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전국시대)

 

1. 개요
2. 발생 배경
3. 사건들


1. 개요


三晉
기원전 376년에 춘추시대의 강국 진(晉)나라가 공중분해되어 만들어진 위(魏), 조(趙), 한(韓)의 세 나라를 이르는 말이다.

2. 발생 배경


주나라에서는 군대를 여섯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진(晉)나라에서 이 제도를 베껴서 제28대 경공(景公) 때에 6군(중군, 상군, 하군, 신중군, 신상군, 신하군)을 두고 각각에 원수(장, 將 - 대장)와 부원수(좌, 佐 - 보좌)를 두었다.
이런 형태의 운영이 나온 배경은 진나라의 국정운영 방침이 군정일체(軍政一體)였기 때문이다. 중군 > 상군 > 하군 > 신중군 > 신상군 > 신하군의 순으로 계급체계가 나뉘어졌으며 이는 진나라 핵심 직위인 경의 위치와 딱 맞아 떨어졌다.
이 제도를 세운 경공 대에는 6군 X 2원수 = 12경 체제였으나, 군제가 여러 번 개편되면서 마지막으로는 제30대 도공(悼公) 대에 중군, 상군, 하군 3군만을 두는 6경 체제가 되었다.
진도공 대까지는 특정 집안이 경을 독점하지 않았으나, 집안간 권력분쟁 끝에 제31대 평공(平公) 대부터 여섯 성씨만이 여섯 경을 독점했다. 그 여섯 집안은 지(智), 범(范), 중항(中行), 조(趙), 한(韓), 위(魏)다.
진나라의 의도는 6경이 치국을 돕는 것이었으나, 나라가 차차 쇠락하자 자연히 6경의 세력은 커졌다. 특히 33대 경공(頃公) 땐 경공 앞에서 귀족들이 서로 헐뜯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6경의 세력은 진의 세력을 압도했으며 나라는 사실상 여섯으로 공중분해되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으며, 마침내 조씨 종가의 조간자가 지파로서 한단을 다스리는 조오를 죽이자 한단은 반란을 일으켰고, 조오의 친족인 범씨와 중항씨의 당주는 조간자에게 분란의 책임을 물어 조간자를 진양으로 쫓아냈다. 그러나 나머지 세 가문의 당주가 조씨에 붙어 범씨와 중항씨를 몰아내 진나라에는 지, 조, 위, 한의 네 당주가 남게 되었다. 이 중 지씨가 가장 강했다. 이때 이런 전횡에 열받은 진(晉)의 출공(出公)이 노(魯)에 구원을 청해 네 당주를 진압하려 했다가 오히려 피살당했고, 지씨가 애공(哀公)을 세웠다.
지씨의 당주 지백(智伯)[1]은 기고만장하여 위씨, 조씨, 한씨에게 영토를 요구했고, 이중 조양자만이 이 요구를 묵살했다. 노한 지백은 위환자(魏桓子)와 한강자(韓康子)와 연합하여 조나라 양자의 본거지인 진양[2]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조양자가 독하게 항전하여[3] 함락시키지는 못하였고, 이때 조양자가 장맹담을 보내 한강자와 위환자를 설득해 몰래 손잡고 지백을 역공해 죽였다. 이후 지씨는 멸문당하고 한, 위, 조 세 성씨만 남게 되었다. 조양자가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지백의 두개골에 금칠을 해서 술잔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3. 사건들


사실 짤막한 기술이지만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는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다.
원래 지백은 다른 세 성씨를 약화시킬 요량으로 왕명을 내세워 영토를 빼앗는 계책을 썼다. 땅을 떼어주고 세력이 약해지거나 거절하고 역적으로 몰렸고, 그런데 한강자의 책사 단규(段規)는 이 독한 계책을 간파하고는 오히려 영토를 떼어주라고 했다. 과연 지백은 손쉬운 갈취에 맛들인 나머지 기고만장해서 위씨, 조씨, 한씨의 공분을 사고는 파멸했다. 이후 떼어준 땅은 물론이고 지백의 영지까지 셋이 나눠가졌으니 계획대로. 지백에게 반기를 든 조양자는 서출인데도 자식 중에 가장 출중해서 적자가 된 인물이다. 어릴적 관상을 본 일화도 유명하지만, 유명한 협객 예양의 일화에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지백과 조양자다.
결국 진나라는 한씨, 위씨, 조씨에게 넘어가고 각 당주들은 자신의 성씨를 국호로 하여 한(韓), 위(魏), 조(趙)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역사상 삼진(三晉)이라 하는 나라들이다. 삼진은 제각기 진의 정통성을 가져갔다고 여겨 자신의 나라를 진(晉)이라 칭하기도 했다.
흔히 삼진이 성립한 기원전 403년부터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를 전국시대라 부른다.
[1] 시호는 지양자, 이름은 지요.[2] 태원(타이위안).[3] '''식인까지 했을 정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