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사
오스만 터키어: بورسا
그리스어: Προῦσα
영어, 터키어: Bur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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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터키 북서부 마르마라 지방에 위치한 도(il)이자 동명의 도시. 부르사 도의 중심이며 인구 190만의 도시로,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의 뒤를 이어 터키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 부르사 혹은 프루사라는 명칭의 어원은 도시의 실질적인 창건자인 비티니아 왕국의 군주 프루시아스 1세에서 유래되었다.
에디르네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수도(1326~1453)로 기능하며 성장하였고[5] , 이후에도 아나톨리아의 주요 거점이었다. 신흥 오스만 세력이 점령한 첫 대도시이고 천도 이후에도 중시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청나라의 심양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부르사 주는 2011년에 경상북도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터키어로 세프탈리라고 부르는 복숭아가 특산물이다. 그 당도는 어마무시하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복숭아라고 부른다는 소리가 있다. 일단 부르사 시내에서 아무 가게에나 보이는 복숭아를 굳이 고르고 고르지 않고 아무거나 집어먹는다해도 어지간한 국산 복숭아 뺨치는 당도를 자랑한다.
이 지방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 이스켄데르 케밥도 전문 프랜차이즈 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요리가 나오고 조금 기다리면 종업원이 와서 끓는 버터를 냅다 들이 붓는 게 일종의 암묵적 룰 같은데, 당연하게도 엄청난 칼로리를 섭취하게 된다. 버터에 찌들은 한 입 크기로 썰어놓은 빵과 구운 가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유럽 방면 이스탄불 남쪽에서 비교적 싼값에 배를 타고 넘어갈 수 있는데 대략 2 - 3 시간 정도 걸리면 시내에 들어갈 수 있다. 이스탄불이 워낙에 붐비고 수작부리는 현지인들이 많거니와[6] 관광지를 중심으로 창렬물가를 자랑하기에 본인의 여행 스타일이 관광지 훑어보기가 아닌 그냥 발 닿는대로 즐기는 걸 선호한다면 하루 정도 시간내서 가보기에도 무리는 아닐 정도로 가깝다.
2. 역사
2.1. 고대 : 비티니아
2.2. 오스만 제국의 수도
오스만 제국 제2대 술탄인 오르한이 이 도시를 정복한 이후 첫 수도였던 쇠위트(Söğüt)에서 천도해 이곳에 자리잡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로 확장하면서 트라키아의 에디르네를 수도로 삼게 되지만, 아직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전이라 국토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막고 있어 부르사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수도로서 여전히 제 역할을 다 했다. 도시는 1402년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 제국군에게 약탈당하며 크게 파괴되었다가 이후 메흐메드 1세 때에 와서야 복구되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에야 에디르네와 함께 수도의 지위를 잃게 된다.
2.3. 근현대 : 실향민 수용
1차 대전 이후 발칸 반도에서 쫓겨난 튀르크인들이 부르사에 대거 정착하였는데, 특히 40년대 이후 불가리아에서 추방된 15만에 달하는 불가리아 튀르크인의 1/3이 부르사에 정착하였다.[7]
3. 관광 (볼거리)
- 바예지드 1세 모스크
- 부르사 고고학 박물관
- 부르사 성벽
- 시립 박물관
- 터키 건축 박물관
- Irgandı 다리 - 15세기에 지어진 석조 교량
- 아브달 다리 - 17세기의 석조 교량
- 주말르크즉 마을
4. 스포츠
신영록 선수가 뛰었던 터키의 1부 축구팀 부르사스포르의 연고지이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1360년대의 어느 해인가에 에디르네를 함락한 이후 천도를 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정작 황제들은 이후로도 부르사에 머물렀으므로 수도가 두 군데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부르사는 메메드 1세가 에디르네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오스만의 수도였다.[6] 갈라타 다리에서는 뜬금없이 담배불 붙혀달라곤 다가와서 술이나 한 잔하고 꼬셔서 바가지를 씌운다거나, 구두솔을 일부러 떨구고는 주워주는 관광객에게 고맙다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냅다 구두를 닦은 다음에 거액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닦아 줄 수 조차 없는 샌들을 신은 사람한테도 시도한다)[7] 다만 불가리아 국명의 어원이자 민족 구성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나머진 슬라브 인) 불가르 만족도 사실 튀르크 계통이다.. 같은 조상을 두었어도 천년의 세월동안 풍습과 종교 등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진 결과이다. (+ 슬라브/그리스인과의 혼혈)[8] 보통 마스지드하면 한 개의 커다란 돔에 미나레트를 떠올리는데 여기는 작은 돔 여러개가 올라간 형태이다. 터키의 유명한 건축물을 미니어쳐로 만들어 놓은 박물관이 이스탄불에 있는데 거기에서 등장하는 걸로 보아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나름 유명한 마스지드로 평가받는 듯 하다. 시내 중심과 가까워서 바로 코앞의 지하에 설치된 상당한 규모의 바자르와 지상의 시장과 이어져있다. 현지인들에게는 나름 유명하지만 외국인들은 잘 안가는 곳이어서 그런지 이스탄불의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마스지드 보다는 더 진짜 모습의 마스지드 풍경을 볼 수 있다. 원래 이 나라 사람들이 우리 기준으로는 신기할 정도로 낯가림이 없는데, 외국인. 특히 아시아인을 보기 힘들고, 아이들 같은 경우 여행자를 역으로 '관광' 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9] 마스지드는 회당이기도 하지만 기도시간이 아니라면 현지인에게 마을회관 같은 기능도 있다. 주부들이 애들을 데려와서 자기들끼리 뛰어 놀게하고 한쪽에 모여서는 수다를 떠는 게 일상이라서 엄숙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종교시설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보통의 이슬람은 종교와 생활이 너무 밀접해서 예배의식도 경건하지만 가벼운 느낌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회당 내부에서 기도시간에 드러누운 사람도 볼 수 있다. 서유럽인들이나 동아시아인 관점에서 이는 불경스러운 행동으로 보는 반면 이쪽은 '여기는 신의 집이고 그는 신의 품안에 누워있는 것이다.' 로 생각을 한다고... 반면 예배의식이 가장 엄격한 종교는 동방정교회 쪽이다. 못해도 1시간 걸리는데 그 과정을 전부 서서(!) 진행한다. 물론 노약자를 위한 약간의 의자를 배치하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