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온

 


'''묘호'''
'''태조(太祖)'''
'''시호'''
선무황제(宣武皇帝)
'''성씨'''
환(桓)
''''''
온(溫)
''''''
원자(元子)
'''부친'''
환이(桓彝)
'''생몰 기간'''
312년 ~ 373년
1. 개요
2. 생애
3.1. 성한 토벌
3.2. 1차 북벌
3.3. 낙양 수복과 북벌의 실패
4. 말년과 최후
5. 평가
6. 기타
7. 둘러보기


1. 개요


동진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며, 권신. 자는 원자(元子), 시호는 선무공(宣武公).
상당히 복합적인 인물로, 영가의 난으로 오호십육국시대가 도래한 지 30여 년이 된 시점에서, 수십 년 만에 파촉 일대를 회복하는 큰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수차례 북벌을 시도하여 진 왕조의 옛 도읍인 낙양 일대를 수복하는 등 화북 일대를 점거한 이민족 왕조들에게 아직 동진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린 명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공로를 앞세워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던 권신이기도 하였다. 동진의 실권자로 떠오른 환온은 제멋대로 황제를 폐위하기도 했으며, 종국에는 제위까지 찬탈하려 들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북벌에 실패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이처럼 환온은 무참히 짓밟힌 한족의 자존심을 세워준 위인이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권력욕에 찌들은 야심가이자 난신적자로 평가될 여지도 있는 인물이었다. 여러모로 조조사마의의 후배격인 인물이며, 한국사로 치면 연개소문과 행적이 비슷하다.
훗날에 아들인 환현(桓玄)이 일시적으로 동진 왕조를 무너뜨리고 환초를 세워 황제로 즉위하게 되자, 환온 또한 황제로 추증되어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였고, 시호를 선무황제(宣武皇帝)라 하였다. 그러나 환현의 초왕조는 단명했고 정식왕조로 인정되진 않는다.

2. 생애


북방에서 흘러온 무인 집안의 자손으로, 선성 태수 환이(桓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아직 돌이 지나지 않았을 때 태원의 온교(溫嶠, 288~329)가 그를 보고, 말하길 “이 아이는 기골이 범상치 않으니 시험 삼아 울려보세.”라고 했다. 환온이 우렁차게 우는 소리를 듣고는 “참으로 영특한 인물이로다!”라 하였다.
환온의 아버지 환이(桓彛, 276~328)는 소준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부하인 한황(韓晃, ?~329)에게 살해당했다. 환온은 이를 분하고 슬프게 여겨, 창을 베고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3년 뒤 환이를 살해한 일파 중 한 명인 강령 강파(江播)가 죽자, 자식들인 강표(江彪) 3형제가 상을 치르며 지팡이 안에 칼을 숨기고 환온에 대비했다. 하지만 환온은 자신을 조문객이라 속이고 들어가 강표를 죽이고 두 동생들도 쫓아가서 죽였다.
진서 원탐(袁耽)전에 따르면 환온은 어렸을 때 몹시 가난하였는데, 일찍이 환온이 젊었을 때 도박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가산을 탕진[1]하고 도박 밑천이 조금 남아있어서 잃은 돈을 찾을 방도를 생각해봤으나 떠올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본전을 건질 방도를 원탐에게 알아보려 했는데 원탐이 마침 상중이라 망설이다가 일단 말해보았다. 그러자 원탐은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상복을 벗고 변복한 다음, 베로 만든 모자를 품속에 넣고 환온을 따라 채권자와 도박을 하러 나섰다. 원탐은 어려서부터 재주꾼이란 말을 듣고 있었는데 채권자도 소문을 들은 적은 있지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했다.

원언도(彥道, 원탐의 자)와 같은 재주가 없으니 당신은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이오.

그러나 판이 벌어지자 원탐이 판돈을 십만 전에서 백만 전으로 올리고 패를 던지며 크게 부르짖더니 베모자를 꺼내 땅에 던지며 말했다.

이제 원언도를 알아보겠소?

원탐의 소탈함이 이와 같았다.[2]
환온은 호탕하고 풍채가 뛰어났으며, 자태도 매우 훌륭했다. 도박을 해서 돈을 날려먹은 일화가 있지만 환온 개인은 대단히 검소했다고 하며, 젊은 시절 패국의 유담(劉惔)과 친했는데, 유담이 이전부터 일컫길 "환온의 눈은 자주빛 석릉(石棱, 자수정의 모서리) 같고, 수염은 고슴도치의 털이 빳빳하게 선 듯하니, 손중모(孫仲謀), 진선왕(晉宣王)에 버금간다."[3]라 하였다. 명제 사마소의 장녀 남강장공주[4]에게 장가들어 부마 도위가 되었고, 낭야 태수로 임명됐다가 서주 자사가 되었다.
환온은 유익(庾翼, 305~345)과 사이가 좋았는데, 항상 서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세상을 구제할 일을 기약했다. 유익이 동진 성제에게 일찍이 환온을 천거하며 말하길 “환온은 어려서부터 웅략이 있으니, 폐하께서는 평범한 사람으로 그를 대하거나 평범한 사위로 그를 아끼지 마시고, 마땅히 방숙(方叔)과 소호(召虎)[5]의 임무를 맡겨 간난을 구제할 공적을 위탁하십시오.”라 하였다. 유익이 죽은 뒤 환온은 도독 형양 사주 제군사, 안서 장군, 형주 자사, 영호 남만 교위, 가절로 임명되었다.

3. 북벌



3.1. 성한 토벌


목제(穆帝) 영화 2년(347년), 안서장군이 된 환온은 저족이 세운 성한(成漢)이 내분으로 인해서 지리멸렬해지자, 서정을 상주하였는데 조정에선 촉이 멀고 험하며, 환온의 병사도 너무 적었기에 적의 근거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매우 근심하였다. 하지만 환온은 어명을 받고 촉을 토벌하기 위해 행군했다. 환온은 우선 참군 주초(周楚), 손성(孫盛)[6]에게 명해 치중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보병을 거느리고 바로 성도를 목표로 진군했다. 놀란 성한의 황제 이세가 그의 숙부 이복(李福)과 종형 이권(李權) 등에게 팽모를 공격, 중간에서 환온군을 영격하게 하나, 주초 등이 결사적으로 이를 막아 격퇴했다. 환온 또한 이권 등을 공격해, 세 번 싸워 적을 대파하여 성한군은 성도로 패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이세가 친정하여 전군으로 환온과 작교(笮橋)에서 맞붙으니, 초기에는 환온이 불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참군 공호(龔護)가 전사하고, 환온이 탄 말이 화살에 맞았다. 환온은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북 치는 병사가 명을 잘못 알아듣고''' 전진하는 북을 세차게 울렸다. 그러자 삼군이 일제히 앞으로 맹돌격을 했다. 환온의 공세가 이렇게 맹렬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이세는 그 기세를 막지 못하고 가맹관(葭萌關)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나중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했다. 환온의 대군은 기세 당당하게 성도로 들어갔고, 이렇게 해서 성한 왕조는 멸망했다(...). 돌아오는 길에 왕서, 등정, 외문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환온은 다시 이를 쳐 평정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환온은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승격되었으며 임하군공(臨賀郡公)으로 책봉되었다. 그렇게 해서 환온의 이름은 조정과 민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앞서 환온의 병력이 적었다고 언급했는데 위서 열전 84권과 손성의 진양추에 따르면 환온은 불과 7천명의 군사만으로 천자에게 아뢰는 문서를 올리고 촉을 정벌했다고 한다. 80여년전 사마소가 16~18만의 대군으로 공격해 정말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촉한을 정벌하고 곧이어 촉한의 옛 장수인 나헌이 불과 2천으로 보협을 대파하고 오나라 명장 육항의 3만 대군을 막아낸 걸 생각하면 성한은 촉한만큼의 분전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멸망한 셈이다.

3.2. 1차 북벌


환온은 군을 거느리고 북정하길 원해, 먼저 상소하여 조정에서 수륙의 적합함을 논하길 청했으나, 나이도 젊고 서부 군단의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무창(武昌)을 중심으로 은거하며 사실상 형주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환온을 조정에서는 매우 경계하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회답이 없었다. 당시 조정이 은호(殷浩)[7] 등에게 의지하여 자신을 견제하는 것을 알았기에, 환온은 몹시 성냈으나, 원래 은호를 알고 있어서, 그를 꺼리지는 않았다. 마침내 북벌을 선언하며, 표를 상주하고, 무창(武昌)에서 군을 일으켰는데 병력이 4, 5만에 이르렀다. 훗날 간문제(簡文帝)가 된 사마욱이 당시 무군 장군이었는데, 환온에게 글을 써서 사직의 대계를 밝히며, 군을 일으킨 연유를 물었다. 이에 환온이 곧 회군하여 진에 돌아간 뒤, 상소하길

신이 근래에 친히 군을 거느린 것은, 북으로 가 (후)조, (염)위를 멸망시키길 원했기 때문에, 군을 무창에 머무르게 했는데, 무군 대장군,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의 글을 받아 보니, 세상이 어지럽고 떠들썩하여, 망령되이 의혹이 생겨났고, 그 말과 뜻이 위급하여, 근심이 사직에까지 이르렀음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살피니 깜짝 놀랐으나, 연유도 이해할 수 없는데도,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돌아보며, 죽어도 의탁할 땅이 없었습니다. 신이 미미하고 드러나지 않는데도, 황송하게도 중임을 짊어졌기에, 비록 재주가 그에 걸맞는 사람은 아니지만, 직분은 난을 평정함에 있습니다. 원수가 불멸하여, 국치를 아직 씻지 못했으나, 다행히 개태(開泰)의 때로 인해, 우연히 틈탈 기회를 만나게 됐으니, 필부도 뜻이 있어, 오히려 분개함을 품는데, 신 또한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앉아서 폐단을 바라만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창을 메고 말을 몰아, 편안히 머무를 여유도 없이, 전후로 표진(表陳)한 것이, 지금까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성심으로 태연하며, 공사로 깨끗하였는데, 무슨 사소한 것이 있었기에, 이러한 혐기(嫌忌)를 용납하셨습니까? 어찌 올바름을 꺼리는 무리들이 속으로 두려움을 품고, 조롱하며 헛된 말을 한 것에, 혹해 조정에서 받아들이신 겁니까?

과거 악의가 정성을 다했으나, 눈물을 흘리며 달아났고, 곽광이 충성을 다했으나, 상관(上官)은 변을 고했습니다. 참언이 행적을 병들게 하고, 간사한 이가 덕을 어지럽힘이, 역대에 항상 있던 근심거리로, 존망(存亡)의 연유입니다. 지금 주상께선 양추(陽秋)가 많으시고, 폐하께선 성스럽고 깨끗함으로 조정에 임하시니, 삼가 위임하시며, 군하(群下)에 책임을 지우시고, 바야흐로 재능있는 이들에게 회통(會通)함을 맡겨, 덕과 믿음을 먼 변방까지 베푸셨습니다. 때마침 신이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어, 3대를 복종하며 섬겼으니, 신분은 타관살이하는 손님이 아니고, 행적은 한신팽월의 허물도 없었으나, 반간(反間)이 흉심(胸心)에서 일어나, 함께 어지럽힘이 4국을 지나게 됐으니, 이가 옛 현인이 이전에 탄식한 까닭이며, 신 또한 올해에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구적(寇賊)이 쇠하여, 대사가 거의 정해졌고, 이 잃어버린 백성들이 고니가 선 듯이 남쪽을 바라며, 의로움에 힘쓰는 이들도 분개하고 한탄함이 곧 드러났기에, 원흉의 명운이 누각에 동떨어져 있는데도, 엉뚱한 의논이 망령되이 생겨나, 이로 인해 작은 허물을 큰 죄로 만들며, 거의 망해가던 도적이 다시 숨통이 트이게 했으니, 기세를 끊은 것에 상심하여, 슬퍼하고 개탄함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이 설사 공공을 위함을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나, 밖의 근심이 아직 그치지 않고, 안의 폐단이 서로 흥하더라도, 신의 본심은 힘을 바치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황제가 위로하며 태위(太尉)를 겸직하게 하였으나, 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당시 은호가 낙양(洛陽)에 이르러 원릉(園陵)[8]을 수복하며, 여러 일을 겪은 지 수년이었는데, 잠시 전국새를 찾고[9] 하남을 수복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하남 지역의 군벌들과 교착 상태에 빠지다가, 결국 북벌에 나섰던 은호의 북부군은 선봉으로 나선 강족의 수장인 요양(姚襄)[10]이 배신을 함으로써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물자와 병장기가 바닥나고, 조야가 모두 그를 원망하자 환온이 조야의 원망에 의거해 은호를 폐할 것을 아뢰니, 견제할 세력이 사라진 환온은 이로부터 내외의 대권을 모두 쥐게 되었다.
드디어 내부의 견제 세력을 물리치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환온은 마침내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요양(姚襄)을 정벌하기 위해서 강릉에서 출발했다. 수군은 장강을 따라 북진하여 양양에서 균구(均口)로 들어가, 남향(南鄉)에 이르렀고, 보병은 석천(淅川)에서부터 관중(關中)을 정벌하며, 양주 자사 사마훈(司馬勳)은 자오도에서 나오도록 명했다. 소위 위연의 자오곡 계책과 유사하였으나 군량 수송 문제와 기습으로 대패하고 철수하여 이쪽으로의 진출은 결국 뻘짓이 되었다(...).
한편 별동대가 상락(上洛)을 공격해, 부건(苻健)의 형주 자사 곽경(郭敬)을 사로잡았고, 청니(青泥)로 진격해 전진군을 격파했다. 부건 또한 아들 부생(苻生), 동생 부웅(苻雄)에게 수만명으로 요류(嶢柳), 수사퇴(愁思槌)에서 환온을 막게 하여, 격전이 벌어졌는데 부생이 직접 진을 함락시키며 환온의 장수 응탄(應誕), 유홍(劉泓)을 죽이고, 수천명을 참하는 등 분투하였으나 환온군이 전력을 다해 싸우자 대적하지 못하고 부생군은 곧 달아났다. 부웅 또한 장군 환충(桓沖)[11]과 백록원(白鹿原)에서 싸우나, 역시 환충에게 격파당했다. 부웅이 마침내 진군하여 사마훈을 공격하자, 사마훈은 물러나 여왜보(女媧堡)에 머물렀다. 환온 또한 나아가 패상(霸上)에 이르니, 부건은 물러나 5,000명으로 도랑을 깊이 파고 굳게 지킬 뿐이었다. 이에 거주민은 모두 편안히 지내며 다시 일에 종사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길에서 환온을 맞이하는 이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고, 노인들은 감격해서 울며 말하길 “오늘날 다시 관군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라 하였다.
이렇게 앞을 막는 군벌들을 하나씩 격파해가며 기세를 올리던 환온이지만,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고질적인 보급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애초에 환온은 그가 진격할 때쯤 보리가 익을 거라 믿고 이를 거두어서 군량으로 삼을 생각이었으나 이를 간파한 부건이 모를 베고, 불을 질러서 들판을 비우는 청야 전술을 펼쳤기에 현지 조달이 어려워진 환온군은 군량이 부족해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군량 보급이 어려워 사기가 날로 떨어지는데, 적은 거세게 저항하니 결국 결단을 내린 환온은 관중의 백성 3,000여 호를 이끌고 회군한다.[12]

3.3. 낙양 수복과 북벌의 실패


356년, 환온은 사주 일대의 강족 수장 요양을 다시 공격한다. 요양은 환온에게 거짓으로 투항했으나 환온은 이에 속지 않는다. 환온은 요양군 수천명을 전사시키고 크게 승리한다. 이후 낙양의 주성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40년 만에 옛 수도를 되찾는다.
이후 환온은 5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세 번째 북벌을 감행해 모용선비족의 전연을 공격했다. 환온은 수로를 이용해 군량을 운반하였다. 동진군은 모용장이 이끄는 전연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방두까지 진격했다.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이때 수도를 버리고 달아날 생각도 했다. 이에 모용수가 출정하여 동진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진에서 구원군이 등판하자 환온은 결국 퇴각하였다. 이때 모용수가 동진군을 추격하여 격파했다. 이후 환온은 석문을 점거하지 못한 원진에게 패전 책임을 묻는다. 원진이 노하여 수춘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환온은 전연과 전진의 지원군을 격파하고 원진의 세력을 제거한다

4. 말년과 최후


환온은 배개를 어루만지며 황제가 될 야망을 꿈꾸었다. 이에 폐제 사마혁을 남색가 내지 고자로 몰아 폐위시키고, 나이 많은 간문제 사마욱을 옹립했다. 환온의 권세는 이미 황제를 넘어서 자신이 황제가 되고자 했다. 동진의 숙원이었던 북벌을 일부나마 실현시킨 환온은 그 공으로 대사마(大司馬) 겸 대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에 올라 364년에 이미 갖고 있던 형주 자사에서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전임됐고, 369년에는 연주 자사 겸 서주 자사를 더해 장강 하류의 모든 군세를 수중에 넣었다. 여기에 자신의 정예 군대인 서부 군단을 합쳐 동진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때 환온의 친구인 동진의 명문 귀족 유담(劉淡)이 가세했다. 당시 동진은 화북 지방으로부터의 유민(流民)과 화중, 화남의 원주민이 섞여 건국된 나라였는데 아직 강남이 완전히 개발된 상태도 아니었는 데다가 동진으로 유입되는 유민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호구 조사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이에 조세나 병역의 부과가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않아서 나라꼴이 엉망이었다. 그래서 환온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현재 거주지를 중심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를 '''토단'''(土斷)이라 하였다. 동진 시기 100년 동안 토단은 약 아홉 차례 시행되었는데 환온이 대사마 재직시 가장 거국적으로 실행됐다. 이를 바탕으로 동진의 국력은 다시 재정비될 수 있었다.
이렇게 명망을 쌓고 간문제로부터 선양을 받으려고 했으나, 간문제는 환온의 야심을 간파하고 불안해하다가 급사해 버렸다. 특히 사안[13]은 초연한 태도로 그를 제거하려던 환온의 의지를 꺾었고, 사마욱이 죽자 효무제 사마요가 즉위한다.
기이한 일화를 모으기 좋아한 진서의 환온전에는 이에 대해서 기이한 일화가 전한다. 그의 말년에 갑자기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비구니가 먼 곳에서 와서 시주로 삼고자 의탁하였다. 이 비구니의 재주와 품행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환온은 매우 공경스레 대했으며 집에서 거주하게 하였다. 비구니가 매번 목욕할 때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환온은 이를 의심하여 엿보았다. 환온이 그 모습을 보니 비구니는 나체로 칼을 휘둘러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내고 몸과 머리를 잘라 모두 작은 덩어리로 잘게 잘랐다. 환온은 이를 괴이하고 두려워하며 돌아갔다. 비구니가 욕실에서 나오는데 몸의 형태가 전과 같았다. 환온이 솔직히 묻자 비구니가 답하기를 "만약 임금을 축출하거나 능멸한다면 육신이 마땅히 보았던 것처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환온은 장차 찬위(問鼎)할 계책을 꾸미고 있었는데 이를 듣고 한탄하였다. 때문에 이를 경계로 삼아 종신토록 신하의 절개를 지켰다. 비구니는 뒤에 작별하고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일화는 환온이 찬탈의 마음을 품었지만 끝내 그 마음을 실행할 수 없었음을 뜻하는 일화이다.
또 진서 환온전에는 그가 죽기 전 간문제와의 일화도 전한다. 효무제가 즉위한 후 환온이 남주(南州)에서 돌아와 간문제의 무덤을 배알했는데, 좌우에서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온이 이윽고 수레에 올라 시종에게 선제의 영령을 뵈었다 말하였는데, 선제가 했던 말을 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다만 환온이 무덤을 배알할 때 자주 말하기를 "신은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환온이 또 좌우에 묻기를 은연(殷涓)의 모습을 물었는데 어떤 사람이 대답하길 "은연이란 사람은 비대하고 단신이며 낯빛이 검고 매우 추합니다." 하였다. 환온이 이르기를 "조금 전 그도 선제의 곁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용모가 또한 그러하였다." 하며 불길하게 생각했다. 애초에, 은호(殷浩)가 환온에게 폐해져 죽고 나서, 은연이 자못 절조가 있어, 마침내 환온에게 이르지 않고, 무릉왕 사마희와 사귀었기에, 환온이 의심하고 그를 해했으나, 끝내 인식하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또한 은연을 보고 빌미가 돼, 병에 걸렸다. 경사에서 14일을 머무르고, 고숙에 돌아가, 마침내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이에 환온은 뒤를 이은 효무제 사마요에게 구석을 요구하는 등 대놓고 찬탈을 꿈꿨지만 사안과 왕탄지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사안과 왕탄지는 그가 위독함을 듣고, 은밀히 그 일을 늦추었다. 석문(錫文)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는데 죽었으니, 향년 62세였다.
환온의 아들 형주 자사 환현은 결국 아버지의 야망을 실현하여 효무제의 아들 안제 사마덕종에게 선양받아 후일 환초라고 불리는 초(楚)나라 황제가 되어 환온의 유지를 이었으나, 불과 3개월 만에 유유에게 반격받아 피살되고 만다. 이후 유유는 동진을 찬탈하고 유송의 개국자가 된다.

5. 평가


동진 이전의 나라 중 위나라 때는 조조가 군사적 명성을 토대로 실권을 잡고, 반대파들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분위기를 형성한 후 그 아들 조비가 후한을 찬탈했고, 서진 때도 마찬가지로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등이 외정을 통해 군사적 명성을 쌓는 한편, 반대파들을 철저히 탄압하여 기반을 다진 후 사마염이 결국 조위를 찬탈했다. 환온이 동진의 다른 실력자들과는 달리 눈에 띄게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정책을 펼치려고 했던 건, 이런 선배들을 따라 해보고 싶어했던 야심이 큰 이유였다.
그렇지만 환온은 유능했으면 유능했지 무능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강남에 박혀있던 동진을 부흥시키며 40년 만에 낙양을 수복하고 반란을 두 차례나 진압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성과를 거뒀다. 환온이 상대하던 지휘관들도 부웅, 부생, 요양, 모용수 등 군사적 재능이 출중한 자들이었다. 즉, 환온이 무능해서 모용수 같은 명장에게 패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환온이 통치하던 시절 동진은 환온 이후 그에게 반대한 명재상 사안이 다스리던 때 처럼 평화로웠다. 게다가 환온이 정말 무능력한 인간이었더라면 전진과 전연이 동맹을 맺고 환온에 맞섰을 리가 없다.
그리고 환온에게도 억울할 이유는 있었다. 그의 사업이 성공하지 못했던 건 동진 특유의 상황도 한몫 했다. 왕돈의 반란과 소준사마연을 감금하고 일으킨 내란을 봐도 동진이란 국가가 몇 번씩이나 내부에서 왕조 교체 직전까지 갔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이미 효무제가 살아있을 때의 제국은 사실상 분열된 지 오래된 상태였다. 이미 동진의 건국시부터 건강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권과 장강 이북의 북부군, 장강 중류의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군에 각각 유력자와 황족들이 중심이 돼서 서로 견제를 하는 형식으로 간신히 국가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환온이 야심을 품으며 틈을 엿 볼 기회가 주어졌던 것.
그리고 동진 조정이 환온에게 제대로 북벌을 실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환온이 촉의 성한을 정벌하자 놀란 동진 조정은 그에게 북벌 기회를 주지 않고 그를 견제하는 세력만 불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 견제 세력이란 작자들의 군사적 재능은 환온의 절반도 미치지 못했다. 환온으로서는 동진 조정에게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훗날 환온이 북벌을 실시했을 때는 적국인 전진전연에서는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어 환온을 방어할 준비가 된 상태였다. 따라서 환온의 군사적 재능을 동진 조정의 지나친 경계 때문에 좋은 타이밍에 펼치지 못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환온이 찬탈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군사적 업적보다도 그의 정치적인 어리숙함과 우유부단함이었다. 환온은 은씨와 유씨를 제거하고 무릉왕 사마희를 숙청했으나 정작 본인에게 가장 걸림돌이었던 사안과 왕탄지는 살려두었다.[14] 그리고 황제에게 적극적으로 선양을 강요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당시 환온에게 맞설 규모의 국내 군벌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분명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군공이 부족하더라도 황제를 강하게 압박하였더라면 선양이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환온은 본인의 말과는 다르게도 '''오명'''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15][16] 그의 야망은 그의 아들 환현이 실현하여 동진을 찬탈하여 환초를 건국하지만, 유유에 의해 진압당해 결국 실패한 찬탈로 끝남으로써 그 기반을 제공한 환온 역시 역적의 대명사인 망탁조의의 추가 멤버로 후세에 이름이 남게 되었다.

6. 기타


환온은 고평릉 사변사마의와 맞서다가 멸족당한 대사농 환범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자세한 것은 환범 항목 참조.
위진 남북조 시대의 가십거리를 소재로 한 소설인 세설신어에서는 주인공이라고 봐도 될 만큼 비중이 크다. 여기에서도 역시 영웅다운 품모와 권력을 노리는 야심가로써의 모습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세설신어에 처음 출전된 단장이라는 고사성어의 일화에서도 등장한다. 일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환온이 촉 땅을 정벌하러 수군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 병사가 우연히 새끼 원숭이를 산채로 잡았다.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찾아서 배를 쫒아 오다가 힘이 다해서 배에 떨어져 죽었는데,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내장이 끊어져 있었다. 이를 본 환온은 그 병사를 매를 때려서 엄히 꾸짖었다는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단장 문서 참조.
어림에 따르면 환온은 자신의 사내다운 모습과 기풍이 사마선왕(사마의), 유월석과 동류라 생각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자신을 왕대장군(왕돈)에 견주자 마음 속으로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부건을 정벌하고 돌아오면서 북방에서 아름다운 여자 하나를 얻어 종으로 삼았는데, 원래 유월석의 기녀(妓女)였다. 여종은 환온이 들어오는 걸 보자 눈물을 흘리며 울기에 환온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여종이 대답하길 "나리(官家)께서 매우 유사공(劉司空)과 닮아서 그리 하였습니다." 환온이 크게 기뻐하며 곧장 밖으로 나가 의관을 정제하고는 다시 들어와 여종을 불러 자신의 어떠한 곳이 그와 닮았는가 물었다. 여종이 "눈이 매우 닮았지만 작은 것이 흠이요, 얼굴도 매우 닮았지만 마른 것이 흠이고, 수염도 매우 닮았지만 붉은 것이 흠이며, 체형도 매우 닮았지만 짤막한게 흠이고, 목소리도 매우 닮았지만 여자같은게 흠입니다."라고 했다. 환온은 이에 관을 풀고 혁대를 풀더니,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잠이 들었으며, 며칠동안 기뻐하지 않았다.

7. 둘러보기




[1] 곽자에 따르면 이때 환온이 가산을 잃은 도박은 저포(樗蒲,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그 주사위로 승부를 다투는 놀이. 저(樗, 가죽나무)와 포(蒲, 부들)의 열매로 주사위를 만든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다. 곽자에 따르면 환온은 이 도박으로 쌀 수백곡을 잃었다고 한다. 곽자에 따르면 치(齒, 패의 일종)패가 나쁜데다 또한 의욕마저 꺾여 스스로 판단하길 다시는 일어날 수 없노라 여겨 원탐에게 갔다고 한다.[2] 곽자에 따르면 환온의 요청에 "매우 좋소, 내가 경을 빼낼 뿐만이 아니라, 경을 위해서 그 놈들을 박살내버리겠소. 내가 반드시 좋은 패를 만들어 낼 터이니 경은 다만 소리나 지르고 있으시오." 그는 즉시 상복을 벗고 문을 나섰다. 머리 위에 상모(巾帽)를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벗어서 내던져 버리고는 작은 모자를 착용했다. 놀이가 시작되자 원탐은 형세를 몰아 분개한 수컷처럼 욕을 하며 소리를 질렀는데, 던졌다하면 필히 노(盧)와 치(雉)가 나오니, 두 사람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자 대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의기를 잃었고, 원탐은 잠시만에 수백만 전을 얻었다.[3] 태평어람세설신어에도 같은 일화가 전하는데 태평어람에서는 손중모만 언급한다.[4] 이름은 사마흥남이다.[5] 주(周) 선왕(宣王) 때 현신(賢臣)들로 형만(荊蠻)을 평정함.[6] 위씨춘추의 저자이며, 삼국지 팬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7] 동진 진군(陳郡) 장평(長平) 사람. 환온의 죽마고우로 일찍부터 명성이 있었으며, 양주 자사, 건무 장군 등을 역임하면서 강력한 북부 군단을 배경으로 동진 조정의 실력자인 회계왕 간문제(동진)사마욱(훗날의 간문제(簡文帝))과 손을 잡고 환온을 견제했다.[8] 능원(陵園), 즉 황제의 묘소[9] 염위의 업성이 포위된 기회를 틈타 업에 지원군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상환받은 것이다.[10] 은호의 북벌을 막아낸 인물이자 후진을 세운 요장의 형이다.[11] 환온의 동생으로, 그가 죽은 뒤 서부 군단의 대권을 물려받는다.[12] 이때 환온은 훗날 전진의 부견을 보필하는 명재상 왕맹을 만났으나, 회군 때 왕맹에게 동행할 것을 제안한 환온의 부탁을 왕맹이 거절하게 됨으로써 남게 되었다.[13] 비수대전 당시 태연하게 바둑을 두다가 사람들이 돌아가자 나막신이 부러지는 것도 모르고 기뻐했다는 그 사람 맞다. 이 일화만 보면 웃기는 사람 같지만 실은 이 사람도 당대의 명재상이자 명망 높은 문화인이었다.[14] 사안과 왕탄지를 죽이려했으나 사안의 태연함에 죽이지 못했다.[15] 물론 훗날의 유유는 뛰어난 무공으로 사마씨의 정통성을 압도하여 유송의 황제에 즉위한다.[16] 유송의 소도성은 군공이 환온에 미치지 못함에도 과감히 유욱을 제거하고 남제를 건국한다. 물론 유욱은 개막장이라서 자신이 죽음을 초래했다 봐도 무방하다. 소도성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한 것이지만 환온도 은호를 실각시키면서 마치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것처럼 강력한 권한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