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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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인 셀리미에 모스크. '터키의 미켈란젤로' 미마르 시난의 작품.
터키어 - Edirne
그리스어 - Ἁδριανούπολις 혹은 Aδριανούπολις[1]
라틴어 - Hadrianopolis
불가리아어, 마케도니아어 - Одрин
세르비아어 - Једрене
1. 개요
2. 역사
3. 교통
4. 이모저모


1. 개요


터키의 대도시 이스탄불 서쪽, 그리스불가리아 접경지대에 있는 도시로 과거의 이름은 '''아드리아노폴리스'''.
자체적으로도 고대, 중세 세계에서도 상당히 중요했고, 오스만 시대에 와서도 수도를 제외한 대도시 중 하나로서 위상이 높았지만, 이 도시의 역사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2. 역사


고대에는 트라키아인의 땅으로 우스쿠다마(Uskudama)로 불리다가 기원전 2세기경 로마에 합병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발칸 지배의 거점으로 성곽을 지었고, 황제의 이름을 따서 하드리아노폴리스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어에서 /h/ 발음이 사라져 아드리아노폴리스가 되었다. '아드리아노플'은 프랑스어, 영어식 명칭. 오늘날 쓰이는 에디르네라는 터키어 명칭도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로도 발칸 반도의 중요 도시로서 기능해왔다. 378년 바로 이곳에서 벌어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 발렌스고트족과의 싸움에서 군단이 전멸당하고 자신도 전사하는 불운을 맞이했다. 이는 고대 로마 제국의 쇠락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거점도시로서의 아드리아노폴리스의 위상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이어져, 제국의 제2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2] 동로마 황제들이 즐겨 머물던 곳이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변고가 생겼을 경우 이곳으로 피난하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며, 동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에게도 현재 에디르네로 개명당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전 한동안 수도 역할을 했으며 전략적, 경제적 핵심지였던 비중 있는 도시였다.
그런데 도대체 이렇게 불안한 지역이 어떻게 동로마-오스만 양대 제국의 핵심 도시 역할을 할 수 있었냐는 의문이 들 만큼 이 지역에서는 전투가 잦았고, 함락당한 적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이유는 유럽 방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이 도시를 함락시키거나 무력화할 필요성이 있으며, 동로마 제국 스스로도 아드리아노폴리스가 포함된 트라키아 지방 동남부 지역은 시작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3중성벽까지 제대로 방어하기 힘들 정도로 지형의 혜택을 못 받는다고 단언할 만큼 지형방어효과가 없는데, 그나마 방어거점으로 활약한 것이 아드리아노폴리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럽 방면에서 아드리아노폴리스가 함락되면 다음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차례가 되므로 공격군이나 방어군이나 여기서 한번 거하게 싸워야 할 이유가 성립된다. 그래서 21세기까지 대규모 전투만 해도 16번이나 벌어질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문 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하면서도 엄청나게 싸움이 많은 도시가 되었다는 역설적인 배경을 가지게 된게 이 때문이다.
1361년[3]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는데,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전까지 이곳이 일시적으로 수도가 되기도 했으며,[4] 발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가도에 있는 도시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영어 위키에 나온 항목을 보면 동로마 제국이 불가리아 제국과 본격적으로 대립하는 8세기부터 한세기마다 이곳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두세 번 벌어지는, 소위 전설을 쌓는 과정이 막 보이다가 1362년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 갑자기 뚝 끊기면서 도시의 역사가 갑작스럽고 전례없는 500년의 평화를 맞게 되는 걸 볼 수 있다.[5] 그러나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이 하락기에 접어들면서 이 도시는 다시 한번 주기적으로 전쟁에 휩쓸리며, 특히 1차대전의 직접적인 발단이자 전초전격이었던 발칸 전쟁 당시 저 고대사의 악순환이 그대로 반복되면서(...) 3만 명의 소도시로 쇠락해버렸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점령하였다. 제1차 발칸 전쟁 당시 불가리아 왕국이 차지했고 제2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다시 차지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투르크가 패전하자 1920년 그리스 왕국이 차지해 이름도 '아드리아노폴리스'로 되돌아갔으나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군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게 패전하고 스미르나까지 뺏겼다. 이에 군사정변까지 일으켜가며 아드리아노폴리스 및 카라아아자는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였으나 결국 1923년 아타튀르크 지휘하의 터키가 또다시 차지했다. 그리스-터키 국경은 메리치(에브로스), 툰자(톤조스)[6]강을 따라 설정되어 있는데, 에디르네 부근 카라아아츠(Karaağaç)에서는 국경이 메리치 강을 벗어나 메리치 강 동쪽임에도 터키 쪽 육상에 설정되어 있다. 그리스 터키 전쟁 때 학살의 보상으로 그리스가 터키에게 할양하였기 때문. 인구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터키의 도시 중에서도 최전방중의 최전방이라 21세기 기준으로는 인구 14만의 소도시이다.[7] 조금만 옆으로 이동하면 이스탄불이라는 대도시가 있어서 굳이 여기서 살 이유가 없기도 하고.
그래도 그리스와 접한 국경도시라는 이점을 살려서 예전만큼 국가의 중심도시 역할은 못 해도 이스탄불의 서쪽 육상 관문 및 검역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3.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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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통해 그리스에서 불가리아로 가려면 에디르네 인근의 터키령을 지나야 했는데, 1971년에 우회철로가 개통되면서 그리스를 거쳐 불가리아로 바로 월경할 수 있게 되었다.

4. 이모저모


아무래도 현 터키에서 가장 서방에 위치한 도시며, 역사가 오래되었고 그에 따라 고대 로마, 동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의 유적이 산재해 있으며,[8] 국경도시이기 때문에 여행자들에겐 평범한 유럽 도시 같다는 인상이 많은 편이다.
국경 건너 그리스인들이 쇼핑(...)을 하러 에디르네를 자주 찾는다. 그리스 쪽 트라키아 지방은 진짜 한적한 깡촌이라 물건도 없고 물가도 비싸지만, 터키 쪽은 물가가 싼 데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담배 3보루와 술 한 병을 면세로 들여올 수 있기 때문(...) 참고로 말보로 담배가 터키에서는 11.50리라 (약 1.90유로)지만 그리스에서는 5유로, 불가리아에서는 5.50레프(3유로)이며, 면세로 사면 당연히 더 싸다. 게다가 그리스인들은 터키를 방문할 때 비자도 필요없다. 반대로 터키인들은 그리스로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고, 그리스 쪽 국경 너머는 깡촌이라 메리트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불가리아를 찾는다. 불가리아도 EU소속이지만 국경 너머 불가리아 도시인 스벨린그라드, 하스코보, 크르잘리는 터키계 불가리아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고[9] 에디르네에 거주하는 터키인들은 상당수가 그리스, 불가리아에 연이 있기 때문에 이중국적자도 많다.


[1] 현대 그리스어로는 Αδριανούπολη[2] 다만 경제적 측면이나 도시의 규모면에서의 제2의 도시는 테살로니키였다. 여기는 제국 말기가 되면 통치의 편의를 위해 말만 같은 나라지 그냥 따로 노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테살로니키가 오스만에 최종적으로 함락된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22년 전인 1431년의 일이었지만.[3] 다만 시기가 분명치 않아서, 가장 이르면 1361년이고 가장 늦게 보는 경우 1369년.[4] 아나톨리아 반도의 부르사와 함께 공동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그 주변이 동로마 제국 영토인 관계로 국토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어, 수도를 에디르네와 부르사 두 군데에 두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5]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drianople_(disambiguation)[6] 이 강 이름은 터키어그리스어, 불가리아어가 모두 다르다. 터키어로는 메리치 강은 불가리아어로는 마리차, 그리스어로는 에브로스라고 부르며, 터키어로는 툰자 강은 불가리아어로도 툰자 강이지만 그리스어로는 톤조스이다.[7] 남한으로 치면 파주시, 철원군휴전선 쪽에 있는 지역들과도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볼 수 있다. 남북통일 이후에는 구 북한 지역 중 신의주시, 중강군 등 중국과 접한 지역과 라선특별시러시아와 접한 지역이 그런 포지션이 되겠고...[8] 셀리미예 모스크 같은 경우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9] 하스코보와 크르잘리에서는 심지어 조그만 노점상조차도 터키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터키계 불가리아인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