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원(1975)

 

[image]
'''이름'''
서동원
(徐東源 / Seo Dong-Won)
'''출생'''
1975년 8월 14일 (49세)
서울특별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84cm / 82kg
'''가족'''
아들 서종민
'''직업'''
前 축구선수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코치
'''소속팀'''
대전 시티즌 (1998~200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1)
전북 현대 모터스 (2001~2004)
광주 상무 (2003~2004, 군 입대)
인천 유나이티드 FC (2005~2006)
성남 일화 천마 (2006~2007)
부산 아이파크 (2008~2010)
'''지도자'''
SV 다름슈타트 98 U19 (2011~2012 / 코치)
SV 다름슈타트 98 II (2012~2013 / 코치)
안산 무궁화 (2015~2016 / 코치)
대전 하나 시티즌 (2020 / 코치)
'''국가대표'''
[image] 8경기 1골
1. 개요
2. 선수 경력
2.2. 대전을 떠난 이후
2.4. 말년
3. 지도자 경력
3.1. 코치 경력
4. 국가대표
5. 플레이 스타일
6.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2. 선수 경력



2.1. 대전 시티즌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특유의 왼발 킥력으로 이름을 날린 미드필더였고, 연세대를 졸업한 이후 1998년 대전에 입단했다. 대전 시절 서동원은 젊은 나이에도 팀에서 중용되었다. 데뷔 시즌에는 15경기에 나와서 1골을 기록했는데, 이 시기부터 이미 국가대표에 소집되기도 하는 등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간혹 3백의 일원으로 내려서 기용되기도 했고, 미드필더로 서기도 했는데 선수 본인도 이 시기가 축구를 하면서 제일 행복했던 때 중 하나로 회상한 바 있다. 2000 시즌에는 4골 3도움을 한 시즌동안 기록하는 등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좋은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2.2. 대전을 떠난 이후


서동원의 활약에 주목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5억이라는 거금을 들여 서동원을 영입한다. 당시 기준 K리그 최고액 이적료일 정도로 수원은 서동원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서동원은 수원에서 거의 기회를 받지 못했다. 전반기에 단 두 경기 출전에 그친 서동원은 반 시즌만에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하고 이 팀에서는 나름 기회를 얻었으나, 선수 본인은 차츰 국가대표에서의 입지까지 흔들리는 등 힘든 세월을 보냈다. 결국 2002 월드컵 국가대표 승선도 좌절되고, 2002 시즌에 전북에서조차 자리를 잃으며 슬럼프에 빠졌다.
전환점 마련을 위해 서동원이 택한 길은 상무 입대. 상무에서는 다시 주전으로 올라서면서 그의 가치를 올려놓았다. 상무를 전역한 서동원은 전북으로 돌아왔으나, 여러 팀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하기 시작했고, 서동원은 이적을 결심한다.

2.3. 인천 유나이티드 FC


[image]
FC 서울도 서동원을 노렸으나, 서동원 본인은 완전히 처음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희망하여 인천 유나이티드를 택한다. 서동원과 가 최광훈, 과 트레이드되는 이적 방식이었는데, 이 트레이드의 승자는 결국 인천이었다.
이전에 큰 실패를 맛보았던 서동원은 인천에서 절치부심하여 등번호 7번을 받고 그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야스민 아기치, 노종건과 중원을 형성하여 주전으로 기용되며 킥력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동원은 임중용이 특히 자신의 적응을 도왔다고 언급했으며, 이전 팀에서 실패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과거의 안 좋았던 모습을 버리려고 노력했다고 밝힌 바 있다. 팀 내에서도 나름 베테랑의 위치에 있던 선수인 만큼 서동원은 중원에서 중심이 되어야 했고, 또 그에 부응했다. 그 결과 인천은 시즌 종료 후 준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다.
그 다음 시즌에도 인천에 잔류하여 커리어를 이어나갔으나, 준우승의 주역 아기치, 셀미르 등이 하나 하나 나가는 와중에 그 역시도 결국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한다.

2.4. 말년


성남 이적 직후에 그는 곧 K리그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 2007년에도 준우승을 기록했지만, 서동원의 입지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이에 서동원은 부산 아이파크로 이적하면서 커리어의 마지막을 맺기로 결정한다. 어느덧 노장이 된 서동원이지만, 부산에서는 여전히 주전으로 기용되었다. 황선홍 감독 역시 그의 능력을 칭찬하기도 했다. 그는 2010 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3. 지도자 경력



3.1. 코치 경력



3.1.1. SV 다름슈타트 98


[image]
서동원은 은퇴 이후 지도자 공부를 위해 독일로 떠나 2011년 SV 다름슈타트 98 유스팀에 코치로 들어갔다. 팀이 재정적 위기에 빠지며 조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자, 본인도 곧 이 팀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정작 구단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2군 팀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3.1.2. 국내 복귀


2013년을 마지막으로 귀국하였으며 이후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이흥실 감독이 있는 안산 무궁화에서 코치 생활을 하였다.
2020년 1월, 대전 하나 시티즌 코치로 부임하면서 20년만에 대전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황선홍 감독과도 부산 아이파크 시절 사제관계라는 인연이 있다.
시즌 도중 황선홍 감독이 사임하고 조민국 감독 대행체재에 들어갔으나 다른 코치진들과 함께 팀에 잔류해 조민국 감독 대행을 보좌하기로 했으며, 20시즌 종료 후 대전을 떠났다.

4. 국가대표


다양한 연령별 대표를 경험했고, 대전 시절인 1998년에 성인 대표팀에 처음으로 소집되어 데뷔전도 치렀다. 그 이후로도 적절히 국가대표에 뽑혔고, 월드컵을 1년 앞둔 시점까지도 국가대표에 뽑히면서 본인도 월드컵에 대한 열망을 가졌으나 리그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그 이후로 국가대표와의 인연도 끊어졌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연령별 대표에 소집된 서동원 선수 본인에게는 꽤 큰 영향을 준 일으로, 이 충격으로 인해 상무 입대를 선택하며 재기를 다짐하게 되었다.

5. 플레이 스타일


체력도 강인하고 활동량도 많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술적인 능력 역시 호평을 받았다. 특히 그의 킥력은 상대 팀의 경계 대상이었다.

6. 여담


  • 성인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날짜가 같은 동명이인 1973년생 서동원 선수도 있었다. 어린 시절에 큰 주목을 받았으나, 질병으로 인해 포항 스틸러스 입단이 취소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낸 바 있다. 그는 2005년부터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두 선수가 함께 대표팀에 소집되었을 당시에는 차범근 감독이 나이가 더 많은 서동원(1973)을 '큰 동원', 나이가 더 작은 서동원을 '작은 동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인천 시절의 동료이자 연세대학교 후배인 서기복이 상무 시절 그의 선임이었다. 연대 시절에 잘 챙겨주던 후배가 선임이 돼서 다시 만난 것. 서기복은 서동원을 열외시킨 후 혼자서 보행을 시킨다던지, 군가를 부르게 시킨다던지 나름대로의 장난을 쳤다고 한다. 처음에는 복수할 생각도 좀 들었다고 하지만, 결국 서기복의 존재가 군 생활 내내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 아들 서종민도 축구선수의 길을 걷고 있으며, 서동원이 다름슈타트에서 코치 생활을 할 당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유스 팀에 입단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돌아오기도 했던 서종민은 2016년 12월 다시 독일에 가 다름슈타트에 합류했고, 2018년 여름에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유소년 팀에 입단했다.
[각주]