면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비하면 인구가 많이 적었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소수의 인원만으로 군대를 충원하면 병력의 숫자가 너무 적고, 그렇다고 다수를 징집하면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으므로 예비군을 두었다. 즉 프로이센식 징병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 말고도 다수의 예비군을 훈련시키는 것 또한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평상시에는 프랑스식으로 가되 인구 규모에 맞춰서 적은 규모의 병력을 보유했으나 전쟁이 발발할 시 짧은 기간 동안 전면징집제를 실시하여 그렇게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빠진 상류층, 중산층들을 모조리 군대로 끌어다 배치하여 대규모 병력을 운용했다. 물론 장기복무를 하는 프랑스군에 비교할 때 숙련도는 확실히 떨어지지만,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장교단을 최대한 우수한 수준으로 운용했고[10] 또한 사회낙오자들로 구성된 프랑스군에 비해 질적 수준도 높았으므로 바보짓만 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의 열세나 전사상자로 인한 부대 사기 저하를 감당할 수 있었다.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그리 쉽게 무너진 것도 숙련도만 높지 전선에서 밀리면 사회낙오자들로 구성되어 전의가 떨어지는 군대가 그냥 패주해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전쟁은 길어지고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이전까지의 전쟁은 각국 군 부대 간에 치러지는 야전 양상이었고,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결판이 났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는 슐리펜 계획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승부를 내려던 독일군의 시도가 마른 전투에서 좌절된 뒤 참호전의 양상으로 전선이 고착했고, 몇 주면 끝나리라 예상한 전쟁이 몇 년을 끌게 되었다. 문제는 각국이 채택한 프로이센의 징병제는 전시에 군대의 규모가 '''평상시에는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팽창한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2차대전의 미국 육군(육군항공대 포함)은 1939년 9월, 2차대전 개전 시점에서 18만명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1945년 시점에선 800만명이 넘는 규모로 급팽창했다. 병력 증가수치를 퍼센트로 환산하면 6년동안 4450%(소수점 아님)가 증가한 것이다.[11]
프로이센의 징병제는 전쟁이 빨리 끝나면 대단히 효율적인 방식이고, 나폴레옹 전쟁[12]과 보불전쟁에서 그 효과를 입증했다. 그러나 전쟁이 수 년 단위로 길어지자 이대로 군대를 유지하기는 어려운데, 그렇다고 상대방도 징병제로 대군을 동원한 상황에서 병력 규모를 축소할 수도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게다가 전쟁에서 소모하는 물자의 양 역시 급격히 늘어났다. 전투가 회전 양상일 때는 포격도 길어야 몇 시간 정도였다. 여기서 적이 무너지면 그걸로 게임 끝. 그러나 참호전이 시작되면서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으로 고착된 전선에서 아군의 생존률은 확실히 높아졌지만 적군을 제압하기도 훨씬 어려워졌다. 이 상황에서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몇 달에서 몇 년씩 계속해서 포탄과 총알을 쏟아부어야 했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수준의 탄약을 소모하기 시작했다.[13] 또한 대포나 전함 등의 무기들도 갈수록 거대하고 복잡해져서 더 높은 수준의 산업적 능력을 요구했다. 당장 19세기 후반에만 해도 대포는 직사포 위주에 포탄도 후장식이 이제 막 보급되고 75밀리 같은 소구경포가 일반적인 단계였지만 1차대전 때 이미 현재 사용하는 105mm 포 정도는 일반적인 무기체계가 되었고 독일군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대구경 곡사포를 개발해야 했다. 물론 이게 다 돈인 만큼 결국 프랑스, 독일 등 전쟁 각국은 국가경제 자체를 전쟁에 총투입해야만 했다. 즉 국가경제의 구조 자체가 전쟁 위주로 재편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과학기술과 근대적인 사회조직 등의 발달로 전쟁을 위해 국가 전체의 산업 구조를 개편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 전체의 산업을 전쟁에 동원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다. 과거에 비해 막대하게 커진 대규모의 군대와 세분화된 군내 조직들이 각기 어떤 물자가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아야 할 뿐더러, 향후 전황에 따라 어떤 물자가 어떤 비율로 소모할지도 계획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 전체에서 어떤 물자를 만드는지 뿐만 아니라 다른 물자를 만들도록 바꾸면 어떤 물품이 나오며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일지, 새로운 물품을 개발하고 만들려면 어디에 어떤 식으로 맡기고 기존의 물자 생산은 어떤 식으로 재조정할지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량의 물자를 관리하고 제때 분배하며 소모량과 필요량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총력전이 필요해도 이렇게 복잡한 일을 진행할 능력이 없을 때는 당연히 총력전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근대적 관료조직의 발달 및 통신 수단의 발달 등으로 이러한 관리가 가능해졌고, 철도를 위시한 교통 수단의 발달 덕에 수많은 물자와 인원을 필요한 곳에 분배할 수 있었다. 산업화 이후 비대해진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정립된 관료제의 등장도 총력전이 나타나게 해주었다. 당장 미군이 44.5배 병력을 증강시켰는데 이게 가능했던 건 그만한 병력을 유지, 관리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도, 소련도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에 수백만 대군의 활용이 가능했다.
물론 2차대전 때까지 모든 행정 작업은 컴퓨터 없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 국방부는 전세계 수십개국에 흩어진 1000만이 넘는 병력의 군수보급체계를 관리하러 다수의 경제학자, 통계학, 수학 전문가, 인간 컴퓨터들을 고용했다. 또한 무기대여법 계획에 따른 대외원조도 큰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쌓은 노하우가 경영학에서 생산관리의 출발로 여겨진다. 당시 이 분야에 종사한 다수의 전문가와 장교들은 전후 미국 대기업에 들어가서 경영효율성을 끌어올린다. 전산 작업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컴퓨터도 없이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다뤘나 신기할 정도. 물론 이건 교육받은 사람을 마구 부어넣을 수 있는 선진국 미국이니까 가능했던 거고, 2차대전 이후에는 군대규모 자체는 그대로지만 필요한 물자와 행정소요가 더욱 폭증하면서 결국 컴퓨터를 도입하게 된다. 애초에 컴퓨터가 실용화된 계기 자체가 트랜지스터의 도입과 베트남 전쟁, 격화된 냉전으로 인한 엄청난 개량 소요였다. 지금의 미군은 이게 더 심각해서 병력은 좀 줄었지만 물자관리를 위한 행정소요는 오히려 급증했다. 당장 개별 병사에게 투자되는 금액만 베트남전 시절의 10배 이상으로 불어난 판이다.
또한 민족주의 등으로 국민들이 이러한 동원을 사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이 갖춰진 것 또한 중요한 요소다.
흔히 총력전이라면 그 나라 인구 전원이 전쟁에 나선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총력전에서 중요한 부분은 오히려 군대 자체보다는 경제적인 부분이다. 농업/공업 생산력을 포함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전쟁을 지원하는 것이 바로 총력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소전쟁은 그야말로 나치 독일소련 사이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총력전이 가장 극렬하게 진행된, 그리고 그 개념에 가장 가까웠던 전쟁이라고 평가받는다. 특히 독소전쟁은 총력전을 초월한 '''절멸전쟁'''[14]의 형태를 띄었는데, 이러한 극단적인 전쟁은 세계사 전체로도 극히 드물다. 2차 대전 이후로는 핵무기의 등장으로 총력전 개념이 희석되는 추세여서 일부에서는 독소전쟁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총력전으로서는 마지막이라고 보기도 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은 집에 있는 숟가락, 밥그릇까지 뺏어갈 정도로 국가 생산력의 대부분을 전시 물자 생산에 쏟아부은 총력전을 결행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과의 생산력 차이를 좁히지는 못했고 이어 찾아오는 여러가지 실책들이 겹쳐 결국 파멸의 길을 걷고 만다.

4. 현대의 쇠락


냉전을 거쳐 현대로 오면서 과거 세계대전 때처럼 수 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수백만 병력과 장비가 맞붙는 형태의 총력전은 점점 드물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현재 마지막으로 발발한 총력전으로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이 있다. 그 외에 규모는 작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1988~1994),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1998~2000) 등이 자국의 국력과 병력을 총동원한 전면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개입하는 수많은 지역 분쟁들은, 전쟁의 한 쪽 당사자인 미국이 '국력을 총동원'하지 않으며, 미국의 개입 의도도 상대국 정권의 재편이지, 상대국의 멸망이 아니기 때문에 총력전이라고 하기 어렵다. 물론 미국과 상대하는 국가들로선 자신의 '총력'을 동원한 것이긴 하겠지만.

4.1. 무기의 고도화


기본적으로 전쟁의 양상이 저강도 분쟁이 아닌 이상 속전속결로 끝나게 된 것도 있지만, 그 당시보다 세계적인 산업력과 인구, 경제력은 모두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최첨단 무기들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과 시간이 과거의 무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늘어나버렸기 때문이다. 설령 예산을 무제한적으로 때려박더라도 생산에 필요한 인시(man-hour)[15]는 물리적으로 극복 가능한 부분이 아니다.
과거엔 어지간한 열강이나 중진국이라면 대부분의 무기를 라이센스 생산하건 자체 설계건 아무튼 국내에서 대부분 부품을 조달하여 생산 가능했지만 오늘날의 최첨단 무기들은 미국조차도 온갖 외산 수입 부품으로 가득차 있는 실정이며 100% 국산만으로 만들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결국 외국과의 무역이 지속되어야만 무기를 만들 수 있는데 당연히 전면전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
이는 20세기 말 이후 대부분의 무기가 정밀한 전자부품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예시를 들자면 삼성전자의 평택 반도체 공장같은 곳은 개전과 동시에 적군의 주 전략폭격 목표가 될 것이다. 2차 대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공장들은 적군의 전략폭격에 얻어맞고도 짧으면 몇 시간, 길어도 몇 주 안에는 공장을 다시 복구하고 생산절차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먼지 한 톨에도 난리나는 극히 민감한 초정밀 공정이 요구되는 공장들은 약간의 물리적 파손에도 모든 라인이 정지되는 것은 물론이고 복구에만 짧아도 수 개월에서 길면 년 단위가 걸린다. 그 동안에 정밀 전자 부품의 공급이 중단되는 건 당연하고 조 단위의 복구비용은 덤이다. 저 반도체 공장을 짓는 데만 100조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됐다.
냉전 시대부터 이미 항공장비나 해상장비 위주로 이러한 한계점이 보이기 시작하였기에 당시 소련에서는 서방과의 3차 세계대전을 대비한 계획들에서 최첨단 병기들은 어차피 개전 초기에 눈 녹듯이 소모되고 총력전 와중에 느긋하게 다시 만들어 보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설계를 지극히 단순화하여 총력전 와중에도 대량 양산할 수 있는 병기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세계 유일의 냉전형 전면전 전장환경에 노출된 한국군북한군 또한 마찬가지이다. 북한군은 전시라고 뭘 더 뽑아낼 돈도 없지만, 한국군도 전차 한 대 강판부터 시작해서 완성하기 한참 전에 이미 북한과의 전쟁이 끝나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는 이러한 현대 총력전의 한계점이 현실화되었는데, 이 전쟁은 실제로 흔히 상상하던 총력전의 모습과는 다소 먼 모습을 보여줬다. 양국이 보유한 주력 병기들이 맞닥뜨리는건 개전 초기나 중요한 공세 작전에만 한정되었으며 대부분의 전쟁 기간은 육상 병력들간의 교전으로 한정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첨단 병기들의 소모 속도가 보충 속도보다 너무나 빨랐던 탓이다.[16]
오늘날의 병기는 이러한 비용증가의 추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기에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에는 정치, 외교, 군사, 경제적 이유로 총력전이 일어나기도 어렵지만 설령 벌어지더라도 과거처럼 수 년에 걸쳐 수많은 무기와 인력을 전시경제하에 생산하고 갈아넣으며 싸우기보다는 단기간에 미리 비축해뒀던 전력을 소모하는 형태의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베트남 전쟁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테러와의 전쟁 등을 보면 현대전의 수행 비용은 굳이 총력전이 아닌 제한적인 전쟁만으로도 조금만 장기화되면 초강대국의 사회와 경제를 휘청이게 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17][18]
어떻게 보면 전근대시대의 모습으로 무기의 생산력이 회귀해가는 모습인데 이 때문에 오히려 근대 ~ 2차 세계대전까지의 시대가 무기의 가격과 사회의 생산력이 가장 불균형했던 기형적인 시대가 아니었냐는 의견도 있다. 즉 세계대전식 총력전은 인류사의 당연한 귀결이 아닌 기형아에 가까운 존재하는 것.

4.2. 핵무기의 등장


기존의 총력전은 한쪽의 전력이 훨씬 앞선다면, 최소한 전선은 몰라도 후방의 민간 도시 지역에 대한 손실은 크게 심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과 여론이 충분히 호전적이라면 전쟁을 고려해볼만한 이해득실을 따질 수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당시의 전략폭격은 피폭격 국가의 전쟁수행의지를 크게 감소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중론이다.
그러나 핵무기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기존의 재래식 폭탄보다 너무나 편리하고 강력한 이 폭탄은 상호확증파괴나 아니면 상호확증파괴까지 미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대국의 대도시나 수도 한둘은 확실하게 절딴낼 수 있는 희대의 물건이었다. 덕분에 일단 총력전 단계에 들어서서 핵무기가 사용되는 순간부터 전쟁에서 이기던 지던 당사국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고 망하는 건 확고하게 되었다.
즉 차라리 소규모 제한전이라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완전히 캐삭빵 급 전면전이 되면 한쪽이 피똥싸도 이기는 그림이 아니라 그냥 둘 다 죽는 그림만 나오게 되었으니 이전과 달리 정치인이던 여론이던 총력전을 감수하더라도 무언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도 냉전 내내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선제공격할 의사가 내심 전혀 없었음에도 서로 저놈이 먼저 우릴 때릴거라는 공포에 상시 휩싸여 있었다. 전면적 총력전 = 핵전쟁 = 다 같이 공멸이라는 공식이 세워져 있던 것.
설령 교전 당사국간의 상호간 묵인으로 재래식 전쟁만으로 상대방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하더라도,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러한 묵인이 계속 지켜질거라는 기대는 하기 어렵다. 당연히 핵무기로 공멸을 시도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 때문에 핵무기가 인류에게 막대한 파괴의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대규모 전쟁을 막아준 것도 핵무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설령 핵무기가 없는 국가라 해도 국제적인 수준의 긴장관계나 분쟁관계에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강대국들과의 동맹관계로 엮여 있고, 덕분에 핵우산 같은 개념까지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핵 보유국이라 하더라도 핵 미보유국을 마음놓고 때리는 건 불가능하다.

4.3. 기타 원인


선진국들의 경우 미국, 일본, 독일, 한국 정도를 제외하면 대규모 제조업 역량 자체가 상당히 감소한 상태라 전시경제 전환을 시도하더라도 말처럼 쉽지가 않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판데믹 비상사태에서 많은 선진국들이 초반에 마스크를 비롯한 방역물품 생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 고통을 겪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이러한 현대전의 총력전 수행 한계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현대전#s-2.3 문서를 참고하기 바람.

5. 영향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19]

'''커티스 르메이'''

국가의 모든 역량이 전쟁에 들어가게 되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려면 상대방의 기반 시설을 파괴할 필요가 생겼다. 따라서 군인이나 군기지가 아닌 시설, 지역,(산업시설, 공업단지등) 심지어는 심리적 효과를 위해 진짜 아무 상관없는 민간주택까지도 공격했다. 따라서 민간인 사상자가 군인의 사상자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 요즘 전면전의 추세라고 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한국전쟁 때만 해도 민간인 사상자수가 전체 사상자 중 50%를 넘었으며 베트남전 같은 경우에는 민간인의 사상자수가 약 '''90% 이상'''이었다고 한다.[20]
민간인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는 고대중세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군대라는 무력을 가진 집단이 민간인의 물자(또는 민간인 그 자체)를 보면 그대로 안 지나가는 법이고, 적에 대한 복수심이나 적개심 등의 까닭에 일부러 파괴도 했다. 그러나 총력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파괴도 감정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나타났다. 의도적으로 민간인이 사는 도시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우선 군수공장부터 파괴하고, 군수공장의 복구를 막기 위해 관련 산업을 초토화시키고, 산업 초토화를 막으려는 민간인들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도시에도 폭격을 가하는 식이다.
옛날 유럽에서는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져도 전쟁에서 한두 번 진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근대 이후부터는 전쟁에 지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 프랑스, 소련, 독일이나 한국전쟁 뒤의 대한민국, 북한처럼 말 그대로 '이겨도 박살, 지면 완전 개발살' 게임으로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총력전의 끔찍함을 겪은 나라들이 전쟁을 꺼리거나, 반대로 단기간에 상대를 제압하러 군사력을 지나치게 강화하는 원인을 만들기도 하였다. 현재 북한군이 전시 쓸 것으로 예상하는 제파식 전술 등도 총력전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빠른 시일에 전쟁 목표를 이루고자 나왔다.[21]
고대의 싸움도 지면 나라가 완전히 멸망한다거나 백성들을 몰살한 예는 있지만, 이는 단순히 나라 전체가 피해를 입었지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전쟁 시스템으로써 돌아갔다고 보기엔 무리이므로 총력전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물론 총력전이란 단어의 의미를 넓게 본다면 이 또한 총력전이라 칭하는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좁은 의미의 총력전, 즉 근대 이후의 국력을 총동원 한다는 의미의 총력전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다만 전쟁 자체가 부족 등의 아주 작은 단위에서 나면 규모가 작을 뿐 총력전과 비슷한 양상도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국가 전체 역량을 정말로 다 소모할 수 있는 행정, 경영 능력이 있어야 총력전이 나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족 사회 같은 작은 사회의 역량을 모두 알고 다 쓰는 것은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 없는 몇몇 사람이 모여 머리를 굴리고 말로 명령해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고대 국가 정도의 규모만 되어도 이는 매우 힘든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요크셔의 피닉스 탄약공장에서 18 파운더 야포의 포탄을 생산하는 여성 노동자들.
전쟁이 이 단계까지 접어들면 여성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1차 대전에서는 참전 국가들이 자국의 성인 여성들을 공장에서 탄약갈고 전차 만들게 한다. 2차 대전 당시 영국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여성인력을 방공포병 및 비전투요원으로 활용한 적이 있고, 미국은 여성 조종사들만인 비행기 배달부대를 운영했다. 소련은 참전국 중 유일하게 여군을 공식적으로 최전선에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저격수 및 직접적인 육탄전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전차병이나 파일럿으로도 훈련시켜 배치했다.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은 2등 국민 취급이었으므로, 사상자가 나와도 군인 취급을 못 받거나 전후 참전용사 예우에서 밀리곤 했다. [22] 서양에서 여성인권이 본격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한 계기를 이 당시 여성의 사회진출로도 본다.
총력전에서 국가의 모든 재원은 다 군수시설로 몰아넣어 온 국민이 배급제를 비롯한 그야말로 철저한 내핍생활로 빠져든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감자를 뺀 모든 식량을 배급제로 분배했고, 이는 다른 국가들도 비슷했다. 의외지만 쇼미더머니로 유명한 미국도 이 당시 베이컨 등을 구운 뒤 나오는 기름을 모아다가 가져다 쓰거나 금속 재료를 수집도 했다. 미국 역시 당시 식량들에 대해 판매 제한을 걸고 일부 주에서는 소금이나 설탕에 대해서 배급제를 시행했다.

6. 기타


총력전에 가까운 양상은 미국남북전쟁에서 처음으로 나타났지만, 다른 강대국들은 1차 세계대전을 겪기 전까지는 남북전쟁의 이러한 면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이는 남북전쟁에서 장기간에 걸쳐 국력을 총동원해서 전쟁을 벌인 것이 그저 '군사기술이 열등해서 짧은 시간에 결판을 내는데 실패해서'라고 간주해 장기간의 전쟁은 매우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미국은 남북전쟁 뒤에는 전쟁을 벌여도 국민들이나 군인들을 굶길 만큼 지독한 총력전을 벌인 적이 단 1번도 없다. 또한 남북전쟁 당시에도 북부는 경제적 궁핍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남부만 말 그대로 파멸[23].
다만 유럽에 비하면 약했다는 뜻이지 미국도 세계대전, 특히 2차 세계대전 때에는 국민들에게 일부 물자에 한해서나마 배급제를 실시하고 각종 자재를 군수산업에만 넣는 등 충분히 총력전을 치르고 있었다. 예를 들면 42년 2월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동차 왕국 미국도 민수용 차량, 특히 민수용 승용차의 생산을 제한했다. 당시 고무 같은 경우 미국은 태반을 동남아시아에서 수입[24]했기 때문에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한 뒤에는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나서 각종 중고 타이어, 고무호스, 심지어 고무장화까지 공출하도록 호소도 했다. 전설적인 재즈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는 이 때 색소폰마저도 공출을 겪어 대신 아크릴로 만든 색소폰을 써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25] 독일이나 일본같은 추축국보다야 낮았지만 미국 역시 전 국가 총생산의 40%이상을 군비로 지출할 정도로 나름대로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다.[26]
일본군태평양 전쟁에서 총력전을 부르짖으면서도 총력전의 개념을 제대로 못 이해하고 "전 국민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 수준으로만 생각해서 오히려 스스로 전쟁수행 능력을 막장으로 떨어뜨렸는데, 숙련공을 죄다 병사로 차출해 전선으로 내보내어 무기 생산에 치명적인 지장을 부르는 삽질을 했다. 이런 숙련공들이 대본영의 한심한 삽질로 전선에 끌려나가자 오각형 너트 같은 해괴한 물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부품으로 만든 물건들 성능이 어땠나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한 물자를 아낀답시고 몸빼바지를 입기를 강요하거나, 위문 편지를 보내지 말거나, 생산중인 옷도 아닌 이미 만든 옷에서 소매를 짧게 자르라고 하는 등[27] 뜻모를 명령으로 자국민만 신나게 괴롭히다가 비참하게 패망했다.[28] 그리고 공업지대와 주거지대를 뒤섞은 주먹구구식 도시계획을 하다가 공업 능력을 마비시킬 전략 폭격의 일환으로 도쿄 대공습을 얻어맞았다. 자원이고 뭐고 다 바닥나기 시작하면서 놋그릇까지 공출해가기 시작한 1944년 일본의 국가총생산에서 군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80%에 근접할 정도였지만, 그 정도로도 미국 군비지출의 20%에 불과했다.
이미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 총력전을 벌이면 그 결과가 어떤지를 알기 위해 젊은 인재들을 모아서 '총력전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를 시킨 적이 있다. 당연히 이 연구원들이 얻은 결과는 '미국과 총력전 상태에 들어가면 일본은 반드시 패배'였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 시도를 중단하거나 하다못해 이 연구에서 지적된 문제점들을 극복할 생각을 하는 대신 힘껏 싸대기를 날려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려는 생각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망했다.
반면 유럽의 군대는 전쟁 중에 자동화 시설을 더욱 늘리고 숙련공을 철저하게 보호했으며, 심지어 숙련공이 모자라자 전선의 병력에서 숙련공으로 키울 만한 인력을 일부 뽑아다 공장에 보내기까지 했다. 예를 들면 참호전에 필요한 단검의 수요가 급증하자 전선에 복무중인 '''모든''' 칼 제조공을 제대시켜 단검제작 공장으로 보내기도 했다. 다만 이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이야기지, 이미 막장상태였던 대전 최후기의 추축국은 숙련공이고 뭐고 다 전선으로 집어던졌다.[29]
현대 대한민국도 총력전에 대비하여 국가가 지정한 기술자나 과학자 등 인재들은 징집하지 않고 대신 지정한 공장[30]에서 일하게 하며, 거의 100% 군대로 끌려가는 인문학도나 사회과학도들과 달리 이공계생들은 산업특례 등을 통해 군복무의 대체도 가능하다.
총력전은 국가가 동원가능한 모든 인적, 물적자원과 정치적, 경제적 수단을 전쟁 및 전쟁지원에 투입하므로 숙련공도 총력전에 투입한다. 총력전은 전쟁보다는 전쟁수행능력이 더 중요하다. 전쟁수행능력은 보급의 상위개념이니, 당연히 더 복잡하다. 전쟁수행능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보급의 질도 상대적으로 올라가고, 낮으면 낮을수록 보급의 질도 상대적으로 내려간다. 보급의 질은 병사들의 사기 및 전투수행능력에 어마어마한 영향일 만큼 중요하다. 보급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투보다 더 까다롭고 복잡해서 이순신과 나폴레옹도 머리싸고 고민한 문제였다. 다만 나폴레옹은 거의 모든 경우 현지에서 공출했다. 그의 평소 지론은 전쟁은 스스로 먹여살려야 한다는 것이였다.
스포츠에서도 총력전이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는데, 보통 토너먼트 경기나 순위결정전 등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에서 모든 선수들을 총동원 하여 치루는 경기를 총력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7. 같이 보기



[1]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erst vorstellen können?[2]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직후이다.[3] 물론 잉글랜드아일랜드 신부를 고급 지식인 노예로 매매하는 등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4]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로마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기독교로 개종을 한 지역이었으나, 노예 제도가 기승을 부렸던 곳이기도 했다.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인인 성 패트릭도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붙잡혀 아일랜드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무척 오래되었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는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가장 큰 노예 시장이 있었다. 이러한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대략 서기 8세기 무렵에 점차 줄어들다가, 바이킹들이 아일랜드를 침입하면서 다시 노예 제도를 되살렸다. 바이킹들이 서기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에 부딪쳐 쇠퇴해지자, 노예들은 바이킹에서 토착 아일랜드인으로 대체되었다. 잉글랜드헨리 2세가 군대를 보내 아일랜드를 공격했던 1171년에 아일랜드의 노예 제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출처: 바다의 늑대/ 라스 브라운워스 저/ 김홍옥 역/ 에코리브르/ 141~142, 337쪽[5] 때문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진나라를 가리켜 강력한 근대국가의 원형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6] 프랑스 공화국은 총동원령으로 18세에서 25세까지의 미혼남성을 징집했다. 그 결과 1793년 2월에는 20만에 불과했던 프랑스군은 이듬해 1월에는 서류상으로 100만, 최소 80만에 달했다. 클라우제비츠의 말마따나 유럽 전쟁사에서 여지껏 볼 수 없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병력이 편성된 것이다. 이들을 혁명력 2년의 병사들이라 불렀다.[7] D. Bell, ''The First Total War, Napoleon's Europe and the Brith of Modern Warfare''(London: Bloomsbury, 2007).[8] 영국은 과거 수백년동안 특유의 유서깊은 모병제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이것은 흔히 레드코트로 인식되는 소수정예 군대체제로서, 압도적인 해양전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프랑스가 국민개병제를 전면적으로 실행하면서, 전쟁 중반부터는 대 프랑스 동맹의 여러 왕정국가들도 이를 모방하여 비슷하게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영국은 모병제의 허점을 이용해 반강제 징집을 하였을 뿐, 공식적으론 징병제를 도입하지 않았다...하지만 세월이 흘러 1차대전이 시작되자, 폭발적으로 증가한 유례없는 병력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1916년부터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종전후엔 다시 폐지 되었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재도입되었다. 이는 60년대까지 유지되다, 결과적으론 모병제로 회귀하였다.[9] 이는 조선의 대립군이나 현대 미군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국 장군이 "모병제 군대는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고 발언한 것도 군인 다수가 목숨<월급 이 성립하는, 경제적으로 열악한 계층에 속하는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10] 다만 장교단의 규모는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에 당대 유럽의 군대는 소대장 정도는 부사관이 맡는 식으로 가는 게 보통이었다. 중대장급 이상만 장교를 배정했다.[11] 이건 평시 미군이 적었다는 측면도 있다. 6.25이전 대한민국 국군이 10만 명 수준이었다.[12] 나폴레옹 전쟁 전체 기간은 길었지만,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난 개개의 전쟁 자체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13] 1차대전의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1일(or 1개월) 포병용 탄약 소모량 예측을 2만 발로 계산했고 준비했지만 실제로는 20만 발씩 서로에게 발사했다고 하며 주요 공세의 준비에는 공세에 필요했던 탄약의 수송을 위해 항상 화차 수천량의 편성이 요구되었다고 한다.[14] 상대국 정부에 자기나라 깃발을 꼽는것으로 끝나는 멸망을 넘어서 적국의 구성원(국민)까지 멸절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쟁[15] 작업에 투입되는 인력과 시간을 나타낸 단위이다. 1명의 사람이 1시간동안 작업하는 양을 1인시라고 정의한다. 즉 3명이 2시간 일하면 6인시.[16] 그렇기에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전쟁이 막바지로 갈수록 참호전의 모습을 띄기 시작한다. 참호를 무너뜨릴 기갑과 항공기는 너무 귀하신 몸들이 된지라 전장에서 뜸해지고, 상대적으로 '''값싼 보병'''들을 주로 투입하였기에 벌어진 일. 1차 세계대전 참호전과 차이점이라면 병사들의 무장이 볼트액션 소총에서 돌격소총으로 변한 수준에 불과할 정도였다.[17]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같은 경우엔 아예 소련 붕괴의 한 원인이 됐다. 또한 코로나 19 이전까지도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가 골골 거렸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미국의 삽질이였다.[18] 그나마 비용증가가 상대적으로 덜한 육상병기를 제외하고 항공병기나 해상병기는 첨단 기술의 투입이 바로 끔찍한 비용상승으로 돌아오는지라 천하의 미국도 지속적으로 피똥을 싸는 중이다.[19]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20] 다만 한국전쟁은 국력이나 인구 수준에 비해서 전쟁의 규모가 커졌고, 베트남전은 매우 특이한 사례로 베트콩 같은 게릴라들의 활동(누가 민간인이고 적군인지 구별할 수 없다)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심했던 점을 봐야 한다. 어쨌든 민간인의 피해가 급증한다.[21] 2천년전에 쓰인 손자병법에서도 전쟁을 일으킬꺼면 확실하게 준비해서 신속하고 빠르게 목표를 달성하고 전쟁을 끝내라고 경고한다. 지금과 같은 총력전이 등장하기 힘들었던 고대에 쓰여졌지만 지금도 들어맞는 내용.[22]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다루는 문제의식이 이것이다. [23] 사실 그 파멸도 애매하니, 분명 남부가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도 남부의 민간인들이나 남군 장병들은 이전보다 식량 수급이 좀 불안정해도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 식량난의 상황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게 닭고기와 옥수수 정도이다', '밀가루 값이 너무 많이 올라서 옥수수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었다' 수준인데, 꽤 힘든 고난이었지만 비슷한 시기 인도나 중국 등의 기근과 비교하면 애교 수준...[24] 당대에도 석유로 만드는 합성 고무가 많았지만 천연고무의 기존 수요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힘들었다. 그당시 합성고무의 가격도 천연고무의 8배 정도였기에 경제적 부담도 따랐다.[25] 애호가들의 수집품으로 유명해진 Grafton saxophone이라 하는 종류인데 엄밀하게 따지면 찰리 파커가 전쟁이나 공출때문에 쓰게된건 아니다. 애초에 미국 국내 투어때는 찰리 파커는 전속계약을 맺은 킹 사의 색소폰을 쓰느라 플라스틱 그라프톤 색소폰은 본인 항목에 들어가면 나오는 Jazz at the Massey Hall 같은 레전설급 음반에 동원되긴 했지만 애초에 실패작에 가까웠던 물건 자체의 한계 때문에 그리 자주쓴건 아니었다. 다만 그놈의 전설적인 마약중독 때문에 멀쩡한 색소폰 전당포에 갔다 팔아먹고 그라프톤 색소폰이 유명해진 해당 연주도 토론토, 즉 미국 국외에서 있었던 공연이라 쓰게 된것. 다만 원래 이탈리아인 장인이 영국에서 개발한 물건인 그라프톤 색소폰이 등장한 배경 자체는 2차대전 종전 직후 미군따라 재즈의 수요는 엄청 폭증했는데 배급제는 안풀려서 악기 재작용 물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거니 2차대전시 공출과 상관 있는게 맞다.[26] 소련과 영국은 각각 1943~44년 기준으로 GDP의 60%, 50% 가량을 군비로 투입할 수 있었다.[27] 정작 일본군의 군수품 생산에 있어서 병목 자원은 니켈, 석유정밀 공작 기계였지, 종이나 옷에서 자른 천쪼가리 따위가 아니었다.[28] 일본군은 전쟁 말기 옥쇄 분위기까지 나오던 시기를 빼면 일반적으로 알던 것과는 달리 인구 대비 병력은 적은 편이었다. 식량 생산을 위해 농촌에 사람이 많이 필요하니, 청년들을 무작정 전장에 차출하면 당장 식량이 모자라서였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는 일단 징집하고 봤으며, 이 때부터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전장의 총알받이로 내몰렸다.[29] 독일 또한 1942년에는 약 국가총생산의 50%, 대전기 내내 최대의 생산량을 기록했던 1944년에는 70%이상을 군비로 쥐어짜냈다. 반면 이탈리아는 전면전 수행중임에도 국가 공업 및 산업체계가 총력전 체계로 완전히 이행되지 못했기에 실질적인 군비 지출은 항복 직전 1943년 기준으로도 GDP의 20%대 정도에 불과했다.[30] 군수공장만이 아니라 경공업도 들어간다. 전쟁 중에는 상당수 물자의 자급자족도 나와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일. 또 다른 이유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물건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총력전을 한 어느 국가에서도 모든 생산시설을 군수로 돌리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최소한 필요로 하는 생필품마저 안 만들면 국민들의 불만이 올라가면서 전쟁수행에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불만이 너무 높으면 전쟁반대나 시위에, 심지어는 반란까지 날 수 있다. 게다가 비누, 의약품같은 물품들은 없으면 추가적으로 전염병에 취약한 환경을 만들어 생화학 무기따위로 인한 피해를 더 키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