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동진)
1. 소개
王導
276년 ~ 339년 9월 7일
동진(東晉) 초기의 권신이며 명재상, 진 원제 사마예와 진 명제 사마소의 정치적 참모이면서 스승이자 킹메이커. 왕람의 손자다. 자는 무홍(茂弘),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2. 생애
낭야군 임기현 사람으로 조야에서 중보(仲父)라 불렀으며, 동각좨주(東閣祭酒)를 지냈다. 서진(西晉) 말기 낭야왕 사마예의 안동사마(安東司馬)가 되었으며 군사적 전략 수립에 참여했다. 사마예에게 권해 건강(建康)[1] 으로 근거지를 옮기도록 했고 낙양(洛陽)이 무너지자 남북의 사족들을 연합시켜 사마예를 옹립해 동진 왕조를 건립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승상(丞相)이 되었으며 나중에 사촌형 왕돈이 병권을 장악하자 장강 상류를 지켰는데 족인들이 많이 요직에 올랐다. 사실 사마예는 왕도의 도움을 많이 받아 옥좌에 같이 앉자고 제안한 적도 있어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가졌다.'''(王與馬 共天下)라는 말이 나왔다.
명제 사마소(司馬紹)가 즉위하자 유조를 받들어 정치를 보좌했다. 사도(司徒)로 옮겼으며 시흥군공(始興郡公)에 봉해졌다. 승상으로 봉해진 후 국사를 논하다가 서진의 문제 사마소(司馬昭)가 조위 황제 조모를 시해하고 천하를 장악했다는 대목을 얘기하자 사마소는 책상에 얼굴을 묻으며 부끄러워했다. 왕돈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했으며 사마소는 왕도의 공을 보아 친족임에도 불구하고 왕도를 처벌하지 않았다. 어린 성제 사마연이 즉위하자 유량(庾亮)과 함께 보필하였다.
함화(咸和) 2년(327년), 역양내사 소준(蘇峻)이 반란을 일으키고 건강에 입성해 사마연을 가두고 권력을 장악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소준은 왕도를 존경하여 일체 해를 입히지 않았는데 반란이 평정된 후 왕도는 다시 승상에 올랐으며 사마예, 사마소, 사마연까지 3대에 걸쳐 승상을 지내면서 동진 왕조의 강남 통치를 공고하게 다지고 왕씨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여담으로 왕돈은 그의 사촌형인데 왕도와는 달리 개막장이라서 왕도가 동진의 충신이 된 반면 왕돈은 동진의 역적이 되었다.
그들의 인성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하루는 둘이 서진에서 내로라하는 부자 중 하나인 석숭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2] 당시 석숭은 손님이 술을 다 마시지 않으면 집의 기녀를 참수시키는 가혹한 주인이었다.
이 자리에서 왕도는 기녀들을 위해 술을 열심히 마셨는데, 정작 그는 술을 잘 하지 못했음에도 이랬다. 그러나 왕돈은 주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결국 기녀들이 3명이나 죽어나갔고, 보다못한 왕도가 기녀들이 죽어나간다고 왕돈을 나무랐다. 그러자 왕돈은 자기 손으로 자기 집 사람을 죽이는데 내가 뭔상관? 이라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