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Regnum Visigothorum'''
'''Hispania Visigoth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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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를 지배하고 수에비반달족을 몰아내지 못했던 시절의 강역(일명 톨로사(툴루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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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에게 점령되기 직전의 강역(일명 톨레툼(톨레도) 왕국).
409년~720년
라틴어
Regnum Visigothorum / Hispania[1]
고트어
𐍅𐌹𐍃𐍄𐍂𐌰𐌲𐌿𐍄𐌹𐍃𐌺 𐍂𐌴𐌹𐌺𐌹 / 𐌷𐌴𐌹𐍃𐍀𐌰𐌽𐌾𐌰
(''Wistragutisk Reiki / Heispanja'')
스페인어
Reino visigodo
프랑스어
Royaume wisigoth
위치
프랑스 남부 및 이베리아
수도
톨로사바르치노톨레툼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알라리쿠스 1세(395~410)
테오도리쿠스 1세(418~451)
알라리쿠스 2세(484~507)
리우비길두스(568~586)
언어
고트어, 라틴어
종교
아리우스파 기독교, 가톨릭
종족
고트족, 로마인
주요 사건
410년 로마 약탈
418년 서고트 왕국 건국
585년 수에비 왕국 병합
720년 멸망
성립 이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우마이야 왕조
1. 역사
2. 문화
3. 정치/사회상
3.1. 왕위 계승
3.2. 법률
3.3. 행정
3.3.1. 중앙행정
3.3.2. 지방행정
4. 대유대인 정책
5. 군사
6. 외교
7. 언어
8. 종교
9. 역대 서고트 왕국의 왕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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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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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민족 대이동 시 서고트족은 불가리아, 그리스, 발칸,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남부 유럽을 헤집고 다녔다. (반달족보다 훨씬 더 많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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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년에서 418년 서고트족의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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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년경 로마 제국. 프랑스 서남쪽의 핑크색이 서고트 족에게 할당된 영토였다.
서고트, 비스고트, 비시고트라고도 불린다.
서고트 왕국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알라리크의 뒤를 이어 서고트의 지도자가 된 아타울프가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와 결혼 동맹(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을 맺고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서남부 갈리아(아키텐)의 지배권을 정치적으로 인정받은 418년, 혹은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를 잡은 451년으로 분류된다. 처음에는 게르만 언어를 썼지만 곧 인구가 많았던 로마인들에게 동화되었고 라틴어를 쓰게 되었다.[2] 전 세계 역사를 봐도, 새로운 정복자의 인구가 적을 경우 소수의 지배민족 언어 대신 다수의 피지배민족 언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도 비슷한 예. 특히 정복지 선주민의 문화나 문명 수준이 높은 경우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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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경의 서고트 왕국 (툴루즈)
서고트족은 한동안 갈리아 남부에 정착하면서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서로마가 맞붙은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 측으로 참전하는 등 로마군에 포에데라티로서 복무했고 로마가 점차 쇠약해지자 에우리코 왕이 이끄는 서고트족이 수에비와 반달을 몰아내면서 갈리아 남부와 루시타니아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를 아우르는 강국을 건설했다.[3]
하지만 얼마 안 가 507년 부이에 전투에서 클로비스 1세프랑크 왕국에게 국왕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아키텐을 상실해 이후 내전에 휘말리는 동안 고토 수복을 외치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동로마 제국에게 히스파니아 남부 일대도 점령당한다. 툴루즈를 본진으로 했던 507년 이전을 톨로사 왕국, 에스파냐의 톨레도로 본진을 옮긴 507년 이후를 톨레도 왕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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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을 대강 수습하고 625년에 갈리아 일부, 히스파니아 전체, 북아프리카세우타[4]를 아우르는 국가를 이룩했지만 고질적인 왕위 다툼은 끊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악화되는 상태에서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 [5] 장군이 이끄는 우마이야 왕조의 공격에 의해 멸망당한다.
서고트족들이 콘스탄티노플처럼 지브롤터 일대를 요새화해 이슬람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방법은 있었지만 지방 귀족과 중앙 정부의 사이가 와해된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아프리카를 틀어막아 주던 세우타가 변절했다. 세우타의 동로마 총독 율리아노스(스페인어로 훌리안)는 견고한 요새와 자체 육성한 해군으로 이슬람의 끊임없는 침략에 적들을 여러 번 패퇴시켜 아랍군의 골칫거리로 군림하며 이베리아를 지키는 방패 역할을 톡톡히 했지만 일설에 따르면 톨레도 궁정에 정치적 연결망으로 보낸 딸 플로린다 라 카바(Florinda la Cava)가 서고트왕 로데리쿠스(Roderic)에 의해 혼외 임신하게 되자 명예 실추에 대한 복수를 위해 모로코의 이슬람군에게 배를 제공하고 서고트왕국의 지리, 정치, 군사 등을 꿰뚫어 이슬람군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전설로써 플로린다 라 카바가 실존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이슬람교쪽의 기록에서는 플로린다 라 카바는 순결했지만 로데리쿠스 왕에 의해 성폭행당한 것이라 되어 있지만 기독교쪽의 기록에서는 오히려 요부로서 로데리쿠스 왕을 유혹한 것이라 되어 있다. 로데리쿠스 왕이 그녀를 유혹하여 연인으로 만든 것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율리아노스는 정치적으로 지방 성주들을 회유해서 항복시키거나 타리크가 도저히 점령하지 못하는 철벽 요새는 율리아노스 휘하 병력으로 기독교 지원군으로 위장해서 잠입 후 차지했다. 거기에 직접 분견대를 이끌어 수많은 도시를 함락시켰고 결국 서고트 왕국은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1차로 7천 명의 베르베르인 병력이 지브롤터 땅을 밟았다. 그 다음에는 1만 3천 명의 아랍인 병력과 7백 명의 흑인 병력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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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적으로는 서고트 왕국군이 약간이나마 앞섰지만 당시 내전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나서 바로 이슬람군과 싸우느라 과달키비르 전투[6]에서 대패하는 동시에 왕 로데리쿠스도 전사했다. 이때 서고트 군영 기병 부대가 전열을 이탈하여 이슬람에 붙어 버렸다. 당시까지 서고트계 게르만족들과 히스파노 로마인들은 문화적, 인종적으로 완전히 결합되지 않은 상태였다.[7]
이후 항전하는 지역이 있었지만 이슬람에 의해 점령당했다.다만 서고트 귀족 출신 펠라요가 북부 산악지대 아스투리아스에서 벌어진 코바동가 전투에서 이슬람군을 격퇴시켜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립해 레콩키스타의 근원이 된다.
전성기 시절 서고트 왕국은 이베리아에 흩어져 있던 소수의 게르만족들을 복속시키고 반달족, 수에비족을 쫓아내거나 복속시켰다. 서고트 왕국의 복속 이전에 수많은 게르만족들이 히스파니아로 내려와서 눌러 앉아 살았는데 라틴 - 아랍인과의 혼혈로 인해 오늘날 그들의 흔적을 보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들의 영향인지 몰라도 금발벽안의 스페인 사람도 흔치는 않지만 가끔씩 보인다.

2.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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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의 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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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브로치. 같은 시기에는 동로마 정도밖에 만들지 못했던 붉은 채색 유리를 사용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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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가 자체적으로 발행한 트레미스.
서고트의 문화적 수준은 여타 게르만계열 국가에 비해 굉장히 높은 면이 많았다. 서고트의 통치하에서 로마인들은 서고트에서 높은 대우를 받고 관직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기술과 문화를 서고트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톨레도에는 로마인으로 구성된 회의가 만들어져 왕국의 법을 제정할 수 있었고 동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실전되어 버린 채색 유리 제조 기술이라든가[8] 버트레스와 돔,[9] 말굽 아치 등을 포함한 발전된 건축 양식, 산모를 제왕 절개해 아이를 꺼낼 수 있는 높은 의료 기술 등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비스고트 건축물과 서적들이 무어인들에 의해 소멸되었다시피 할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10] 실제 수준은 더 높을지도 모른다.
화폐의 경우 초기에는 로마의 솔리두스나 트레미스 등의 화폐를 쓰다가 이후에는 자체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했다. 781개 가량의 주조소에서 화폐를 발행할 정도였고[11] 동유럽이나 반달과 지속적인 무역을 했다. 서고트의 합금[12]과 유리, 도자기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포도와 같은 비싼 작물을 기르는 법이나 비단과 같은 고급 옷감이나 이것을 이용해 만든 의복을 생산하는 법을 몰라 동로마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서고트는 로마의 문화를 상당 부분 수용했고 이슬람에 의해 파괴당하기 전까지 그 대부분을 보존하고 있었다.[13]

3. 정치/사회상



3.1. 왕위 계승


명목상 모든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었지만 구체적인 왕위 상속법이 없었고 세력이 있는 서고트 귀족이라면 누구나 왕위에 도전할 수 있었다. 교회의 주도로 7세기 초에 통치자 선출의 절차 규정을 법문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겨우 그 정도로 복잡한 후계 문제를 끝낼 수는 없었고 이슬람 제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도 왕위 계승 문제로 서고트 왕국 내에서 분쟁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슬람 세력을 끌어들인 것은 왕위를 선거제가 아닌 왕위상속으로 바꾸려던 위티샤왕이 죽으면서 아들 아길라2세에게 물려줬는데, 왕위선출제를 지지한 귀족들은 로드리고에게 정통성을 부여한다. 힘이 부족한 아길라 2세는 북아프리카에 이슬람 세력을 끌어들이게 된다.
가령 형제인 왈리아를 뒤통수친 테오도릭 1세는 형제인 유릭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아 왕위를 빼앗겼고 장군이었던 킨다쉰트는 의회로부터 지지를 얻어 선왕인 투르가에게 쿠테타를 일으켜 왕위를 빼앗았다. 테우디우스는 미친 척 다가온 암살자에게 암살당했고 교회는 아리우스파와 가톨릭파로 갈라져서 각각 왕을 임명해 둘로 갈라진 고트는 100년 가까이 내전을 치뤘다.
빈번한 내전과 외부와의 전쟁은 인구 감소를 불러왔고 이러한 인구의 감소는 제일 먼저 군사에, 그 다음은 농업에 악영향을 미쳤다. 서고트는 일반적으로 식량이 부족해서 수입해야 했다는 기록이 있다.

3.2. 법률


아타울프부터 시작해 서고트의 통치자들은 대체로 로마 문화를 동경했고 로마법을 반영한 법전을 편찬했다. 물론 로마법을 그대로 고트족에게 적용할 수는 없어서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결국에는 게르만 법과 로마 법이 적절하게 섞인 포룸 루디쿰을 만들었다.
포룸 루디쿰은 동시대의 다른 국가나 로마와 비교해도 발전된 부분이 많았다. 여성의 상속권을 제한하는 등 여성 차별이 보였던 로마법[14]이나 여성의 증언이 남성의 증언에 비해 절반의 효력만 있는 이슬람법(샤리아)과는 달리 여성의 권리를 나름 보장했고[15] 가정 내에서의 폭력을 엄격히 처벌했다.[16]
포룸 루디쿰은 법학자들과 의회에 의해 법을 사회에 맞게 수정하고 개정하고 성문화했다. 렉스 로마냐 비스고트룸에서부터 시작해 테오도시쿰, 렉스 고트룸 등의 개정을 거쳐 포룸 루디쿰까지 도달한 법전은 선민족 로마와 침략자 게르만의 가치를 융합하려 한 노력이 들어 있다. 이 노력들 덕에 일단 왕이 세워지면 서고트의 관료제는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고 재정와 군대를 비롯한 국력 전반을 효율적으로 성장시키고 사용할 수 있었다.

3.3. 행정



3.3.1. 중앙행정


중앙의 중대사는 의회에서 결정되었다. 이 의회의 정확한 명칭은 왕실 자문회로 7세기경 왕실 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자문회는 왕이 지방에 파견한 공작들과 그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관리만이 참석할 수 있었고 입법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한편 왕이 소집권을 행사하는 톨레도의 산 타 레오카디아 성당에서의 종교 회의 역시 적지 않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이들은 이단문제 같은 단순한 종교적 문제뿐만 아니라 국왕의 선출과 폐위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어 내전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3.3.2. 지방행정


서고트 왕국 지방 행정의 중추는 여러 개로 나뉘어진 와 그러한 주를 통치하는 중앙의 왕이 파견한 공작(dux)이었다. 이러한 공작 밑에는 작은 지역과 도시를 통치하는 백작(count)과 도시 참사회가 유지되었다.
한편 외부의 침략이 거세지고 왕국 내에서도 내전이 발생하면서 대토지 소유주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국왕의 선출과 형벌의 면제라는 특혜를 받았고 나중에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자식에게 상속할 수 있는 특권까지 향유하게 된다.

4. 대유대인 정책


참고로 초기의 유대인에 대한 처우는 로마의 법을 그대로 따랐다. 다시 말하면 차별은 있었지만 심각하진 않은 정도.[17] 하지만 아리우스파가톨릭의 내전에서 (반삼위일체론이라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였던) 아리우스파를 이긴 가톨릭파(유대인에게 적대적인)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을 심하게 차별하고 탄압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서고트 왕국에 대해 강한 적개감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이슬람 제국의 침공 당시 유대인들의 배반을 초래하게 되었다.[18] 이후 후우마위야 왕조 때도 유태인들은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등 아랍 정복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5. 군사


남아있는 기록들이 단편적이다. 일단 4세기 이전에는 여느 게르만족과 같이 경무장한 보병 중심이었고 점차 로마화가 진행되면서 게르만과 로마 양식이 혼합된 미늘 갑옷을 착용한다.
편제는 대개 서로마와 비슷했다. 잘 무장한 로마병과 서고트 병사간의 장비 차이는 거의 없었다. 기병을 육성했지만 수가 적었고 전술적인 부분도 (다른 게르만 부족과 같이) 어느 정도 서로마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역시 서로마와 비슷하게 주무장은 라멜라 갑옷, 창, 방패, 검이었다. 이 중 검과 갑옷은 패턴 웰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마보다 견고했거나 비슷했지만 창날은 무지하게 약했다.
해군은 규모가 작았지만 로마를 바다에서 공격했다는 기록 정도는 있다. 비스고트 문헌이나 유물은 없지만 동로마 기록에 '우리 해군이 반달과 서고트의 연합군을 몰살시켰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최소 수송을 위한 해군 정도는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아랍 해적에 대한 대응은 하지 못한 걸로 봐서 이 패전 이후로 해군이 해체되었을 수도 있다.

6. 외교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서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대왕(서고트의 테오도릭 1세나 2세와는 다른 인물이다.)은 서고트의 왕 알라릭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었고 알라릭 2세가 프랑크 왕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한동안 서고트 왕국의 섭정으로 서고트 왕국까지 통치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다.
서고트는 일단 명목상 서로마 황제의 수하로서 카탈라우눔 전투 같은 전투에 종군하고 서로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지만 서로마 제국이 군주들의 실정과 반달족, 프랑크족, 색슨족 등 다른 게르만족들의 압력으로 워낙 빌빌거렸다 보니 가끔 무리하게 하사금을 요구하거나 기분 나쁘면 한 대씩 치고 윽박지르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상하 관계였다.
반달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험악했지만 이후 공적이 된 동로마를 견제하기 위해 친밀해졌다.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수에비 왕국과 바스크족과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뤘고 이 중 수에비 왕국은 레오비길드 왕에게 결국 정복되었지만 바스크족은 끝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동로마 제국과는 초기에는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 고토 수복 전쟁의 일환으로 서고트 왕국의 내전에 개입해 핍박받던 정통 기독교인의 지지에 힘입어 이베리아 반도 남부 일대를 점령하고 히스파니아 속주를 설치하면서 서로 전쟁을 치루게 된다.
프랑크 왕국의 경우 지리적인 이유로 딱히 외교관계가 없었지만 갈리아를 평정하고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진 프랑크족을 통합한 클로비스 1세에게 부예 전투에서 알라리크 2세가 전사하는 수모까지 겪으며 국토의 절반인 아키텐, 셉티마니아 해안가 이외 갈리아 영역을 잃으면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7. 언어


서고트인들은 게르만어 동게르만어파고트어를 사용하였지만 곧 로마화되어 히스파니아 로마인들의 로망스어를 썼고 고트어는 7세기에 완전히 사멸했다. 그러나 현 스페인어포르투갈어에는 약간이나마 서고트어의 영향이 있어 현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지명, 인명에 알바로, 페르난도(프리데난드), 로드리고(로데릭), 로센도(루데신드), 아르기미로, 엘비라(겔로비라), 알폰소(아드폰스, 알폰스, 일데폰스), 곤살로(군디살브), 아돌포(아타울프, 아돌프), 라미로, 베르문도, 갈린도, 고메스(구마즈) 등 서고트족에서 유래된 이름이 상당수 나타난다.

8. 종교


서고트 왕국의 국교는 서고트인들이 믿고 있던 기독교 아리우스파였으나 레카레드 1세 시대 587년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9. 역대 서고트 왕국의 왕


'''라틴어 이름'''
'''고트어 이름'''
'''재위 기간'''
족장 시대
프리티게르누스
프리투게른스
376년 – 380년
발티 왕조
알라리쿠스 1세
알라릭스 1세
395년 – 410년
아타울푸스
아타울프스
410년 – 415년
시게리쿠스
-
415년
발리아
왈리야
415년 – 419년
테오도리쿠스 1세
티우다릭스 1세
419년 – 451년
투리스문두스
토리스모트스
451년 – 453년
테오도리쿠스 2세
티우다릭스 2세
453년 – 466년
에우리쿠스
에와릭스
466년 – 484년
알라리쿠스 2세
알라릭스 2세
484년 – 507년
게살레이쿠스
게살렉스
507년 – 511년
동고트 왕국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섭정시대 (511년–526년)[19]
아말라리쿠스
아말라릭스
526년 – 531년
발티 왕조 이후의 왕조
테우디스
티우디스
531년 – 548년
테우디기셀루스
-
548년 – 549년
아길라
아길라
549년 – 554년
톨레도의 아리우스 기독교 왕조
아타나길두스
아타나길드스
554년 – 567년
리우바 1세
리우바 1세
568년 – 573년
리우비길두스
리위길드스
568년 – 586년
톨레도의 가톨릭 왕조
레카레두스 1세
레카레드스 1세
586년 – 601년
리우바 2세
리우바 2세
601년 – 603년
위테리쿠스
-
603년 – 610년
군데마루스
군티메르
610년 – 612년
시세부투스
-
612년 – 621년
레카레두스 2세
레카레드스 2세
621년
수인틸라
수인틸라
621년 – 631년
시세난두스
-
631년 – 636년
킨틸라
킨틸라
636년 – 640년
툴가
툴가
640년 – 641년
킨타스빈투스
킨타수인트스
641년 – 649년
렉케스빈투스
레카수인트스
649년 – 672년
왐바
왐바
672년 – 680년
에르비기우스
에르위그
680년 – 687년
에기카
에기카
687년 – 701년
비티자
위티자
701년 – 710년
로데리쿠스[20]
흐로다릭스
710년 – 711년
아길라 2세[21]
아길라 2세
711년 – 713년
아르다바스투스[22]
-
713년 – 721년

10. 관련 문서



[1] 서고트의 왕은 이베리아 점령 후 히스파니아와 셉티마니아(남프랑스)의 왕을 자처했다.[2] 현재도 스페인, 포르투갈, 남부 프랑스는 라틴 계열이다.[3] 458년에 마요리아누스에게 패배해 서로마 제국의 신하 국가가 되기도 했지만 468년에 그가 사망하자 다시 독립했다. 472년경에는 프랑스 남부와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의 영토를 확보했다.[4] 세우타는 공식적으로는 유스티아누스가 수복한 동로마 땅이었고 동로마인 총독이 다스렸다. 이슬람 침공으로 아노미 상태가 된 본국으로 인해 가까운 서고트 왕국과 유착하게 된 것일 뿐 공식적으로 서고트 왕국 땅이었던 적은 없다.[5] 지브롤터의 어원이 되는 사람이다. 아랍어로 자발 (جبال 산) 알(의) 타리크(طارق), 타리크의 산라는 말이 스페인어화된 것이다.[6] 혹은 세레스 데 라 프론테라 전투[7] 종교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서고트족은 아리우스파 기독교였던 반면 히스파노 로마노는 로마 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서로 융화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587년에 서고트왕 레카레드 1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형식적으로는 종교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차원의 이야기고 귀족이나 민간인들 사이에는 이후로도 상당기간 아리우스파 기독교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8] 아랍권도 동로마에서 청색이나 녹색 유리를 만드는 법 등은 배워왔지만 빨간색, 갈색 유리 등은 만들지 못했다. 서고트의 유리는 특별히 '서고트(visigoth) 유리'라고도 불리면서 중세 서유럽의 귀중품 취급을 받았다.[9] 제대로 된 돔은 남아있는 게 없지만 소형 돔과 돔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반원통 볼트 형태가 중기 유적에 있다.[10] 서고트의 도시였던 톨레도, 코르도바 등에 남은 유적이 없다. 남아있는 건 시골 구석의 조그마한 교회 건물들 정도. 다만 톨레도와 코르도바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대도시로서 무슬림들이 많이 거주해 오고 그 때문에 교회들이 점차 사라지고 모스크가 들어서면서 없어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11] 주조소의 개수에 비해 발견된 동전은 3500개 정도로 적다. 귀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고트의 다른 유산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도래 이후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귀금속 유물은 귀금속 특성상 살아 남기 힘들다. 대표적인 예로 아즈텍과 잉카를 들 수 있는데 아즈텍의 경우는 아주 조금 남아 있고 잉카의 경우 귀금속 유물을 보기조차 힘들다. 스페인인들이 가져가 금이나 은이 아닌 다른 귀금속들은 떼어 내고 금이나 은은 녹이는 등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12] 구리와 철로 만든 제품이 유명했다.[13] 얼마나 파괴당했는지 남은 고트어 문헌은 20개도 안 될 지경이었다. 포룸 루디쿰 정도는 그라나다의 도서관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부부왕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이 포룸 루디쿰을 경쟁적으로 카탈루냐어와 카스티야어로 번역했다. 이렇게 파괴가 된 것은 의도적인 파괴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하면 일어나는 일이고 교류가 끊기면 문화가 유실되는 사례는 많다. 어쨌든 현대 스페인인들의 입장에서 서고트 왕국의 문화재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대거 파괴된 건 매우 뼈아픈 일이다. 더군다나 이슬람 세력은 서고트족에 비하면 이베리아 반도 라틴 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라틴족의 정체성을 가진 현대 스페인인들의 입장에선 당연히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던 때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던 때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14] 게르만의 살리카법에서도 보인다.[15] 강간당한 여성은 납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강간을 증명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가해자 재산의 절반을 요구할 수 있었다.[16] 그래도 노예제가 있었고 유대인을 차별하기는 했다.[17] 일부는 정부의 높은 위치에 있었고 일부는 군대의 높은 위치에 있었다. 일부는 군에 모집되어 수비를 맡았다. 물론 대부분은 낮은 위치였지만. Jane S. Gerber, The Jews of Spain: A History of the Sephardic Experience (New York: Free Press, 1992), p. 9.[18] 이슬람 군대에게 서고트 왕국에 대한 정보를 주며 침략하라고 부추겼다.[19] 이때 동고트와 서고트 왕국이 일시적으로 통일되었다가 테오도리쿠스 사후 재분열된다.[20] 킨다스빈투스 왕의 아들. 사실상 서고트 왕조의 마지막 정식 군주로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압둘 아지즈에게 톨레도와 왕비 에길로나를 빼앗기고 살해당했다.[21] 711년 톨레도 함락 후 사라고사를 거점으로 아랍군에 대항했다.[22] 일명 아르도. 서고트의 마지막 군주. 무슬림 왕조에 패사했는데 일부 사학자들은 아르도의 패사를 레콩키스타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