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image]
사진은 빔 벤더스의 영화 포스터.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 작곡가 카를로스 푸에블라가 작곡한 노래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부른 이 버전이 아주 유명하다.
곡의 제목은 Hasta Siempre - Comandante Che Guevara 로 체 게바라를 기리는 곡이다.
'''Buena Vista Social Club'''
'''이제는 전설이 된 쿠바의 재즈 뮤지션'''
본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과거 1940년대 쿠바 하바나에 있었던 가장 유명한 사교 클럽의 하나였으며, 환영받는 사교 클럽이란 뜻이었다. 유명한 클럽이었던 만큼 당시 쿠바의 많은 유명 뮤지션들이 공연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카차오 로페즈(Cacho Lopez, 베이시스트 올란도 "카차이토" 로페즈(Orlando "Cachaito" López)의 아버지)와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즈(Arsenio Rodriguez)가 가장 유명했다. 당시 아르세니오의 밴드에서 피아노를 쳤던 루벤 곤잘레스(Rubén González, 1919~2003)의 말에 따르면, 보수는 정말 적었음에도 그들 자신들이 정말로 음악을 하는 것이 좋았기에 연주를 했다고. 훗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통해 함께하게 되는 루벤과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 본명 막시모 프란시스코 레필라도 무노즈(Máximo Francisco Repilado Muñoz), 1907~2003), 이브라힘 페레르(Ibrahim Ferrer, 1927~2005) 등은 그 당시를 대표하는 젊은 뮤지션들이었다. [1]
하지만 쿠바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모든 상황이 바뀌어버리고 말았는데, 1959년 대통령에 오른 마누엘 우루티아 레오(Manuel Urrutia Lleó)는 하바나의 향락적인 문화생활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이후 피델 카스트로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이전까지의 문화는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비록 쿠바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전통 음악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으나 실제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후 팝 뮤직과 살사가 쿠바에서 인기를 끌게 되면서 쿠바의 전통 음악들은 대중들로부터 점차 잊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활동했던 꼼빠이 세군도와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 엘리아데스 오초아(Eliades Ochoa)같은 이들을 제외한 과거 하바나의 클럽들을 주름잡았던 이들 대부분은 음악을 접고 구두닦이나 이발사로 전직하거나 발레하는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주는 등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늙어가고 있었다.
이후 1995년, 월드 서킷 레코드(World Circuit Records)의 프로듀서 닉 골드(Nick Gold)는 이전부터 쿠바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라이 쿠더(Ry Cooder)에게 쿠바 재즈 뮤지션들과 아프리카의 연주자들이 함께 연주하는 퓨전 앨범을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했고, 이에 동의한 라이는 말리의 토속 음악인들과 쿠바 뮤지션들을 섭외해 하바나에서 녹음을 할 것을 계획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말리 뮤지션들이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자 닉과 라이는 계획을 바꾸어 쿠바의 전통 음악인 손(Son) 앨범을 내기로 결정하고, 당시 또다른 쿠바 음악 프로젝트인 아프로 쿠반 올 스타즈(Afro-Cuban All Stars)를 진행하고 있던 후안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Juan de Marcos González)와 함께 작업을 할 다른 뮤지션들을 섭외해 앨범을 녹음하게 된다.[2]
이들이 쿠바를 돌아다니면서 찾아낸 이 아티스트들과 '''6일만에(!!)''' 녹음을 완성해 발매한 것이 'Buena Vista Social Club'인데, 이것이 대박을 치면서 전세계적으로 큐반 재즈 열풍을 일으킨다. 앨범 발매 이후엔 헤수스 "아구아예" 라모스(Jesus "Aguaje" Ramos)와 피오 레이바(Pío Leyva), 마누엘 갈반(Manuel Galbán)등이 밴드에 합류하였으며, 이후 이 어르신들은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몇 차례 공연을 가진 뒤 미국 카네기 홀까지 가서 공연을 하고,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후에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름하에 열린 공연들이 몇번 더 있었다.
1999년에는 빔 벤더스가 동명의 다큐 영화를 만들어서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한다.
1959년 이후로 40년 가까이 묵혀졌던 이들이 재평가되었고 빔 벤더스의 영화 덕분에 덕분에 이들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세월이 너무 흘러서 오래가질 못했다. 하지만 이들이 누린 인기는 절대 반짝 인기가 아니었는데, 비록 'Buena Vista Social Club' 앨범만큼은 아니었긴 해도 이후 멤버들이 발매한 앨범들은 대부분 비평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괜찮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리드 보컬이었던 이브라힘 페레르는 라이 쿠더로부터 ''''쿠바의 냇 킹 콜''''이란 찬사까지 받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이전까지 주로 매니아층이 찾는 음악이었던 손, 그리고 아프로-큐반 재즈를 대중들이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쿠바 내에서도 그 인지도를 잃어가고 있던 손이라는 장르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만으로도 이들의 활동에는 충분히 그 의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들에게 찬사만이 쏟아진 것은 아니다. 특히 당시 본국인 쿠바에서는 무관심하다 못해 냉소적인 반응이었다고 하는데, 애초에 앨범에 수록된 곡들 대부분이 쿠바 내에선 그야말로 흘러간 옛날 유행가나 다름없는 곡들이었기에 큰 감흥을 주지 못한것도 있지만, 앨범이 손(그것도 하바나 일대의)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탓에 쿠바 내에 다양한 전통음악이 존재함에도 오직 손만이 유일한 쿠바의 전통음악인 것처럼 다른 국가의 사람들 뿐 아니라 쿠바인들까지도 인식하도록 만들어버렸고, 그 손마저도 외국인인 라이 쿠더와 닉 골드의 프로듀싱 탓에 원래의 그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 비판하는 이들의 주된 요지. 이점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멤버들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디렉터였던 후안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관련 프로젝트에서 손을 뗀 후 보다 다양한 쿠바 전통 음악들을 자신이 직접 프로듀스하여 자신의 밴드 아프로 쿠반 올 스타즈의 앨범에 수록했고, 다른 멤버들도 자신들의 솔로 앨범들을 통해 과거 자신이 부르거나 연주했던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녹음해 발매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의 음악, 그리고 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는 오늘날의 쿠바의 모습 뿐 아니라 과거 1920~1930년대의 쿠바의 실상 역시 제대로 담고 있지 않으며, 과거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집권 시기에 대한 향수를 지나치게 표현함으로서 군부독재기를 미화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이들이 쿠바 출신이라는 점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과 그 멤버들의 솔로활동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쿠바에 정치 및 경제적으로 적대적인 미국에서는 이들이 공연을 할 때마다 적잖은 수의 극우 시위대에 시달려야 했는데, 시위대의 관객석 난입 및 공연장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협박 등으로 인해 공연이 여러 차례 중단되기도 했었다. 2003년에는 이브라힘 페레르의 북미 투어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후의 투어 일정이 일방적으로 취소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이브라힘 페레르는 '우린 쿠바의 스파이들이 아니다!'라는 분노에 찬 인터뷰를 하기도.
2003년에 이브라힘 페레르가 내한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건강 악화로 결국 무산되었다. 한편 유일한 여성 보컬인 오마라 포르투온도는 2001년 루벤 곤잘레스 및 다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멤버들과 함께 내한한 바 있으며, 이후 2005년에 한번 더 내한공연을 가졌다.
2006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10주년을 기념하여 생존한 멤버들 일부는 젊은 뮤지션들-가수 카를로스 칼룬가(Carlos Calunga), 퍼커션을 맡았던 아마디토 발데즈(Amadito Valdés)의 딸이며, 역시 가수인 이다나 발데즈(Idana Valdés) 등-과 함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름으로 월드 투어를 치뤘고, 이후 이들은 오케스트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Orquesta Buena Vista Social Club)이란 이름으로 2014년 지금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핵심 멤버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그룹을 탈퇴한 상황임에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름을 달고 활동하는 이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2007년에 쿠바를 여행한 만화가 이우일, 선현경 내외는 이들 공연을 직접 봤으나 주축이던 세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는 터라 뭔가 허전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나머지 멤버들도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있는 것이 현실. 2009년 2월 9일에는 더블 베이스를 맡고 있었던 올란도 "카차이토" 로페즈가 수술을 받던 도중 사망했고, 2012년 2월 11일에는 기타리스트인 마누엘 갈반이 80살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잠시 이 곳에 퍼커션으로 몸담았던 멤버인 미구엘 디아즈의 쌍둥이 딸들이 현재 Ibeyi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라카미 류는 아프로-큐반 재즈의 광팬으로, 이들의 공연을 보면서 ''' '저렇게 잘하지 않아도 될 텐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고 매혹적' '''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의 인디 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의 이름의 모티브...인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리더인 조까를로스는 정작 "그때 그런 밴드 몰랐었다" 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한국에서는 2015년 11월 19일 재개봉할 예정인데 포스터가 심의반려되는 사건이 있었다. 문제는 저 포스터의 담배라고(...)#결국 수입사에서 담배를 블러처리해서 재심의를 받은 듯
놀면 뭐하니? 유산슬 굿바이 콘서트에 참여했던 연주자들이 한국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불린다.
사진은 빔 벤더스의 영화 포스터.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 작곡가 카를로스 푸에블라가 작곡한 노래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부른 이 버전이 아주 유명하다.
곡의 제목은 Hasta Siempre - Comandante Che Guevara 로 체 게바라를 기리는 곡이다.
'''Buena Vista Social Club'''
'''이제는 전설이 된 쿠바의 재즈 뮤지션'''
본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과거 1940년대 쿠바 하바나에 있었던 가장 유명한 사교 클럽의 하나였으며, 환영받는 사교 클럽이란 뜻이었다. 유명한 클럽이었던 만큼 당시 쿠바의 많은 유명 뮤지션들이 공연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카차오 로페즈(Cacho Lopez, 베이시스트 올란도 "카차이토" 로페즈(Orlando "Cachaito" López)의 아버지)와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즈(Arsenio Rodriguez)가 가장 유명했다. 당시 아르세니오의 밴드에서 피아노를 쳤던 루벤 곤잘레스(Rubén González, 1919~2003)의 말에 따르면, 보수는 정말 적었음에도 그들 자신들이 정말로 음악을 하는 것이 좋았기에 연주를 했다고. 훗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통해 함께하게 되는 루벤과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 본명 막시모 프란시스코 레필라도 무노즈(Máximo Francisco Repilado Muñoz), 1907~2003), 이브라힘 페레르(Ibrahim Ferrer, 1927~2005) 등은 그 당시를 대표하는 젊은 뮤지션들이었다. [1]
하지만 쿠바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모든 상황이 바뀌어버리고 말았는데, 1959년 대통령에 오른 마누엘 우루티아 레오(Manuel Urrutia Lleó)는 하바나의 향락적인 문화생활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이후 피델 카스트로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이전까지의 문화는 대부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비록 쿠바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전통 음악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으나 실제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후 팝 뮤직과 살사가 쿠바에서 인기를 끌게 되면서 쿠바의 전통 음악들은 대중들로부터 점차 잊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활동했던 꼼빠이 세군도와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 엘리아데스 오초아(Eliades Ochoa)같은 이들을 제외한 과거 하바나의 클럽들을 주름잡았던 이들 대부분은 음악을 접고 구두닦이나 이발사로 전직하거나 발레하는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주는 등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늙어가고 있었다.
이후 1995년, 월드 서킷 레코드(World Circuit Records)의 프로듀서 닉 골드(Nick Gold)는 이전부터 쿠바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라이 쿠더(Ry Cooder)에게 쿠바 재즈 뮤지션들과 아프리카의 연주자들이 함께 연주하는 퓨전 앨범을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했고, 이에 동의한 라이는 말리의 토속 음악인들과 쿠바 뮤지션들을 섭외해 하바나에서 녹음을 할 것을 계획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말리 뮤지션들이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자 닉과 라이는 계획을 바꾸어 쿠바의 전통 음악인 손(Son) 앨범을 내기로 결정하고, 당시 또다른 쿠바 음악 프로젝트인 아프로 쿠반 올 스타즈(Afro-Cuban All Stars)를 진행하고 있던 후안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Juan de Marcos González)와 함께 작업을 할 다른 뮤지션들을 섭외해 앨범을 녹음하게 된다.[2]
이들이 쿠바를 돌아다니면서 찾아낸 이 아티스트들과 '''6일만에(!!)''' 녹음을 완성해 발매한 것이 'Buena Vista Social Club'인데, 이것이 대박을 치면서 전세계적으로 큐반 재즈 열풍을 일으킨다. 앨범 발매 이후엔 헤수스 "아구아예" 라모스(Jesus "Aguaje" Ramos)와 피오 레이바(Pío Leyva), 마누엘 갈반(Manuel Galbán)등이 밴드에 합류하였으며, 이후 이 어르신들은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몇 차례 공연을 가진 뒤 미국 카네기 홀까지 가서 공연을 하고,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후에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름하에 열린 공연들이 몇번 더 있었다.
1999년에는 빔 벤더스가 동명의 다큐 영화를 만들어서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한다.
1959년 이후로 40년 가까이 묵혀졌던 이들이 재평가되었고 빔 벤더스의 영화 덕분에 덕분에 이들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세월이 너무 흘러서 오래가질 못했다. 하지만 이들이 누린 인기는 절대 반짝 인기가 아니었는데, 비록 'Buena Vista Social Club' 앨범만큼은 아니었긴 해도 이후 멤버들이 발매한 앨범들은 대부분 비평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괜찮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리드 보컬이었던 이브라힘 페레르는 라이 쿠더로부터 ''''쿠바의 냇 킹 콜''''이란 찬사까지 받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이전까지 주로 매니아층이 찾는 음악이었던 손, 그리고 아프로-큐반 재즈를 대중들이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쿠바 내에서도 그 인지도를 잃어가고 있던 손이라는 장르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만으로도 이들의 활동에는 충분히 그 의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들에게 찬사만이 쏟아진 것은 아니다. 특히 당시 본국인 쿠바에서는 무관심하다 못해 냉소적인 반응이었다고 하는데, 애초에 앨범에 수록된 곡들 대부분이 쿠바 내에선 그야말로 흘러간 옛날 유행가나 다름없는 곡들이었기에 큰 감흥을 주지 못한것도 있지만, 앨범이 손(그것도 하바나 일대의)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탓에 쿠바 내에 다양한 전통음악이 존재함에도 오직 손만이 유일한 쿠바의 전통음악인 것처럼 다른 국가의 사람들 뿐 아니라 쿠바인들까지도 인식하도록 만들어버렸고, 그 손마저도 외국인인 라이 쿠더와 닉 골드의 프로듀싱 탓에 원래의 그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 비판하는 이들의 주된 요지. 이점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멤버들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디렉터였던 후안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관련 프로젝트에서 손을 뗀 후 보다 다양한 쿠바 전통 음악들을 자신이 직접 프로듀스하여 자신의 밴드 아프로 쿠반 올 스타즈의 앨범에 수록했고, 다른 멤버들도 자신들의 솔로 앨범들을 통해 과거 자신이 부르거나 연주했던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녹음해 발매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의 음악, 그리고 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는 오늘날의 쿠바의 모습 뿐 아니라 과거 1920~1930년대의 쿠바의 실상 역시 제대로 담고 있지 않으며, 과거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집권 시기에 대한 향수를 지나치게 표현함으로서 군부독재기를 미화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이들이 쿠바 출신이라는 점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과 그 멤버들의 솔로활동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쿠바에 정치 및 경제적으로 적대적인 미국에서는 이들이 공연을 할 때마다 적잖은 수의 극우 시위대에 시달려야 했는데, 시위대의 관객석 난입 및 공연장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협박 등으로 인해 공연이 여러 차례 중단되기도 했었다. 2003년에는 이브라힘 페레르의 북미 투어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후의 투어 일정이 일방적으로 취소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이브라힘 페레르는 '우린 쿠바의 스파이들이 아니다!'라는 분노에 찬 인터뷰를 하기도.
2003년에 이브라힘 페레르가 내한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건강 악화로 결국 무산되었다. 한편 유일한 여성 보컬인 오마라 포르투온도는 2001년 루벤 곤잘레스 및 다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멤버들과 함께 내한한 바 있으며, 이후 2005년에 한번 더 내한공연을 가졌다.
2006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10주년을 기념하여 생존한 멤버들 일부는 젊은 뮤지션들-가수 카를로스 칼룬가(Carlos Calunga), 퍼커션을 맡았던 아마디토 발데즈(Amadito Valdés)의 딸이며, 역시 가수인 이다나 발데즈(Idana Valdés) 등-과 함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름으로 월드 투어를 치뤘고, 이후 이들은 오케스트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Orquesta Buena Vista Social Club)이란 이름으로 2014년 지금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핵심 멤버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그룹을 탈퇴한 상황임에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름을 달고 활동하는 이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2007년에 쿠바를 여행한 만화가 이우일, 선현경 내외는 이들 공연을 직접 봤으나 주축이던 세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는 터라 뭔가 허전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나머지 멤버들도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있는 것이 현실. 2009년 2월 9일에는 더블 베이스를 맡고 있었던 올란도 "카차이토" 로페즈가 수술을 받던 도중 사망했고, 2012년 2월 11일에는 기타리스트인 마누엘 갈반이 80살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잠시 이 곳에 퍼커션으로 몸담았던 멤버인 미구엘 디아즈의 쌍둥이 딸들이 현재 Ibeyi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라카미 류는 아프로-큐반 재즈의 광팬으로, 이들의 공연을 보면서 ''' '저렇게 잘하지 않아도 될 텐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고 매혹적' '''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의 인디 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의 이름의 모티브...인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리더인 조까를로스는 정작 "그때 그런 밴드 몰랐었다" 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한국에서는 2015년 11월 19일 재개봉할 예정인데 포스터가 심의반려되는 사건이 있었다. 문제는 저 포스터의 담배라고(...)#결국 수입사에서 담배를 블러처리해서 재심의를 받은 듯
놀면 뭐하니? 유산슬 굿바이 콘서트에 참여했던 연주자들이 한국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불린다.
[1] 그 외에도 많지만 이 세 사람과, 기획자인 동시에 프로듀서였으며 기타리스트로서도 레코딩에 참가한 라이 쿠더(Ry Cooder), 어레인지 및 레코딩의 총지휘를 맡았던 후안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Juan de Marcos González),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이전 아프리카-쿠바 뮤지션 프로젝트부터 함께 한 엘리아데스 오초아(Eliades Ochoa)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핵심 멤버라 할수 있다.[2] 훗날 말리 뮤지션들과 쿠바 뮤지션들의 합동 프로젝트는 2010년 아프로큐비즘(Afrocubism)이란 이름으로 다시 진행되었고, 이후 발매된 이들의 앨범 역시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