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공국

 




'''부르고뉴 공국'''
'''Duché de Bourgogne'''

'''880년~1477년[1]
1477년~1790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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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십자가기[3]
카페 부르고뉴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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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 부르고뉴기[4]
발루아 부르고뉴 문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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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이전(1789)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
프랑스어
Duché de Bourgogne
라틴어
Ducatus Burgundiae
네덜란드어
Hertogdom Bourgondië
위치
프랑스 동부(욘, 코트도르, 손에루아르, [6])
수도
디종
정치체제
봉건제
국가원수
공작
주요 공작
선량공 필리프 3세(1419~1467)
용담공 샤를 1세(1467~1477)
언어
프랑스어, 부르고뉴어, 프랑코프로방스어
종족
프랑스인, 부르고뉴인
종교
가톨릭
성립 이전
부르군트 왕국
프랑스 왕국
주요사건
1032년 건국
1474 ~ 1477년 부르고뉴 전쟁
1477년 용담공 샤를의 죽음
동년 공국 영토 분할
멸망 이후
[image]프랑스 왕국에 통합
1790년 데파르트망 행정구역이 만들어져
행정구역상의 부르고뉴 공국 소멸.
1. 개요
2. 상징
3. 역사
3.1. 카페-부르고뉴 공국
3.2. 발루아-부르고뉴 공국
3.3. 프랑스의 영토가 된 이후
4. 기타
5. 역대 부르고뉴의 지배자
5.1. 부르고뉴 가문 이전
5.2. 부르고뉴 가문
5.3.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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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고뉴 공국은 9세기~1477년까지 프랑스 동부에 존재했던 공작령, 프랑스 왕국 통합 이후 1790년까지 존재했던 군구(도)였다.
프랑스식으론 부르고뉴, 영국식으로 버건디 공국이라고 한다. 부르군트족부르군트 왕국에서 유래되었다. 중세, 근세 시대에 프랑스 동부 지역에 위치했던 공국. 카페 왕조 초기부터 왕자령(appanage)으로서 '''프랑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중세 프랑스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발루아 왕조 성립[7] 이후에는 당시 유럽의 경제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일대를 상속받기도 했으며, 백년전쟁 도중 자치권을 확보한 뒤부터는 자국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으나 용담공 샤를(Charles le Téméraire)의 전사를 끝으로 가문이 단절되면서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에 합병된다.
보통 부르고뉴 공국이라고 하면 위의 지도에 있는 프랑스 동부 영토를 말하고, 저지대 국가로 영토를 확장한 시기(1366~1477년)를 부르고뉴국(États bourguignons)이라고 부른다.

2.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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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 부르고뉴기[8]
카페 부르고뉴 문장
우측의 카페 부르고뉴 문장은 카페 부르고뉴 가문이 썼던 문장이며 형태가 바뀌었을 뿐 발루아 부르고뉴 가문이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후 부르고뉴 지역의 상징으로 정착하여 부르고뉴프랑슈콩테 레지옹이 된 지금도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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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십자가(문장)
부르고뉴 십자가(왕관)[9]
깃발
호담공 장부터 쓰기 시작한 부르고뉴 십자가는 처음에 성 안드레아 십자가에 색을 바꾼 형태로 쓰였다. 이후 잘린 나뭇가지가 남아있는 형태로 갔다가 나중에는 톱날 형태에 가까워진다
위에 있는 발루아 부르고뉴기는 부르고뉴 공작의 상징으로 쓰였다면 아래의 십자가는 부르고뉴 공국을 포함한 영지 전체의 상징으로 쓰였다. 그래서 부르고뉴 전쟁과 관련된 그림에서는 두 깃발을 모두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영토가 된 이후에는 아래의 깃발이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의 상징으로 쓰였고 부르고뉴 십자가는 주로 스페인 제국카를로스파를 상징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3. 역사




3.1. 카페-부르고뉴 공국


그 원류는 부르군트 왕국이다. 카롤링거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부르군트 왕국 중 손 강 서편의 지역이 서프랑크로 넘어갔고, 이 지역에 부르고뉴 공국이 생긴 것이 시초이다. [10]
이 부르고뉴 공국의 공위는 로베르 가문[11]에 넘어갔다가 982년 외드 앙리 대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외드 앙리의 양자였던 오토 빌헬름과 외드 앙리의 조카인 프랑스왕 로베르 2세 사이에서 계승분쟁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것은 로베르 왕이었고,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령으로 흡수되었다가 로베르의 뒤를 이은 앙리 1세가 자신의 동생 로베르에게 왕자령으로 수여함으로서 약 300년 간 존속하게되는 카페 왕조 부르고뉴 공국이 탄생한다.
이때 왕자령(appanage)은 중세시대 프랑스 왕이 부족한 행정력을 가지고 왕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봉건 봉신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왕자들에게 영지를 수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왕자령은 후계가 단절될 때는 다시 영지가 왕령지로 넘어가는 구조를 가졌으며 전반적으로 프랑스 왕의 통치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부르고뉴 공국 역시 카페 왕조 시기 대표적인 왕자령으로서 국왕의 통치에 협력했는데, 이는 부뱅 전투, 콜트레이크 전투 등 카페 왕조 시기 치러진 주요한 전투에 종군해 프랑스군의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확인이 된다.
부르고뉴 가문은 카페 왕조에 협력하며 별 탈 없이 300년 넘게 부르고뉴의 공위를 지켰으나, 실제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은 미미했고 후대의 발루아-부르고뉴에 비하면 별볼일이 없는 수준이었다. 한편 프랑스 왕실 본가의 카페 왕조는 샤를 4세의 요절을 끝으로 직계가 단절되면서 발루아 백작 필리프[12]필리프 6세로 왕위에 올라 발루아 왕조의 막이 올랐고 백년전쟁의 화근이 되었다.
1361년 부르고뉴 공국의 대가 끊겨 환수될 당시 부르고뉴 공작은 꼬마아이에 불과했던 필리프 1세로, 부친을 전쟁으로 여의고 뒤이어 조부를 흑사병으로 잃어 3살에 작위를 승계받은 까닭에 실제 통치는 할 수 없었으나 어머니에게서 오베르뉴와 기네를, 할머니에게서 아르투아와 부르고뉴 자유백국을 물려받는 등 상당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리프 1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승마 사고로 요절해버렸고, 백년전쟁의 패전으로 지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재기를 위한 기반이 절실히 필요했던 장 2세는 즉시 작위를 환수하고 막내아들인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앉힌다. 바야흐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유럽사에 등장한 것이다.
여담으로 이 카페-부르고뉴 가문이 포르투갈 왕조들의 시조이다. 부르고뉴 공작의 손자인 앙리(포르투갈어로 엔히크)가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의 사위가 되어 포르투갈 백작령을 하사받았고 그 아들인 아폰수 1세가 포르투갈의 초대 국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3.2. 발루아-부르고뉴 공국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개창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바로 부르고뉴 공 필리프 2세 (용담공 필리프)가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 3세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인데, 마르그리트는 플랑드르의 유일한 상속녀였을 뿐만 아니라, 필리프 1세의 사망 이후 아르투아와 부르고뉴 자유백국을 상속받아 본인 스스로도 상당한 영토를 소유한 영주였다. 이로서 용담공 필리프는 자신의 세력권을 저지대 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13] 당시 유럽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저지대의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이후 부르고뉴 공국이 부흥하게 되는 가장 큰 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용담공의 치세에 분란의 씨앗도 함께 싹텄는데, 바로 그것은 당시 정신병자였던 프랑스 왕 샤를 6세 대신 프랑스를 통치하는 섭정자리를 둘러싼 다툼이었다.[14] 당시 용담공은 자신을 따르는 부르고뉴파(Bourguignons)의 지지를 받으며 오를레앙 공 루이와 그를 따르는 아르마냑파(Armagnacs)와 대립했는데, 이는 백년전쟁이 재개되고 용담공의 사후 그의 작위를 아들 용맹공 장이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그러던 중 오를레앙 공 루이가 부르고뉴파에게 암살되고, 용맹공은 또 아르마냑파의 지지를 받는 샤를 도팽(후일의 샤를 7세)과의 협상 도중 암살되면서 갈등은 점점 격화, 결국 부르고뉴파는 당시 전쟁중이었던 잉글랜드와 결탁해 프랑스 왕실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부르고뉴의 지지를 얻은 잉글랜드군은 샤를 6세로부터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는 트루아 조약[15]까지 조인받는다. 그러나 헨리 5세가 급사하고 그 유명한 잔 다르크의 등장과 함께 기세를 되찾은 프랑스군이 파타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세를 역전시킨다. 이에 부르고뉴파는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겨 처형시키는 식으로 대응을 했으나 이미 사실상 결정된 전세를 뒤집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막 샤를 7세 역시 왕위에 오른 상태로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고, 이렇게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에 따라, 휴전 회담 도중 교묘하게 잉글랜드 측을 배제시킨 체로 부르고뉴-프랑스 양국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라스 조약에 따라,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는 대신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국에 대한 봉건 의무에서 해방되면서 사실상 독립국으로 거듭났고 볼로뉴, 베르망두아 등에서의 지배권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역시 잉글랜드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마침내 1453년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 세력을 축출함으로서 백년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이후 부르고뉴 공국은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기조로 삼았고, 이는 아라스 조약을 체결한 선량공 필리프(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용담공 샤를 시기에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용담공 샤를이 부르고뉴 전쟁에서 전사했고, 아들 없이 죽었다는 것을 노린 프랑스에 의해 캉브레 조약을 거쳐 프랑스 왕국에 통합됐다.

3.3. 프랑스의 영토가 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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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를 현재 행정 구역으로 놓았을 때
프랑스 왕국의 행정 구역[16]으로 존재했다가 프랑스 혁명에 의해 1789년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고 1790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복수의 데파르트망으로 흩어지면서 형식적으로 존재했던 부르고뉴 공국이 해체됐다.[17]
이후 1956년에 레지옹이 생기고 1982년에 일반 영토 집합체의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바뀌면서 부르고뉴 지역도 (약간 다른 경계로) 부르고뉴 레지옹으로 부활했다가 2016년에 프랑슈콩테 레지옹과 합치면서 부르고뉴프랑슈콩테 레지옹이 되었다.

4. 기타


문화와 예술을 가장 많이 후원한 선량공 필리프는 무예가 뛰어난 귀족들 24명을 모아 황금양모 기사단(프랑스어: Ordre de la Toison d'or, 스페인어: Orden del Toisón de Oro)라는 기사단을 창시하기도 했다. 이들의 대장은 특히 신분이 높은 귀족이어야만 했으며, 초대 단장은 선량공 본인이었다. 단원들 역시 귀족이어야 했으며, 이들은 모두 범죄나 이단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에도 그리스 신화에나 나올법한 황금양털이란 이교스러운 이름 탓에 빈축을 사기도 했으니, 할 일 없는 높으신 분의 코스프레라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러나 의외로 명망이 높았는지 기사단장직의 계승 문제에 교황이 관여한 적도 있고 기사단장직은 역대 부르고뉴 공작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 스페인의 왕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단절되자 자신이 정통 기사단장이라고 보르본(부르봉) 왕조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나치 독일이 구 부르군트 왕국 지방에 부르고뉴 SS국이라는 국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Paradox Interactive의 게임 Crusader Kings 2Europa Universalis IV에서 구현되어 있다. 크킹에서는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 나오는데, 1066년 시나리오로 시작 시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가 왕위를 찬탈하고 내전이 펑펑 터져 '''게임 진행이 역사와 달라지게 하는 제일 큰 원흉이 된다.''' 유로파4에서는 독립 국가로서 실제 역사대로 프랑스와 서로 대립하는데, 후사 없이 통치자가 사망하면 나라가 자동으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황제국에 상속되는 부르고뉴 상속 이벤트도 구현되어있다.

5. 역대 부르고뉴의 지배자



5.1. 부르고뉴 가문 이전


이름
재위
비고
"정의공" 리샤르
880-921
보소 가문, 부르고뉴 공국 탄생
라울
921-923
후일 프랑스 왕이 된다.
"흑색공" 위그
923-952
흑색공
질베르
952-956
마지막 보소 가문 출신 공작
오통
956-965
로베르 가문
"대공" 앙리
965-1002

오토 빌헬름
1002-1004
마지막 로베르 가문 출신 공작
"현명왕" 로베르 2세
1004-1016
카페 왕조 통치, 프랑스 왕, 국왕령으로 편입
앙리 1세
1016-1032
프랑스의 왕

5.2. 부르고뉴 가문


이름
재위
비고
"노인공" 로베르 1세
1032-1076
앙리 1세의 동생 왕자령으로 분봉받았다.
위그 1세
1076-1079

"적색공" 외드 1세
1079-1103

위그 2세
1103-1143

외드 2세
1143-1162

위그 3세
1162-1192

외드 3세
1192-1218

위그 4세
1218-1271

로베르 2세
1271-1306

위그 5세
1306-1315

외드 4세
1315-1350

필리프 1세
1350-1361


5.3.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이름
재위
비고
[image] "호담공" 필리프 2세
1364-1404

"용맹공" 장
1404-1419

"선량공" 필리프 3세
1419-1467

"용담공" 샤를
1467-1477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낭시 전투에서 전사
"부유공" 마리
1477-1482
용담공 샤를의 딸로 부친의 남성 후계가 없어 계승, 오스트리아 대공인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한다.
[1] 정의공 리샤르~용담공 샤를[2] 프랑스 왕국의 하위 군구(province)인 부르고뉴 공국.[3] 부르고뉴 전쟁 관련 그림에서는 성 파트리치오 십자와 비슷하게 생긴 깃발이 나오는데 이 십자가도 부르고뉴의 십자가인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따라서는 X의 위아래 끝의 4부분만 가시가 달린 것도 있고 가시달린 십자가도 나온다.[4]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확장을 하면서 해당 영토의 문장을 추가하는 식으로 깃발과 문장이 변형된다.[5] 호담공 필리프의 문장. 부르고뉴의 문장과 투렌의 문장이 2개씩 배치돼있다.[6] 참고자료[7] 프랑스, 부르고뉴 둘 모두에 해당된다.[8] 투렌기+카페 부르고뉴 문장[9] 각종 그림이나 동전에서 비슷한 형태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10] 다른 부르군트 지역은 고지 부르군트, 저지 부르군트로 나뉘었다가 얼마 후 통합하여 제2 부르군트 왕국(아를 왕국)을 구성했다. 제2 부르군트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으로 넘어갔다.[11] 에스베의 로베르를 시조로 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위그 카페 역시 로베르 가문의 일원이며, 편의상 보통 위그 카페 이전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한 파리의 오도, 로베르 1세를 로베르 왕조로, 위그 카페 이후를 카페 왕조로 정의하는 편. 딱히 로베르 왕조가 갈라진 건 아니기 때문에, 로베르 왕조를 그냥 카페 왕조로 통칭하는 경우도 있다.[12] 발루아 백국 역시 왕자령으로, 필리프 6세는 샤를 4세와 사촌지간이다.[13] 공식적으로 플랑드르, 아르투아가 영지가 된 건 필리프와 마르그리트의 아들인 용맹공 장 시기이다.[14] 최근 연구에서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대립이 섭정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일 뿐만 아니라 도시민,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 사이의 대립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5] 이때 샤를 도팽은 샤를 6세의 사생아로 몰렸다.[16] 엄밀히 말하자면 프랑스 왕국이 직접 통치하는 부르고뉴 공국이라는 이름은 군구(Gouvernements généraux et particuliers 혹은 Provinces militaires)였고 행정구로서의 부르고뉴는 Généralité de Bourgogne 혹은 Généralité de Dijon(부르고뉴 행정구 혹은 디종 행정구)이었다. 군구와 행정구의 관할구역이 항상 동일했던 것은 아니지만, 부르고뉴는 군구와 행정구의 관할구역이 동일했다.[17] 참고자료 1970년에 기존 행정구역이 83개의 데파르트망으로 흩어질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신설된 데파르트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