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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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전국시대에 등장한 나라로 수도는 한단(邯鄲).
조나라 조씨는 진(秦)나라와 같은 영(嬴)성이다. 비염(蜚簾)의 장남의 후예가 진나라, 차남의 후예가 조나라의 조상이 된 것이다.
2. 역사
조씨는 본래 진(晉)나라의 신하였지만 진문공 때 공신인 조쇠의 후손이 한씨, 위씨와 함께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으면서 진(晉)의 영토를 분할하여 세운 나라로[5] 전국칠웅 중 하나이며 무령왕 때는 전차(채리엇) 중심이던 중국에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기마전술을 도입했다. 기록상 등자와 안장도 없던 시기이니 돌격기병이라기보다는 유목민족 스타일의 궁기병로 추정한다. 실제로 군복을 호복(유목민 스타일)으로 변경하였다.
기원전 296년에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임호, 누번 등을 무찔러 크게 강성하며 진(秦)마저 압박했다. 그때까지의 전형적 전술이었던 닥치고 함곡관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조나라의 지형적 특징을 이용하여 진나라의 북부 지역으로부터 압박하는 혁신적인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갑자기 무령왕이 태자인 조장을 폐하고 왕위를 후에 혜문왕이 될 막내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주보 혹은 주부(主父)라 하여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런 이상한 선택을 한 까닭은 자신이 진나라와의 전쟁에 힘쓰는 한편 자신이 총애하는 혜문왕에게는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조장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반란을 미리 알고 대비했던 공자 성[6] 에게 패배하고 도망쳐 오자 이를 측은하게 여겨 자신의 궁에 숨겨주었다가 공자 성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무령왕이 있던 궁을 포위하여 조장은 주살되고 무령왕은 결국 자신의 궁궐에 유폐된 채 굶어 죽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충실한 국가 막장 테크를 탄 듯 보이나, 혜문왕이 정치를 잘하면서 국가가 안정돼갔으며, 염파부터 시작해 이목으로 끝나는 조나라의 명장계보가 발동하여, 지리학적 위치와 군사력으로 장평대전까지 초강국 진(秦)의 실질적인 라이벌이자 방해물로 성장했다.[7]
이 시기 일화가 몇 가지 있는데, 인상여 항목에 모두 있으니 참고.
이후 세월이 흐르며 명장 조사도 죽고 재상인 인상여는 병으로 오늘 내일 하면서 백전노장 염파는 혼자서 거침 없는 진나라를 상대로 고군분투했으나, 염파 역시 조나라 내부의 암투에 휘말려 초나라로 쫓겨나면서 조나라는 안습 테크를 충실히 밟게 됐다. 특히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에서 조괄 때문에 진나라에 완전히 관광당하고 병사 40만 명이 몰살당한 후로는 골골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다 조 도양왕이 새로 들인 왕비에게 빠져 세자를 폐하고 새 왕비 소생의 어린 아이를 세자로 책봉했으며, 도양왕 사후 이 아이가 왕으로 즉위했다.
이목, 사마상 등 조나라 최후의 명장들이 진나라를 상대로 반격하였지만 진나라가 간신들[8] 에게 뇌물을 주어 이목을 죽게 하고 사마상을 유배당하게 하더니 결국 그 기회로 공격해 들어간 진나라의 공격으로 한(韓)나라 다음으로 기원전 229년~기원전 228년에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수도 한단이 함락되고 일단 멸망했으나, 앞서 폐해졌던 세자가 대(代)라는 촌구석에 일종의 망명정부를 세우고 '대왕(代王)'이라 칭했다. 이 저항군은 기원전 222년에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왕전의 공격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했다.
진말 초한쟁패기 진승·오광의 난에서 진승의 부장 무신이 자립하여 조왕이 되었다가 살해됐고 장이 · 진여에게 옹립되어 조나라가 부활했다. 곧이어 진승의 난을 평정한 장한에게 포위되었으나 거록대전에서 위기를 넘기고 항우에게 복속하여 제후국이 되었다가 한신의 정형 전투에서 패배하고 조헐이 도망치다가 한신의 군대에 잡혀 죽임을 당함으로써 마침내 완전히 멸망했다.
3. 기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신하 복은 많지만 왕 복은 무령왕과 그 아들인 혜문왕 정도를 빼고는 영 없는 나라였다.[9] 전국사군자 중 한 명인 평원군과 모수를 비롯한 여러 식객들, 전국시대에 가장 뛰어난 4명의 명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염파, 최강국 진의 전성기를 구가한 최강의 패권군주 소양왕을 엿먹이며 관광태운 인상여, 염파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조사, 5국 연합군을 지휘하여 6개월 만에 제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악의(출신만), 앞서 설명한 전국시대의 명장 중 한 명으로 동급으로 평가받는 명장인 왕전을 상대로 막아선 이목, 위에서 언급한 악의의 침공에 맞서 화우의 진으로 제나라를 구하였으나 나중에 망명하게 되는 전단, 이목과 함께 조나라의 최후의 방어전을 지휘했던 노장 사마상 등 당시 네임드들이 거의 한 시대에 함께 있었다.
여담으로 유목왕 조천의 후손들은 탁군 조씨(涿郡趙氏)로 불리었고, 그 후손으로는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이 있다.
4. 역대 군주
4.1. 삼진 분립 전 (진나라 신하)
- 조씨종주(趙氏宗主)
4.2. 삼진 분립 후
4.3. 초한쟁패기
무신(武臣):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8년
조헐(趙歇):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5년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drewʔ. 현대 발음은 zhào. 趙는 현대의 한자이며 진나라 시대의 전서 소전체 표기는 이렇다. 참조[2]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조나라 영성은 조씨(趙氏)다.[3] 기원전 325년부터.[4]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5] 그래서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는 전국시대 내내 삼진(三晋)으로 불렸다.[6] 무령왕의 숙부.[7] 국력만으로는 초나라가 진나라에 버금갔고, 이 둘을 제외하면 전통의 강국 제나라가 두 나라에 겨루어볼 만했다. 하지만 초나라는 넓이에 비해 덜 개발된 지역이 많았고, 진나라가 천하를 호령할 때 회왕처럼 암군도 나오면서 진나라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 제나라는 민왕 시절 악의의 연·조·초·위·한 연합군을 맞은 후 비실댄 반면, 조나라는 군사력이 삼진(三晉) 중 가장 진나라에 맞설 만 했으며, 위치도 중원이었던 터라 진나라가 천하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위나라, 한나라와 함께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존재였다. 이런 상황에 명장들이 줄줄이 나오며 진나라를 바르니 사기에서도 가장 빛나는 드라마가 나타나게 됐다.[8] 대표적으로 곽개. 곽개는 말 그대로 '''간신 중의 간신'''으로, 명장 염파를 추방하고 후에도 염파의 재등용을 방해했다. 조나라 최후의 명장 이목을 죽인 것도 모두 곽개가 한 짓이다.[9] 이 두 왕의 시기 조나라는 진나라와 더불어 전국 칠웅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 가장 강력한 적인 진나라가 바로 옆에 있어 이들을 방어하는데 그 국력을 소진하였다는 점이다.[10] 아들이 아니라 형제라는 설도 있다.[11] 대왕의 시호는 아니고, 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