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른도르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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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8월 25일 동프로이센의 조른도르프에서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이 맞붙은 전투. 오전 9시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참혹한 전투였으며 양측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2. 배경
1757년 12월 로스바흐 전투와 로이텐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게 협공당할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 겨울 동안 휴식을 취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1758년 봄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반 프로이센 동맹의 주동세력인 오스트리아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힌 뒤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전쟁에서 이탈하게 해서 프랑스와 러시아가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동력을 상실하기를 희망했다. 다만 1756년에는 보헤미아를 침공한데 반해, 이번 공세는 모라비아로 향했다. 1758년 5월,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모라비아의 수도 올로모우츠를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적을 가볍게 격파한 뒤 올로모우츠를 포위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콜린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오스트리아 구원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로스바흐와 로이텐에서 잇달아 대승을 거둔 것에 자신만만해져 있었기에 오히려 구원군이 와서 회전을 벌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로이텐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임한 로트링겐 공자 카를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에 오른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의도대로 따라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 콜린 전투의 영웅은 프로이센군과 정면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소규모 기습전을 벌여 적을 소모시키기로 했다. 이때문에 프로이센군은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물자가 부족해졌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보급물자 운송부대를 대규모로 편성해 단숨에 보급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 대규모 보급부대가 올로우모츠를 포위한 적에게 가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다운 백작은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에게 이를 저지할 임무를 맡겼다. 라우돈 남작은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격, 6월 30일 돔슈테트에서 3만 명의 프로이센 보급부대를 공격했다.(돔슈테트 전투)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프로이센군은 2천 명의 사상자와 1,450명의 포로를 남긴 채 패주했고[1] 오스트리아군은 보급물자 수송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다운 백작은 대규모 구원군을 올로모우츠로 파견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고 모라비아에서 철수했다.
얼마 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급보를 접했다. 지난 겨울에 철군했던 러시아군이 폴란드를 가로질러 동프로이센에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급기야 빌림 빌리모비치 페르모르가 이끄는 러시아군 43,000명의 선봉대가 8월에 베를린으로부터 약 10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출해 다운 원수 휘하의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려 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급히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군의 후방으로 접근했고 8월 22일에 만슈노브에서 추가 병력과 합세해 3만 6천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이때 쿠스트린을 공격하고 있던 페르모르는 코사크 부대로부터 프로이센군의 움직임을 보고받자 공성전을 포기하고 쿠스트린에서 10km 동남쪽으로 떨어진 조른도르프에 가서 유리한 위치를 장악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들을 섬멸하고자 조른도르프로 접근하면서 양측의 격전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대왕
- 참모장: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 병력: 38개 대대, 83개 중대, 11개 야포, 76개 중포, 36,000명
3.2. 러시아군
- 총사령관: 빌림 빌리모비치 페르모르
- 병력: 56대대, 50중대, 7개 코사크 기병대, 60개 야전포대, 146개 중포, 43,500명
4. 전투 경과
4.1. 프로이센군의 진격
8월 24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바르타 강과 오데르 강을 가로지르는 모든 다리를 파괴해 러시아군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이후 그는 러시아군을 조른도르프에서 몰아낸 후 이들을 바르타 강과 오데르 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몰아내서 항복을 강요하게 만들기로 작정했다. 당시 프로이센군은 코사크 기병대가 본국에 침입한 뒤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것에 매우 분노했고, 조국을 짓밟은 러시아군에게 복수하겠다는 욕망이 가득했다. 대왕은 노이담의 어느 제분소에서 숙면을 취한 뒤 8월 25일 자정에 일어나 조른도르프에 모인 러시아군을 향한 공세 준비를 개시했다. 대왕은 먼저 노이담의 관리들을 불러서 아군을 안내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런 후 새벽 3시에 정찰병들로부터 적군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말을 타고 진지를 돌아다니며 전군에 소집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새벽 3시 30분, 프로이센군 전체가 진격을 시작했다. 보병대는 노이담의 다리를 건너 미에텔에 진입했고, 기병대 대부분은 보병대 이전에 진영을 떠나 노이담에서 북쪽으로 6km 떨어진 케르스텐브뤼게 근처의 다리에서 미에텔을 지나 케르텐브뤼게의 다리에서 본군과 합류했다. 이 기병대는 전날밤 늦게 프로이센 진영에 도착하다가 거의 즉시 진격을 재개했기 때문에 사실상 휴식이 주어지지 않았다. 강을 건넌 후, 프로이센군은 포병대를 앞세워 바츠로우 방향으로 3열 대열을 갖추며 진격했다. 보병대는 1, 2열을 형성했고 기병대는 3열을 형성했다. 또한 선봉대는 전방에 멀찍이 출격해 지체르에서 후사르 기병대 일부와 맞붙어 쫓아냄으로서 본군의 진군로를 확보했다.
새벽 5시, 프로이센군이 숲지대를 벗어나 바츠로우의 북서쪽에 진입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잠시 군대를 정지시킨 후 정찰대를 파견해 주변 지역을 살펴보게 했다. 그러나 러시아 기병대가 이 정찰대가 러시아군 본대를 확인하는 걸 저지했기 떄문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군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고 단지 랑겐그룬드와 호프브루흐를 따라 배치되어 있다고 추정했다. 그는 일단 러시아군의 위치를 더욱 잘 관찰하기 위해 바츠로우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러시아 기병대의 훼방을 뿌리치며 바츠로우로 진군 1.5km를 진군했다가 윌커스도르프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때 클라인-케민 근처를 지나가던 러시아 전투용 마차들이 목격되었다. 이 전투용 마차들을 빼앗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진짜 목표인 러시아군 섬멸에 집중해야지 마차 따위에 신경쓸 여유는 없다며 병사들이 마차를 습격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4.2. 러시아군의 대처
8월 25일 아침, 페르모르 장군은 프로이센군이 바츠로우 방면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그는 적이 남쪽에서 공격해올 것을 확신하고 군대를 즉각 배치시켰다. 그는 조른도르프에서 쿼트센 쪽에 우익을 배치시켜서 우익의 측방이 자번그룬드 강 근처에 있게 했다. 한편 좌익은 랭겐그룬드의 고지를 점령했다. 이때 러시아군은 전선 전체를 축소시켰고, 특히 갈겐그룬드와 자베르그룬드 사이에 배치된 부대가 촘촘히 포진하게 되었다. 이는 프로이센군의 포병대의 포격 세례에 수많은 병사들이 몰살당할 수도 있는 지극히 위험한 배치였다. 한편 중앙은 스테인부쉬와 호프브루치 사이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러시아군 대열의 전체 길이는 3km, 깊이 800m의 큰 직사각형의 형태였고 남쪽과 남동쪽을 향했으며, 2개의 전선을 형성했다.
페르모르는 두 개의 전선 사이에 기병대를 집중 배치시켰다. 본래는 전선 후방에 배치되어야 했지만, 후방에는 습한 저지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모든 기병대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했다. 그 대신, 후사르 기병대와 코사크 기병대가 그곳에 배치되어 예비대 역할을 맡았다. 또한 러시아군은 300m 높이의 푸흐스버그 언덕에 포대를 설치하고 아군을 향해 진군할 적에게 포화를 퍼부을 준비를 갖췄다. 여기에 전선으로부터 얼마 안되는 거리에 예비 연대가 배치되었다. 이들은 1,2선의 군대로부터 분래된 별동대였다. 야전 포병은 보병 근처의 적당한 지점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러시아군의 배치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줄곧 써먹은 러시아군의 고유의 전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측면 공격 지향 전술에 익숙하지 않았고, 페르모르는 수비에 전념했을 뿐 공격 작전은 별도로 마련해두지 않았다.
4.3. 조른도르프에서 대치하다
러시아군이 병력 배치를 완료할 무렵, 프로이센군은 윌커즈도르프를 향해 행진을 제기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지체르와 스테인부쉬 사이에 배치된 러시아군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군 우익은 확인하지 못했다. 이윽고 프로이센군이 윌커즈도르프에 도착했을 때 코사크 기병대가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된 후사르 기병대와 함께 이들을 공격했다가 역공을 받기 전에 철수했다. 프로이센군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는 보고를 접한 페르모르 장군은 오전 7시 적이 조른도르프를 향해 진군하는 걸 막기 위해 적의 진군로 근방의 마을들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불길은 빠르게 번졌고, 남풍은 화재로 치솟은 짙은 연기를 러시아 우익을 향해 몰아갔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군에 조른도르프 방향으로 행진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러시아 경기병대가 교란하려 들자 프로이센 기병대가 출격해 이들을 쫓아냈다.
오전 8시 경, 전장에 도착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코사크 기병대가 이미 마을들에 불을 지른 것을 발견했다. 다만 불타는 집들의 연기가 러시아인들을 향해 몰아갔기 때문에 그들이 프로이센군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은 그에게 큰 이점이었다. 대왕은 언덕에 말을 타고 가서 비로소 러시아 우익을 관찰했다. 얼마 후 정찰병으로부터 추가 정보를 전달받은 대왕은 곧 적의 측면엔 깊은 늪이 많아서 그가 줄곧 사용해온 측면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는 그가 정면 돌격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단 지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대왕은 자번그룬드와 갈겐그룬드 사이에 배치된 러시아군을 몰아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으로부터 공격에 나선 아군을 엄호하기 위해 후방에 예비대를 편성했다. 이윽고 프로이센군이 조르도르프 남쪽에 배치를 완료하여 적과 대치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진격을 명령했다. 오전 9시경, 프로이센 포병대가 적을 향해 포격을 퍼부으면서 조른도르프 전투의 막이 올랐다.
4.4. 프로이센 보병대의 공격과 패주
오전 9시에 시작된 포격전은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러시아군은 능선 뒤에 교묘하게 배치된 프로이센 포병대를 거의 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몰려오는 짙은 연기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 포병대는 프로이센 포병대를 침묵시킬 수 없었으며, 반대로 프로이센 포병대는 최전방에 배치된 러시아 포병대에게 심한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 일부 폭탄들이 갈겐그룬드로 굴러들어와 그곳에 있던 수화물 마차에 불을 붙이면서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군 기병대에게 피해를 입히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두 시간 넘게 적의 포격을 견뎌냈다. 예비대는 첫번째 전선에 생긴 공백을 메꿨고 병사들은 숱한 동료들이 전투 한 번 못해보고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동요하지 않고 제 자리를 고수했다. 한편 러시아군의 중앙과 좌익은 그들이 마주보고 있는 프러시아 전지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훨씬 덜 고통받았다. 그리고 고원의 양쪽에 형성된 그들의 두 번째 선은 많은 손실을 입지 않았다.
오전 11시 직전, 2시간의 포격이 끝난 뒤 만테우펠과 카니츠 휘하의 프로이센 보병대가 포병대의 엄호하에 출격했다. 이와 동시에 프로이센군 우익이 능선에 몸을 숨긴 채 적을 향해 전진했다. 이윽고 만테우펠의 8개 대대가 포병선에 가까이 다가오자 최좌익 프로시아 포병대는 재빨리 푸흐스베르크 언덕 쪽으로 전진했다. 한편 좌익의 프로이센 기병대는 러시아군의 포격을 무릅쓰고 조르도르프 서쪽까지 진군했고 우익의 기병대 역시 출격해 우익 보병대의 측면을 보호했다. 이윽고 11시 15분, 양측의 보병대가 서로를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러시아군 일부는 명령도 없이 적을 향해 돌진해 총검을 휘둘렀다. 곧 만테우펠의 보병대는 적의 무지막지한 저항에 직면했고 얼마 안가 3분의 1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진격했지만, 더 많은 러시아인들이 역공을 가하자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
한편, 카니츠 휘하의 프로이센 보병대는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진군했다. 그는 아군의 양익이 멀리 진군하면서 본군과의 사이에서 큰 공백이 발생한 것을 눈치챘다. 그는 러시아군 중앙이 이 공백지에 치고 들어와 아군 양익을 포위섬멸하려 들 것을 우려해 이 공백을 메우기로 결정했다. 카니츠의 휘하 부대는 슈테인부쉬를 가로지르는 언덕을 통과하며 전진했지만, 그 과정에서 첫번째 대열이 상당히 무질서한 형태가 되었다. 이윽고 그는 프로이센군의 포격에 별 피해를 보지 않았던 러시아군 중앙을 강타했다. 그의 공세는 적의 무지막지한 십자포화에 직면했지만, 프로이센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을 향한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맹렬한 반격에 직면한 카니츠의 부대는 결국 큰 손실을 입고 진격이 중단되었다. 후방 진지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좌익에서 보병대를 차출해 중앙에서 고전 중인 아군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오전 11시 25분, 탄약이 떨어진 러시아군 보병들이 총검돌격을 가했으나 큰 사상자를 낸 뒤 후퇴했다. 이에 11시 35분 러시아군 2차 전선에 배치되었던 러시아군이 전선을 수호하기 위해 전진했다. 오전 11시 45분, 페르메르 장군은 가우레벤 여단의 3중대 기병대와 세르비아인 후사르 기병대를 만테우펠 보병대의 측면과 전방으로 파견해 적을 격멸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이들이 출격해 만테우펠의 전방과 측면을 강타했고 뒤이어 카니츠 보병대의 좌익과 측면 역시 러시아군의 역습에 직면했다. 이렇게 되자 카니츠 보병대와 만테우펠 보병대는 적의 압도적인 역습에 짓눌렸고, 결국 그들은 패주했다. 페르메르는 그의 우익 보병들에게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보병들이 붕괴되어 도망치는 것을 보자 즉시 좌익의 기병대와 예비대의 기병대를 출격시켜 적의 추격을 막게 했다. 또한 패주하는 병사들을 수습해 재집결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4.5. 프로이센 기병대의 공세
도주하는 적을 신나게 추격한 러시아군은 곧 혼란에 빠졌다. 러시아 장교들은 병사들을 재편성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단지 몇 개의 잘 조련된 대대 만이 재집결했다. 이러한 적의 혼란을 눈치챈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왕자는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향한 역습을 감행했다. 그때까지 프로이센군이 버리고 간 무기들을 수집하느라 정신이 없던 러시아 보병대는 적 기병대의 갑작스런 난입에 당황한 나머지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이에 페르메르 장군은 기병대를 파견해 이들을 막으려 했지만 무너진 보병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제대로 진군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은 일부 보병들이 소규모로 집결해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적 기병대를 향해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다가 총탄이 다 떨어지자, 그들은 총검돌격을 감행해 적 기병대와 육탄전을 벌였다.
이후 추가 병력이 속속 도착하면서 전투원들의 격전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짙은 먼지 구름과 뿌연 먼지가 동료와 적을 거의 분간할 수 없게 했고, 혼란 속에서 러시아 병사들이 서로를 총으로 쏘기까지 했다. 이 끔찍한 격전은 한동안 이어지다가 처음부터 수가 적었던 러시아 기병대가 전멸하고 고립된 보병대가 패주하기 시작하면서 프로이센군이 승기를 잡았다. 점점 더 많은 수의 탈주병들이 쿼트센을 향해 달아났고 프로이센 기병대가 그들을 바짝 뒤따랐다. 15분 만에 러시아군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갈겐그룬드까지 올라간 러시아 우익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고 갈겐그룬드를 간신히 빠져나가 중앙에 합류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의 탈주자들은 콰트겐 북쪽 숲으로 피신했고, 다른 이들은 자번그룬드를 건너 드루이츠 언덕으로 도주했으며, 일부는 러시아군의 후방에 있던 보급품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기병대는 이 혈전을 치루면서 매우 지쳤고 갈겐그룬드 강을 건너 러시아 중앙을 향한 공격을 개시할 수 없었다. 또한 페르모르 장군[2] 은 포병대와 함께 새 병력을 배치했고, 몇몇 부대는 갈겐그룬드 동쪽을 따라 집결해 우익의 측면을 보호하기 위한 전위대를 형성했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마침내 대열을 정비한 후 본군으로 귀환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이제 항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러시아군은 전력의 1/3이 무력화된 상황에서도 새로운 전열을 갖추고 전투를 이어나갈 의지를 보였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후 1시에 병력을 편성해 적과 회전을 벌이기로 했다.
4.6. 프로이센군의 재집결
오후 1시경, 프로이센군 우익은 러시아 좌익의 대포 사정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후 2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의 기병대와 기병 예비대가 조른도르프 서쪽에 집결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좌익에서는 만테우펠의 보병대 잔여 병력과 카니츠의 잔여 병력을 가까스로 집결시켰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앞서 엄청난 혈전을 치르며 막대한 손실을 낸 프로이센 좌익에게는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우익과 포병대, 그리고 기병대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문제는 갈겐그룬드를 따라 있는 강력한 러시아 진지에 대한 정면 공격은 아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할 게 분명하다는 점이었다. 이 떄문에 프리드리히는 함부로 공격하지 않고 포병대로 하여금 포격을 퍼부어 적의 전열을 흐트러놓게 했다. 또한 그는 알-플라텐 기병대와 플레텐베르크 기병대에게 우익의 기병대와 합류할 것을 지시했다. 그 후 프로이센 우익 보병대가 천천히 전진했고, 좌익의 보병대 역시 진군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모든 프로이센 보병대는 포병대의 엄호 아래 러시아 진지를 향해 진격했다.
4.7. 러시아 기병대의 공격
오후 3시, 러시아 정찰대가 적이 진격해오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사령부에 알렸다. 그러자 데미쿠 소장이 이끄는 러시아 기병대가 코사크 기병대와 함께 출격해 프로이센군 우익 측면으로 돌아가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3시 10분에 프로이센 우익 기병대가 이들과 교전을 벌여 큰 어려움 없이 격파했다. 일부 코사크들이 지체르로 피신하자, 프로이센 기병 일부가 이들을 추격했다. 이에 코사크들은 지체르에서 불을 질렀지만 이미 적에게 포위된 마을을 벗어날 수 없었고 전원이 죽거나 생포되었다. 이러한 기병전이 벌어지는 동안, 프로이센 우익 보병대는 러시아 전선을 향해 꾸준히 진격했다.
그러나 우익이 이럻듯 승승장구하는 와중에 프로이센 좌익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미 앞선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그들은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다가 적 기병대가 갑작스럽게 출몰하자 겁에 질러 달아났다. 장교들은 그들을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지만 윌커즈도르프 남쪽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집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알-플라텐 기병대와 플레텐베르크 기병대가 프로이센 좌익을 습격한 기병대를 격퇴해 아군의 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좌익이 제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서, 프로이센 우익은 이제 홀로 러시아군 전선과 맞서게 되었다.
4.8. 프로이센 기병대의 2차 공세와 보병대의 전선 돌파
한편, 자이틀리츠 장군은 아군의 상황이 좋지 않자 기병대가 매우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장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기병대를 둘러 나눠 적의 양 측면을 향해 진군했다. 오후 3시 30분, 자이틀리츠 기병대는 적 보병대와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말들이 매우 지쳤기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러시아 보병대가 끈질긴 저항을 벌이면서 결국 실패했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후방으로 후퇴해 재집결해 재차 공세를 가할 때가 오길 기다렸다. 이렇듯 기병대의 2차 공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러시아군은 이 기병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프로이센 우익 보병대의 공세를 제때에 막아내지 못했다. 이렇듯 적의 관심이 다른 데 집중하던 오후 4시경, 프로이센 우익 보병대는 완강히 방어하는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여 적의 전선을 흔들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끈질기게 저항했고, 기병대는 러시아 기병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했다.
오후 4시 30분, 프로이센 우익은 두번째이자 마지막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좌익 포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용감하게 밀어붙였다. 러시아군은 이에 대해 최선을 다해 맞섰지만 이제는 전선이 완전히 흐트러졌고 탄약이 모두 소진되어서 조직적인 저항을 벌이기 어려웠다. 결국 오후 6시경, 러시아군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호프부르흐로 후퇴했고 다른 일부는 콰트센으로 향했다. 러시아군은 가까스로 병력을 뒤로 물려 갈겐그룬드의 진지로 퇴각했다. 이후 자이틀리츠의 기병대는 갈겐그룬트로 향했고 보병대 역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지칠대로 지친 그들은 엄청난 탈진과 엄청난 전력 손실로 인해 더이상 효과적이면서도 일치된 군사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콰트센 근처 갈겐그룬드 강과 마을 동쪽에 있는 숲을 따라 자리를 잡았고 러시아군은 갈겐그룬드 강 뒤쪽에 진형을 갖추었다. 이렇게 전투는 오후 6시 직후에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4.9. 저녁까지 이어진 전투
프로이센군이 완전히 지쳐버렸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전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투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싸울 수 있는 소수의 프로이센 보병 대대(8~10개)를 이끌고 갈겐그룬드와 쿼트센 부근의 러시아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또한 그는 오후 동안 월커즈도르프 근처까지 패주했지만 지금은 부분적으로 집결한 좌익의 군대로 스테인부쉬와 조른도르프 사이의 러시아 우익을 공격하기로 했고, 스테인부쉬 북쪽 고지에 배치된 중포들이 이들을 지원하게 했다. 또한 그는 기병대를 스테인부쉬와 윌커즈도르프 사이에 집결시켜 코사크 기병대를 저지하게 했다. 이윽고 오후 7시경, 전투가 재개되었다. 프로이센군은 갈겐그룬드 동쪽 비탈에 있는 덤불 속에서 적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그들은 반대편 경사면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몇 번이나 공격을 재개해야 했다. 코사크 기병대는 이들의 측면을 공격할 임무를 맡았으나 버려진 마차를 보자마자 임무를 잊고 짐을 약탈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의 공격은 전체 전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프로이센 좌익은 러시아 포와 일부 러시아 기병대의 역습을 받자 일부 병력이 무너지고 다른 부대도 진군을 멈춰버렸다. 그리고 우익은 프란츠 폰 프레우예센이 지휘하는 보병대를 포함한 극히 일부 만이 갈겐그룬드 강을 건넜을 뿐이었고, 그나마도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에 의해 후퇴해야 했다. 오후 8시, 프로이센 보병대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겐그룬드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윽고 어둠이 완전히 깔리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더이상의 전투는 무리라는 걸 깨닫고 마침내 전투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군대를 윌커스도르프에서 쿼트센까지의 구역에 집결시켰다.
오후 9시, 프로이센군이 철수한 것이 확실시되자 러시아군은 각자의 자리로 이동했다. 페르모르 장군은 탈영병들과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그의 부대를 재편성했으며 전장에 버려진 총과 대포를 가능한 확보했다. 러시아군은 쿼트센의 작은 계곡 뒤에 진을 쳤고, 코사크 기병대는 다르미에첼, 쿼트센, 윌커스도르프의 마을을 불태웠다. 이렇게 해서 7년 전쟁 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로 손꼽히는 조른도르프 전투가 막을 내렸다. 전투 후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러시아인을 죽이는 것은 쉬우나 그들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은 어렵다.
5. 결과
조른도르프 전투는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 양자에게 참혹한 피해를 안겼다.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18,500명에 달했고 2,8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특히 러시아의 정찰 부대의 80%가 전사했다. 프로이센군은 12,800명을 상실해 전체 전력의 1/3 이상을 손실했다. 러시아군은 다음날까지 전장에 머물러 있었지만 페르모르가 먼저 란츠베르크(Landsberg)로 퇴각했다. 러시아군의 퇴각은 러시아군이 그들의 동맹자인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는 것이 실패했음을 의미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를 근거로 자신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러시아 역시 프로이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기 때문에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 2세는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숙련병 상당수를 상실해 이후 전쟁을 진행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