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안(동진)
謝安
320년 ~ 385년
동진(東晉)의 명재상. 자는 안석(安石).
하남 진군 출신으로 환온의 찬탈을 막고 친족들을 보내 비수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동진의 명운을 몇십년 더 늘리고 나라를 안정시킨 명재상이었다. 당대의 명필 왕희지와 교류하면서 청담과 풍류에 열중하다가 나이 40에서야 환온의 사마로 출사했는데 결국 환온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환온은 진간문제가 죽고 즉위한 진효무제를 폐하고 황제가 될 야심에 차 있었다. 사안은 왕담지 등과 끝까지 환온의 계략을 막아냈으며 사안의 초연한 태도에 감히 환온도 그를 해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사안이 환온에게 효무제의 섭정이 되어 달라며 보낸 편지가 재미있는데 "대사마(大司馬)께서 제갈무후(諸葛武侯)가 되어 주십시오" 라고 했다한다. 그러니까 뻘짓 그만하고 유비의 탁고를 받아 어린 황제 유선을 끝까지 충심을 다해 보필한 제갈량처럼 탁고대신이 되어서 지금의 어린 황제를 끝까지 보필하는 그런 신하가 되라는 말. 환온이 촉으로 들어갔을때 자기가 제갈량과 비교할 수 있다고 자뭇 자긍했는데 백성들이 "여태껏 그분 이래로 그만한 훌륭한 분을 다시는 본적이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는걸 생각하면 좀 웃긴 장면이다(...). 어쨌거나 이런 초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열심히 계략을 짜내 환온의 찬탈을 막았고, 결국 환온 사후 상서복야가 되어 동진의 정권을 잡았다.
비수대전 때는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이 되어 동생 사석, 조카 사현과 함께 작전을 지휘했는데,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 사안은 승전보가 올 무렵 백만 대군을 맞아 불안해하는 조정과 병졸들을 안심시키려고 지휘 천막 안에서 태연히 바둑을 뒀다. 황제가 보낸 사신이 전황은 어떤지 묻자 역시 바둑이나 한 판 두자며 사신을 바둑판에 앉혔다. 한참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승전 보고서가 도착하자 한 번 눈으로 훑어보고 조용히 한쪽으로 치우고는 다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사신이 보고서에 뭐라고 써있었냐 묻자 너무도 담담하게 "우리 애송이들이 적을 물리쳤다는구려."라고만 말했다. 당시 동진군의 총사령관인 '사현'은 사안의 조카였고 그 밖에도 사안의 동생, 아들 등이 참전해서 이들을 애송이라 부른 것이다. 그래도 기쁨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 해서 바둑돌 쥔 손이 덜덜 떨렸는데, 이를 본 손님이 "나쁜 수로군요."라고 지적하자 사안은 "이 정도에 동요하다니 이 노인이 주책이군요."라며 허허 웃었다고. 손님이 돌아가고 나서야 문턱에 나막신을 부딪혀 굽이 박살나는 것도 모를 만큼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태보에 올랐고 비수대전의 기세를 몰아 동진군이 북진하자 강력하게 북벌을 주장했지만 당시 황족인 사마도자(司馬道子)[1] 의 견제를 받아서 낙향하게 된다. 사마도자는 간문제의 아들이자 효무제의 동생이었는데 사안의 권력이 커져서 황제를 위협하는 권신이 다시 나타날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기본적으로 사안은 사람됨이 소탈하고 초연한 편이여서 이렇게 권력을 놓고도 딱히 뭔가를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사안 이후 그의 집안 양하 사씨는 공신 일족인 낭야 왕씨[2] 와 동격으로 대우 받았다고 한다. 사후 태부(太傅)와 여릉군공(廬陵郡公)의 작위가 추증됐다.
왕희지와 교류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의 명재상이면서 뛰어난 문화인이자 풍류인으로 평소 사람됨됨이가 소탈해 백성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았다. 재상을 지내면서도 짬짬이 기녀(技女)를 데리고 동산(東山)을 노닐며 지은 시부가 즉시 온 장안에 유행될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