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량진 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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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44년(중종 39년) 4월, 대마도의 왜구들이 조선의 사량진[1] 을 약탈한 사건이다. 사량왜변(蛇梁倭變)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상세
조선 조정은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부산포(釜山浦) 등의 삼포를 완전히 폐지하였다가 이후 대마도주와 왜인들 그리고 대마도주의 요청을 받은 무로마치 막부의 지속적인 간청 등으로 인해 1512년에 임신약조(壬申約條)를 맺고 교역은 재개하되 왜인들의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는 쪽으로 일본측과 서로 타협을 보게된다.
하지만 이 '''임신약조는 대마도주와 왜인들 입장에서는 교역량의 축소로 굉장히 손해를 많이보는 조약'''이었는데 이는 이후 세견선 파견수만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로 임신조약 이후 세견선의 파견 횟수를 그 이전과 비교해 보면 '''삼포왜란 이전의 210척에서 임신약조 이후 60척으로 세견선의 척수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왜인들에 대한 조선의 통제가 엄격해지고 교역규모 또한 크게 축소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속에서 대마도주는 세견선을 다시금 예전 수준으로 늘려줄 것을 계속 요청하였으나 조선정부는 5척을 증가시켜 30척으로 해주었을 뿐 나머지 요구는 임신약조에 의거해 일절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의 이런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왜인들과의 충돌은 그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고 그렇게 왜인의 행패가 여전히 계속되던 중, 1544년 왜선 20여 척이 현재의 경상남도 통영시 원량면(遠梁面) 진리(鎭里)에 있던 '사량진'에 침입하여 사람과 말을 약탈해 가는 무력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단, 이 사량진 왜변은 이전의 삼포왜란과는 달리 조직적인 성격이 적은 왜구의 소규모 침입이었던 탓에 피해규모는 꽤나 적은 편이었다.
3. 결과(결말)
안 그래도 조선 조정에서는 거듭되는 왜인들의 조약위반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때 마침 터진 이 '사량진 왜변'을 계기로 기다렸다는듯이 임신조약을 완전히 폐기하고는 왜인의 조선 왕래를 아예 엄금하였다.[2]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와 소이전(小貳殿)의 거듭된 통교재개 요청과 대마도주의 간청에 의해 3년 후인 명종 2년(1547년)에 정미약조(丁未約條)를 체결하고는 교역 재개를 다시금 허락하였다.
이 정미약조의 체결로 가까스로 교역은 재개되었으나 이전과 같은 평화로운 통교관계는 당연히도 더 어려워졌고 사량진 왜변 이후에도 명종 말년까지 대소 30여 회의 왜구들의 침략이 계속 일어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1555년(명종 10년) 왜구들이 왜선 70여 척을 동원하여 전라남도의 변장들을 살해하고 10개의 진을 함락시켰던 을묘왜변으로서 이 을묘왜변 이후 조선에서는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여 대일경계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