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궤구고두례

 


1. 개요
2. 역사
3. 방식
4. 사례


1.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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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석 '''삼'''
꿇어앉을 '''궤'''
아홉 '''구'''
두두릴 '''고'''
머리 '''두'''
예절 '''례'''
중국 청나라 시대 때 황제를 대면할 때 취하는 인사법.

2. 역사


자신의 몸을 굽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히는 방식으로 상대에게 예를 표하는 인사법은 전세계 곳곳에서 있었으며 현재에도 존재한다.
중국에서도 집안어른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표하는 고두례라는 인사법이 존재했으며 명나라 시기에 이르러 황제에 대한 예법으로 오배삼고지례라 해서 다섯번 절하고 세번 조아리는 예식을 취했다.
만주족이 후금을 세우고 후에 청나라로 변모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이 명나라의 예법도 청나라가 받아들이면서 약간 바리에이션을 둔 삼궤구고두례는 청 황제에 대한 예법이 된다. 그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이 예법도 폐지된다.

3. 방식


궤(꿇어앉을:跪)라는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라는 명령에 양손을 바닥에 두고 머리를 조아린 후 상체를 세우면 이고두, 삼고두란 명령에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기(일어날:起)라는 명령에 무릎을 펴고 일어난다. 여기까지가 한 셋트. 이것을 3번 반복한다. 즉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현대 한국에서는 웃어른께 1배, 죽은 어른께 2배, 부처께 3배가 그나마 일상에서 접해본 인사법인지라 9번 절하는다는 것에 이것은 인사법이 아니라 항복의식이다! 라는 인식이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오해이며 조선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할때에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흔히 그냥 맨땅에 해딩 수준으로 삼궤구고두례가 끝난 후 인조의 머리에 선혈이 가득했다, 혹은 인조가 머리를 바닥에 찧는 소리가 단 위의 청태종에게 들릴 때까지 행했다 등의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러하지 않았다.

4. 사례


청나라엔 300년간 12명의 황제가 있었으며 이들은 신하를 접견할때 삼궤구고두례의 예법을 받았기때문에 일일이 사례를 나열하는건 넌센스이다. 그나마 이와 관련한 유명에피소드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 150년 뒤인 건륭제 시절(1792년) 영국의 사신인 매카트니가 건륭제와 대면할 때 청나라측에서 삼궤구고두례를 하라고 하자 "서양에선 신에게 말고는 왕에게도 무릎 하나를 꿇는게 전부다." 라거나 러시아의 카자크 기병들은 "차르의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 등으로 삼궤구고두례를 거절하려 했지만, 청나라는 싸그리 무시하고 삼궤구고두례를 강요하기도 했다. 결국 영국 매카트니는 삼궤구고두례를 거부했고 청나라와 영국 간의 수교 작업은 중단됐다.
  • 사실 이는 삼궤구고두례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서양인들은 신분 고저를 막론하고 같은 인간에게 두 무릎을 모두 꿇거나 머리를 여러 번 조아리는 것을 미개한 동양의 풍속이라 생각했으며 이런 부복(俯伏, προσκύνεσις)에 대해 모멸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실제로 마케도니아 왕국알렉산드로스 대왕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이후, 신하들한테 엎드려 절을 하는 페르시아식 예법을 하라고 강요하자, 분노한 신하들이 대왕을 죽이려는 반란 음모를 꾸미다 적발되어 처형되기도 했다.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그리스인들은 엎드려 절을 하는 페르시아식 예법이 비굴한 노예한테나 어울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즉 서양 측이 괜히 삼궤구고두례만 예로 잡아서 시비건 게 아니라 대대로 내려온 예법의 차이 때문에 흔히 발생했던 트러블로서, 매카트니가 건륭제와 만난 이후, 이런 삼궤구고두례 문제 때문에 벌어진 일을 잘 알고 있던 네덜란드 사신들은 건륭제한테 기꺼이 삼궤구고두례를 했고 심지어 건륭제가 주는 포도송이가 담긴 은쟁반을 향해서도 머리를 조아렸다. 이는 네덜란드인들이 비굴해서가 아니라 실용적인 성향이 강했기 때문인데, 건륭제한테 절을 해서라도 청나라와 무역 관계를 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아부를 했는데도 정작 청나라는 사절단을 후하게 대접해주었지 네덜란드가 원하는 대로 무역 관계는 끝내 열어주지 않았다(...) 물론 애시당초 저러한 군신관계에 기반한 예를 요구한 시점에서, 1대1 무역관계가 아닌 조공무역을 지속할 것이라는 청나라의 의지표명이었다. 네덜란드 입장에서야, 어떤 예를 요구하더라도 응대하여 무역을 맺으면 그만한 금전이 보장되기에 예를 보인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