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풋다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필두인 인물. 팔리어로는 사리풋다, 산스크리트로는 '샤리푸트라', 한역으로는 '사리불(舍利佛)' 혹은 '사리자(舍利子)'라고 한다. 금강경과 함께 널리 알려진 반야심경은 사리자 즉 사리풋다를 향해 석가모니 부처가 설법하는 내용이다.“나는 지금 가지가 없는 큰 나무와 같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열반에 든 것은 큰 나무에 가지가 잘려나간 것 같다. 대중들을 살펴보니 마치 텅 빈 것 같구나. 그들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있었으면 이렇게 쓸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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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일아함 18권 사의단품(四意斷品) 제9경
마가다 왕국 출신의 브라만 가문의 후예로 우파팃사 마을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친구 목갈라나(목건련)와 함께 산자야라는 수행자의 교단에 출가했는데, 그는 '진리는 확정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을 주창하던 육사외도였다. 사리풋다는 이러한 가르침에 "그러면 '확정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떻게 확답할 수 있는가?" 하며 번민하던 중에 석가모니를 만났다.
사리풋다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감복하여 친구 목갈라나, 자신들을 따르는 수행자 250여 명을 이끌고 불문에 귀의했고, 석가모니도 그들을 특별히 아껴 사리풋다를 자신의 오른쪽에, 목갈라나를 왼쪽에 앉혀 그들을 자신의 수제자임을 분명히 하였다.[1] 사리풋다도 석가모니와 그 교단에 헌신하여, 훗날 데바닷타[2] 가 일부 비구들을 이끌고 교단을 이탈하려 하자 목갈라나와 함께 나서서 비구들을 조리있게 설득하여 돌아오게 하는 등 활약하였다.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제일'이라고 불렸다. 성품이 온화하고 자비로워서 주로 대중들을 교화하는 일을 맡았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깨달음을 가장 잘 이해하여 다른 비구들은 그에 비하면 지혜가 16분의 1도 미치지 못한다고도 하였고, 간혹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설법한 일도 있다. 또한 외법(불교 외의 교단)에도 밝아 위의 데바닷타의 얘기처럼 이들 교리의 헛점을 논파하는 데에도 능했고, 한편으로는 방대한 지식을 살려서 불교 교리를 대중이 쉽게 이해하게끔 정리하는 데에 일조하여 오늘날 대승 불교의 기초를 마련했다고도 말한다. 대승 쪽 경전에서 자주 나오는 '사리불', '사리자'가 이 사리풋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목갈라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열반에 들었는데, 정확하게 시기가 언급된 것은 아니나,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에 경전 편찬을 당시 두 사람이 아닌 3인자 위치였던 마하카사파(가섭)가 주도했으므로 석가모니보다 먼저 죽은 것은 확실하다. 그들이 열반한 후에 석가모니는 "사리풋다와 목갈라나가 보이지 않는 모임은 어쩐지 텅 빈 것만 같구나."라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사리풋다가 태어나고 입적한 날란다 지방의 사원에는 사리풋다를 기리는 기념탑이 있다. 나중에 여기에 세계 최초이자 최고의 불교 대학이 설립되었고 한때는 불교학의 중심지였다.
자이나교의 경전 <이시바샤임>에는 '붓다 아라핫트 선인인 사티풋타의 가르침'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불교의 대표자를 사리풋다로 본 것이다. 초기 불교 승단에서 사리풋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 이들보다 먼저 들어온 비구도 많았기 때문에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석가모니는 둘의 전생 이야기까지 하면서 설득했다.[2] 여담으로 사리풋다는 한때 '데바닷타는 신통과 위력이 뛰어난 비구다'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 물론 데바닷타가 석가모니의 교단을 떠나 자기 교단을 세우려 들면서 교단의 분열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