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 불교
1. 개요
대승이란 부처의 가르침을 비유적으로 탈 것(yana)으로 나타내어 자기자신만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치지 않고 많은 중생의 구제를 목적으로 한다고 '스스로' 주장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이전의 부파 불교(또는 그 하위 분류인 상좌부 불교)를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는 작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여 소승(小乘, Hinayana) 불교라 불렀는데 이런 멸칭적인 성격 때문에 1950년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에서 소승 불교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한국사를 배울 때 반드시 나오는 교종/선종도 전부 대승불교에 속한다.
대승불교의 경전은 《금강경》, 《반야경》, 《반야심경》, 《묘법연화경》, 《화엄경》, 《유마경》, 《아미타경》등이 있다. 이 경전들은 대승불교의 경전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다. 대승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최소한 위에 언급한 경전들은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2. 역사
2.1. 형성
초기 대승불교는 부파 시대의 불교가 고타마 붓다 당시의 초기 불교의 활동성·순수성·일반성을 상실하고 아비달마라고 하는 고정적·번쇄적·전문적인 훈고해석에 빠져버려 '''중생제도(衆生濟度)라는 불교 본래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 것을 그 본래의 자세로 되돌리기 위해서 일으킨, 말하자면 불교 부흥 운동이라고 한다.''' 물론 대승불교만 하는 주장이지 역사적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초기불교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에서는 힌두교와 융합한 대승불교를 타락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승비불설 참고.
대승불교 운동의 발생과 그 추진역(推進役)에 관해서는 사실 아직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기존에는 부파 불교 중 대승과 교리가 유사한 대중부 불교에서 대승불교가 기원했다고 보거나(대중부 기원설), 대략 서력 기원전 1세기경부터 재가(在家)를 중심으로 한 혹은 불탑(佛塔)을 수호하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재가불탑 기원설[1] ) 이루어졌으며 그 지역도 남인도에 원형(原型)이 생겨서 북인도에서 확립되었다고 보았다. 대승불교는 수행을 통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말하는데 이러한 실천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등 경전도 대승불교가 나타난 이후에 작성되었다고 학자들은 추측했다.
그러나 폴 헤리슨*이나 그레고리 쇼펜*, 사사키 시즈카(佐佐木閑)*, 안성두* 등을 중심으로 나오는 신 학설에서는 여러 고고학적/역사적 자료들까지 근거로 하면서 기원후 4세기까지[2] 대승/부파간 구분이 없고, 대중부 외에도 설일체유부, 법장부 등 여러 부파와 부파의 아가마와 논서에서 대승 사상과 관련된 교리들과 더불어 대승 운동이 있었다는 사료들이 많다는 점, 초기 대승문헌에서 아란야에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은둔 수행을 하는 출가자들이 중심이 되는 점, 고고학/문헌학적으로 성립연대가 기원전으로 올라가는 대승경전 유물들, 특히 대승불교의 근간인 반야사상과 관련해 기원전으로 올라가는 반야경 유물의 발견과 반야사상 관련 문헌의 문헌학적 분석 등을 통해 반야사상을 비롯한 대승불교의 근간사상의 연대가 소급되었다는 점[3] 등을 근거로 한 부파불교 기원설, 아란야 은둔 수행승 기원설, 법사[4] 기원설, 종교적인 선정 중 종교적 체험에 기원했다는 설, 경권(경전 두루말이) 신앙설 등 새로운 학설들을 내놓았다.
물론 가라시마 세이시(辛嶋静志) 교수처럼 기존의 대승불교 대중부 유래설에 대한 재검토와 보완을 언급하면서[5] 대중부 기원설에도 근거가 있음을 주장하는 학자와 학설들도 많으며, 현재로선 재가불탑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본토인 일본에서조차 사사키 시즈카(佐佐木閑) 교수 이후로는 사라졌다. 보살가나설은 설 자체의 근거부족과 그레고리 쇼펜, 나티에, 사사키 시즈카 등 국내외 학자들의 비판, 특히 이 설 자체가 재가불교 교단 운동이 전통적인 출가불교 교단을 압도하는 일본불교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측면이 강함이 밝혀진 이후 영향은 남았을자언정 설 자체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아직도 종종 통용된다.
물론 가라시마 세이시처럼 기존의 대승불교 대중부 유래설에 대한 재검토와 보완을 언급하면서[6] 대중부 기원설에도 근거가 있음을 주장하는 학자와 학설들도 많다. 현재로선 재가불탑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본토인 일본에서조차 사사키 시즈카 이후로는 사라졌다. 보살가나설은 설 자체에 근거가 부족하여 그레고리 쇼펜, 나티에, 사사키 시즈카 등 국내외 학자들이 비판했다. 특히 이 설 자체가 재가불교 교단 운동이 전통적인 출가불교 교단을 압도하는 일본불교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측면이 강함이 밝혀진 이후, 영향은 남아있을자언정 설 자체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아직도 종종 통용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존 인도 사상계에 존재하던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브라만교 쪽 전통사상이나 자이나교 사상,[7] 당시 인도에 유입되던 조로아스터교 등 이란계 외부 종교들의 영향도 받았다. 이는 후대에 밀교로도 이어지는데, 이런 영향관계는 국내 학술논문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일 정도로(참조링크) 이미 국제적으로도 정설이다.
이러한 대승불교 사상은 2세기 사람 용수(나가르주나)가 본격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중관파의 시조인 나가르주나는 공 사상의 개념을 체계화하는 등 대승불교의 기본 틀을 닦았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그를 계승하는 제자들과 바수반두(세친)[8] 등 대승 논사들이 등장하면서 대승불교, 더 나아가 후대의 밀교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이 때문에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은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차이점만 부각하여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용수교'라고 하거나, 부처가 아닌 조사의 가르침만을 따르는 '조사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승불교 역시 석가모니의 사상에 기초하는 데다가 현 상좌부 불교 역시 석가모니 당대 오리지날이 아니며, 동남아 민간신앙부터 대승불교까지 다양한 사상과 교류하며 변해왔다.[9]
- 참조 문헌: 스에키 후미히코, 사이토 아키라 등 저, 안성두 역, <시리즈 대승불교>-대승불교의 아시아/대승불교의 탄생
2.2. 전파
현재까지 연구결과에 의하면 부파 불교가 있던 2세기 중엽, 쿠샨 제국 카니슈카 대왕이 4차 결집을 열어 경전을 모으고(이떄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등장함) 논사들이 부파 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했다. 이즈음 남인도 등에 있던 대중부 계열에서 초기 대승불경이 성립되어 인도 간다라 지방에 전해졌고, 그후 대승불교가 인도 밖으로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다. 대승불교는 이 결집을 '4차결집'이라고 하나 상좌부 불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 시대까지도 인도와 간다라 지방에서 설일체유부 등 부파 불교의 여러 부파들이 같이 공존했다. 대승불교와 부파 불교를 칼로 자르듯 구분하기는 어려웠고 혼합 교단에서 대승화가 진행된 듯하다.[10]
중국, 한국, 일본 등으로 전래되었으므로 '북전불교', '북방불교'라고도 부르지만, 이는 남방에 대승불교가 절멸한 현재의 상황만 반영한 표현이다. 과거에는 동남아시아에서도 대승불교가 주류였다. 대표적으로 대승불교가 성행한 곳이 스리위자야이다. 크메르 제국 역시 힌두교와 더불어 대승불교를 받아들였는데, 대승불교를 믿는 군주로는 수르야와르만 1세, 자야와르만 7세, 인드라와르만 2세가 있다. 이후로도 불교도 황제와 힌두교도 황제가 번갈아 등장하였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에선 각각 상좌부 불교, 이슬람교가 자리를 잡으면서 현재 대승불교가 주류인 동남아시아 국가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뿐이다. 몽골 문화권은 티베트 불교이다.
3. 부파 불교와의 비교
- 대승불경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독송한다.
- 석가모니의 전생만을 뜻하던 '보살'이라는 개념이 확장되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을 미루거나 포기한 성인'으로 제일 중요한 반열에 올랐다. 반대로 기존 상좌부 불교의 최종 목표이던 나한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11]
- 중생 제를 목표로 한다.
- 재가신자가 비구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 믿음이 중요하다.
- 득과 사상이 발전하여 믿음만 있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정토종이 등장한다.
- 복잡한 경전 공부보다 깨우침 자체를 중시하여 누구나 깨달음만으로 부처가 된다는 선종이 등장했다.
- 초기 불교의 호신주 개념이 발달하는 한편 힌두교의 의식들이 도입되어 다양한 진언, 다라니와 이와 관련된 비밀 의식/수행을 중시하는 밀교가 등장했다.
4. 관련 문서
[1] 일명 보살가나 기원설[2] 이마저도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쇼펜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5~6세기부터다.[3] 한 예로, 반야부 경전 중 금강경의 핵심 이론인 공 사상은 아함경에도 등장한다*.[4] 경전을 암송하고 재가자들에게 포교하던 승려들을 말한다.[5] 사실 이 설은 보살가나설 등장 이전에 나온 설이었으나 나온 당시가 1903년이다보니 시기상 연구 부족으로 근거가 보살가나설보다도 부족해 밀렸다가 2000년대에 들어 추가적인 사료의 발굴과 연구로 증보개정되면서 점차 다시 힘을 얻는 중이다.[6] 사실 이 설은 보살가나설 등장 이전에 나온 설이었으나 나온 당시가 1903년이다보니 연구가 부족하여 근거가 보살가나설보다도 부족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고 연구가 진행되면서 점차 힘을 얻었다.[7] 대승불교에서 육식 금지나 힌두교적 요소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8] 상좌부에서 대승을 받아들인 인물로, 한때 동명이인설도 있었으나 외국 학계에선 설일체유부 문헌에 그를 '대승으로 변절한 낙오자'라고 비판하는 기록이 있어 부정한다.[9] 국내에서 상좌부 불교가 초기불교가 아니라는 학술적으로 명백히 증명된 이야기를 강조하는 인물 중 영향력 있는 사람인 승려 마성摩聖(팔리문헌연구소 소장이자 불교학 박사학위자)은 상좌불교 전공자이자 상좌불교 우월론자이다. 그런데 마성은 극단적인 상좌불교 추종자들과 상좌불교 우월주의 반대파 양쪽 모두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10] 한지연, "서역에서 소승교단과 대승교단은 대립했는가", 2014, 제3회 한-중-일 공동 학술대회: 동아시아 불교에 있어서의 대립‧논쟁과 그 의의[11] 신비주의 요소와 결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부처 = 아라한이던 개념이 대승에 와서는 부처 > 아라한이 됐다. 결국 아라한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다고 믿기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석가모니불을 뛰어넘은 비로자나불과 여러 보살들이 불교 신화로 흘러들어온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