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대전

 


'''비수대전
淝水之戰'''

'''시기'''
383년 11월
'''장소'''
중국 안후이 성(安徽省), 화이난화이허 강(淮河) 지류
'''원인'''
부견의 천하통일을 위한 남정(南征).
'''교전국'''
전진(前秦)
동진(東晉)
'''지휘관'''
'''부견'''
부융†
주서
장천석
'''사현'''
사염
환이
'''병력'''
약 1,000,000 명
약 80,000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1]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동진의 대승, 전진의 분열.
'''영향'''
'''오호십육국시대 존속'''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말
5.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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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동진 vs. 전진전쟁.
[image]

'''하늘이 부견을 버렸도다(蓋天棄秦也).'''[2]

압도적인 병력 우위를 가지고도 통솔 미스와 작전 설명 누락이 부른 참담한 패배, 통일을 눈앞에 두고 이 싸움 한 번에 말아먹고 무너진 전진, 기적 같은 승리를 얻어내고도 더욱 철저하게 개망나니 짓을 해서 같이 망해버린 동진 등. 생각보다 많은 교훈을 주는 몹시 유익한 전쟁이다. '''제3자에게는'''.
승자없는 싸움의 예시 중 하나다.
전쟁 장소인 비수(淝水)는 "비"란 이름을 가진 강[3]이란 뜻이다. 삼국 시대 오나라위나라가 그토록 싸웠던 합비[4]원술이 한때 참칭했던 수춘 땅과 멀지 않은 곳이다.

2. 배경


전진황제였던 부견(337~385)은 위진남북조 당시 진짜로 중국을 통일해 위진남북조를 종식시킨 수문제 양견 이전 천하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사람으로, 자신은 저족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차별을 두지 않았음은 물론 명재상 왕맹을 기용해 성공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룩, 화북과 서역을 모조리 평정하여 실질적으로 북조를 몽땅 정리했다. 게다가 동진이 점령했던 회하, 양자강 일대, 사천 지방[5]도 이미 점령한 상황이어서 이제 남아있는 거라곤 강남의 동진 하나뿐이었다.
부견은 중원 재통일을 위해 남아도는 국력을 총동원해서 대군을 일으키려 했지만 말 그대로 부하도, 아들도, 동생도, 아내도, 엄마도, 주요 신하들도, 심지어 부견이 존경하던 스님 도안도 다 반대했다. 바로 그 왕맹도 죽으면서 "우리 나라에 있는 한족은 아직 동진을 그리워하고 있고 그 동진은 현재 위아래가 일치단결 되어있으니 괜히 집적대지 말고 선비족 출신으로 계속 폐하께 알랑방귀나 뀌는 모용수랑 요장부터 신경 쓰시고 기회 되면 제거해버리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승려 도안이 동진과의 전쟁을 반대하자 부견이 한 말이 있다. "이 원정은 영토확장과 인구탈취의 목적이 아니다. (중략) 영가의 난 이래, 강남에 떠돌고 있는 사대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그들을 어려움으로부터 구하려 인재를 등용하기 위함이었고, 무력을 휘두를 생각은 없다." 이 대화에서 부견이 이상적인 통치를 추구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존재 기간 내내 황제가 귀족들 눈치나 보며 한 순간도 막장이 아닌 적이 없었던 동진의 상황을 생각하면[6] 많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일단 전진에 남아있는 한족들이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걸 더 싫어했다는 의미로 생각하자. 그리고 급격한 통일 작업 덕분에 전진 내부에 있는 이민족들이 완전히 동화된 상태도 아니어서 수틀리면 언제든 다시 분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부견은 왕맹이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은 왕맹의 유언을 잘 지켰다. 하지만 부견은 결국 최악의 패배를 낳고 말 비수대전을 감행하고 만다. 이는 부견이라는 인물 자체가 순수한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화북 지역의 통일을 이룬 다음 남쪽까지 아우르는 걸 꿈꾼 것은 자신 스스로를 선대의 진시황이나 한고제처럼 '통일 중화 제국의 황제'라는 연장선상에 놓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저족의 리더가 아니라 한족과 이민족을 아우르는 중국의 황제가 되고 싶었기에 한족과 이민족 가릴 것 없이 인재를 기용했으며, 한족의 통치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내부 통일체제 구축이라는 선결과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진을 강행했던 것이다.

3. 전개


부견이 왕맹 사후 7년 갑자기 전쟁을 하려 들자 비서감 주융이 찬성했다. 상서좌복야 권익, 태자좌위솔 석월, 양평공 부융, 태자 부굉, 승려 도안, 장부인, 중산공 부선 등 주위에서 죄다 들고 일어나 반대했는데도 부견은 뭐에 씌였는지 "할래할래~ 전쟁할래애~!!" 하면서 주변에 떼를 쓰더니 위에 언급한 관군장군 겸 하남윤 모용수가 "그럼 하죠."라고 맞장구 좀 쳐주자마자 '''선봉만 25만에 자신이 이끄는 군대까지 모두 87만, 여기에 기타 병력까지 합쳐 100만이 넘는 대군'''을 구성해 동진 침략을 감행했다.[7] 물론 그 이전과 이후에도 100만 대군이라는 묘사 자체는 많이 등장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과장이 많이 섞여 들어갔거나 단순히 많은 수의 군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백만 대군이라는 용어가 쓰였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비수대전에 동원된 전진의 군사는 과장이 아닌 병력 편제 자체가 100만이라는 숫자를 찍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8] 인류사에서 비수대전의 전진군과 수양제고구려 원정 당시 수나라군을[9] 빼면 그로부터 '''천 년이 넘어''' 제1차 세계 대전 때가 되어서야 백만대군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실로 놀라운 수치.
이렇게 된 이유는 부견이 자기 생전에 중국 통일을 한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통일 작업은 순탄하게 이루어졌고, 남은 국가는 동진뿐인지라 조금만 더 하면 목표 달성이기는 했다. 물론 자기 발 밑이 아직 불안정하다는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는 무시되기 일쑤. [10]아마 자기가 '''덕을 베풀어서 사람들이 감복'''했으므로 끝이라 보고, 난세에는 조금만 틈을 보이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무시한 모양[11]. 실제로 부견이 전사한 후에도 일족이 계속 부견의 의지를 받들어 저항했으며, 나중에 배반하는 모용수나 요장 같은 이들도 양심에 찔렸는지 패전 후에도 즉시 부견의 뒤통수를 치지는 않았다. 왕맹의 유언을 7년 동안 잘 지켜놓고 갑자기 이를 어겨가며 침공을 강행한 것도, 7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천하 통일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북쪽에서 부견이 질량낙하급 인해전술을 시전하니 동진에서도 막긴 해야겠는데, 동진은 이미 문벌귀족의 띵가띵가로 말미암아 국력이 막장으로 치달아있었고, 그나마 동원 가능한 병력을 닥닥 긁어모아보니 8만 명가량뿐이었다.
절대 우세인 가운데 전진은 대국의 아량을 보인답시고 한족 출신에 양양 태수였던 주서를 보내 항복을 권고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엑스맨.''' 항복은 했을지언정 마음은 동진에 가있었던 그는 바로 전략을 몽땅 누설해버렸고, 동진군은 그걸 기반으로 필승의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실로 왕맹이 우려한 그대로였다. 사실 주서의 배신이 매우 위험하긴 했어도 그것을 부견이 눈치채지 못한다는 보장도 없고, 달랑 전략 누설 좀 했다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부견이 끌고 온 그 거대한 규모의 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4. 결말


비수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최종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동진은 군대를 아주 조금만이라도 후퇴시켜주면 항복하겠다고 제의해왔다. 부견은 미심쩍어 했으나 일단은 수락했다. 만일을 대비해서, 후퇴하고 있을 때 동진이 약속을 어기고 비수를 건너 추격해온다면 바로 뒤돌아 공격하리라는 야심찬 작전을 세웠다.
'''그런데 이 인간이 미쳤는지 후속부대에게까지 그 작전을 설명 안 했다'''.
머릿수만으로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100만 대군인데, 다짜고짜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수들까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전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으며, 심지어 전진의 엑스맨 주서가 "진나라 군대에게 패했다!" 라는 소문을 대대적으로 퍼뜨리는 바람에 악재가 더욱 겹친다. 제대로 통솔되지 못한 전진의 백만대군은 싸워보기도 전에 우왕좌왕하면서 스스로 무너져내린다. 이런 꼴을 보고 동진이 잽싸게 비수를 건너 추격해왔는데, 비록 수는 적었지만 기동성과 공격력이 뛰어난 기마대가 찌르고 들어오니 그 위력은 엄청났다.
이러한 어이없는 패배는 무전기도 없이 원거리 통신 체계가 갖춰지기 이전, 대규모의 병력을 통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통신 체계가 잘 잡힌 현대에서도 급박한 전투 중에 명령 하달이 누락되거나 사령관의 판단 미스로 지휘 체계가 무너져 부대 통솔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이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12].
당장 이 비수대전만 하더라도 동진의 8만 군사가 전진의 군사를 일일이 다 상대해 패퇴시킨 것이 아니고 선봉 기마 돌격으로 전진의 진형이 붕괴되고 패배라는 말에 온 군대의 사기가 무너져 자기들끼리 밟아죽인 것이 더 많았다. 괜히 동서고금의 수많은 명장들과 병법가들이 병력을 통솔하고 지휘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온 것이 아니다. 또한 부견과 수양제를 제외하면 중국사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수많은 군주들이 근대 이전에 100만이라는 숫자를 찍지 않았던 것도 인구가 적어서가 아니라 그 많은 병력을 철도와 원거리 통신 체계 없이는 보급과 통솔이 불가능함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급과 통솔이 가능하더라도 100만 대군을 동원할 정도로 총력전을 펼치면 그 후폭풍이 엄청나다. 1,2차 세계대전 내내 총력전을 펼치다가 세계 제일의 초강대국이 그냥 강대국 수준으로 굴러떨어진 영국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 전쟁을 이겨도 국력 소모가 엄청날 판에, 부견과 수양제 모두 전쟁에서 져버려서 그럭저럭 잘 나가던 나라들이 그대로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결론은 오히려 너무 많은 군대를 동원했다가 독이 된 케이스.
다만, 백만이라는 수치는 전진군의 총병력이고, 비수대전 자체에 동원된 군사 숫자는 백만에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이 전투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문제점은 거의 모든 정보가 (가뜩이나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진서의) 부견재기라는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하나의 텍스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료에 대한 회의론을 제기한 가장 대표적인 학자가 2005년에 타계한 Michael C. Rogers이다. 진서는 기본적으로 당태종 시기에 그 기본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Rogers는 비수전투를 해석함에 있어서, 당시 편찬을 담당한 당나라 관리들이 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말리기 위해 부견의 군세와 그 패전의 비참함을 과장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데이비드 A. 그라프는 Rogers의 주장이 너무 나갔다고 보고, 부견재기의 서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해도, 부견의 패전이 거대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병력 규모를 생각해 봤을 때 그럼에도 동진의 8만 군사보다는 훨씬 많았을 거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5. 영향


전진은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이 한 방으로 망했다. 닥닥 긁어모아 보낸 병력을 일시에 깡그리 말아먹었으니[13] 힘의 공백이 생긴건 당연했고, 복속되었던 기존의 세력들이 대거 들고일어나 기껏 통일되었던 전진 영토를 갈갈이 찢어놓기 시작한 것. 차라리 동진을 공격할 때 소수 병력만 보내 패했다면 반란이 일어나도 막을 힘이 있었겠지만, 이때의 전진은 그럴 힘이 전혀 없었다.
앞서 전쟁하자고 홀로 부추겼던 모용수는 집에 가서 자기 고향이였던 전연 위에 후연(後燕)을 건국했다. 부견은 자신이 멋지게 속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 거기에 왕맹이 조심하라고 그리도 충고하던 신하 요장은 독립해서 후진(後秦)을 세웠고, 역시 신하이던 모용홍도 덩달아 독립하여 서연을 세우고 힘빠진 전진을 틈만 나면 쳐들어왔다. 또 일시적으로 전진에게 복속되었다가 군사를 준비하던 걸복부에서는 전진의 패배 소식을 듣고 여러 부족을 협박해서 병합해 10여만 명에 이르는 무리를 이루어 농서 일대를 장악하고 서진을 건국했다. 게다가 남쪽에선 동진이 비수대전의 대승을 틈타 황하까지 도달해 전진 영토의 절반 가량을 수복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을 넘어 아비규환의 상황. 부견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려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에게 이들을 제압할 힘이라곤 없었고, 특히 서연이 자리잡은 화음이 장안의 코앞이었던 관계로 본진을 수비할 병력마저 모자라 대다수의 지방은 포기하고 장안으로 집결시키기에 급급한 상태였다. 결국 전진은 비수대전 불과 1년 만에 장안 정도를 빼면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국으로 전락해버렸다.
385년, 서연(西燕)은 끝내 장안까지 도달했고 지리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부견은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전황은 악화되어만 갔다. 결국 부견은 장안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과거에 신하이던 요장은 옥새를 요구했으나 부견은 요장을 마구 꾸짖으며 거절했고, 요장은 그를 신평의 한 절에 감금했다가 후에 교살했다. 그리고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시호를 내렸는데, 뭔가 찬양과 비하를 섞은 듯하다.
부견의 핏줄은 대부분 도륙났지만 그나마 부견의 서자인 부비가 뒤를 이어 전진은 겨우 버텼다. 그러나 그도 1년 만에 후진에게 패배하고 죽었으며 일족인 부등, 부등의 아들 부숭이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394년 부숭이 서진에게 잡혀 죽으면서 전진은 아예 망했다.
당시 동진의 재상이었던 사안은 승전보가 올 무렵 백만 대군을 맞아 불안해하는 조정과 병졸들을 안심시키려고 지휘 천막 안에서 태연히 바둑을 뒀다. 황제가 보낸 사신이 전황은 어떤지 묻자 역시 바둑이나 한 판 두자며 사신을 바둑판에 앉혔다. 한참 바둑을 두고 있다가, 승전 보고서가 도착하자 눈으로 한 번 훑어보고 조용히 한쪽으로 치우고는 다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사신이 보고서에 뭐라고 써있었냐 묻자 담담하게 "우리 애송이들이 적을 물리쳤다는구려."라고만 말했다.[14] 그래도 기쁨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해서 바둑돌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가 그만 원치 않는 자리에 잘못 두었는데, 이를 본 사신이 "나쁜 수로군요."라고 지적하자 사안은 "이 정도에 동요하다니 늙어서 주책이군요."라며 허허 웃었다. 사신이 돌아가고 나서야 막사에서 기뻐하며 날뛰었고, 문턱에 나막신이 부딪혀 굽이 박살나는데도 모를 만큼 기뻐했다고 한다.
동진은 군사를 보내 전진을 공격해 384년에 응양장군 유뢰지가 환성, 상용태수 곽보가 위흥, 상용, 신성 등 세 군을 함락시켰다. 또한 양전기가 성고를 점령하고 양주자사 반맹을 격파했다. 경릉태수 조통이 양양을 공격해 형주자사 도귀를 달아나게 하고, 전진의 낙주자사 장오호는 풍양을 점령하고 동진에 투항했으며, 사현, 환석현과 함께 원정을 해서 전진의 서주자사 조천을 팽성에서 쫓아내고 점령했다.
9월에는 사현이 팽성의 내사 유뢰지를 시켜 전진의 연주자사 장숭을 공격해 견성을 점령하고 하남의 성보들을 모두 귀순시켰으며, 음릉태수 고소가 전진의 청주자사 부랑을 공격해 항복시켰다. 기세가 오른 동진은 전진을 공격해 연주, 청주, 사주, 예주 등을 평정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수적인 열세를 딛고 비수대전에서 멋지게 승리한 동진은 '''더욱 마음 놓고 나라를 말아먹기 시작했다'''. 효무제가 후궁한테 '넌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내일부턴 탱탱한 애들 끼고 잘란다'라고 농담했다가 열받은 그 후궁이 자던 황제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켰을 정도였다. 결국 동진은 비수대전의 승리의 주역이던 북부군의 쿠데타로 나라의 기반이 무너졌고, 북부군 사령관 유뢰지(劉牢之)의 부하였던 유유(劉裕)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 멈출 수 있었던 혼란스러운 난세는 이후로도 206년 동안 계속되었고 나중에 수나라가 통일한 589년에서야 끝나나 싶더니 이 항목과 별 다르지 않은 짓을 저지르고 다시 혼란기가 왔다가 당나라가 들어서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1] 전투 전황을 보면 알겠지만 싸움으로 무너진 게 아니라 소통의 부재로 전투병력이 흩어진 것에 가깝다. 다만 지휘관이 전사 했을 정도로 적들이 깊숙하게 들어올 만큼 진형이 붕괴되었음은 짐작이 가능하다.[2] 자치통감 106권 진기(晉紀) 28편에 등장하는 문구로서 남송 말부터 원나라 시기까지의 역사학자 호삼성(胡三省)의 주해에서 나온 말로서 '하늘이 전진을 버렸으므로 그 멸망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기록하였다.[3] 본래 '水' 자는 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현대어의 '강'의 의미로도 쓰였다. 우리가 쓰는 강(江)이라는 한자는 원래 양쯔강만을 뜻하는 고유명사였던 것이 의미 확장을 거친 것이다. 역시 강물을 뜻하는 하(河) 역시 본래는 황허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으며, 보편적인 의미의 강물은 다 수(水)라고 불렀다.[4] 합비와 비수의 비자가 같은 글자다.[5] 성한을 동진이 멸망시킨 지 수십 년 만에 북조에 빼앗겼다.[6] 진나라에서 서진과 동진 전부 합쳐도 제대로 된 황제가 명제, 효무제 잘 쳐줘도 무제, 회제, 성제. 이게 끝이다. 성제와 목제는 능력이 있었으나 요절(게다가 목제는 부검결과 누군가에게 암살)했고, 강제, 애제는 무능했으며, 폐제와 공제는 능력 자체는 있었으나.....[7] 더 놀라운 것은 동시에 서역으로도 10만 원정군을 보냈다![8] 물론 이런 장부상 병력들은 정확하진 않다. 의외로 군대 규모가 큰 경우 장부상 병력을 다 채우지 못한 사례가 많다. 몽골 제국도 리즈 시절 때 장부상으로는 대략 160만 대군이 있었으나 실제 병력은 그보다 적었고 아는 게 좀 있는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적벽 대전 때 오나라에서도 조조가 80만 대병력을 보낼 것이라는 편지를 받고 난 후, 손권이 80만 병력을 어찌 막냐는 발언을 하자 주유는 "그거 뻥튀기고 18만+@임."이라며 5만의 병력을 준다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발언을 한다. 당시에도 뻥튀기 논란이 있던 것인데, 어쨋거나 이때 조조가 언급한 80만이라는 걸 사실이라고 본다고 해도 100만보다 적다. 거기다 하나 더, 적벽 당시 동오의 병력도 조조에게 압살당할 차이하고 하기는 힘들다.[9]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 당시에 대해 자치통감은 병사만 113만, 수송대는 그 두 배라고 기록하고 있다.[10] 마켓 가든 작전에서 보듯이 현대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원래 사람 심리가 한번 좋은 것만 보기 시작하면 적신호가 얼마든지 들어와도 다 무시하거나 반박하게 되어 있으니[11] 다만 비수대전 직전 부견의 통치력은 안정적인 상태로 국내에 특별히 활동적인 저항세력이 없고 대규모 병력 동원도 무리없이 가능했음을 생각해 볼 때 '''만약 동진원정에 성공했다면''' 국내의 불안정 문제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고 오히려 쉽게 수습되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대규모 대외원정의 성공은 황제(부견)의 권위와 위상을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 즉 동진 원정에서 부견의 실수는 '유해무득의 멍청한 짓을 했다'기 보다는 '이기면 크게 따지만 졌을 때 안정판이 없는 도박판에서 성급히 올인을 외쳤다'가 저서 싹 날린 것에 다 가깝다. 뭐 올인을 외치고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본인이야 자기가 절대 지지 않을 판이라고 생각했겠지만.[12] 나폴레옹의 몰락이라고 알려진 워털루 전투도 사실은 통솔 문제 때문에 발생한 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잠든 사이 기병 대장이 돌격을 명령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냥 정찰하라고 보낸 거였는데 나머지 기병대들이 출격하라고 하는 줄 알고 뒤따라가 갔다가 영국의 전열보병대에 의해 말아먹었다는 말도 있다.[13] 물론 백만 대군이 모조리 몰살당한 것은 아니고 대다수는 살아서 전진 땅으로 도망쳤지만, 어차피 군사력이란 건 징집하고 편성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14] 당시 동진군의 총사령관인 '사현'은 사안의 조카였고 그 밖에도 사안의 동생, 아들 등이 참전해서 이들을 애송이라 부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