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왜란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같이보기


1. 개요


三浦倭亂
1510년(중종 5년) '''부산포, 염포, 제포 등 삼포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발생한 대규모 폭동'''. 흔히 임진왜란이나 당시 잦았던 왜구의 침입 등으로 인해 이 사건 역시 대중적으로는 단순히 '왜구들의 난'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좀 더 복잡한, 상호 간의 갈등과 증오가 맞물려 폭발한 사건이었다.

2. 배경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의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조선 건국 당시 왜구들의 난동은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심지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까지 골치를 썩이게 하는 요소였다. 왜구들은 일본 정규군이 아닌, 해적 비스무리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일본에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일본 전국시대에도 상당히 많아서 일부 다이묘들은 왜구를 매수해서 전력에 보강하기도 했다. 조선 초까지도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자,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은 1419년(세종 1년)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공격할 것을 명한다.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는 강경책으로 대마도와 왜구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한편 부산포, 염포(현 울산 광역시 북구 염포동 지역), 제포(또는 내이포,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등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두어 일본인들이 무역을 하거나 상업 활동을 하도록 하는 유화책도 병행하였고, 그 결과 왜구들의 수는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왜구의 준동 때문에 조선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인식은 '해적 집단'이었고, 실제로도 당시 조선을 찾는 일본인들 중에는 행실이 불량하거나 밀수를 위해 들어오는 범죄자들이 섞여 있었다. 즉, 조선 영내에 일본인들의 거주 구역이 들어서게 되면 갈등이 심화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초기에는 일본인들의 숫자를 약 60명 정도로 제한했으나, 점차 무역이 성행하고 교류가 늘면서 자연히 왜관의 일본인 수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세종 말년에는 2000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교린 정책의 하나로 이들에게 면세 등 다양한 혜택을 주었다. 하지만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의 분위기는 일변했고,[1] 이들 왜관에게도 강경책을 쓰기 시작하며 혜택들을 하나씩 줄여 나가게 되었다. 당연히 왜관의 일본인들은 반발하며 부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더불어 이런 국가적 분위기가 일본인들을 압박하고 엄하게 다루는 방침으로 흘러가자, 원래부터 일본인을 멸시하던 사회적 분위기와 합쳐져 다양한 차별과 학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가장 악명 높았던 사례는 부산포 첨사였던 이우증의 행각인데, 일본인을 붙잡아 머리카락에 노끈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그 노끈을 활로 쏘아 떨어뜨리며 공포에 떠는 일본인을 보고 즐거워하는 식의 놀이를 즐겼다. 문제는 이것을 본 주위의 조선 군인들이 말리기는 커녕 칭찬하고 좋아하며 따라하여 전 군영에 번질 수준이었다는 것. 결국 이는 일본인들이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쓰시마 도주의 지원 하에 폭동이 일어나게 된다.

3. 전개


일본인들은 '''약 4000명 ~ 5000명''' 정도의 사람들을 모아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는데 각지에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웠다. 이러한 상황에 부산포, 제포 등이 함락당하였고, 부산포 첨사 이우증 등이 살해당하였다. 동래성[2]과 웅천이 공격당하는 등 피해도 컸다. 상황이 악화되자 조정에서는 급히 군사를 모아서 폭동을 진압했는데, 중앙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경상도 내 군사들이 먼저 진압해버렸다. 하지만 조선은 272명의 병사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갔고, 재산 피해는 이보다 훨씬 심하였다.[3] 일본인들도 300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이때도 앞선 이우증과 같이 악명을 떨친 사람으로 소기파라는 군인이 있었는데, 당시 진압된 일본인들의 시체 사이를 뒤지다가 살아 있는 자가 있으면 칼로 배를 갈라 피를 얼굴과 손 등에 바르고 술을 꺼내 마시면서 그 시체의 내장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안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는 당대 조선인들도 끔찍하게 여겨서,[4] 소기파는 소야차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4. 결과


폭동을 지원한 쓰시마 도주 소 요시모리는 폭동이 진압되어 조선 조정에서 왜관을 폐쇄하자 곧바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여 폭동을 주도한 주모자의 머리를 바치는 등 여러가지로 교역 재개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5] 결국 대마도주와 왜인들 그리고 대마도주의 요청을 받은 무로마치 막부의 지속적인 간청 등으로 인해 1512년에 조선 조정에서 '임신약조'를 맺고 교역을 다시 재개해주게 된다. 해당 조약의 내용은 삼포 거주 불허, 세사미두 및 세견선을 반감,[6] 삼포 중 제포(薺浦)만 개방, 제포 외 왜인은 왜구로 간주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임신약조'로 인한 교역량 축소에 불만을 품은 대마도주와 왜구들에 의해서 또 다시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게 된다.

5. 같이보기



[1] 사실 이전에도 고초도를 벗어난 어업 행위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 하지 말라는 해적질까지 하며 공마선 약탈, 살인 등등 별짓을 다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참다참다 폭발한 셈이기도 하다.[2] 이 일이 있고 82년 뒤 이곳에서 동래성 전투가 벌어진다.[3] 민가 796호가 파괴되었다.[4] 당연하지만 식인은 어딜가나 혐오대상이다.[5] 사실 애초부터 쓰시마 섬은 조선과의 확전을 원하지 않았다.[6] 계해약조의 200석 50척을 100석 25척으로, 차후 임진왜란 후 기유약조 시에 100석 20척으로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