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군트 왕국
1. 개요
중세 부르고뉴와 프로방스에 있었던 왕국이다.
2. 부르군트 제1왕국
부르군트족이 세운 왕국이다.
원래 라인강 상류 지역에 원주하던 부르군트족은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 남하하여 부르군트 왕국을 세웠다. 부르군트 왕국은 북동쪽의 훈족과 남동쪽의 동고트 왕국과 북서쪽의 프랑크 왕국 사이에 끼어서 고생을 하게 된다. 그래도 알프스 산맥이 동고트 왕국으로부터 보호해주었지만 문제는 훈족과 프랑크 왕국이었다.
5세기 중반 훈족의 아틸라와의 전쟁에서 왕인 군터가 전사하면서 큰 위기를 겪었다. 이 사건은 중세 게르만 신화이자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아틸라가 사망하면서 훈족이 약화되고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면서 국왕 군도바트(Gundobad, 452 – 516)의 치하에서 사부아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부르군트 왕국이 재건, 부흥되었다.
부르군트 왕국은 처음에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고 있었고 로마와는 형식적인 동맹-신종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군도바트 시기에 정식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서고트 왕국과 같이 법전을 편찬하였다(법전의 정식 명칭은 Lex Burgundionum, 즉 부르군트법). 또한 자신의 아들 지기스문트를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의 딸 오스트로고타와 결혼시키는 결혼 동맹을 통해 프랑크왕국의 위협에서 벗어나려 했다.[1]
하지만 군도바트가 죽은 후인 523년에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의 네 아들[2] 이 부르군트 왕국에 침입하였으며, 이들은 부르군트군을 가볍게 물리치고 군도바트의 후임 왕 지기스문트와 그 아내 오스트로고타 및 아들 세르게릭(Sergeric)을 모두 살해한다. 오스트로고타와 세르게릭은 각각 테오도리크의 딸과 외손자였기 때문에 테오도리크는 부르군트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려고 하지만 여의치 않아서(이유는 테오도리크 대왕 문서 참조) 직접 군사행동을 벌이는 대신 지기스문트의 동생 고토마르(Godomar)를 왕으로 세우고 지원해 주는데, 무능한 고토마르는 전혀 프랑크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며 결국 534년 고토마르가 도망치다 죽은 직후에 부르군트 왕국은 프랑크 왕국에 합병되었다.
이후 부르군트는 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될 때까지 프랑크 왕국의 속국으로 지냈지만 프랑크 왕국 안에서 나름대로의 독립성은 유지했다. 프랑크 왕국은 한 명의 군주가 온전히 통치하던 통일 왕국 시절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은 게르만족 특유의 분할 상속에 의해 여러 통치자에 의해 독립적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프랑크 왕국은 크게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슈바비아(슈바벤), 아키타니아(아키텐), 부르군디아(부르군트)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지역은 어느정도 독립성과 고유성을 유지한 채 존속되었다. 이러한 고유성과 독립성은 프랑크 왕국 멸망 후까지도 지속된다
3. 부르군트 제2왕국
부르군트 제1왕국은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지만 이후에도 프랑크 왕국의 부르군디아 지방으로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한 채 존속했다. 프랑크 왕국은 분할 상속에 의해 여러 통치자가 각 지방을 독자적으로 분할 통치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부르군디아의 고유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카롤루스 대제 사망 후 제국이 분열되는 과정에서 부르군트도 다시 왕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카롤루스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부르군트 지방은 대체로 로타링기아[3] 에 속하게 되었으나, 손강 이서 지역만은 서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분리되었는데, 이 손강 이서 지역은 프랑스 왕국의 구성국인 부르고뉴 공국이 된다.
서프랑스로 넘어간 부르고뉴 공국을 제외한 나머지 부르군트 지역은 고지 부르군트(상부르군트, 오늘날의 프랑슈콩테 지방과 스위스 서부)와 저지 부르군트(하부르군트, 프로방스 지방)으로 나뉘어 각자 왕국을 선언하며 카롤링거 왕조로부터 독립했다. 고지 부르군디아의 왕 로돌프가 저지 부르군디아의 왕 위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위그는 로돌프를 양 부르군디아 연합 왕국의 왕으로 추대하여 933년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 왕국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부르군트 제2왕국이다. 이 왕국은 수도가 아를이었으므로 '아를 왕국'이라고도 부른다. 이후 잦은 왕조 교체를 겪다 1032년 최종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잘리어 왕조로 왕위가 넘어가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
이후 부르고뉴 지역은 근대까지 수차례 멸망과 재건을 반복했다. 중세 중기부터 근대에는 북부의 베네룩스, 중부의 알자스-로렌 지역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의 가장 서방 경계를 형성했다.
16세기 종교개혁기에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 간의 전쟁을 거쳐 프랑스 왕국에 귀속되게 되었고 이후 중앙집권화된 프랑스 왕국의 간섭을 받았다. 다만 부르군트족이라는 정체성과 언어는 진작에 사라졌지만 부르고뉴 지역은 계속 강한 독립성을 유지하였고 이런 분위기는 근대까지도 이어졌다.[4]
[1] 참고로 군도바트의 모친은 수에비족 출신으로 서로마 제국 말기의 권신이 된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의 여동생(이름은 불명)이다. 따라서 군도바트는 리키메르의 외조카인 셈. 리키메르 항목에도 있지만 군도바트는 이런 인맥 덕분에 리키메르 사후 잠깐동안 리키메르의 후임 역할을 했다. 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이후 군도바트가 철저하게 자기 왕국의 로마화를 시도한 것을 보면 이 시기에 로마의 문화를 제대로 접한 것으로 보인다.[2] 게르만족의 전통에 따라 클로비스는 자식들에게 땅을 분할해서 물려줬기 때문에 프랑크왕국은 4명의 아들이 분할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전투종족 프랑크인답게 군사행동은 효율적으로 함께 했다.[3] 카롤루스 대제의 장손 로타르의 왕국. 로렌(로트링겐)의 어원이기도 하다.[4] 물론 현재의 부르고뉴 지역 사람들은 굳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그러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