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티우스

 


1. 개요
2. 생애
3. 사상
4. 여담

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안치우스 만리우스 세베리누스 보에티누스)

1. 개요


'''하느님이 존재하는 세상에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

중세 초기에 동고트 왕국에서 활동한 로마계 원로원 의원, 행정관이자 철학자, 가톨릭의 성인.
생몰연도는 470년대 후반 무렵[1]~524이며 축일은 10월 23일이다.
로마계 귀족인 동시에 고트족 궁정에서 봉직하였고,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철학자였던 것과 동시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생을 마감한 고대 말 중세 초 유럽의 모습을 상징하는 인물.

2. 생애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지만, 당시 실력자였던 심마쿠스[2]에게 입양되었다. 심마쿠스의 밑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그리스어에 능통했다고 하며, 25세의 어린 나이에 원로원 위원이 되었다. 이후 동고트 왕인 테오도리쿠스 밑에서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테오도리쿠스는 칼케돈파가 아닌 아리우스파 신자였지만 그를 중용했다.
하지만 524년에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동고트 왕국 속 로마교회 간의 대립에 휘말려서 실각했고, 투옥되어 파비아에서 처형당했다.[3]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보에티우스는 죽음에 대한 철학적 논문인 《철학의 위안》을 저술했으며 이는 중세 시대의 가장 인기있고 영향력있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가 스콜라 철학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두고 '최후의 로마인', 또는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라 부르기도 한다.
사후 1883년에 당시 교황이던 레오 13세가 성인으로 시성했다.

3. 사상


오랫동안 고대철학과 중세철학 사이의 가장 중요한 중개자 중 한 명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그의 《철학의 위안》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철학적 아이디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이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그것에 대한 주석을 작성했으며 그 논리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신학 토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또한 신플라톤주의자의 생각들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여서, 중세 시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철학의 위안》에서 '신이 존재하는 세상에 어떻게 악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보에티우스는 다음의 논증을 제시하였다. 신은 전지전능하여서 미래의 결과를 다 알고 있지만, 또한 인간에게 자기의 이성을 따라 스스로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다. 하지만 자유가 있다는 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인데, 신의 계시는 이를 다 예측하지 않는가? 또한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악'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줌으로써 '악'이 존재할 근거를 신이 마련한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해 보에티우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벌이는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사건들은 신이 계획한 전체적 ‘개연성(eikos)'[4]을 방해하지 않으며, 신의 섭리 아래 악이 실재하는 이유는 다만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는 모두 헤아릴 수 없는 것일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신이 다스리는 세상에 왜 악이 득세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불완전한 인간이, 신이 계획한 섭리를 결과로 확신할 때에 그 결과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4. 여담


  • 《음악 지도》라는 그의 논문에서 그는, 인간의 예술중 음악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음악이야말로 하나의 질서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주에도 음악이 있으며 이는 신이 주재하는 우주의 질서에 해당된다고 설명하였다.

[1] 영어 위키백과의 보이티우스 문서에서는 477년 무렵으로 나온다.[2] 테오도시우스 1세 때 승리의 여신상이 철거되자 원로원 대표로 항의서한을 보낸 심마쿠스의 일족이다.[3]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의 214쪽에 따르면 ' the Gothic government was worried about the loyalty of the populace even before the war began, and the detailed narrative of Procopius makes it clear that its fears were justified.' 즉 '고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도(535년으로서 그리 먼 미래가 아니었다.) 고트 정부는 이탈리아인의 충성심에 대해서 우려했고, 프로코피우스의 자세한 서술에 따르면 그 우려가 적중했다는(즉 동로마에 붙음) 점이 명백해졌다.'라는 내용이 있다.[4] 이 개연성(eikos)은, 그리스 철학에서의 '인간 이성의 개연성'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